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읽고 나면 과연 그렇구나 하고 공감하게 되는데, 작가가 설계한 예측 불가능한 함정에 누구라도 빠질 수밖에 없어서다. 다만 작가의 말처럼 이런 수법은 거의 전적으로 한 번만 써먹을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작가는 여기서 탐정 푸아로의 다채로우면서도 뛰어난 역량을 한껏 드러내 보인다. 애초 초반부터 그를 포로토 씨라는 낯선 영국식 발음으로 주변 인물이 동일인임을 연상시키지 않도록 한다든지, 그의 직업을 은퇴한 원예가로 하여 방심토록 하는 데서 출발한다. 중반부에는 탐정으로서 의기양양한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푸아로의 유능함을 화자와 함께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푸아로는 고개를 내젓고는 가슴을 활짝 편 다음 우리에게 눈을 깜박이며 서 있었다. 대단한 인물인 양 으스대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가 정말로 훌륭한 탐정일까 하는 의혹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의 대단한 명성이 혹시 요행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P.138)

 

화자인 의사 셰퍼드와 독자와 주변 인물은 그의 명성에 회의적 견해를 품는다. 제아무리 명성 높은 탐정이라도 이 사건 자체가 너무나 명명백백해서 행방불명된 랠프 페이턴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를 체포하면 그것으로 끝날 것으로 말이다.

 

여기서 푸아로의 유명한 회색 세포론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용의선상에 오른 주변 인물 모두를 향해 질타한다. 그들 모두가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으며, 아무리 자그마한 거라도 솔직히 자신에게 털어놓으라고 요구한다. 용의자들을 안심과 긴장 사이에서 쥐락펴락 분위기를 일변하는 푸아로의 능력에 화자인 의사 셰퍼드는 새삼 탄복한다. 푸아로는 셰퍼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일 처음 할 일은 그날 저녁 일어난 일을 명료하게 알아내는 겁니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말입니다.” (P.218)

 

푸아로는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재빨리 웃음을 띠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답니다. 증명된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말입니다!” (P.308-309)

 

작중에서 의사 셰퍼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소설의 전개를 이끄는 중요한 화자인 동시에, 푸아로의 조수 역할도 맡는다. 셜록 홈즈의 왓슨처럼, 푸아로의 헤이스팅스처럼 말이다. 살해된 애크로이드 경의 친구이자, 랠프 페이턴과 플로라를 비롯한 집안 사람의 전적인 신뢰를 지닌 인물. 마을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성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사고를 할 줄 알며, 가십과 본능에 의존하는 누이 캐롤라인과는 차별되는.

 

저는 진실을 원해요.”

플로라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모든 진실을 말입니까?”

모든 진실을요.” (P.116)

 

진실은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궁극의 가치인가. 이렇게 푸아로를 개입시킨 플로라마저 진실하지 않은데 누구에게 진실을 기대할 수 있는가. 살해당한 애크로이드 본인마저 진실을 숨기지 않았는가. 애크로이드 양과 애크로이드 부인, 관리인 러셀 양, 랠프 페이턴, 블런트 소령, 비서 레이몬드, 파커 집사, 하녀 어슐러 본 등 모두가 진실을 은폐한다. 이 정도는 숨겨도 사건 해결에 영향을 없을 거라 판단하면서. 이것을 푸아로는 수면 위로 드러내게 만든다. 아주 사소한 사실의 불일치에서 그는 단서를 찾고 파헤치고 연결하고 확장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로.

 

이 작품에는 여러 가정이 등장한다. 만약 애크로이드가 랠프 페이턴과 플로라의 결혼을 강제하지 않았다면, 애크로이드가 집안 씀씀이를 구두쇠처럼 가혹하게 통제하지 않았다면 사건은 다르게 전개되었으리라. 러셀 양, 파커, 어슐러 본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개인사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애크로이드가 앞서 독살된 애슐리 페러스 부인과 우정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또 하나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반추하게 만든다. 진범이 처음부터 애크로이드를 살해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개인적 금전 사정의 어려움, 한번 잘못된 선택에 따른 벗어날 수 없이 연속된 패착, 친절과 위선의 일상적 가면을 뒤집어쓴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은닉했던 본성의 가면을 비로소 꺼낸다. 그는 페러스 부인의 죽음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낄 수 없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함정을 피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다지 유감스럽지 않다. 이걸 맞췄다면 나 자신이 너무나 비인간적이므로. 그럼에도 푸아로가 결정적인 의구심을 품게 된 단서에 나 역시 약간은 의아한 낌새를 가졌다는 점에서 다소간 뿌듯한 마음도 있다. 다만 스포일러가 될까 봐 전반적으로 자유로운 감상문 기록이 못 되어 이 점이 유감스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시 : 2025년 2월 22일(토) 20:00

