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의 토토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 프로메테우스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도모에 학원은 요즘 말로 대안학교이다. 토토처럼 일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대안 수업과 체험학습 위주의 학교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에 대안학교를 모색한 고바야시 선생님과 같은 분이 계셨다는 점은 전혀 의외다. 게다가 철저한 군국주의 체제에서. 한편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임에도 퇴학을 요구하는 점은 매우 비교육적인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다. 토토의 부모가 당시로서는 서구적으로 열린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토토의 장래는 암울해졌을 것이다.

 

도모에 학원에서 행복한 학교생활을 누리는 토토를 보면서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은 어떤 심정일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토토를 부러워할까 아니면 이상한 나라의 별세계를 바라보듯 무심하게 받아들일까.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우리 아이가 학교에 가는 걸 손꼽아 고대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의문이 들지만 도모에 학원이라면 가능하겠다 싶다.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부터 공부하면 되는 곳. 일과가 정상적으로 마무리되면 자연 산책이 날마다 가능한 곳,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으로 식사가 재밌어지는 곳, 스스로 음식을 만들고 농부가 일일교사로 직접 농사 수업을 가르치는 곳, 아이가 화장실 용변을 뒤엎어도 스스로 처리하게끔 하는 곳, 다리가 불편한 아이도 운동회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는 곳. 도모에 학원은 이런 곳이다. 이 학교를 운영하는 고바야시 교장의 교육관이기도 하다. 여기에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리드미크 수업은 확실히 시대를 앞서나간다.

 

리드미크는 이런 식으로 몸과 마음에 리듬을 이해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이것이 정신과 육체와의 조화를 도와, 이윽고 상상력을 깨우치고 창조력을 발달시키게 되었으면 하는 발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P.96)

 

도모에 학원이 초등학교니까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안학교가 필요하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그나마 수업 진도에 대한 요구가 상대적으로 덜할 테니. 중학교나 고등학교라면 상상도 할 수 없다. 아직까지 대안학교는 일반 학교의 낙오자들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일반적인 경로로는 대학진학을 도모하기 어려운 곳도 사실이다. 사회적 인식도 당사자 자신의 생각도 비슷하리라.

 

요즘 교육의 본질을 되짚어보는 일이 많다. 대학진학, 그것도 상위권 대학에 가는 게 삶의 목표가 되는 게 마땅한 건지. 정상적인 학교 수업이란 미명 하에 수행평가와 과제평가의 짊에 허덕이며 학교생활기록부에 안 좋은 내용이 기록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생활. 대학진학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자신의 진로를 발견하지 못한 아이에게 참다운 학창 생활의 방향은 무엇이 올바를까. 다수가 따라가는 길을 맹목적으로 좇아가도록 요구하는 게 사회와 부모의 바람직한 역할이 맞는지 등등. 그 과정에서 아이의 행복과 즐거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무조건 대학진학 이후로 넘기고 꾹꾹 참으라고 하는 게 타당한가.

 

토토는 지갑은 찾지 못했어도 만족스러웠다. 제 힘으로 이렇게까지 찾아보았으니까. 실은 그 만족스러움 속에는 교장선생님이 자기가 한 행동을 야단치기는커녕 신뢰해 주었으며, 또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었다는 충족감이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당시의 토토로서는 그렇게 어려운 내용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P.58)

 

토토를 비롯한 도모에 학원 출신 아이들이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그 시절을 잊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어린아이를 아이로 간주하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것을 아이들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깨닫는다. 그런 선생님과 학교를 사랑하고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모에 학원은 너무 일찍 핀 꽃이었다. 일찍 핀 꽃은 찬란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이런 아픔과 희생의 과정이 반복되어야 비로소 참된 봄이 다가오는 법이다. 아쉽게도 고바야시 선생님은 화재 이후 제2의 도모에 학원을 재건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학교 모델이라고 하겠으니 도모에 학원을 운영하는 교장으로서 노심초사가 컸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였으리라.

