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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박공의 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2
너대니얼 호손 지음, 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평점 :
<주홍 글자>의 강렬한 인상에 힘입어 후속작인 <일곱 박공의 집>을 꺼내든다. 이전에 이미 단편선집도 읽었으니 본격적으로 호손의 세계에 뛰어드는 순간이다. <주홍 글자>와는 달리 남은 세 편의 장편소설들은 국내에 별로 인기가 없다. 번역본도 달랑 한 종류씩뿐, 따라서 무얼 읽을지 선택의 고민이 없어서 좋은 면도 있다.
호손은 자신의 장편 소설을 ‘로맨스’로 지칭한다. 이른바 ‘소설’과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데, 아무래도 작품 제재와 전개방식에 있어서의 비현실성 내지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럴듯한 허구’가 아니라 ‘그럴듯하지 않은 허구’로서의 로맨스라면 충분히 납득가능하다. 환상문학이 현대에 와서 강력하게 주류 문학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마법사로 화형당한 매슈 몰의 저주, 대를 이은 핀천가 주인의 의문사, 앨리스 핀천의 불행한 죽음, 그리고 급작스러운 해피엔딩. 고딕적 괴기와 선혈 낭자한 범죄, 저주와 최면 같은 로맨스적 성격은 물론 흥미롭다. 권선징악적 해피엔딩은 진부하지만 독자의 기분은 불편하지 않다. 다만 이것이 전부라면 뭔가 미진하다. 독자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몰입감이 좋은 편이 아니며, 말초신경을 자극할 짜릿함도 부족하다. 게다가 홀그레이브의 신분은 작중에서는 결말 부분에 공개되지만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중반부에서 추론이 가능하다.
기실 이 작품은 흥미로운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전작과 마찬가지로 인간 성격에 관한 진지한 탐구로 접근해야 마땅하다. 전작은 죄와 죄의식, 그리고 양심이 주된 테마로 등장한 반면, 여기서는 위선과 인간상의 대비-탐욕적 인간상과 (동화 같은) 순수하고 이상적 인간상-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호손의 인간탐구 시리즈 제2부라고 불릴 만하다.
전작보다 훨씬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흐름은 느릿느릿하다. 성미 급한 독자라면 중반까지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책장을 살포시 덮고 치워버리기 딱 좋다. 작가는 느긋하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당대에서 이백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식민지 초창기 시절에 벌어졌던 어두운 사건을 상세히 소개한 후 일곱 박공의 집의 현재로 돌아온다. 이 점에서 내내 과거에 머물렀던 전작과는 차이점을 보여준다.
독자는 곧 주요 인물들의 성격에 대해 알 수 있다. 헵지바의 괴팍한 외모와 선한 성격의 대조를 기술하는 장면을 통해 독자는 다소간 헵지바에게 연민을 품게 되고 이후 그녀의 무능력과 약점을 눈감아주게 된다. 클리퍼드는 살인범으로 수십 년간 지하 감옥 형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선하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작가의 말로써 흉악한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핀천 판사는 지역사회의 유지로 관대하고 친절한 언행으로 세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인데, 작가는 홀그레이브가 보여주는 핀천 판사의 은판 사진과 핀천 판사와 헵지바, 피비의 조우 장면으로써 겉보기와는 다를 수도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드리운다.
그것은 후손에게 상속하고자 하는 재산과 명예에 관련해 인간의 법이 확립하고자 했던 계승의 과정보다 훨씬 더 확실한 과정을 통해서 약점과 결점들, 악한 감정들이나 비열한 경향들, 그리고 범죄로 이어지는 도덕적 질병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 내려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P.162)
특히 이날 오전 핀천 판사의 친절한 면모가 지닌 따뜻함이 너무 도가 지나쳐, 적어도 마을에 도는 소문에 따르면 지나치게 쏟아지는 햇볕 때문에 생긴 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 따로 물차가 따라다녀야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P.177)
위 대목의 해학성에 주목해본다. 이미 전작에서 형식상 두드러진 특징으로 불성실한 화자로서 작가의 의도적 개입을 언급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작중 사건과 인물에 대한 작가의 시점은 대체적으로 전작과 유사하다.