장소 :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연주 : 오지현 (첼로), 박은희 (피아노)

프로그램

  - 슈만,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Op.70

  - 브람스, 비올라 소나타 1번 F단조 Op.120, No.1

  - 펜데레츠키, 비올라 독주를 위한 카덴차

  - 비외탕, 비올라 소나타 B-flat 장조 Op.36


* 세줄평

독주악기로서의 비올라는 낯설다. 과연 어떤 소리를 들려줄까. 연주곡이 거의 처음 듣는 곡들인데, 무척이나 아름답다. 펜데레츠키 작품조차 흥미롭다. 무엇보다 바이올린 작품으로 유명한 비외탕의 비올라 소나타가 이렇게 좋을 수가. 확실히 비올라의 음향은 육성과 비슷하다. 그것이 더욱 절절한 호소력을 지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일시 : 2025년 2월 15일(토) 20:00

장소 : 예술의전당 IBK기업은체임버홀

연주 : 신성희 (바이올린), 김종윤 (피아노)

프로그램

  -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4번 A단조 Op.23

  -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8번 G장조 Op.30, No.3

  -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10번 G장조 Op.96


* 세줄평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시리즈의 피날레라고 한다. 그렇게 대중적인 레퍼토리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여러 번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었지만, 오늘 연주곡목은 머리속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연주가 시작되자 귀에 익은 선율이 생소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후반부의 소나타 10번이 인상적이다. 유심히 귀 기울이니 간과하였던 아름다움이 오히려 절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일시 : 2025년 2월 8일(토) 17:00

장소 : 세종체임버홀

연주 : 백수진 (피아노), 조유리 (바이올린), 김인하 (첼로)

프로그램

  - 슈베르트, 피아노 3중주 B-flat 장조 D.28

  - 쇤필드, 카페 뮤직

  - 아렌스키, 피아노 3중주 D단조 Op.32


* 세줄평

오랜만에 세종문화회관을 찾는다. 산책삼아 시청역에서 걸어갔는데, 정치집회가 맹렬히 시끄럽게 진행중이어서 정신없을 지경이다. 처음 듣는 쇤필드의 곡은 현대음악 같지 않아 오히려 재밌다. 아렌스키의 곡은 새삼 아름다운 서정미로 넘쳐흐르는 묘미를 느끼게 한다. 전체적으로 앙상블의 합이 훌륭하다. 앙코르의 피아졸라 곡도 여운이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대의 차가운 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누구나 껍데기를 갖고 산다. 혹자는 그것을 가면이라 칭한다. 껍데기든 가면이든 그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나를 보호하거나 가리는 목적이다. 타인의 날카롭거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차단하며,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외부와의 접촉을 꺼려 방패막이를 삼기도 한다.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위선자라고 일컫는다. 이처럼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부정적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안팎이 한결같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존재하는지, 그들의 세상살이는 평안한지를. 대다수 사람은 위선적인 면모를 지닌 채 살아가기 마련이다. 어린 나이에서 비롯되었든 성인이 된 후 시작하였든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이며, 껍데기 또는 가면의 넓이와 두께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내가 정성과 지혜를 다해 빚은 탈 속에서 끊임없이 탐색하고 긴장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사랑받거나 칭찬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P.68)

 

이 작품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조각가 장운형과, 인테리어 디자이너 E에 대해 낯설고 이질적인 인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와 동류에 속해서이다. 위선적인 집안과 부모 아래서 일찌감치 세상의 속리를 깨우친 화자는 반생을 철저하게 두꺼운 가면을 쓴 채 살아온다. 세상은 진실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에 따르고 부응하는 데 있다. 그렇기에 그는 진실을 감출 수 없는 손을 믿으며, 손으로 작업하는 조각을 직업으로 택한다. 화자가 삶에서 마주치는 두 명의 여자와 마주친다. LE.

