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 - 400여 년 전, 조선과 일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정장식 지음 / 고즈윈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수년간 불고 있는 한류의 실체와 영향이 진실로 어떠한지는 참으로 궁금하다. 한류는 일개 바람에 그치는 환상에 불과한게 아닐까싶기도 한데.

'에도시대 일본에는 이미 한류가 있었다'는 표지 문구가 신선한 동시에 상업성을 물씬 풍기는 이 책은 의외로 진지하며 유익한 내용을 가득 담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메이지유신까지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는 대체로 평화기조를 유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몇차례 통신사를 파견하여 우호 교린을 확인하였고.

이 책은 바로 12번이나 파견되었던 통신사 일행의 사행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사행의 배경과 경과, 양측의 대응 등 그동안 우리의 관심사밖에서 방치되었던 분야인 동시에 양국관계를 생각한다면 소홀히 다루어졌던 분야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의 충격이 막심하였음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나 그 정신적 외상이 그렇게 오래 끈질기게 남아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통신사의 사신들은 일본의 경제력과 무력에 놀라면서도 단지 '오랑캐'라는 케케묵은 단어에 집착하는 태도를 초지일관하였다.

허망하기 짝이없는 오랑캐의식으로 병자호란의 치욕마저 감내해야 하였으면서도 실력을 배양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던 심약한 조선의 사대부. 그들은 외적인 무력감을 내적으로 위안받고자 하였다. 그게 바로 소중화사상이었던 것이니 참으로 가련한 작태였다.

겉으로는 일본의 무력에 겁을 집어먹으면서도 오로지 상국의 논리에 집착하며 협박에 굴복하면서도 대국의 양보로 포장한 가식적인 행동이 이 책에서는 그대로 묻어난다. 오죽하면 일개 대마도조차도 가운데서 조선을 농락하였단 말인지. 참말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 역사는 치욕적인 면을 너무도 많이 발생시키고 있구나.

조선과 에도막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통신사가 시작되었고 이제 필요가 없어졌기에 일본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그만큼 일본에서 조선의 가치와 비중이 현저하게 약화되었던 것이다. 일본에게는 엄청난 물력과 힘으로 들이닥치는 서양세력이 보다 중요하게 되었고 이제 조선은 일개 향후의 먹잇감일 따름이었으니.

통신사의 시말은 오늘날까지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열린자세로 타국의 나쁜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여 이용후생할 수 있었더라면 오늘의 우리역사는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며 대일관계도 보다 당당할 수 있으련만. 문제는 그것이 한낱 과거에 국한된 경우가 아니라는데 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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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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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임진왜란 2 -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이순신역사연구회 엮음 / 비봉출판사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임진왜란은 물론 이순신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가 참으로 부족하였다는 사실을 요즘들어 절감하고 있다. 군사정부시절에는 오로지 '구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키는데 급급해서 인간이 아닌 신화적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였는데, 그후로도 큰 진전이 없었던 듯. 어쩌면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이러한 정체된 이순신 연구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에 있어서 중요한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연구가 꼭 전공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소위 재야사가들의 연구가 정통학계에서는 별로 인정을 못받고 있는 형국이지만 언젠가는 다방면에서 참신한 접근법과 발상을 갖고 우수한 성과를 낼 것으로 믿는다. 그런 면에서 이순식역사연구회와 구성원들의 헌신과 열성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징비록><난중일기>를 비롯한 역사고전과 '불멸의 이순신'드라마, 각종 시중 문헌을 참조하면서 이순신의 위대성은 날로 부각되고 있다. 과거의 이순신 상이 단순한 무장에 그쳤다면 요즘은 문무를 겸전한 뛰어난 경영자로서의 새로운 면모에 집중하고 있다. 그도 아픔과 슬픔을 겪고 괴로워 할줄 아는 진실한 한 인간임에 더욱 친근함을 접하게 된다.

이순신의 해전 전략전술에 관하여 구체적 분석이 일반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역시 이순신이 나서니 잘했구나 하는 인식과 아울러 한산대첩에서 학익진을 사용했고, 거북선으로 들이받아서 이겼다고 믿을 뿐. 하지만 잠시 되짚어보니 전쟁이란게 그리 간단한 상황은 아닐듯 싶다. 적 또한 나 못지 않게 이성과 감성을 갖고 똑같이 이기고 살아남으려는 강렬한 욕망을 지닌 존재가 아니던가. 내가 준비하고 내가 힘쓰는 동안 그들이 그냥 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두 권의 책에서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처음 옥포해전부터 부산포해전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따져보고 비교분석한 점은 글자그대로 참신하며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막연히 그러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부분을 백일하에 드러내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논리는 순수한 역사전공자 또는 일개인으로서 이루기 어려운 성과라고 할때 다방면의 연구집단이 이루어낸 업적인 것이다.