 

작가는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부족하나마 고바야시 선생님이란 존재, 그가 아이들을 얼마나 큰 사랑으로 대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P.230)

 

그렇다. 아이들이 더 큰 존재로 쑥쑥 커나가기 위해서는 곁에서 물을 주고 가꾸는 정성이 필요하다. 부모와 교사의 관심과 칭찬은 아이가 어떤 곤경에도 굴하지 않고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준다. 미혹과 갈등의 순간에도 올바른 방향을 놓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타를 제공해 준다. 도모에 학원의 다채로운 교육방식은 물론이지만, 토토가 무엇보다도 강하게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 사실, 인정과 존중이었다.

 

저로서는 <, 정말은 착한 아이>라고 끊임없이 말씀해 주셨던, 이 한 마디가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도모에 학원에 다니지 않았고, 고바야시 선생님도 못 만났더라면 저는 아마 무엇을 하든 못된 아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콤플렉스에 고뇌하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채 어른이 되었을 것입니다. (P.230)

 

나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볼 때 토토와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훗날 떠올려보면 뭐 특별하고 대단한 교육철학을 전개한 게 아님에도 아, 나를 믿어주시는구나 하는 그 느낌이 학교에 정을 붙이고 안착할 수 있던 계기였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0일간의 세계 일주 열린책들 세계문학 147
쥘 베른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명의 발달로 지금은 이야깃거리도 안 되는 소재다. 만 하루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읽는 내내 흥미로움과 박진감을 지속적으로 선사하니 역시 뛰어난 소설임이 틀림없다. 특히 구글맵으로 일행의 여정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면 흥미로움이 배가된다. 미국이야 작가가 방문했으니 그렇다 쳐도 인도의 지리적 정보는 순전히 문헌을 통해 획득했을 텐데 마치 현장에 가본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작가는 하필 영국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같은 프랑스사람을 하인으로 설정했을까? 역할에 맞는 그네들의 국민성을 감안하였음을 소설이 전개되면서 독자는 차츰 깨닫게 된다. 정확하고 침착하며 무감동한 포그와 즉흥적이며 감정에 치우치며 격정적인 파스파르투. 포그를 뒤쫓는 픽스 형사의 집요함 역시 포그와 본질에서 유사하다. 그는 자신의 직분에 철저하였을 따름이니까.

 

필리어스 포그는 수학적인 정확함이 몸에 밴 사람답게 절대 서두르지 않고 늘 준비된 상태며, 걸음이나 동작을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한 걸음도 불필요하게 내딛지 않았고 언제나 지름길로 다녔다. 천장을 보며 시선을 분산시키지도 않았고 불필요한 동작은 절대 보이지 않았다. 감동에 젖거나 동요된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9)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았고, 리폼 클럽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생겨도 놀라는 일이 없었다. 항해용 정밀 시계만큼이나 무감동한 사람이었다. (P.65)

 

포그의 성격 묘사는 칭찬보다는 비판조에 가깝다. 사람이지만 기계와 같다는. 오죽하면 파스파르투는 기계의 시중을 든다고 간주해버릴 정도다.

 

이 작품의 우선적 재미는 세계 일주를 통해서 포그 일행이 맞닥뜨리는 아슬아슬한 상황, 즉 기한을 지키기 어렵게 만드는 온갖 사건과 사고들을 헤치며 포그가 자신의 여정을 진행하는 상황 자체가 주는 긴박감이다. 자고로 모험이 흥미로우려면 독자가 잘 모르는 환경에 처해 있어야 한다. 작가는 유럽 통과는 간략히 지나가는 반면 인도 아대륙의 횡단과, 홍콩에서 상하이를 거쳐 요코하마에 이르는 항로, 북미대륙을 관통하는 모험에 상당한 노력과 분량을 아끼지 않는다. 집필 당시의 세계관에서 이곳이 아직은 덜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리라.