 

무엇인가 숨겨져 있었다. 끔찍한 무엇인가가. 그 숨겨진 것 위로, 저 아이는 저렇게 이상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졌다. 순간 나는 그녀에게 애정을 느꼈다. (P.85)

 

L은 연민과 혐오를 동시에 안겨주는 인물이다. L의 아픈 과거에 동정하면서도 그가 폭식과 거식을 반복하며 자신의 삶을 축내는 대목에서는 괴기스러움에 외면하고 싶을 정도다. L은 가면을 쓸 줄 모르거나 아주 얇은 가면 밖에 갖고 있지 못하다. 그녀의 자존감과 가치판단은 전적으로 외부로 향해 있다. 무리한 다이어트를 해서라도 좋아하는 남자와 어울리겠다는 그녀의 사고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요즘 많은 젊은 여성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오히려 순진하기에 가면을 쓰고 껍데기를 두를 줄 모르며 세상의 풍파를 오롯이 맨몸으로 마주한다.

 

육손이의 가슴 아픈 굴레를 천형처럼 지닌 E는 어떠한가. 뭇 남성들의 시선과 설렘을 끌어내는 영민하고 당당한 여성의 꺼풀 아래 얇고 흰 속살을 지닌 본모습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호숫가에서 백조가 우아함을 유지하기 위해 수면 아래 맹렬히 발을 젓듯이 그녀의 삶은 긴장과 압박,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가 이따금 플러그 빠진 인형처럼 일순간 넋이 나간 듯한 양태를 보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장운형은 처음에 점토로 사람의 손을 빚는다. 그가 보기에 인체 중 가장 솔직하고 믿을 수 있는 부위가 손이다. 제아무리 얼굴과 몸을 둘둘 말아 감추더라도 손을 통해 그 사람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어서다. 그가 라이프캐스팅으로 전환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인데, 껍데기 속 숨겨놓은 본모습의 인간 면모를 드러내고 싶은 것과 함께, 손을 통해 자신의 실체가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이다. 그는 진실을 알고 싶으면서도 진실을 가리는데도 진심이었다.

 

E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의 몸 어디에선가 미미하게 새어나오곤 하던 구역질과 공허의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자석의 같은 극처럼 나를 밀어내곤 하던 환멸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그것은 애정이라 할 수도 있고 오히려 반대의 것이랄 수도 있는, 극도로 양가적인 감정이었다. (P.280)

 

L은 그를 떠나고, 그는 E와 세상의 시선에서 사라진다. L의 껍질은 얄팍하므로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였지만, 그 때문에 홀로 껍질을 벗어던지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화자와 E가 뒤집어쓴 가면과 껍데기는 튼튼하고 빈틈을 거의 찾을 수 없는 형국이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상대방이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깨닫는다. 역겹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질긴 인연으로 묶인 두 사람. 그들이 자신과 상대를 옭아맨 단단한 껍데기를 마침내 깨뜨릴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은 더는 기존의 인물로 남아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마지막 대목에서 H 외에 아무도 달라진 두 사람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상징적이다. 두 사람의 본모습을 아는 사람은 H밖에 없으므로.

 

우리에게서 일체의 껍데기와 가면을 벗겨버리면 어떤 장면이 전개될까. 모르긴 해도 그리 유쾌하거나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피부가 신체와 환경을 경계 짓듯이, 심리적 껍질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어느 정도 필요하리라. 다만 그것이 굳고 단단한 껍데기로 변질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화자 어머니의 하얀 탈바가지 얼굴. 고상하고 품위 있는 위선적 지성인의 민낯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얼굴. 그 점에서는 오히려 두 손가락을 잃은 외삼촌이 더 솔직하고 덜 위선적이다. 그도 없어진 손가락을 가리려 애썼지만, 여기서 실망을 느낀 것은 아마 화자 혼자뿐일 것이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P.313)

 

다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비좁고 단단한 껍데기에 갇혀 있을 때 우리네 생명은 위축되고 말 것임을. L의 거대한 비만일 때 손과, 다이어트 후 온기감을 상실한 손을 비교해 보자. L의 육체의 풍요로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날씬한 E의 차가운 몸과 입술, 그리고 메마른 육체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가면은, 껍데기는 결국 사물에 불과하다. 그것의 본질은 다만 텅 비어있음이다.

 

이 소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갖추고, 장운형의 원고가 본문으로 중간에 들어가 있는 액자 구조를 취하고 있다. H는 작가의 분신이자 서사 전개와 마무리를 담당한다. 그는 또한 작중 인물의 여정에 대한 치밀한 관찰자이자, 장운형과 E의 탈태를 유일하게 알아차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펴낸날이 2002118일이다. 보유한 한강 책 중 유일한 1쇄본이다. 신기하여 적어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