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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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년은 함께 걸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경험도 감정도 판이하게 다르고 의사 소통도 잘 되지 않는 동떨어진 존재였다.

멧돼지만 손에 넣게 되면

난 돌아가 오두막 일을 계속 해야겠어(P.79)

 

두 소년은 얼굴을 맞바라 보았다. 한쪽에는 사냥과 술책과 신나는 흥겨움과 솜씨의 멋있는 세계가 있었고, 다른 한쪽엔 동경과 좌절된 상식의 세계가 있었다. (P.103)

 

이 소설의 상징성은 너무나 분명하게 작품 내 드러나 있기에 독자라면 쉽게 알아차린다. 잭과 랠프로 대표되는 수렵 대 정착, 야만 대 문명의 이원적 대립구조가 노골적이기에 주제 이해에 용이하지만 너무나 선명한 단순화에는 거부감을 느낄 독자도 있겠다. 무엇보다도 아무런 외부적 요인 없이 소년들 스스로가 야만성으로 기꺼이 회귀한다는 전개가 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당혹감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문학 작품으로서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인력과 소설적 재미는 매우 강력하다. 특히 후반부로 가면서 랠프와 잭의 갈등이 커지면서 야만성이 잔인함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부터는 영화못지 않은 박진감마저 느낄 수 있다. 특히 끝장면은 사냥감이 되어 쫓기는 랠프의 공포가 극에 달한 압권을 보여준다.

 

그는 상처도 시장기도 갈증도 모두 잊어버리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절망적인 공포에 몰려 나는 듯이 뛰면서 숲을 벗어나서 탁 트인 모래사장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검은 점이 여러 개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것은 붉은 동그라미가 되어 잽싸게 커지더니 눈앞에서 사라졌다. 너무나 기진하여 자기 다리인지 남의 다리인지 분간이 안 갔다. 필사적인 신호소리가 위협의 톱날을 번뜩이며 다가왔다. 금방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P.299)

 

이 작품은 <15소년 표류기>와 유사한 설정이면서 현저히 다르며, 작품 해설에 따르면 <산호섬>의 낙천적 인간관에 대한 패러디라고 한다. 두 주인공의 이름도 거기에서 따왔다. 이 작품이 발표된 해는 1954,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소 양대 세력의 냉전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된 시점이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 잇달아 실험되면서 인류 절멸의 위기가 암울하게 드리워진 시기다. 작품 내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문명의 옹호와 복귀의지-봉화와 오두막-는 스러져가는 위기감의 발로라고 하겠다.

 

너나 닥쳐! 도대체 넌 뭐야? 가만히 버티고 앉아서 이것저것 지시나 하고. 사냥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는 주제에...

난 대장이야. 선출되었어

그래, 선출되었다는 게 어쨌다는 거야? 이치도 안 닿는 명령이나 내리고...(P.134)

 

잭과 로저의 오랑캐패, 즉 야만인은 스스로 문명을 거부하고 선택한 길이다. 대장 선출에서 낙선했음에도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모습, 자신만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고 공동체와 함께 하길 거부하는 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규칙과 인간애마저 가차없이 저버리며 무자비하고 냉혹한 수단에 거리낌없는 잔인성.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일말의 유감과 후회의 감정마저 느끼지 않는 비인간성. 그것은 문명 이전의 원시 상태, 즉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무정부 사회의 타락한 장면이다.

 

그것은 이상야릇한 옷을 입고 두 줄로 나란히 서서 대충 보조를 맞추어 행진하고 있는 일단의 소년들이었다. 그들은 반바지나 셔츠나 다른 옷가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P.25)

 

잭이 이끄는 성가대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작가는 이 대목에 상당히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여기와 나중에 타락한 잭과 사냥대를 연결시키면 몇가지 단어가 떠오른다. 검은 제복, 나치, 광신적 종교집단 등. 나치와 광신도 모두 자신의 믿음을 절대화하고 타인을 지배하려고 들며 폭력도 불사한다. 고도 문명의 상징인 정치와 종교에서 오히려 절대적 타락과 비인간화가 두드러졌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잭은 그것에 대한 공포와, 멧돼지 고기로 대변되는 물질적 유혹으로 서서히 문명을 무너뜨린다. 숨가쁜 암퇘지 사냥과 이어지는 광란의 가무는 원시와 야만성의 폭발적 표출이다. 그리스 신화의 바쿠스 축제를 연상시키며, 작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인육을 먹는 좀비들과 다를 바 없다.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 그놈을 죽여라!