 

단순히 세계 일주 모험기에 그쳤다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잊히고 말았을 텐데, 이 소설에는 무엇보다 입체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여행의 경과에 따라 점차 발전하고 성숙한 면모를 보이는데 이것이 독자의 가슴을 제법 흐뭇하게 한다. 무뚝뚝하고 젠체하며 오만하게 비치는 포그는 진정한 신사임을, 아우다 부인의 탈출과, 인디언에 사로잡힌 하인을 구출하기 위해 위험과 재산과 생명을 주저함 없이 무릅쓰는 장면으로 여실히 보여 준다. 그것도 너무나 사소하여 마치 별일 아닌 간단한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 당신도 심장을 가진 남자로군요!프랜시스 크로마티 경이 말했다.

가끔은요.필리어스 포그가 간단히 대답했다. 시간이 있을 때 말입니다.(P.99)

 

살아 있다면,포그 씨가 덧붙였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결심하며, 필리어스 포그는 모든 것을 희생했다.

막 파산을 선고한 셈이었다. 하루만 늦어도 뉴욕에서 배를 탈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내기에 지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 의무다!>라는 생각 앞에서,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P.257)

 

이러한 그를 지켜보면서 아우다 부인의 마음은 그에게 쏠리게 된다.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동시에 과묵함 속에 따스한 인정을 품고 있는 포그의 참된 면모를 발견한 것이다. 파스파르투는 어떠한가? 포그의 하인인 그가 처음부터 포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포그의 시중을 들면서 같이 세계 일주를 하면서 그는 포그의 언행을 통해 그가 참된 인물임을, 재산에 앞서 사람을 중시하는 가치관의 소유자임을 깨닫고 진정으로 그를 존경하게 되는 단계를 독자는 차근차근 눈여겨보게 된다. 그래서 픽스 형사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파스파르투는 여자를 구하겠다는 주인의 생각에 흥분했다. 이렇게 얼음처럼 차가운 주인의 겉모습 아래에 있는 심장과 영혼을 느꼈다. 그러자 필리어스 포그에 대한 애정이 싹텄다. (P.100)

 

이 성실한 청년은 이제 주인을 무조건 신봉했다. 필리어스 포그의 정직함과 관대함과 헌신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다. (P.204)

 

이 모험소설의 다른 묘미는 풍자에 있다. 세계 각지에서 맞닥뜨린 문화와 풍습의 비합리적이고 반인륜적 측면을 직설적으로 때로는 시니컬하게 건드린다. 홍콩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아편 중독자들의 처참한 모습은 작가가 프랑스인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추레한 꼴에 얼이 빠지고 비쩍 마른 몸으로 아편을 빨고 있는 이들에게 돈벌이에 혈안이 된 영국 상인은 매년 천만 파운드도 넘는 죽음의 마약, 아편을 팔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성 중 가장 해로운 악덕을 이용한 서글픈 벌이였다. (P.156)

 

무법적인 난투극으로 이어진 거리의 정치 집회가 사실은 치안 판사를 뽑는 선거였다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당혹스러움이란! 물론 작중 묘사에는 작자 자신이 속한 문화의 근원적 한계도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르몬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막무가내의 폭력성 묘사가 이에 해당한다.

 

필리어스 포그 씨는 결과적으로 주어진 기한 내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다. 여행을 위해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소진하였지만, 반대급부로 비교할 수 없이 더 크고 소중한 존재를 얻었다. 자신을 영웅처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아내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훌륭한 하인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중학교 시절 읽은 후 정말 오랜만에 다시 펼친다. 그때 읽은 책은 범우사르비아문고인데, 책 표지가 오른쪽에 있고, 세로쓰기로 편집되어 있다. 옛 생각을 살려 서가를 뒤져보니 누렇게 변색한 책장에 세월의 간극을 느낄 수 있다. 놓아주어야 할 때가 너무 지난 모양이다.


