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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수록작>
입동
노찬성과 에반
건너편
침묵의 미래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이들 모두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을까. (P.269, ‘작가의 말’)
작가의 말이 작품집 전체의 내용과 분위기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의 사고사와 아내의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을 바라보며 섣불리 위로하지 못하는 <입동>의 화자 남편.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어렵게 살아가는, 늙은 반려견의 안락사를 둘러싼 소년 찬성의 망설임(<노찬성과 에반>). 아주 오래되어 사랑의 감정조차 메말라진 연인 도화와 이수의 이야기(<건너편>). <풍경의 쓸모> 속 가정을 버린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이선생의 세상사에 물들고 타락하는 모습. 아들의 순수를 믿고자 하는 엄마의 기대를 금 가게 하는 재이의 웃음과 맑은 눈망울(<가리는 손>). 학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교사 남편의 죽음으로 방황하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화자 아내. 수록작 중 <침묵의 미래>를 제외한 모든 작품이 여기에 귀결된다.
모두가 삶 앞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하거나 갈 곳 몰라 표류하는 사람들이다. 삶은 그들에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외로운 찬성이 우연히 만난 개 에반,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들인 에반 덕분에 찬성은 심적 안정을 되찾는다. 늙은 그를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며 비용을 마련하는 찬성. 여기까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대로만 계속된다면. 작가는 삶의 아이러니를 에두르지 않고 털어놓는다. 찬성과 에반의 우정이 보여주는 진정의 얄팍함을. 마치 이것이 삶의 실체라는 듯이.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찬성이 선 데가 길이 아닌 살얼음판이라도 되는 양 어디선가 쩍쩍 금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P.81)
겉보기에 다문화 가정을 등장시켜 독자의 시선 돌리기에 성공한 <가리는 손>도 본질은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화자 엄마의 요리 장면이 유독 많은 내용을 차지하는데, 곧 아들 재이에게 향한 화자의 헌신과 진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나쁜 형들한테 보복당할까 겁먹어서 폭력 장면을 목격하고도 거짓말을 하는 재이. 엄마는 재이의 순수성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마주한 세상 모든 부모는 언제나 그러하다. 마치 학폭 건으로 학교에 가서도 우리 아이는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며,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부모처럼. 문득 엄마는 깨닫지만 믿을 수 없다.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윽고 눈뜬 아이가 맑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P.220)
<풍경의 쓸모>는 어떤가. 작가는 성실히 살려고 나름 애쓰는 강사 이선생과 그의 불성실한 아버지를 대비하여 보여준다. 일찍이 가정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 너무나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이선생에게 아버지는 지향점이 아니라 지양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되묻는다. 가정이라는 영역에서의 도덕성과 올바름이라는 가치 판단을 논외로 한다면 이선생과 아버지 중 누가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교수 임용을 기대하며 교통사고도 대신 뒤집어쓰며 홍삼진액 한 상자를 사 들고 곽교수의 방에 찾아가는 이선생, 그리고 뒤통수를 맞는 이선생. 이선생은 풍경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지만, 아버지는 풍경의 때를 즐긴다. 그에게조차 씁쓸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늙은 아버지. 이선생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로하지만, “더블 폴트”(P.183)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입동>, <건너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공통적으로 사랑을 제재로 하고 있다. 사랑의 설레임과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랑의 상실이 핵심이다. <건너편>을 보자. 여기서 도화와 이수는 사랑이 시들어가는 연인의 관계이다. 동거한 지 수년이 경과하고 여전히 구직자 신세인 이수.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자연스레 감정이 그렇게 움직인 것이다. 도화의 마음속엔 일반적인 연인 관계, 함께 앞날을 그려볼 수 있는 남자의 존재가 서서히 떠올랐으리라. 그래서 이수에게 이별을 통지할 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그녀가 깨달았듯이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P.118)이었다.
<입동>에서 상실의 대상은 아이 영우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수년간 근검한 생활을 한 부부에게 기쁨도 잠시 아이의 사망은 존재의 의의를 빼앗아 가버렸다. 억지로 슬픔을 견디고 버티려 애쓸수록 상실의 빈자리는 커져만 가고 부부 사이, 주변과의 관계도 어그러진다. 그들 부부에게 잘못을 추궁할 수 있을까, 책임을 지울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 벌어진 참극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쨌든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아이의 죽음에도 만사를 내버려 둔 채 그들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삶의 아이러니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 (P.37)
갑작스러운 사랑의 상실은 아이만이 아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화자 아내는 남편의 죽음으로 일상과 결별한다. 학생을 구하기 위한 교사로서의 책무감, 그것은 훌륭한 자세이지만 아내 처지에서는 의미가 없고 이해할 수 없다. 꼭 그랬어야만 했는가, 남편에게 자신은 무엇인가. 사촌언니의 배려로 에든버러에서 마음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게 된 아내. 외견상 아내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그녀 몸의 피부 감기는 실상 그렇지 못함을 보여준다. 허허로움에 불쑥 만난 남자 동창의 몸을 갈구하지만 역시 부질없는 시도. 차라리 몸을 섞었더라면 조금 더 현실 세계로 가까이 다가올 수 있었을까. 마지막 대목에서 아내는 남편과의 화해를 조금이나마 시도한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P.266)
마지막으로 <침묵의 미래>는 이 작품집에서 이색적인 소설이다. 일종의 우화에 가까운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 언어, 말, 사회의 관계를 역설적 시각에서 탐구한다. 중앙 정부는 멸종 위기에 처한 소수 언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종의 언어 동물원을 세운다. 매우 타당한 조치 같지만, 그 외의 곳에서는 소수 언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멸종을 막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멸종을 재촉하는 방안인가.
소설이란 게, 나아가 문학 자체가 언어를 토대로 하는 예술 형식이다. 언어가 사라지면 비단 문학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소통 자체가 소멸하게 된다. 엄격한 통제에서도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소녀와 소년이 사랑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건 상징적이다. 언어의 본질은 남남 사이에서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수단이다. 그것은 무수한 오해와 이해로 이루어져 있다. 그걸 막거나 피하기 위해 통제한다면 언어의 단절, 소통의 부재로 이어진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를 그 낱말을 좋아했다. (P.145)
나로서는 작가가 어떤 배경으로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 작품을 썼는지 짐작할 수 없다. 인간과 언어의 근본적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에서 시작하였는지. 인간사를 관통하는 언어적 소통의 여러 현상에 대응하고자 하는 현실적 이유에서 출발했는지. 여하튼 무척이나 독특하고 기묘하며 쌉싸름한 뒷맛을 남기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