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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두 소년은 함께 걸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경험도 감정도 판이하게 다르고 의사 소통도 잘 되지 않는 동떨어진 존재였다.
「멧돼지만 손에 넣게 되면」
「난 돌아가 오두막 일을 계속 해야겠어」 (P.79)
두 소년은 얼굴을 맞바라 보았다. 한쪽에는 사냥과 술책과 신나는 흥겨움과 솜씨의 멋있는 세계가 있었고, 다른 한쪽엔 동경과 좌절된 상식의 세계가 있었다. (P.103)
이 소설의 상징성은 너무나 분명하게 작품 내 드러나 있기에 독자라면 쉽게 알아차린다. 잭과 랠프로 대표되는 수렵 대 정착, 야만 대 문명의 이원적 대립구조가 노골적이기에 주제 이해에 용이하지만 너무나 선명한 단순화에는 거부감을 느낄 독자도 있겠다. 무엇보다도 아무런 외부적 요인 없이 소년들 스스로가 야만성으로 기꺼이 회귀한다는 전개가 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당혹감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문학 작품으로서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인력과 소설적 재미는 매우 강력하다. 특히 후반부로 가면서 랠프와 잭의 갈등이 커지면서 야만성이 잔인함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부터는 영화못지 않은 박진감마저 느낄 수 있다. 특히 끝장면은 사냥감이 되어 쫓기는 랠프의 공포가 극에 달한 압권을 보여준다.
그는 상처도 시장기도 갈증도 모두 잊어버리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절망적인 공포에 몰려 나는 듯이 뛰면서 숲을 벗어나서 탁 트인 모래사장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검은 점이 여러 개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것은 붉은 동그라미가 되어 잽싸게 커지더니 눈앞에서 사라졌다. 너무나 기진하여 자기 다리인지 남의 다리인지 분간이 안 갔다. 필사적인 신호소리가 위협의 톱날을 번뜩이며 다가왔다. 금방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P.299)
이 작품은 <15소년 표류기>와 유사한 설정이면서 현저히 다르며, 작품 해설에 따르면 <산호섬>의 낙천적 인간관에 대한 패러디라고 한다. 두 주인공의 이름도 거기에서 따왔다. 이 작품이 발표된 해는 1954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소 양대 세력의 냉전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된 시점이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 잇달아 실험되면서 인류 절멸의 위기가 암울하게 드리워진 시기다. 작품 내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문명의 옹호와 복귀의지-봉화와 오두막-는 스러져가는 위기감의 발로라고 하겠다.
「너나 닥쳐! 도대체 넌 뭐야? 가만히 버티고 앉아서 이것저것 지시나 하고. 사냥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는 주제에...」
「난 대장이야. 선출되었어」
「그래, 선출되었다는 게 어쨌다는 거야? 이치도 안 닿는 명령이나 내리고...」 (P.134)
잭과 로저의 오랑캐패, 즉 야만인은 스스로 문명을 거부하고 선택한 길이다. 대장 선출에서 낙선했음에도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모습, 자신만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고 공동체와 함께 하길 거부하는 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규칙과 인간애마저 가차없이 저버리며 무자비하고 냉혹한 수단에 거리낌없는 잔인성.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일말의 유감과 후회의 감정마저 느끼지 않는 비인간성. 그것은 문명 이전의 원시 상태, 즉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무정부 사회의 타락한 장면이다.
그것은 이상야릇한 옷을 입고 두 줄로 나란히 서서 대충 보조를 맞추어 행진하고 있는 일단의 소년들이었다. 그들은 반바지나 셔츠나 다른 옷가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P.25)
잭이 이끄는 성가대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작가는 이 대목에 상당히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여기와 나중에 타락한 잭과 사냥대를 연결시키면 몇가지 단어가 떠오른다. 검은 제복, 나치, 광신적 종교집단 등. 나치와 광신도 모두 자신의 믿음을 절대화하고 타인을 지배하려고 들며 폭력도 불사한다. 고도 문명의 상징인 정치와 종교에서 오히려 절대적 타락과 비인간화가 두드러졌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잭은 ‘그것’에 대한 공포와, 멧돼지 고기로 대변되는 물질적 유혹으로 서서히 문명을 무너뜨린다. 숨가쁜 암퇘지 사냥과 이어지는 광란의 가무는 원시와 야만성의 폭발적 표출이다. 그리스 신화의 바쿠스 축제를 연상시키며, 작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인육을 먹는 좀비들과 다를 바 없다.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 그놈을 죽여라!」
막대기가 내려 퍼부어지고 새로 원을 그린 소년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 짐승은 원형의 한가운데서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짐승은 고함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산에 있는 시체에 대해서 무어라고 자꾸만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짐승은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나가 원형을 꿰뚫고 가파로운 바위 끝에서 물가의 모래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곧 소년의 무리는 물밀 듯이 그 뒤를 밟고 바위를 내려가 짐승에게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고 주먹질을 했다. 물어뜯고 살을 찢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이빨과 손톱으로 물어뜯고 할퀼 뿐이었다. (P.228)
랠프는 외모와 성품 등 여러면에서 우수한 대장이 될 수 있음에도 동료를 모두 놓치고 잭 일당에게 쫓기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가. 그는 잭처럼 단호하지 못하고 야심을 품지도 않았으며 돼지의 조언을 받아들여 실행에 옮길 과단성도 부족하였다. 평화시의 지도자상이지 전시의 지도자상은 아닌 것이다. 소라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정확한 대안을 모색하는 능력은 차라리 돼지가 훨씬 뛰어나다. 아래 랠프와 돼지의 대화는 이러한 랠프의 결점이 명확하게 언급된 대목이다.
「랠프, 어떡할 작정이야? 얘기만 하고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잖아? 나는 안경을 도로 찾아야겠어」
「나는 지금 생각중이야. 만약 우리가 그 전에 그랬듯이 단정하게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간다면-어쨌든 우린 오랑캐 쪽이 아니고 또 구조되는 것은 장난이 아니니까-」 (P.256)
이렇게 보면 랠프가 무척 무능하게 보이지만 사실 평균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가깝다고 하겠다. 자신의 이성과 선의가 타인에게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는 보편적인 믿음. 그는 소년들 사이에 규칙과 권위에 대한 준수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거라는 순진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보편적 믿음과 순진한 생각의 정반대가 소설의 표제이기도 한 파리대왕이다. 그것은 ‘그것’에 바쳐진 제물인 동시에 ‘그것’ 자체이다. 사이먼은 막대기에 매달린 파리대왕과의 묵시적 대화를 통해 그것의 본질을 알아차린다. 파리대왕 스스로가 자신이 인간 본성의 일부분, 즉 내면의 동물성의 증거임을 주장하므로.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 (P.214)
간신히 구조받은 랠프의 울부짖음은 처절하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고 의연하게 버티던 성숙한 소년이 어른을 만나는 순간 소년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결코 예전의 순수한 소년으로 돌아갈 수 없음도 알기에 그의 눈물은 절실한 것이다. 다만 랠프의 심경을 어른인 장교가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P.303)
이 소설을 읽기 위해 책을 고를 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도 최선이 아닌 차선의 의미에서 말이다. 서평의 많은 부분이 번역의 고루함을 지적하였는데, 읽다 보니 과연 오늘의 젊은 세대의 문체와 감각에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20세기 훨씬 이전 번역본을 새롭게 손보지 않은 상태에서 재출간한 것으로 생각된다. 출판사가 스스로 밝힌 ‘새 문학 전집을 펴내면서’의 모토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투의 책에 익숙해서인지 몇몇 생소한 한자어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낯설지 않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