당시 사춘기의 내게 충격이었던 점은 학업에 지친 주인공이 극단적 선택을 감행한다는 점이다. 작품에서는 한스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을 밝히지 않지만 삶에 지치고 목적을 상실한 그가 죽음을 간구하는 대목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영원히 쉬고, 잠들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낙담했고 비참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이 따끔거렸다. 기운이 없어서 도저히 일어나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어렴풋한 상념과 기억들, 수치심과 자책감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한스는 크게 신음하고 풀밭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P.212)

 

예나 지금이나 학업 스트레스는 줄지 않았다. 제아무리 학력 차별을 외치더라도 정작 수험생 처지에서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학업 이외 다른 진로를 선제적으로 모색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한스가 사는 도시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아이는 신학교와 대학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밟아야 소위 출세하게 된다. 학력의 혜택이 클수록 학력을 향한 경쟁은 치열하게 마련이며, 대다수 학생은 자신이 왜 공부하는지 질문조차 없이 공부 자체에 막무가내로 매진하게 마련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곧 낙오자, 패배자가 되는 것이므로.

 

신학교에서도 동급생들을 앞지르려면 더 야심차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동급생들을 앞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래야 할까? 그 이유는 한스 자신도 알지 못했다. (P.53)

 

좋아하던 낚시도 금지되고, 산책도 통제받으며, 토끼 기르기도 막힌 한스는 학교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한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한스의 눈에 성적도 우수하지 못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과 굳이 어울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사회적으로도 당연한 것으로 용인받는다. 신학교에서 나온 한스가 자신의 동네에서 친구를 찾을 수 없기에 낯섦과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스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신학교 시절의 유일한 친구인 하일너는 퇴학당한 후 연락이 끊어졌고 신학교와는 더는 볼일이 없다. 고향 도시에서도 학교 교장, 목사, 아버지 모두 그와 공감대가 없다. 소년 시절 내내 공부만 하던 허약한 한스가 기계공이 된다는 게 지난한 선택이라는 점을 소설은 보여 준다.

 

진퇴양난이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에마와 만남이다. 갑자기 눈부시게 아름답게 변모한 세계를 인식하는 한스를 바라보며, 풋내기 한스가 노련한 에마 앞에서 쩔쩔매는 순진한 모습을 보며 독자는 안타까움과 순수함의 양가의 감정을 동시에 갖게 된다. 에마와 잘 풀렸다면 이른바 사랑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할 수도 있었겠지만 에마는 떠나고 한스는 마지막 기대도 허물어진다.

 

작가는 전반부에서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한스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아름답고 세심한 자연묘사가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어 후반부의 자연과 유리된 한스와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활기찬 시기를 보내는 한스가 뼈마디가 앙상할 정도로 여위고 두통에 시달리며 창백한 낯빛을 지닌 채 허우적거리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하기조차 하다. 그의 모습은 광인 또는 좀비를 연상시킨다.

 

한스는 자신이 원해서, 공부가 너무나 좋아서 그런 길을 택한 것일까. 아니다, 그는 그저 부모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진실한 자신을 억누르려고 애쓴 딱한 아이일 뿐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평범한 소년이었기에 스스로 파멸의 길을 따른 것이다. 지적 탐구심을 올바르게 삶의 여유와 조화할 수 있었다면 한스도, 다른 이들도 결과적으로 나았을 텐데. 아니 그가 만약 하일너 같이 개성 강하거나 고집이 셌다면 이렇게 비극으로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하일너의 마지막 소식은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하일너는 떠났고, 소식이 끊어졌다. 하일너라는 인물과 그의 도주는 점차 이야기가 되었고 마침내 전설이 되었다. 훗날 이 열정적인 소년은 갖가지 어리석은 기행을 더 저지르고 더 방황한 끝에 삶의 고뇌를 엄격하게 다스려 위대한 영웅은 아니지만 어엿한 한 남자가 되었다. (P.137)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는 작가 헤르만 헤세의 분신이다. 작가 자신 소년 시절의 체험을 짙게 반영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하일너처럼 용케 질곡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가 조금만 더 소심하고 나약했더라면 한스의 길을 따르지 않았을 거라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아무도 소년의 여윈 얼굴에 나타난 당혹스러운 미소 뒤에 물에 빠져 가라앉는 영혼이 아파하고 있으며, 그 영혼이 두려움과 절망에 차 죽어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도 아버지와 몇몇 교사의 야만적인 공명심과 학교가 이 연약한 존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가장 위태로운 소년 시절에 왜 한스는 날마다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을까? 왜 그의 토끼를 빼앗고, 왜 라틴어 학교에서 동급생들을 일부러 멀리하게 만들고, 왜 낚시를 금지하고, 왜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왜 하찮고 소모적인 명예욕을 추구하겠다는 공허하고 세속적인 이상을 그에게 심어주었을까? 왜 시험이 끝나고 힘들게 얻은 방학 때조차 푹 쉬게 하지 않았을까?