막대기가 내려 퍼부어지고 새로 원을 그린 소년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 짐승은 원형의 한가운데서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짐승은 고함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산에 있는 시체에 대해서 무어라고 자꾸만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짐승은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나가 원형을 꿰뚫고 가파로운 바위 끝에서 물가의 모래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곧 소년의 무리는 물밀 듯이 그 뒤를 밟고 바위를 내려가 짐승에게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고 주먹질을 했다. 물어뜯고 살을 찢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이빨과 손톱으로 물어뜯고 할퀼 뿐이었다. (P.228)

 

랠프는 외모와 성품 등 여러면에서 우수한 대장이 될 수 있음에도 동료를 모두 놓치고 잭 일당에게 쫓기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가. 그는 잭처럼 단호하지 못하고 야심을 품지도 않았으며 돼지의 조언을 받아들여 실행에 옮길 과단성도 부족하였다. 평화시의 지도자상이지 전시의 지도자상은 아닌 것이다. 소라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정확한 대안을 모색하는 능력은 차라리 돼지가 훨씬 뛰어나다. 아래 랠프와 돼지의 대화는 이러한 랠프의 결점이 명확하게 언급된 대목이다.

 

랠프, 어떡할 작정이야? 얘기만 하고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잖아? 나는 안경을 도로 찾아야겠어

나는 지금 생각중이야. 만약 우리가 그 전에 그랬듯이 단정하게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간다면-어쨌든 우린 오랑캐 쪽이 아니고 또 구조되는 것은 장난이 아니니까-(P.256)

 

이렇게 보면 랠프가 무척 무능하게 보이지만 사실 평균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가깝다고 하겠다. 자신의 이성과 선의가 타인에게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는 보편적인 믿음. 그는 소년들 사이에 규칙과 권위에 대한 준수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거라는 순진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보편적 믿음과 순진한 생각의 정반대가 소설의 표제이기도 한 파리대왕이다. 그것은 그것에 바쳐진 제물인 동시에 그것자체이다. 사이먼은 막대기에 매달린 파리대왕과의 묵시적 대화를 통해 그것의 본질을 알아차린다. 파리대왕 스스로가 자신이 인간 본성의 일부분, 즉 내면의 동물성의 증거임을 주장하므로.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P.214)

 

간신히 구조받은 랠프의 울부짖음은 처절하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고 의연하게 버티던 성숙한 소년이 어른을 만나는 순간 소년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결코 예전의 순수한 소년으로 돌아갈 수 없음도 알기에 그의 눈물은 절실한 것이다. 다만 랠프의 심경을 어른인 장교가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P.303)

 

이 소설을 읽기 위해 책을 고를 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도 최선이 아닌 차선의 의미에서 말이다. 서평의 많은 부분이 번역의 고루함을 지적하였는데, 읽다 보니 과연 오늘의 젊은 세대의 문체와 감각에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20세기 훨씬 이전 번역본을 새롭게 손보지 않은 상태에서 재출간한 것으로 생각된다. 출판사가 스스로 밝힌 새 문학 전집을 펴내면서의 모토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투의 책에 익숙해서인지 몇몇 생소한 한자어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낯설지 않았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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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는 봄 : 청소년 비극 지만지 희곡선집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미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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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베데킨트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친 희곡 부문에서 소위 문제적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당대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올 정도로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억압된 성()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었다. 이 작품 <눈뜨는 봄>(또는 <사춘기>)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성에 대한 관심과 무지, 반면 어른들의 편협한 사고와 교육관을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다.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사춘기는 2의 탄생또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불릴 정도로 청소년들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신체는 급격한 성장을 거듭하는 반면, 정신적 성장은 아직 불완전하며, 가정과 사회적으로 그들은 미숙아로서 보살핌과 교육을 받는 대상이다. 그들은 인생과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면서도 희망찬 꿈을 품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당장의 신체적 변화와 자연적 욕구의 성장에 당혹감을 품는다.


