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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 - 개정2판 ㅣ 창비아동문고 46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트 그림 / 창비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우애, 독재, 자유, 믿음, 환상, 죽음, 용기.
이 동화를 읽고 난 후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이다.
우애. 동화를 시종일관 이끄는 힘은 요나탄과 카알의 우애다. 모든 면에서 완전히 대비되는 형제이지만 그들 사이의 우애는 비교할 수 없이 끈끈하고 따뜻하다. 겁많은 카알이 벚나무 골짜기를 떠날 결심을 품게 된 계기도 꿈속에서 들렸던 도와달라는 형의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두 사람에게는 죽음조차도 장벽이 되지 않는다. 나약하고 무력한 카알이 형과의 모험을 통해 서서히 사자왕에 어울리게 성장하는 모습이 흐뭇하다.
독재. 독재자 텡일에 저항하는 들장미 골짜기 사람들과 사자왕 형제의 이야기가 후반부를 차지한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낭기열라에 어울리지 않는 비극적 상황이다. 강압과 착취, 폭력을 마구 일삼는 텡일은 독재자의 전형이다. 압제에 시달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마침내 자유를 쟁취해 내는 과정이 극적으로 전개된다. 독재자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은 번역본 출간 당시 국내 정세를 볼 때 의외인 동시에 시사적이다.
독재자들이 으레 저지르는 실수를 텡일도 별수 없이 저지르고야 말 거라는 얘기지. 결국 기생충처럼 죽어서 영영 사라져 버릴 거야. (P.69)
텡일이 갑자기 내 앞쪽으로 바짝 다가왔기 때문에 잔인해 보이는 얼굴과 눈빛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과연 요나탄 형의 말대로 독사처럼 흉악스러웠습니다. 피에 굶주린 듯 끊임없이 잔인한 짓을 저지르는 악당다운 모습이었습니다. (P.154)
자유. 자유는 공기와 같다. 상실하고 나서야 소중함을 비로소 체감하며 되찾기 위해 뼈저린 고초, 때로는 죽음마저 감내해야 한다. 이렇게 자유를 위한 투쟁이 중요한 것은 자유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근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들장미 골짜기 사람들이 무수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끝내 쟁취해야 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자유가 곧 행복의 동의어는 아니므로.
“이제 곧 자유의 폭풍이 몰아칠 겁니다. 나무가 부러지고 뿌리 뽑히듯이 독재자도 쓰러져 버리겠지요. 끓어오르는 함성과 함께 그 폭풍은 속박을 휩쓸어 내고 우리에게 자유를 되찾아 줄 겁니다!” (P.254)
믿음. 공동체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구성원 상호 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믿을 수 없다고 여겨지면 자연스레 멀리하게 된다. 카일이 휘베트에 반감을 품었던 이유이다. 배신은 더욱 큰 실망과 증오를 유발한다. 형제에게 참으로 친절하고 벚나무 골짜기 일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던 황금 수탉의 반역이 인물들에게 그토록 충격을 다가왔던 까닭이다. 그래도 아직은 믿음의 힘이 한층 크다. 소피아 아주머니, 마티아스 할아버지처럼.
환상. 예술의 가치는 적나라한 현실과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음에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간과하거나 현실을 벗어난, 하지만 또 다른 진실의 가치를 갈구한다. 예술을 통해서 현실을 버텨갈 힘과 지혜를 얻는 것이다. 겉보기에 터무니없지만 꿈속 세계, 사후 세계, 용과 괴물들의 모험에 열광하는 모습은 자연스럽다.
죽음. 낭기열라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하나다.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곳. 사람들은 언제나 사후 세계에 관심을 보여왔다. 천국과 지옥, 극락과 지옥 등 표현은 다르지만 지향점은 동일하다. 착한 사람은 죽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대한다. 낭기열라조차 예상과는 달리 완전히 순수하고 아름답지 않게 되었다. 요나탄이 카알에게 얘기했던 낭기열라와 낭길리마의 모습은 차이점이 없는데 낭길리마는 과연 어떠한 곳일까?
“지금 우리는 낭기열라에서 아주 오랜 옛날을 살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오래전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니까. 그렇지만 어쩌면 어린 시절이라고 할 수도 있어. 젊고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 살아가는 것이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고 근심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그런 시절 말야.” (P.41)
용기. 형제이지만 요나탄과 카알은 우성과 열성 유전자의 극단적 표현형으로 비친다. 언제나 소심하고 겁 많고 주저주저하는 카알. 그런 카알이 낭기열라에 따라가고 홀로 벚나무 골짜기를 헤매게 된 것은 오로지 요나탄 형과 함께 있고자 하는 열망에서다. 어떤 면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과 같은 마음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런 카알이 일련의 모험을 겪으면서 조금씩 바뀌어 감을 보면 일종의 성장소설로 간주할 수 있다. 낭길리마로 가기 위해 오로지 카알만이 실행할 수 있는 최종 행동을 보라.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을 하는 참된 이유라고 하겠다.
형은 아무리 위험해도 반드시 해내야 되는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래?”
내가 다그쳤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와 다를 게 없으니까.” (P.71)
어떻게 내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나는 정말 그럴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해내지 못한다면 나는 하잘것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못난 쓰레기 이상의 그 무엇도 영영 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P.288-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