무지막지하게 몰아댄 망아지는 길에 쓰러져 이제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P.141)

 

스러져 가는 한스를 향한 작가의 안타까운 심경과 사회를 향한 분노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절절하게 표현되고 있다. 또한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었음에도 한스에 대한 아픔이 내게 여전함은 내 아이의 처지가 과거의 나, 소설 속 한스와 별다른 차이가 없음에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들어오지 마시오 사계절 1318 문고 118
최나미 지음 / 사계절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교통사고로 엄마가 사망한 이후 석균이는 학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낸다. 아빠와의 대화도 꺼리며 낯선 이가 집안에 들어오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품으며 정상적 식사를 마다한 채 햄버거 등의 급체로 숨이 막히기 일쑤다. 작품 초반부에 독자가 석균에게 갖는 태도는 유보적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동정적 감정이다. 엄마와 사이가 돈독한 만큼 심적 충격도 컸을 테니까. 그럼에도 석균이의 반응이 지나치다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다.

 

이번에도, 너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P.65)

 

엉뚱한 할머니의 등장과 석균 가족과의 티격태격이 있지만 그래도 평이하게 전개되나 싶던 작품은 한 통의 소포 배달과 함께 요동친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엄마의 휴대폰과 함께 발견한 문자메시지 하나. 석균이는 이것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은 재빨리 망각하는 편리한 기제를 갖고 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심리적 자구책이라 할 수 있는데, 의식의 맨밑에 가라앉아 자신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다. 석균이가 6학년 시절의 사진 사건에 대해 처음에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태까지 독자는 석균이를 피해자로 인정하였는데, 이것이 한순간에 뒤바뀐다. 의도적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가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를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친구들과 피해자의 시선을 외면하고 오히려 그들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연락을 끊고 전화번호를 바꾸며 졸업앨범을 버리려 하고 초등학교 시절의 모든 것을 망각한 채 새출발하고자 하는 숨겨진 이유를 비로소 드러난다.

 

네가 의도하지 않았다는 거, 나는 믿어. 하지만 의도하지 않아도 엄연한 결과가 있고 피해를 본 사람이 있잖아. 무엇보다 넌 피해자가 아니고. 당사자는 그 일로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다른 사람은 절대 알 수가 없어.” (P.141)

 

독자는 인정한다. 석균이가 직접적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할머니도 석균이의 진심을 믿는다. 그는 단지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일까 추리한 결과의 의견을 말했을 뿐이다. 그는 지목당한 친구를 비난할 의도도 없었고 다른 아이들의 몰지각한 괴롭히는 행위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비난받는 당사자가 당당하게 항의하고 이의를 제기했다면 더 빨리 가라앉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석균이가 억울해 하는 이유도 납득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모순된 변명임을 그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다.

 

아들, 만약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 때문에 누군가 힘들어졌다면, 그런데 그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어?”