오늘날은 청소년들의 성교육에 대하여 대체로 긍정적이며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성문화의 확산이니 성 개방 풍조니 하는 일각에서 우려하는 현상도 앞서가는 서구에서도 1960년 이후에나 발생한 추세다. 따라서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19세기 말은 전적으로 전근대적 보수적 사고관이 지배하던 시기임을 무엇보다도 인식해야 한다.


당시 성은 무조건 감추어야 하는 것, 어른들만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가장 궁금한 질문, 즉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대한 답변은 적당히 에두르는데 일차적 목적을 둔다. 우리의 경우,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는 식으로. 과거 유럽도 다르지 않다. 황새가 굴뚝을 통해 들어와서 아이를 주고 간다는 식으로. 그래서 벤들라의 호기심에 엄마 베르크만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결국은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부인 자신도 그렇게 교육받아 왔고, 결혼 후에야 깨우친 내용이므로.


열네 살짜리 딸한테 그걸 말하느니, 차라리 태양이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내 어머니가 내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했을 뿐이란다.” (P.138)


6장에서 벤들라가 멜히오어와 우연한 경험을 갖게 된 후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미소 짓는 걸 어머니가 보시니까. 넌 왜 입을 다물지 못하니? 난 몰라. 난 정말 몰라.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길이 마치 양탄자 같아....” (P.89)


이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은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파국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당사자들의 성적 무지와, 어른들의 허위와 가식적 도덕관이 잘못 결합한 결과다.


모리츠의 자살 사건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교사 회의의 면면을 보자. 베데킨트는 신조어로 사춘기 청소년 문제를 논의하는 어른들, 즉 교사들을 비꼬고 있다. 원숭이 비계, 몽둥이, 주린 띠, 골절상, 혀 놀림, 파리 시체, 일사병 등의 이름을 가진 교사들이 제대로 사안을 다룰 수 있겠는가? 그들이 답답한 실내 환기를 위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설전을 보라.


벤들라는 잘못된 임신중절로 죽게 되고, 모리츠는 자살을 한다. 멜히오어는 청소년 감화원에 갇힌다. 에른스트와 핸셴은 동성애 관계를 맺는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성인 중 유일하게 긍정적이고, 앞서가는 인격을 갖춘 이는 멜히오어의 어머니 가보어 부인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모든 면에서 솔직하며 사실에 기반을 둔 가정교육을 한다. 그녀는 학교의 처벌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 말대로 그들은 희생양이 필요했을 따름이다. 아들이 남녀의 성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해서 그것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감화원에 들어갈 중죄에 해당되는가?


다만 당대는 가보어 씨의 다음 의견이 지배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소수자의 발언으로 치부되며, 그녀의 교육관과 그 결과는 다수와 충돌한 것이다.


멜히오어가 쓴 것 같은 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내면 깊숙이 썩어 있는 게 틀림없어요. 골수가 상한 거예요...그 글은 소름 끼치도록 분명하게 솔직한 의도를 기록하고 있어요. 그 자연적 성향, 부도덕한 경향 말이오. 왜냐하면 그것은 부도덕한 것이기 때문이오...” (P.123)


멜히오어가 묘지에서 죽음을 택하려는 순간 나타난 복면의 신사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그에게 기회를 주어 지평을 환상적인 방법으로 확대시킬 수 있도록”(P.151) 해준다고 약속한다. 즉 그에게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흥미로운 것을 빠짐없이 알게”(P.151) 해주겠다고. 작가는 멜히오어를 죽음에 몰아넣어 완전한 비극으로 구성할 수 있었는데도 복면의 신사를 등장시켜 그를 구제한다. 그 연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와 유사한 인상을 준다. 둘 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독일의 김나지움을 무대로 한다. 베데킨트가 좀 더 성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양자는 기본적으로 가정과 학교의 인습적인 교육의 폐해를 노정한다. 엄격하고 보수적 가치관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과 욕망을 죄악시한다. 도덕의 이름으로 그것을 억누르는 데 급급하다.


여기서 양육과 교육의 본질적 목적은 무엇인가 되새겨본다. 자녀를 본성과 자질의 자연스럽고 올바른 발로로 유도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 순응적이고 보다 성공하기에 유리한 인간형으로 만드는 것인가? 문득 이런 광고문구가 생각난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아니면 학부모입니까?


