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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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는 에르퀼 푸아로도, 마플 양도 나오지 않는다. 아니, 탐정 자체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독자는 작가와 함께 전지적 시점으로 등장인물 전체를 관찰하거나 사건 속으로 들어가 인물 각자의 시선으로 타인을 관찰하고 의심하는데 합세해야 한다. 독자는 작중 인물이 파악하는 정보만큼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탐정과 범인, 독자는 구별되지 않는다. 모두가 범인일 수도 있거나 억울한 피해자일 수 있다.

 

전통적 추리소설의 원칙에서 벗어난 점과 아울러 이 작품은 죄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법률을 위반하는 죄는 응당 법적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반면 법적 기준에는 어긋나지 않거나 증거가 명백하지 않아 처벌할 수 없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무죄를 인정해야만 하는가? 병정 섬에 초대받은 열 명의 손님들처럼. 무죄 인정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그를 심판할 기준은 무엇이고 심판과 집행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

 

제 말은 그 사실이 이 병정 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설명해 준다는 겁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범죄는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겁니다. 예컨대 로저스 부부의 범죄가 그렇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인을 저지른 워그레이브의 경우가 있지요. (P.131)

 

대상자의 처지에서 바라보자. 그들 중에는 목소리의 기소 죄목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인정하지 않는 인물은 혐의 자체를 부인하거나 혐의는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의 범죄성을 거부하거나 한다. 살인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행위의 경중, 고의성의 존재 여부 등이 제각각이다. 로저스 부인과 에밀리 브렌트, 그녀와 앤터니 매스턴 간의 간극은 머나멀다.

 

오웬의 의도는 심정적으로 독자의 암묵적 동의를 요구하지만 그것에 다소간의 불쾌함이 섞여 있음은 처벌 기준과 집행 수단이 매우 자의적이라는데 있다. 열 꼬마 병정 자장가 속의 순서에 맞춰 잇따라 손님들의 죽음이 발생하자 나머지 손님들은 불안과 공포에 쫓긴다. 죽음의 자리는 냉혹하다, 대상자는 자기변호를 하거나 집행자가 누구인지 미처 알기도 전에 참혹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법이 처벌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공명정대한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한다는 이 계획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계획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는 길은 한 가지 밖에 없소. 오웬이라는 자가 직접 이 섬으로 올 수밖에 없는 거요.

결론은 명백하오. 오웬이라는 자는 우리 중의 하나요...... (P.168)

 

고립된 섬, 샅샅이 수색해도 그들 외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곳. 살인자는 미치광이인 동시에 그들 중 일원이라는 판단이 그들 자신을 더욱 괴롭히고 서로 간의 유대와 협력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성과 인정이 사라진 곳에서 사람은 동물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오직 생존 욕구와 본능에 따르게 된다. 무죄가 증명되고 의심의 눈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시체가 되는 방법뿐.

 

겉치레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예의상의 대화 같은 것도 없었다. 그들은 자기 보호라는 공통적인 본능으로 묶여 있는 다섯 명의 적일 뿐이었다.

그러자 그들 모두가 갑자기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은 동물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P.232)

 

동요 속 예언이 차례차례 실제로 이루어짐에도 사람들은 살인범의 실체를 알 수 없고 섬을 탈출할 희망도 품지 못한다. 오직 압박과 공포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서를 기다리며. 불안감에 잠조차 청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 통 아저씨 게임처럼 언제 나의 몸에 칼이 들어올지 모른다. 독자조차도 다음 희생자가 누구인지 살인자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미지수인 가운데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나가고 흐트러진 구슬이 서서히 꿰매져 나중에는 정교한 자수와 아름다운 세공품이 만들어지는 듯한 효과를 작가는 설계하였으리라. 그만큼 뒤돌아보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지는 가공할 세밀함에 몸을 떨게 된다.

 

모든 범죄자는 완전범죄를 꿈꾼다. 제아무리 많은 인력이 투입되고 오랜 시간이 경과해도 결코 풀어낼 수 없는 범죄의 실체. 해커와 화이트 해커는 동전의 양면이자 종이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미궁에 빠진 병정 섬 사건의 범인을 보면 문득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한자 성어를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말마따나 범죄에 예술성을 논할 수 있다면 매우 높은 예술점수를 획득하였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직접 사람을 죽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예술가의 욕망과 다름없을 터! 나는 범죄의 예술가라고 할 수 있었다! 내 직업적 요구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된 내 상상력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섭게 자라나고 있었다. (P.314)

 

작가는 이 사건과 살인자에 어떠한 도덕적 재단도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묘사하고 기술할 뿐이다. 범죄란 행위는 목적의 정당성 여하와 관계없이 태생적으로 비도덕성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어떤 사안의 옳고 그름은 겉과 속이 다를 수 있으며 법적 판단에 따른 진실이 후에 뒤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워그레이브 판사의 사례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열 명의 희생자들에 동정심을 갖게 할 요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도 있다. 독자는 희생자와 살인자 모두에게 절반의 동정과 미움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점층적으로 강화되는 긴장과 흥분과 스릴감이란! 정교하게 짜 맞춘 퍼즐처럼 극도로 정교하게 세공한 작가의 솜씨는 과연 추리소설의 걸작이라고 불릴만한지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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