아빠가 기억에 없는 일이라고 자긴 책임 없대? 진짜 어이없다.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괜히 그러는 거야, 사과하기 싫으니까. 안 봐도 알겠다.” (P.160)

 

애초에 사진의 당사자가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났을 때 사과하였다면 사안은 이렇게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석균이의 엄마도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말은 쉽지만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수치심과 함께 무너진 자존감, 거기에 사죄 이후의 후속 처리에 따른 대가 등은 더더욱 사과를 망설이게 만든다. 어른도 그러할진대 아이들에게 마냥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법.

 

이제 지난 1년간 석균이의 생활을 되돌아 볼 때, 석균이의 은거가 단순히 엄마의 사망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의구심이 든다. 이미 세상과 절연하려는 퇴행적 성향을 지닌 석균에게 엄마의 죽음은 기폭제 역할을 한 게 아니었을까. 스스로 구축한 굴 속에 틀어박힌채 아무도 참된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위장 전술을 사용하는 것. 그래서 도우미 아주머니는 물론 고모조차도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 물론 이 모든 행위가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겠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았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한다.

 

잘 생각해라, 피한다고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거 아니다. 아예 시작을 하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이 상태로 두고 떠나는 건 도망가는 거나 다름없어. 그런 곳이 낙원일 리도 없고.” (P.153-154)

 

석균의 용기는 친구 가람이와, 무엇보다 유사한 아픔을 겪은 할머니의 도움이 크다. 아빠의 진심어린 고백의 영향도 있다. 당장 모든 상처가 아물 수 없다. 언젠가 상처가 낫더라도 흉터자국을 없애버리지도 못한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할 용기를 냈다는 것, 용서와 화해를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적어도 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고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품을 수 있기에. 할머니의 말처럼 회피한다고 해서 있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방법으로든 싸워야 하며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 그들이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경험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페스트와 싸우는 것이었다. (P.159)

 

광포한 위력의 페스트에 굴복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목숨을 내걸며 일선에서 싸우는 사람들-리외, 타루, 그랑 등-의 투쟁기록이라고 하면 대체로 차원을 달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게 마련이다. 나 같은 범인(凡人)으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영웅 말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리외는 시종일관 이러한 선입견을 거부한다. 랑베르와의 대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뭔가요?” 랑베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를 예로 들면, 성실성은 내 직분을 완수하는 거예요.” (P.194)

 

코로나19 환경에 처한 우리네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페스트>는 더는 소설 속 가공의 상황이 아니다. 폐쇄된 오랑 시의 시민들은 자의든 타의든 격리 생활을 겪는 지금의 우리와 판박이다. 통제할 수 없는 질병의 노도에 우왕좌왕하는 시민들과 정부 모습도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온다. 병실 부족 현상도, 비록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타국에서의 사망자 속출에 따른 시신 방치 및 폐기 등도 소설과 마찬가지다. 압도적인 질병에 좌절하거나 현실을 회피하든지 하는 개개인의 반응도.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와 생이별을 겪고 끝내 재회하지 못하는 아픔과 슬픔을 우리는 많이 겪지 않았던가.

 

완벽할 정도로 갑작스러운데다 언제 끝날지 예견할 수도 없는 그 이별에 망연자실한 채, 우리는 그토록 가까이 있었는데 어느새 그토록 멀어진 존재, 그리고 이제 우리의 삶 하루하루를 다 차지해버린 존재에 대한 추억에 저항하지 못했다. 사실 우리는 이중의 고통-우리 자신의 고통 그리고 집에 없는 사람들, 즉 자식, 아내 또는 연인이 겪는 고통을 상상 속에서 함께 겪고 있었다. (P.89)

 

카뮈의 실존주의 문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이 작품에서다. <이방인>이 개인과 세상의 괴리를 인식한 순간의 묘사라면, <페스트>는 깨달은 인식을 통해 개인과 세상을 합일시키고자 하는 행동의 장면이다. 소외된 두 세계를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쉽사리 성과를 거둘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좌절하지 말 것, 그리고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직분으로서 성실하게 수행할 뿐이라는 것. 작가가 여기서 보여주는 작중 인물들-리외를 제외하더라도-의 면면이 그러하다.