그러면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아주 소박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P.42)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이야기의 문턱에서 소심하게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헵지바 핀천이 이제 막 하려는 일을 들추어내기가 도무지 싫은 것이다. (P.49)
하지만 여기서는 정도가 더욱 현저하다. 작가는 전지적 시점으로 전개를 해나가다가 불현 듯 순진한 관찰자의 외투를 덮기도 한다. 마치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처럼 소리 없는 영상 속 사건과 인물을 관객에게 설명해주는데 만담 풍으로 의도적으로 조소적, 해학적 촌평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게다가 이러한 촌평의 분량이 짤막하지 않고 대체로 길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 불쌍한 클리퍼드! 당신은 결코 당신이 겪어서는 안 될 괴로움에 시달려 지치고 늙었구나. 당신은 반쯤은 정신이 나가고 반쯤은 바보가 되었다......(중략)......그러니까 할 수 있을 때 그 행복을 잡아라. 투덜대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최대한 누려라! (P.213)
이러한 사례의 압권은 핀천 판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소개하며 기술하는 제18장이다. 헵지바를 협박하여 그녀가 클리퍼드를 데려오길 기다리는 핀천 판사의 모습이 독자가 아는 마지막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독자도 마찬가지이길 기대하면서 조상 전래의 의자에 앉아있는 핀천 판사를 향해 이러저러한 대화를 건넨다. 다소 길고 반복적이지만 해학적 어조로 그의 죽음을 서서히 알리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핀천 판사의 진정한 면모, 즉 치밀한 일상과 맹렬한 야심을 비로소 확연히 알게 된다.
제발, 핀천 판사, 이젠 시계를 좀 봐요! 눈길도 안 주나요? 저녁 시간이 십 분밖에 안 남았는데!......(중략)......맙소사, 이 만찬! 그 진짜 목적이 뭔지 정말 잊은 건가요?......(중략)......그러니까 서두르십시오! 당신이 할 역할을 해요! 당신이 지금까지 얻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싸우고 기어 가며 어렵게 오른 데 대한 보상을 이제 바로 거머쥐기만 하면 돼요! 만찬에 참석해야 해요! 그 고귀한 와인을 한두 잔 마시고 가능한 한 나직한 목소리로 선서를 해야죠! 그러면 식탁에서 일어날 때 사실상 당신은 오래된 주의 영예로운 주지사가 되는 겁니다! 매사추세츠 추의 핀천 주지사!......(중략)......그러니까 일어나요, 핀천 판사, 일어나라고요! 하루를 다 낭비했고 곧 내일이 올 거예요. 늦지 않게 일어나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그래요? 내일이라고요! 내일! 내일! 살아있는 우리는 내일 일찍 일어날 거예요. 오늘 세상을 뜬 사람에게 내일을 부활의 아침이 될 테고요. (P368~372)
해피엔딩의 주인공인 홀그레이브와 피비에 대해 빼놓을 수 없다. 일단 홀그레이브에 대한 작가의 평가는 주저하면서도 대체로 호의적이다.
삶의 초기에 가진 오만한 믿음이 마지막에는 훨씬 겸손한 믿음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중략)......그의 신념과 불충, 가진 것과 부족한 것 모두에서 그 예술가는 고국 땅의 많은 동료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충분히 나설 만했다. (P.243~244)
반면 피비는 작품 내에서 가장 완벽한 미덕을 지닌 완벽한 인성의 보유자로 그리고 있다. 그녀가 일곱 박공의 집에 등장하는 것은 낡고 음습한 저택에 한줄기 빛이 비추는 것과 같다. 그녀의 존재는 헵지바와 클리퍼드를 돕고 위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홀그레이브마저 변화시킨다.