* 2011년에 쓴 글인데, 누락되어 있는 걸 찾아서 추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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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 - 개정2판 창비아동문고 46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트 그림 / 창비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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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애, 독재, 자유, 믿음, 환상, 죽음, 용기.

이 동화를 읽고 난 후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이다.

 

우애. 동화를 시종일관 이끄는 힘은 요나탄과 카알의 우애다. 모든 면에서 완전히 대비되는 형제이지만 그들 사이의 우애는 비교할 수 없이 끈끈하고 따뜻하다. 겁많은 카알이 벚나무 골짜기를 떠날 결심을 품게 된 계기도 꿈속에서 들렸던 도와달라는 형의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두 사람에게는 죽음조차도 장벽이 되지 않는다. 나약하고 무력한 카알이 형과의 모험을 통해 서서히 사자왕에 어울리게 성장하는 모습이 흐뭇하다.

 

독재. 독재자 텡일에 저항하는 들장미 골짜기 사람들과 사자왕 형제의 이야기가 후반부를 차지한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낭기열라에 어울리지 않는 비극적 상황이다. 강압과 착취, 폭력을 마구 일삼는 텡일은 독재자의 전형이다. 압제에 시달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마침내 자유를 쟁취해 내는 과정이 극적으로 전개된다. 독재자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은 번역본 출간 당시 국내 정세를 볼 때 의외인 동시에 시사적이다.

 

독재자들이 으레 저지르는 실수를 텡일도 별수 없이 저지르고야 말 거라는 얘기지. 결국 기생충처럼 죽어서 영영 사라져 버릴 거야. (P.69)

 

텡일이 갑자기 내 앞쪽으로 바짝 다가왔기 때문에 잔인해 보이는 얼굴과 눈빛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과연 요나탄 형의 말대로 독사처럼 흉악스러웠습니다. 피에 굶주린 듯 끊임없이 잔인한 짓을 저지르는 악당다운 모습이었습니다. (P.154)

 

자유. 자유는 공기와 같다. 상실하고 나서야 소중함을 비로소 체감하며 되찾기 위해 뼈저린 고초, 때로는 죽음마저 감내해야 한다. 이렇게 자유를 위한 투쟁이 중요한 것은 자유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근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들장미 골짜기 사람들이 무수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끝내 쟁취해야 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자유가 곧 행복의 동의어는 아니므로.

 

이제 곧 자유의 폭풍이 몰아칠 겁니다. 나무가 부러지고 뿌리 뽑히듯이 독재자도 쓰러져 버리겠지요. 끓어오르는 함성과 함께 그 폭풍은 속박을 휩쓸어 내고 우리에게 자유를 되찾아 줄 겁니다!” (P.254)

 

믿음. 공동체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구성원 상호 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믿을 수 없다고 여겨지면 자연스레 멀리하게 된다. 카일이 휘베트에 반감을 품었던 이유이다. 배신은 더욱 큰 실망과 증오를 유발한다. 형제에게 참으로 친절하고 벚나무 골짜기 일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던 황금 수탉의 반역이 인물들에게 그토록 충격을 다가왔던 까닭이다. 그래도 아직은 믿음의 힘이 한층 크다. 소피아 아주머니, 마티아스 할아버지처럼.

 

환상. 예술의 가치는 적나라한 현실과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음에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간과하거나 현실을 벗어난, 하지만 또 다른 진실의 가치를 갈구한다. 예술을 통해서 현실을 버텨갈 힘과 지혜를 얻는 것이다. 겉보기에 터무니없지만 꿈속 세계, 사후 세계, 용과 괴물들의 모험에 열광하는 모습은 자연스럽다.

 

죽음. 낭기열라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하나다.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곳. 사람들은 언제나 사후 세계에 관심을 보여왔다. 천국과 지옥, 극락과 지옥 등 표현은 다르지만 지향점은 동일하다. 착한 사람은 죽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대한다. 낭기열라조차 예상과는 달리 완전히 순수하고 아름답지 않게 되었다. 요나탄이 카알에게 얘기했던 낭기열라와 낭길리마의 모습은 차이점이 없는데 낭길리마는 과연 어떠한 곳일까?