 

리외는 그랑을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한다. 독자가 보는 그랑은 나약한 소시민, 늙은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문장 한 줄을 완성하지 못해 쩔쩔매는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다. 페스트와의 투쟁에서도 그는 통계를 정리하는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그럼에도 리외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세간에서 굳이 영웅을 찾고 싶다면 말이다.

 

그렇다, 영웅이라고 부를 만한 예나 모델이 제시되기를 정 원한다면,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 그런 영웅이 한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서술자는 이 영웅, 보잘것없고 눈에 띄지도 않으며,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언뜻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이상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이 영웅을 제시하고자 한다. (P.164)

 

우연히 오랑에 갇혀버린 랑베르는 탈출에 필사적이다. 그는 오랑 시민도 아니므로 이곳에 갇혀서 남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 이유가 없다. 지긋지긋한 오랑을 벗어나 사랑하는 아내와 하루빨리 재회하고픈 심정은 누구라도 다를 바 없다. 리외도 그런 랑베르를 비난하지 않으며 잘 되기를 개인적으로 바란다. 여러 차례 탈출 시도가 어긋나는 동안 열병의 전파와 리외를 비롯하여 그것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랑베르가 내적 갈등을 겪는 것도 일면 타당하다. 페스트는 인간이 정한 경계를 지킬 의향이 추호도 없을 테니. 나와 그들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독자는 투쟁에 참여하는 두 명의 이념주의자를 확인할 수 있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 초기만 해도 전형적인 종교인의 태도를 견지한다. 이러한 시련 자체도 신의 뜻이니 반성하고 감수하라는. 그의 초기 강론은 이렇게 영적 의지로 충만해 있다. 신부는 실험 대상이 되어 혈청 주사를 맞고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아이의 처절한 몸부림을 지켜보면서 다시는 추상의 세계에 머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적나라한 현실은 이념의 틀을 거부한다. 그가 리외 일행에 동참하고 신앙에 변화가 생기게 됨은 진정한 종교인이기에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넷플릭스의 <지옥>에서 갓난아기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사도를 보며 대중들이 비로소 의구심을 품게 되는 장면이 떠오른다. 따라서 파늘루 신부가 전염병에 걸려 죽음을 맞는 것은 필연이다.

 

타루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전염병의 의미와 사람들의 행동의 깊숙한 충동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으로서 리외와 유일하게 우정을 교감할 수 있는 인물이다. 현실의 부조리함을 견딜 수 없는 그는 낯선 고장 오랑에서 페스트와 맞닥뜨리며 비로소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그와 리외는 동일한 것을 추구한다.

 

(타루)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면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평화를 기대할 수는 있겠죠. 인간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비록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선까지 행할 수 있으니까요. (P.294)

 

이 소설 속 많은 사건은 그의 기록에 의존하며 보건대 활동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그의 비중을 알 수 있으며, 그의 죽음이 리외에게 갖는 충격과 아픔의 심대함은 절절하기 이를 데 없어 리외는 자신이 페스트에 패배했다고 느낄 정도였다.

 

지금 그의 친구를 에워싸고 있는 침묵은 너무나 깊고 페스트에서 해방된 도시와 거리의 침묵과 너무나 긴밀하게 일치해서, 리외는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패배, 전쟁을 끝내지만 평화 자체를 치유할 수 없는 고통으로 만들어버리는 패배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P.338)

 

역사상의 무수한 파괴적 질병과 마찬가지로 오랑의 페스트도 인간세계의 완전한 절멸에는 실패한다. 계절이 바뀌고 어느덧 정체 상태에 이르다가 급작스럽게 소멸하고 만다. 페스트의 쇠퇴에 리외와 보건대를 비롯한 사람들의 기여도를 어느 정도인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페스트는 인간과는 무관하게 스스로의 존재 의지에 따라 등장과 퇴장을 결정하는지도 모르겠다.