그녀는 실재였다. 손을 잡으면 무언가를, 따뜻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실체이면서 온기를 가진 것. 그래서 부드럽기도 한 그 손을 꽉 붙잡고 있기만 하면 서로 공감하는 인간 본성의 전체 연쇄 속에서 자신이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세상은 이제 단지 망상이 아닌 것이다. (P.189~190)
피비의 진정한 미덕은 그녀가 매우 실제적이라는 사실이다. 헵지바와 클리퍼드는 스스로를 유령이라고 탄식한다. 그들은 사실상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오라버니는 타의에 의해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지냈으며, 누이는 세상에 대한 반감으로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켰다. 그들은 모두 당대에 착근하지 않고 과거에 사로잡혀 세상을 부유하는 인물이라고 하겠다. 반면 작가의 표현처럼 피비는 “여성적 품위와 유용성이 결합”된 당대의 이상적 여성상에 해당한다.
여기에 이 작품의 또 다른 이야기가 드러난다. 귀족사회에서 공화주의 사회로 정치 체제가 변화하였고, 농경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경제 체제도 변모되는 사회에서 시대의 변천에 따른 귀족계급의 부침과 몰락, 대응이라는 전개 과정을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독자는 작품 초반부에서 헵지바가 생활을 위하여 상점을 여는 것에 대한 그토록 끔찍하게 여겼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스스로 옛날 귀족층이라 칭했던 것의 최후 단계였다......그리고 우리는 귀족 부인이 평민 아낙네로 변신하는 바로 그 순간의 헵지바 핀천을 불경스럽게 훔쳐보게 된 것이다. (P.53)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에서 배제되고 회피한 헵지바와 클리퍼드는 과거의 인물들이다. 삶에 있어 보다 실제적이고 주도적인 피비와 홀그레이브는 분명 현재와 미래에 속하는 인물이리라. 그렇다면 핀천 판사는? 그는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파도를 타고 높이 비상하려고 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다가오는 시대의 부정적 측면에 함몰되어 스스로를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우리는 핀천가에서 두 명의 억울한 인물을 찾을 수 있다. 앨리스 핀천과 클리퍼드 핀천. 핀천 대령의 청교도적 가면을 쓴 파멸적 욕망에 못지않게 앨리스 핀천을 죽음으로 몰고 간 목수 매슈 몰의 죄악도 크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존중을 저버린 점에서 그는 전작의 칠링워스와 닮은꼴이다.
작가는 세상의 정의에 대해 회의적이다. 부정의와 부조리를 없앤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본 것일까. 어설픈 위로와 위안보다는 차라리 상처받은 이들이 아픔을 가슴속에 묻은 채나마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낫다고 제언한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 정말 잘못된 일은, 내가 행한 것이든 당한 것이든 진정으로 바로잡히지 못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 고귀한 희망을 암시하지 않는다면 또한 아주 슬픈 진실이 되기도 할 것이다......그보다 나은 치유는 고통을 당한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라고 여겼던 그것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P.425)
작품 주제와 별로 연관성은 없지만 인상 깊은 대목이 하나 있다. 바로 클리퍼드가 기차 안에서 어떤 노신사에게 피력한 사상이다. 거기서 클리퍼드는 문명의 발전이 우리네 삶을 유목민의 그것으로 돌려놓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노매드로 불리는 21세기적 인간형과 세태에 대한 적확한 예견이 무척이나 놀랍다.
철도의 발견은, 속도에 있어서나 편리함에 있어서나 우리가 바라는 만큼 광범위하고 불가피하게 점점 향상되면서 가정과 난롯가라는 그 케케묵은 생각을 없애 버리고 그보다 나은 것으로 대체할 것입니다.......(중략)......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고 계속 향상하고 있는 교통시설이 분명 우리를 다시 유목민의 상태로 되돌려 놓을 거라는 게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P.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