 

지금 우리는 낭기열라에서 아주 오랜 옛날을 살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오래전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니까. 그렇지만 어쩌면 어린 시절이라고 할 수도 있어. 젊고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 살아가는 것이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고 근심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그런 시절 말야.” (P.41)

 

용기. 형제이지만 요나탄과 카알은 우성과 열성 유전자의 극단적 표현형으로 비친다. 언제나 소심하고 겁 많고 주저주저하는 카알. 그런 카알이 낭기열라에 따라가고 홀로 벚나무 골짜기를 헤매게 된 것은 오로지 요나탄 형과 함께 있고자 하는 열망에서다. 어떤 면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과 같은 마음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런 카알이 일련의 모험을 겪으면서 조금씩 바뀌어 감을 보면 일종의 성장소설로 간주할 수 있다. 낭길리마로 가기 위해 오로지 카알만이 실행할 수 있는 최종 행동을 보라.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을 하는 참된 이유라고 하겠다.

 

형은 아무리 위험해도 반드시 해내야 되는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래?”

내가 다그쳤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와 다를 게 없으니까.” (P.71)

 

어떻게 내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나는 정말 그럴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해내지 못한다면 나는 하잘것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못난 쓰레기 이상의 그 무엇도 영영 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P.288-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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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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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는 에르퀼 푸아로도, 마플 양도 나오지 않는다. 아니, 탐정 자체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독자는 작가와 함께 전지적 시점으로 등장인물 전체를 관찰하거나 사건 속으로 들어가 인물 각자의 시선으로 타인을 관찰하고 의심하는데 합세해야 한다. 독자는 작중 인물이 파악하는 정보만큼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탐정과 범인, 독자는 구별되지 않는다. 모두가 범인일 수도 있거나 억울한 피해자일 수 있다.

 

전통적 추리소설의 원칙에서 벗어난 점과 아울러 이 작품은 죄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법률을 위반하는 죄는 응당 법적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반면 법적 기준에는 어긋나지 않거나 증거가 명백하지 않아 처벌할 수 없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무죄를 인정해야만 하는가? 병정 섬에 초대받은 열 명의 손님들처럼. 무죄 인정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그를 심판할 기준은 무엇이고 심판과 집행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

 

제 말은 그 사실이 이 병정 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설명해 준다는 겁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범죄는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겁니다. 예컨대 로저스 부부의 범죄가 그렇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인을 저지른 워그레이브의 경우가 있지요. (P.131)

 

대상자의 처지에서 바라보자. 그들 중에는 목소리의 기소 죄목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인정하지 않는 인물은 혐의 자체를 부인하거나 혐의는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의 범죄성을 거부하거나 한다. 살인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행위의 경중, 고의성의 존재 여부 등이 제각각이다. 로저스 부인과 에밀리 브렌트, 그녀와 앤터니 매스턴 간의 간극은 머나멀다.

 

오웬의 의도는 심정적으로 독자의 암묵적 동의를 요구하지만 그것에 다소간의 불쾌함이 섞여 있음은 처벌 기준과 집행 수단이 매우 자의적이라는데 있다. 열 꼬마 병정 자장가 속의 순서에 맞춰 잇따라 손님들의 죽음이 발생하자 나머지 손님들은 불안과 공포에 쫓긴다. 죽음의 자리는 냉혹하다, 대상자는 자기변호를 하거나 집행자가 누구인지 미처 알기도 전에 참혹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법이 처벌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공명정대한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한다는 이 계획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계획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는 길은 한 가지 밖에 없소. 오웬이라는 자가 직접 이 섬으로 올 수밖에 없는 거요.

결론은 명백하오. 오웬이라는 자는 우리 중의 하나요...... (P.168)

 

고립된 섬, 샅샅이 수색해도 그들 외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곳. 살인자는 미치광이인 동시에 그들 중 일원이라는 판단이 그들 자신을 더욱 괴롭히고 서로 간의 유대와 협력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성과 인정이 사라진 곳에서 사람은 동물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오직 생존 욕구와 본능에 따르게 된다. 무죄가 증명되고 의심의 눈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시체가 되는 방법뿐.

 

겉치레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예의상의 대화 같은 것도 없었다. 그들은 자기 보호라는 공통적인 본능으로 묶여 있는 다섯 명의 적일 뿐이었다.