2권 중반부터는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경사학(經史學)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대략적인 의미는 이해하겠지만, 저자의 견해처럼 너무나 전통의 학문접근을 등한시하고 서양과학에 몰입되었는지 쉽게 와닿지는 않는다. 하여튼 공리공론에만 치중을 한 당시 조정의 무능과 격물치지에 충실한 이순신은 정말로 대비가 된다.

그런데 후반부터 등장하는 '임진왜란은 ...에서 막을 수 있었다'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포에서, 아니면 문경새재에서 또는 한강이나 임진강, 대동강에서 막을 수 있었는데 우왕좌왕하여 막지 못했다는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다만 너무나도 중언부언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저자들의 답답한 심경이겠지만 이런 연구서에 그렇게 토로하는 것은 적합치 않다. 부산에서 한강에서 대동강에서 어선과 협선들을 활용하고 화포무기를 적극 활용하였다면 당연히 임진왜란의 흐름은 급격한 변동이 발생하였을 것이지만, 그렇게 대비를 못하고 피난가서도 당쟁에 몰두하였던 것이 당시의 조정과 집권층이었음을 왠만한 이라면 충분히 인지하는 사실이 아닌가. 저자들 못지 않게 읽는 나도 짜증스러운데 그걸 동어반복으로 읽자니 갑갑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난중일기>와 <징비록><선조실록>을 일자별로 조목조목 나열하고 훑어나가는 부분에서는 도대체 이 책이 보여주려는게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고 기대하는 바는 이순신 장군이 적군을 무찌른 전략과 전술, 전시경영의 참모습 등이지 당시 무능한 조정의 잘못을 한줄한줄 조목조목 비판하는 데 있지는 않다. 차라리 비판하려면 그렇게 한심하고 썩어빠진 선조와 집권층이 전쟁후에도 어떻게 정권을 유지하고 썩은내 나는 그들만의 계급사회를 왕조가 멸망할때까지 움켜쥐고 있었나를 제시하는 것이 보다 발전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추어이기에 가능한 연구서이며 성과도 남다르다. 특히나 정발의 부산성전투와 송상현의 동래성전투에 얽힌 신비화의 껍질을 벗겨내어 잘못된 우상화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데서 참으로 공감을 하게 된다. 하지만 특히 후반에 접어들수록 아마추어로서의 한계가 노정되는 점에서 후속작업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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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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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임진왜란 1 -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이순신역사연구회 엮음 / 비봉출판사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임진왜란은 물론 이순신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가 참으로 부족하였다는 사실을 요즘들어 절감하고 있다. 군사정부시절에는 오로지 '구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키는데 급급해서 인간이 아닌 신화적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였는데, 그후로도 큰 진전이 없었던 듯. 어쩌면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이러한 정체된 이순신 연구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에 있어서 중요한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연구가 꼭 전공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소위 재야사가들의 연구가 정통학계에서는 별로 인정을 못받고 있는 형국이지만 언젠가는 다방면에서 참신한 접근법과 발상을 갖고 우수한 성과를 낼 것으로 믿는다. 그런 면에서 이순식역사연구회와 구성원들의 헌신과 열성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징비록><난중일기>를 비롯한 역사고전과 '불멸의 이순신'드라마, 각종 시중 문헌을 참조하면서 이순신의 위대성은 날로 부각되고 있다. 과거의 이순신 상이 단순한 무장에 그쳤다면 요즘은 문무를 겸전한 뛰어난 경영자로서의 새로운 면모에 집중하고 있다. 그도 아픔과 슬픔을 겪고 괴로워 할줄 아는 진실한 한 인간임에 더욱 친근함을 접하게 된다.

