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탐사 김성수 - 밝은 길을 찾아가다
이진강.황호택 지음 / 나남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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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 설립, 캠퍼스 내 인촌 동상과 인촌기념관, 그리고 친일파 논란.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개략적 수준이다. 명색이 모교의 실질적 설립자인데도. 지인으로부터 넘겨받은 이 책을 의무감과 호기심이 반반 섞인 채 읽어나간다, 너무 지루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저자는 인촌의 삶을 6부로 구분하고, 각 부에 길로 이어지는 부제를 붙인다. 희망의 길, 성장의 길, 역사의 길, 가슴 뛰는 길, 공선사후의 길, 이별의 길. 이렇게 길을 제재로 삼은 까닭은 발간사에도 나와 있듯이 전기류의 전형성을 탈피하고자 함이며, 역사 여행 하듯이 탐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음이다.

 

어떻게 보면 인촌이 거둔 성과는 거개가 그의 출신에 기반한다. 전라도 대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금수저 집안이기에 그가 노력했던 교육, 기업, 언론 사업은 자본의 뒷받침 없이는 출발 자체가 어려웠던 만큼 성과가 폄하될 수 있다. 다만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집안의 경제적 부와 개인의 존경받는 삶과는 별개의 사안이다. 인촌도 자칫 비뚤어지고 타락한 삶에 빠지기 쉬웠지만, 선각자였던 두 부친과 장인의 덕택으로 민족의식과 개화사상을 담뿍 흡수하게 된다. 부모의 뜻을 어기고 상투를 자른 채 과감하게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젊은 인촌에게는 모종의 단호함도 엿보인다.

 

인촌의 최대 업적은 무엇보다 경성방직, 동아일보, 그리고 고려대학교로 대표된다. 중앙학교를 인수하면서 교육사업을 시작한 게 불과 20대라는 점에서 놀랄 수밖에 없다. 인촌은 항일독립투쟁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일체의 일제 저항운동과 연계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자신이 지향한 실력양성운동에 매진하였다. 겉보기 행적만 보고 그의 소극성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제하 모든 한국인이 투사가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인촌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는 이들도 이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으며, 전시체제의 강압기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해방 후 정치활동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다른 견해도 있겠다. 한국민주당의 성격과 단독정부 수립 주장 등은 토지개혁 정책의 성과 판단과 함께 분명 논쟁적이다. 다만 이승만 정부가 독재로 치닫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부통령직을 사임하는 행동이라든지 조봉암을 끌어안으려고 애쓰는 모습에서는 정치인이 되고자 하지 않았지만, 뛰어난 정치 감각을 보여준다. 여기서 현실 인식과 역사적 평가의 어려움이 상존한다. 특히 장문의 부통령 사임이유서는 그로서는 드물게 격렬한 감정과 돋보이는 혜안을 표출하고 있다. 더불어 인촌이 진단하는 이승만 정권의 행보와 현 시국의 유사함에 놀라울 따름이다.

 

그랬더니 그는 돌연 비상계엄의 조건이 하등 구비되어 있지 아니한 임시수도 부산에 불법적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소위 국제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누명을 날조하여 계엄하에서도 체포할 수 없는 50여 명의 국회의원을 체포 감금하는 폭거를 감행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국헌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적 쿠데타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P.335)

 

인촌의 삶에서 두드러진 점은 탁월한 인적 네트워크다. 송진우, 장덕수와 어릴 적부터 평생에 걸친 지기. 백관수, 현상윤, 김병로 등과의 막역한 지우. 그것은 그가 단지 부호여서가 아니라 그의 인품이 겸손하고 진실하기에 가능하였으리라. 그는 극단주의를 제외한 폭넓은 이념을 포용하는 아량을 지녔기에 여운형, 조봉암 등의 좌파 세력도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비록 직접적으로 독립 투쟁에 나서지 않았지만, 그의 가족들의 면면을 보면 범상치 않다. 3.1 만세운동으로 옥살이를 한 여성과의 재혼, 아들과 자부, 조카가 독립운동으로 수감된 상황. 친일파의 아들과 결혼한 딸과의 의절. 그토록 가까이하였던 이광수가 변절하자 일거에 외면하는 단호함 등. 독립 자금 지원과 관련한 여러 일화는 그가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행동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에는 인촌의 드러나지 않은 역사적 성과와 비사를 담고 있어 인간 김성수를 다양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친일파 논쟁이 주목을 받다 보니 후대의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를 평가하고 매도하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그의 죽음에 여야 할 것 없이 모두가 애도하고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를 정도로 추앙받던 인물의 참모습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가. 그가 일군 경성방직은 민족자본을 대표하는 선구적 기업-영등포 타임스퀘어가 경성방직의 부지라는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이었으며, 동아일보는 일제 치하에서 민족을 대변하는 언론이며, 독재정권에서 직필을 꺼리지 않는 정론지였다. 고려대학교는 누구나 알고 있는 명문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인촌의 행적을 친일이냐 아니냐의 흑백논리로 재단하면 그는 명백히 친일 행동을 하였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대법원판결도 이 논리를 따른다. 일제 치하에서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암묵적 친일이다. 인촌은 자기 가족과 집안, 그리고 벌여놓은 사업과 학교, 언론을 유지해야 할 책무가 있는 사람이다. 혈혈단신 자기 한 몸만 챙기면 되는 경우와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면 안 된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도, 좌파에서도 인촌을 친일파라고 판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외형상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해서이다. 이 책에 수록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가와, 주봉환 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의 발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평가의 잣대는 엄격한 법적 논리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본다. 어쩌면 그의 친일 이슈는 동아일보의 언론 위상의 변화와 맞물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별 기대 없이 펼쳐 든 책이지만 웬걸 의외로 내용과 구성이 좋다. 문장도 매끄러워 글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인촌 김성수라는 문제적 인간에 대한 탐사 성격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며, 사실에 충실하고 객관성을 놓지 않는 범위 내에서 흥미적 요소를 양념처럼 넣어 묘미를 살리는 등 흔히 편향적이고 따분한 저작이 되는 위험성을 잘 회피하고 있다.

 

아무래도 저자들은 인촌에 우호적이고 옹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인촌의 삶을 탐사하는 책을 쓸 이유가 없으므로. 그러면 독자는 이 책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얻을 수 있을까? 잊혀져 가는 인촌의 업적과, 친일파로 판정된 인촌의 행적을 그의 일생을 거슬러 훑어보면서 작게는 인촌의 개인사를 이해하고, 크게는 한국 근현대사의 복잡다단한 지형과 곡절을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다면 뜻깊은 성과라고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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