 

봉쇄가 풀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헤어졌다가 재회한 가족, 연인, 부부들 모두는 기쁨의 웃음과 눈물을 흘린다. 극도의 고생이 가져다준 안도감과 행복감은 비교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페스트에 걸렸으나 운 좋게 살아남은 그랑도 마찬가지다. 어두운 과거는 훌훌 털어버리고 밝고 행복한 나날만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공통적이다. 페스트의 악몽은 잊어버리고 기억할 필요조차 없이.

 

물론 예외적인 사람도 있으니 코타르가 그러하다. 그는 페스트 상황 속에서 역설적으로 삶의 편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비정상과 혼란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감출 수 있었던 것이다. 페스트의 발달과 함께 그의 삶의 만족도도 높아졌고 열병의 소멸과 더불어 그의 공포와 광기도 극에 달하였다. 타루는 그가 페스트의 공범이라고 기록하였으며, 죽음에 대한 동의야말로 그의 진정한 죄악이라고 평한다.

 

그렇다. 페스트는 죄악이다. 평범한 도시에서 죄악은 그늘 속에 항상 드리워져 있다. 어떤 계기로 그것이 존재를 드러내기 전까지 사람들은 죄악의 정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리외를 포함한 일군의 사람들이 위대한 것은 그들이 죄악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데 있다. 비록 그것의 성패를 확신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카뮈가 생뚱맞은 이 작품을 발표한 해가 1947년이다. 그 시절에 페스트가 발병한 사례도 없는데 그는 왜 잊혀버린 치명적 전염병을 제재로 들고나왔을까? 작품 해설에서처럼 나치주의에 반대하는 유럽 레지스탕스의 투쟁”(P.365)은 빈말이 아니었으리라. 그의 눈에 나치즘은 페스트 못지않은 광기와 죄악으로 비쳤을 테니까.

 

타루는 페스트가 도시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으며, 시민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려는 욕망이 강할 거라고 말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을 테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모든 것을 잊을 수는 없으며, 적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페스트는 흔적을 남길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P.326)

 

히틀러가 자살하고 나치 독일이 패망한 것처럼 페스트가 소멸하였다고 해서 모든 죄악이 사라지고 세계가 정화되었다고 믿는다면 순진하리라. 나치에 동참한 사람들, 나치를 겪은 사람들, 나치에 희생된 사람들. 그들에게 세상에는 이제는 순수한 기쁨과 행복은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과거의 악몽을 지우고자 해도 기억과 인식은 의식 밑바닥 깊은 곳에 숨어서 떠오를 때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것이다. 세상도 여전히 변함없이 바쁘게 돌아갈 것이다. 수천 년간 인간이 반복해 온 삶의 패턴이다. 제아무리 무심하고 반성과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비난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모든 걸 기억하고 모든 걸 의식 속에 항상 담아둔다면 사람은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에.

 

코타르도, 타루도, 리외가 사랑했고 잃어버린 남자들과 여자들도, 죽은 자들도, 범죄자들도 모두 기억나지 않았다. 노인의 말이 옳았다. 인간들은 언제나 똑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인간의 힘이자 순수함이었다. 리외가 모든 고통을 넘어 그들과 다시 만난다고 느낀 지점도 바로 여기였다. (P.360)

 

다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리외가 마지막 대목에서 상기하듯이 페스트는 결코 소멸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병균이 어딘가에 숨어서 재기를 노리듯이 겉보기에 세상에 죄악이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나치즘과 같은 죄악의 병균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마냥 순수하고 천진하게 환희에 빠져들 수 없는 까닭이다.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가 정점에서 서서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정부에서도 방역단계를 차츰 완화하고 있다. 강력한 신규변종이 발생하지 않는 한 코로나19 팬데믹도 머지않은 시기에 종결을 선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사스, 메르스 등 근년 들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유행병은 치명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페스트보다 약하지만 전염성의 기준에서는 그것에 못지않다. 결국 질병은 인간과 사회에 끊임없이 도전장을 보낼 것이며 관건은 그에 대한 우리들의 대응이 될 것임을 이 소설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