이순신의 해전 전략전술에 관하여 구체적 분석이 일반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역시 이순신이 나서니 잘했구나 하는 인식과 아울러 한산대첩에서 학익진을 사용했고, 거북선으로 들이받아서 이겼다고 믿을 뿐. 하지만 잠시 되짚어보니 전쟁이란게 그리 간단한 상황은 아닐듯 싶다. 적 또한 나 못지 않게 이성과 감성을 갖고 똑같이 이기고 살아남으려는 강렬한 욕망을 지닌 존재가 아니던가. 내가 준비하고 내가 힘쓰는 동안 그들이 그냥 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두 권의 책에서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처음 옥포해전부터 부산포해전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따져보고 비교분석한 점은 글자그대로 참신하며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막연히 그러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부분을 백일하에 드러내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논리는 순수한 역사전공자 또는 일개인으로서 이루기 어려운 성과라고 할때 다방면의 연구집단이 이루어낸 업적인 것이다.

2권 중반부터는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경사학(經史學)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대략적인 의미는 이해하겠지만, 저자의 견해처럼 너무나 전통의 학문접근을 등한시하고 서양과학에 몰입되었는지 쉽게 와닿지는 않는다. 하여튼 공리공론에만 치중을 한 당시 조정의 무능과 격물치지에 충실한 이순신은 정말로 대비가 된다.

그런데 후반부터 등장하는 '임진왜란은 ...에서 막을 수 있었다'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포에서, 아니면 문경새재에서 또는 한강이나 임진강, 대동강에서 막을 수 있었는데 우왕좌왕하여 막지 못했다는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다만 너무나도 중언부언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저자들의 답답한 심경이겠지만 이런 연구서에 그렇게 토로하는 것은 적합치 않다. 부산에서 한강에서 대동강에서 어선과 협선들을 활용하고 화포무기를 적극 활용하였다면 당연히 임진왜란의 흐름은 급격한 변동이 발생하였을 것이지만, 그렇게 대비를 못하고 피난가서도 당쟁에 몰두하였던 것이 당시의 조정과 집권층이었음을 왠만한 이라면 충분히 인지하는 사실이 아닌가. 저자들 못지 않게 읽는 나도 짜증스러운데 그걸 동어반복으로 읽자니 갑갑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난중일기>와 <징비록><선조실록>을 일자별로 조목조목 나열하고 훑어나가는 부분에서는 도대체 이 책이 보여주려는게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고 기대하는 바는 이순신 장군이 적군을 무찌른 전략과 전술, 전시경영의 참모습 등이지 당시 무능한 조정의 잘못을 한줄한줄 조목조목 비판하는 데 있지는 않다. 차라리 비판하려면 그렇게 한심하고 썩어빠진 선조와 집권층이 전쟁후에도 어떻게 정권을 유지하고 썩은내 나는 그들만의 계급사회를 왕조가 멸망할때까지 움켜쥐고 있었나를 제시하는 것이 보다 발전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추어이기에 가능한 연구서이며 성과도 남다르다. 특히나 정발의 부산성전투와 송상현의 동래성전투에 얽힌 신비화의 껍질을 벗겨내어 잘못된 우상화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데서 참으로 공감을 하게 된다. 하지만 특히 후반에 접어들수록 아마추어로서의 한계가 노정되는 점에서 후속작업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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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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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프로방스
피터 메일 지음, 강주헌 옮김 / 효형출판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다 읽었을 때 기분이 흐뭇해지는 유형의 책이 있다. 절로 마음을 느긋하고 따스하게 만들어준다. <나의 프로방스>라는 책이 바로 그러하다.

영풍문고에서 2월중에 일부도서에 한하여 세일을 하였다. 그래서 여러권을 나름대로 충동구매하였는데, 제목과 디자인을 보고 마음에 들어 살까 말까 한동안 고민하였다. 결국 사지는 않았지만 뇌리에 어른거려 그만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게 되었다. 페이지 사이에 중독성 물질이라도 뿌려놓았는지.

한마디로 <월든>에 못지않다. 소로우가 사람을 피해서 숲속에서 생활한다면 여기 저자는 도시적 삶을 버리고 프랑스의 프로방스에 정착한다. 그리고 긍정적이고 따스한 눈과 마음으로 그들을 포용하고 더불어 행복한 일상을 누리는 것이다. 부럽다.

여행자가 낯선 고장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사물,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면 여행기가 된다. 여기서 여행자는 결국 타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행기는 주마간산 격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조금은 심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피터 메일은 프로방스로 여행온게 아니라 정착하러 즉, 살러 왔다. 첫 일년을 보내면서 나름대로 보고 듣고 느낀 소회를 솔직 담백하게 적어 내려갔다. 이때 열린 마음으로 프로방스 사람들을 대했다는게 뛰어난 점이다.