그러자 그들 모두가 갑자기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은 동물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P.232)

 

동요 속 예언이 차례차례 실제로 이루어짐에도 사람들은 살인범의 실체를 알 수 없고 섬을 탈출할 희망도 품지 못한다. 오직 압박과 공포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서를 기다리며. 불안감에 잠조차 청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 통 아저씨 게임처럼 언제 나의 몸에 칼이 들어올지 모른다. 독자조차도 다음 희생자가 누구인지 살인자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미지수인 가운데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나가고 흐트러진 구슬이 서서히 꿰매져 나중에는 정교한 자수와 아름다운 세공품이 만들어지는 듯한 효과를 작가는 설계하였으리라. 그만큼 뒤돌아보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지는 가공할 세밀함에 몸을 떨게 된다.

 

모든 범죄자는 완전범죄를 꿈꾼다. 제아무리 많은 인력이 투입되고 오랜 시간이 경과해도 결코 풀어낼 수 없는 범죄의 실체. 해커와 화이트 해커는 동전의 양면이자 종이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미궁에 빠진 병정 섬 사건의 범인을 보면 문득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한자 성어를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말마따나 범죄에 예술성을 논할 수 있다면 매우 높은 예술점수를 획득하였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직접 사람을 죽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예술가의 욕망과 다름없을 터! 나는 범죄의 예술가라고 할 수 있었다! 내 직업적 요구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된 내 상상력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섭게 자라나고 있었다. (P.314)

 

작가는 이 사건과 살인자에 어떠한 도덕적 재단도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묘사하고 기술할 뿐이다. 범죄란 행위는 목적의 정당성 여하와 관계없이 태생적으로 비도덕성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어떤 사안의 옳고 그름은 겉과 속이 다를 수 있으며 법적 판단에 따른 진실이 후에 뒤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워그레이브 판사의 사례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열 명의 희생자들에 동정심을 갖게 할 요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도 있다. 독자는 희생자와 살인자 모두에게 절반의 동정과 미움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점층적으로 강화되는 긴장과 흥분과 스릴감이란! 정교하게 짜 맞춘 퍼즐처럼 극도로 정교하게 세공한 작가의 솜씨는 과연 추리소설의 걸작이라고 불릴만한지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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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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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관점에서 셰익스피어의 가장 문제작이다. 작가 당대에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을 텐데 이것을 보면 문학 해석에 있어 시대와 가치관의 변화가 갖는 의미를 한층 생생하게 다가온다. 더불어 예술의 외양을 한 꺼풀 벗길 때 내면에 드리워진 인간성의 진정한 의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원제보다는 <베니스의 유대인>이 표제명으로 보다 적합하다. 아마 말로의 작품명과 유사성을 꺼리려는 조치일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작품 내에서 사건의 핵심인 동시에 유이하게 살아 숨 쉬는 캐릭터로서 샤일록의 압도적 영향력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바사니오와 안토니오는 유감스럽게도 그다지 매력적인 주인공이 못 된다. 샤일록과 포셔에 비교하면.

 

극 중에서 샤일록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로 나온다. 샤일록에 대한 안토니오의 미움은 그가 우선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유대인은 종교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다. 이들을 향한 탄압의 결정판이 나치 히틀러임은 자명하지만 역사적 배척은 뿌리 깊다. 일상적인 생업을 가질 수 없게 된 그들이 금융업에 매진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극 중에서 샤일록은 고리대금업자로 비난받지만 그의 구체적 영업 행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에 대한 안토니오의 비난 대사만 등장할 뿐이다. 안토니오의 비난이 당대에는 정당하지만 현대의 시각에서는 터무니없는 비난에 불과함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 시각이라면 금융업은 존재의 의의를 상실한다. 결국 안토니오의 비난은 근본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의 소산이다.

 

(샤일록) 저자는 우리의 신성한 나라를 미워하고 / 상인들이 운집한 곳에서도 나와 내 장사와 / 정당한 내 소득을 이자라고 부르면서 / 욕을 했어. 내 민족이 저주를 받더라도 그를 용서 않으리라! (1막 제3, P.28)

 

(샤일록) 당신은 날 오신자, 무자비한 개라 하고 / 내 유대인 저고리에 가래침을 뱉었는데 / 그 모두가 내 것을 사용하는 대가였죠. (1막 제3, P.31)

 

(샤일록) 이유가 뭐냐고요? 내가 / 유대인이란 겁니다. 유대인은 눈 없어요? 유대인은 / 손도 기관도 신체도 감각도 감정도 정열도 없냐고요? (3막 제1, P.69)

