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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에센셜 한강 (무선 보급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ㅣ 디 에센셜 The essential 1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평점 :
작가 한강의 자선(自選) 작품집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장편소설 한 편, 단편소설 두 편, 시 다섯 편, 산문 여덟 편을 골라 모았다고 한다(P.356). 노벨문학상 수상에 따른 뻔한 기획은 아닌 게, 2022년도에 나온 책이다. 마침 <희랍어 시간> 도서를 갖고 있지 않을뿐더러 시와 산문 등 작가의 다양한 면모를 일람할 수 있을 것 같아 구매하였다.
<희랍어 시간>은 이미 2012년에 감상평을 남겼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보는 작가의 화법에 큰 인상을 받았다. 나직하고 서늘한 목소리, 말보다는 말 없는 사이, 행간 사이의 여백이 더한 울림을 가져다주는 글쓰기. 내가 작가의 애호가가 된 계기는 아마 이 작품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P.18)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P.185)
여자가 목소리를 상실한 원인은 근원적이다. 작가의 분신일 수도 있는 여자는 언어와 문장의 순수성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리 예민하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말과 글을 여자는 쉽사리 넘기지 못한다. 희랍어의 속성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완전성과 자족성이 허물어지는 희랍어를 타락으로 볼지 아니면 진전이라고 여길지. 믿었던 아이마저 여자에게 한 걸음 떨어져 나간다.
남자의 시각 상실은 유전이지만, 서서히 어두워지는 나날을 견디는 화자의 심정은 어떠할지 예상하기 어렵다. 젊은 시절 그는 사귀던, 말을 못하는 여자에게 말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가 크게 얻어맞았다. 자신의 시각에 치중하였기에,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그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지금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터인데. 멀쩡하였다면 그는 계속 독일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이제 앞이 보이지 않게 되는 그는 이방인으로 취급받지 않을 수 있는 문화로 되돌아온다.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P.53)
이 소설은 상실을 통한 사랑과 유대를 지향한다. 언어와 시각을 상실하고 비애와 고독에 괴로워하지만, 두 사람의 삶은 계속된다. 우연한 계기에 개인적 접촉을 하게 된 두 사람.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인 두 사람은 내면의 소통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고 이해한다. 두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고 싶었던 작가의 심정은 작품의 결말에서 은근하지만 뚜렷하게 드러난다.
<회복하는 인간>과 <파란 돌>은 작품집 <노랑무늬영원>에 수록된 단편이다. 작가는 무슨 까닭으로 이 작품집에 실린 단편만을 뽑아냈을까. 이 작품집도 비교적 최근인 작년에 감상평을 남겼기에 자세한 촌평은 생략한다. 다만 전자에서 그녀와 언니의 악화한 관계는 일방의 잘못으로 귀책하기 어렵다. 나의 약점, 남의 오점까지도 보듬고 품을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포근하고 아름답겠는가마는, 가족 간에도 그것이 어렵기에 세상사가 복잡다단하지 않은가. <파란 돌>을 읽다가 문득 동일한 내용의 시를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찾아보니 표제도 동일하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여기의 꿈을 독립적으로 다룬 작품을 쓰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3부는 다섯 편의 시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새벽에 들은 노래’, ‘심장이라는 사물’, ‘마크 로스코와 나─2월의 죽음’, ‘해부극장 2’. 모두가 작가의 유일한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에 실린 작품들인데, 선정 기준은 작가 나름의 고심의 산물이리라. 작가의 문체적 특징이 시적 산문으로 유명하지만, 어쨌든 산문과 시는 다르기에 시집을 정독하면 나름 보람을 느낀다. 역시 이 시집도 감상평을 근래에 남겼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4부 산문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처음 읽게 되는 작가의 글이다. 본격적인 에세이는 따로 출간하지 않았기에 이 글들을 통해 작가의 내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 좋았다. ‘종이 피아노’, ‘저녁 여섯시, 검고 긴 바늘’은 유년 시절의 추억에 기반하며, ‘아버지가 지금, 책상 앞에 앉아 계신다’와 함께 당시로서는 어려웠던, 지금에 와서야 이해하게 된 부모님의 모습이다. ‘여름의 소년들에게’와 ‘출간 후에’는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의 후기 격에 해당한다. 이전과는 궤를 달리하는, 사회문제에 직접적 관심을 표명한 이들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자신이 품고 있었음을 밝힌다. 존엄과 잔혹이 한 끗 차이로 오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가치란 무엇인가 하면서 말이다. 작가의 그러한 싹이 일찍부터 보였나 보다. 그러니 최인호 작가가 신진 작가인 그녀에게 인생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처음 자신의 작품을 접하는 독자에게 추천한다고 밝혔다. 낭자한 비인간성에서도 끝내 사랑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동감한다. 다만 작가 한강의 문학적 원류를 가까이 느껴보고 싶은 독자라면 오히려 이 책이 더 낫다는 개인적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