누구나 낯선 사람과 문화에 마주치면 으레 방어적 자세를 취하게 마련이다. 그걸 비난한다면 좀 곤란하다. 그건 일종의 본능에 가까운 반사적 행동이니깐. 프로방스라면 프랑스에서도 따뜻한 남쪽나라의 오지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나라로 치면 남해안 어디쯤이 되겠지. 세련된 도시인이 보기엔 그들이 얼마나 투박하고 촌티 풀풀나겠는가마는 그래도 글쓴이의 태도는 일단 긍정하고 본다. 그것이 다소 재밌고 우습게 읽혀지지만 오히려 악의적으로 비추어지지 않는 점이 신기하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나도 이런데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솟는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겠지. 저자 부부만 하더라도 프로방스에 집을 사고, 대대적인 개보수공사를 한다. 그리고 외식도 자주 하고.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일단 등 따습고 배 불러야 여유가 생긴다는 이치려나.

보통 우리가 접하거나 듣는 것은 프랑스에서도 파리라는 대도시의 소식이다. 서울이 우리나라의 진정한 문화를 대변하지 못하는 것처럼 파리도 마찬가지다. 다소 불편함이 있더라도 시골에서 오히려 참다운 그 지역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겠지.

우리에겐 여전히 어려운 포도주를 리터단위로 주전자에 담아서 받아오는 모습도 재밌다. 그리고 미스트랄이라는 강풍의 위력도 몸소 겪고 싶다. 그나저나 프로방스에 가면 너무나 음식을 많이 먹어서 금방 배불뚝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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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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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기억 1 - 탄생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옮김 / 따님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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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우월한 인종이 미개한 인종을 정복하고 지배하는게 자연법칙 상 정당하다면 난 차라리 자연법칙을 거부하련다.

- 인간의 멸종을 가져올 잠재적 위협요인이 바로 인간 자신이다.

책을 덮고 난 뒤 머리속에 되뇌이는 상념이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통하지 아니하며 문화가 상이하다는 차이 때문에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는 역사적으로 당연시되었다. 그리고 그 절정은 소위 제국주의 시대, 서구에 의한 아시아, 유럽, 중남미 침탈이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일찌기 <수탈된 대지>라는 저작에서 외세에 의한 남미의 근세사가 왜곡되고 변질된 과정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였다. 이제 그는 좀더 시야를 넓히고 깊이를 더하여 이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초기에서부터 다시금 통사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연대기다. 일단 방대한 작업에 감사하고 싶다.

콜럼버스에 의한 소위 신대륙 '발견'은 아메리카인에게는 한마디로 재앙의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 미대륙 전체에서 소위 아메리칸 인디언의 숫자는 몇이나 남아있을까? 더구나 그들의 삶의 수준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자신의 땅으로 힘을 앞세운 강도들이 쳐들어와서 동족과 혈육을 살인하고 이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황금에 눈이 먼 당시 서구인-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예외없다 -들에 의하여 황금의 '金'자라도 첨부된 모든 문화유산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피해자들은 백보 양보해서 불행하다 치더라도 가해자들은 행복한 삶을 누리지도 못하였다. 약탈경제에 의존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그후 유럽의 변방국가로 몰락하고 말았으니 황금이 아니라 차라리 '독'이었음을 누구도 알지 못하였음이야.

콜럼버스 이전 역사에 대한 기록은 구할 수 없기에 저자는 신화와 전설, 옛이야기를 인용하여 풍부한 문화유산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소박하기에 소중하고 적기에 귀한 기억들.

인디언에 대한 유럽인의 착취는 교회에서 열렬한 공인과 지지를 받고 있음이 눈에 띈다. 인디언은 재산이며,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착취의 선두에는 당시 가톨릭교회와 신부들이 있었다. 가톨릭이 아무리 참회하고 개선한다 하더라도 과거의 범죄 흔적은 결코 지우거나 숨기지 못할 것이다.

침략자의 언어와 문화가 오늘날 지배적인 체제가 되었음은 차라리 눈물을 자아내는 한편의 코미디일 뿐이다. 남아있는 자기 것이 없기에 그리고 빼앗긴 지 너무 오래되어 되찾을 수 없기에 그들은 침략자의 마지못한 유산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도 더러운 폐악마저.

어디 인간 지배와 착취가 옛이야기일 뿐일까.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제는 무력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수단으로 변경되었을 뿐 수탈의 형식은 여전하다. 그래서 저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의 기억'을 되지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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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3.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