 

작품 곳곳에는 유대인 차별과 멸시에 대한 샤일록의 억압되고 축적된 분노를 표출하는 대사가 등장한다. 누구라도 샤일록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분개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결국 안토니오를 향한 샤일록의 증오를 유발한 사람은 안토니오 자신이다. 그를 파멸시킬 욕심에 샤일록은 무리수를 감행하였고 그것은 포셔의 판결 덕분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 작품에서 유대인 차별을 강화하는 설정은 더 있는데, 샤일록의 딸 제시카다. 그녀는 기독교도 남자와 사랑에 빠져 가출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재물을 갖고 도망치며 이에 대한 죄의식은 없다. 게다가 유대인으로서의 아버지를 부인하고 오히려 비난한다.

 

(제시카) , 아버지의 자식임을 부끄러워하다니 / 내게는 이 얼마나 가증스런 죄인가! / 하지만 내가 비록 혈연으론 딸이지만 / 성향은 물려받지 않았어. , 로렌초, / 당신이 약속을 지키면 이 갈등을 끝내고 / 기독교인, 당신 아내, 둘 다 될 거예요! (2막 제3, P.47)

 

재판에서 진 샤일록의 전 재산은 몰수당한다. 베니스 시민의 정당한 생명을 노린 범법자로 취급받은 것이다. 이 혐의의 적법성 여부는 극 중에서 시비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어쨌든 샤일록이 그나마 일부 재산이나마 보전할 방법을 안토니오는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안토니오) 그 조건은 둘인데, 우선 이 호의의 대가로 / 그가 곧장 기독교 신자가 될 것이며 / 또 하나는 죽었을 때 소유한 모든 것을 / 사위인 로렌초와 딸에게 선물한단 기록을 / 여기 이 법정에서 남기는 것입니다. (4막 제1, P.114)

 

여기서 안토니오는 변함없는 유대인 혐오를 보여준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안토니오와 바사니오 등은 인간미 없고 박제된 성격을 꾸준히 유지한다. 바사니오가 포셔와의 결혼을 추진하는 의도의 순수성을 확인해 보자. 작품의 주인공이 그들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샤일록과 다른 의미에서 매력적인 주인공인 포셔는 양면적인 모습을 지닌다. 남편에게 순종적인 전통적 여성으로서의 포셔와, 남편 친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변신한 법학자 발타자르로. 발타자르는 샤일록의 계약서 맹신주의에서 약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빌미로 재판을 뒤집는 데 성공한다. 샤일록의 과도한 욕심이 부른 일대 참사라고 할 수 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흠결을 찾아낸 발타자르, 즉 포셔의 날카로운 지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샤일록과 그라티아노 모두 발타자르를 공정하고 박식한 판관으로 거듭 평가한다, 전혀 다른 의미에서지만.

 

(샤일록) 계약서에 그렇게 지정돼 있습니까?

(포셔)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오? / 그쯤은 자선으로 하는 게 좋을 거요.

(샤일록) 그런 건 못 찾겠소, 계약서엔 없소이다. (4막 제1, P.108)

 

바사니오는 재판 도중에 감정에 북받쳐서 해서는 안 될 발언을 하고야 만다. 제아무리 목숨이 경각에 달린 우정이 소중하다고 해도 아내와 사랑보다도 더 우위에 두는 발언은 예나 지금이나 금물이다. 이를 듣게 된 포셔가 발끈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이후에 벌어지는 결혼반지를 둘러싼 우스꽝스러운 후일담은 결혼 생활에서 바사니오에 대한 포셔의 우위를 예고하는 서막이다.

 

이 작품은 단지 희극이라고 하기에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작품 해설에서도 역자가 언급하였듯이 샤일록이라는 인물을 향한 우리의 평가는 다면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악인임은 분명하지만 비난보다는 오히려 동정의 마음을 갖게 되는. 유대인이라는 자리에 지금의 시점에서 흑인, 이슬람인 등 주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지위에 놓인 사람을 대치하면, 세상을 향한 샤일록의 외침은 안토니오와 포셔 부부, 그라티아노 부부, 로렌초와 제시카의 유쾌하고 행복한 장면보다 독자에게 더욱 진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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