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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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법으로든 싸워야 하며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 그들이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경험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페스트와 싸우는 것이었다. (P.159)

 

광포한 위력의 페스트에 굴복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목숨을 내걸며 일선에서 싸우는 사람들-리외, 타루, 그랑 등-의 투쟁기록이라고 하면 대체로 차원을 달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게 마련이다. 나 같은 범인(凡人)으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영웅 말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리외는 시종일관 이러한 선입견을 거부한다. 랑베르와의 대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뭔가요?” 랑베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를 예로 들면, 성실성은 내 직분을 완수하는 거예요.” (P.194)

 

코로나19 환경에 처한 우리네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페스트>는 더는 소설 속 가공의 상황이 아니다. 폐쇄된 오랑 시의 시민들은 자의든 타의든 격리 생활을 겪는 지금의 우리와 판박이다. 통제할 수 없는 질병의 노도에 우왕좌왕하는 시민들과 정부 모습도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온다. 병실 부족 현상도, 비록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타국에서의 사망자 속출에 따른 시신 방치 및 폐기 등도 소설과 마찬가지다. 압도적인 질병에 좌절하거나 현실을 회피하든지 하는 개개인의 반응도.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와 생이별을 겪고 끝내 재회하지 못하는 아픔과 슬픔을 우리는 많이 겪지 않았던가.

 

완벽할 정도로 갑작스러운데다 언제 끝날지 예견할 수도 없는 그 이별에 망연자실한 채, 우리는 그토록 가까이 있었는데 어느새 그토록 멀어진 존재, 그리고 이제 우리의 삶 하루하루를 다 차지해버린 존재에 대한 추억에 저항하지 못했다. 사실 우리는 이중의 고통-우리 자신의 고통 그리고 집에 없는 사람들, 즉 자식, 아내 또는 연인이 겪는 고통을 상상 속에서 함께 겪고 있었다. (P.89)

 

카뮈의 실존주의 문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이 작품에서다. <이방인>이 개인과 세상의 괴리를 인식한 순간의 묘사라면, <페스트>는 깨달은 인식을 통해 개인과 세상을 합일시키고자 하는 행동의 장면이다. 소외된 두 세계를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쉽사리 성과를 거둘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좌절하지 말 것, 그리고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직분으로서 성실하게 수행할 뿐이라는 것. 작가가 여기서 보여주는 작중 인물들-리외를 제외하더라도-의 면면이 그러하다.

 

리외는 그랑을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한다. 독자가 보는 그랑은 나약한 소시민, 늙은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문장 한 줄을 완성하지 못해 쩔쩔매는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다. 페스트와의 투쟁에서도 그는 통계를 정리하는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그럼에도 리외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세간에서 굳이 영웅을 찾고 싶다면 말이다.

 

그렇다, 영웅이라고 부를 만한 예나 모델이 제시되기를 정 원한다면,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 그런 영웅이 한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서술자는 이 영웅, 보잘것없고 눈에 띄지도 않으며,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언뜻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이상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이 영웅을 제시하고자 한다. (P.164)

 

우연히 오랑에 갇혀버린 랑베르는 탈출에 필사적이다. 그는 오랑 시민도 아니므로 이곳에 갇혀서 남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 이유가 없다. 지긋지긋한 오랑을 벗어나 사랑하는 아내와 하루빨리 재회하고픈 심정은 누구라도 다를 바 없다. 리외도 그런 랑베르를 비난하지 않으며 잘 되기를 개인적으로 바란다. 여러 차례 탈출 시도가 어긋나는 동안 열병의 전파와 리외를 비롯하여 그것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랑베르가 내적 갈등을 겪는 것도 일면 타당하다. 페스트는 인간이 정한 경계를 지킬 의향이 추호도 없을 테니. 나와 그들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독자는 투쟁에 참여하는 두 명의 이념주의자를 확인할 수 있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 초기만 해도 전형적인 종교인의 태도를 견지한다. 이러한 시련 자체도 신의 뜻이니 반성하고 감수하라는. 그의 초기 강론은 이렇게 영적 의지로 충만해 있다. 신부는 실험 대상이 되어 혈청 주사를 맞고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아이의 처절한 몸부림을 지켜보면서 다시는 추상의 세계에 머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적나라한 현실은 이념의 틀을 거부한다. 그가 리외 일행에 동참하고 신앙에 변화가 생기게 됨은 진정한 종교인이기에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넷플릭스의 <지옥>에서 갓난아기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사도를 보며 대중들이 비로소 의구심을 품게 되는 장면이 떠오른다. 따라서 파늘루 신부가 전염병에 걸려 죽음을 맞는 것은 필연이다.

 

타루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전염병의 의미와 사람들의 행동의 깊숙한 충동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으로서 리외와 유일하게 우정을 교감할 수 있는 인물이다. 현실의 부조리함을 견딜 수 없는 그는 낯선 고장 오랑에서 페스트와 맞닥뜨리며 비로소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그와 리외는 동일한 것을 추구한다.

 

(타루)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면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평화를 기대할 수는 있겠죠. 인간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비록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선까지 행할 수 있으니까요. (P.294)

 

이 소설 속 많은 사건은 그의 기록에 의존하며 보건대 활동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그의 비중을 알 수 있으며, 그의 죽음이 리외에게 갖는 충격과 아픔의 심대함은 절절하기 이를 데 없어 리외는 자신이 페스트에 패배했다고 느낄 정도였다.

 

지금 그의 친구를 에워싸고 있는 침묵은 너무나 깊고 페스트에서 해방된 도시와 거리의 침묵과 너무나 긴밀하게 일치해서, 리외는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패배, 전쟁을 끝내지만 평화 자체를 치유할 수 없는 고통으로 만들어버리는 패배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P.338)

 

역사상의 무수한 파괴적 질병과 마찬가지로 오랑의 페스트도 인간세계의 완전한 절멸에는 실패한다. 계절이 바뀌고 어느덧 정체 상태에 이르다가 급작스럽게 소멸하고 만다. 페스트의 쇠퇴에 리외와 보건대를 비롯한 사람들의 기여도를 어느 정도인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페스트는 인간과는 무관하게 스스로의 존재 의지에 따라 등장과 퇴장을 결정하는지도 모르겠다.

 

봉쇄가 풀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헤어졌다가 재회한 가족, 연인, 부부들 모두는 기쁨의 웃음과 눈물을 흘린다. 극도의 고생이 가져다준 안도감과 행복감은 비교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페스트에 걸렸으나 운 좋게 살아남은 그랑도 마찬가지다. 어두운 과거는 훌훌 털어버리고 밝고 행복한 나날만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공통적이다. 페스트의 악몽은 잊어버리고 기억할 필요조차 없이.

 

물론 예외적인 사람도 있으니 코타르가 그러하다. 그는 페스트 상황 속에서 역설적으로 삶의 편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비정상과 혼란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감출 수 있었던 것이다. 페스트의 발달과 함께 그의 삶의 만족도도 높아졌고 열병의 소멸과 더불어 그의 공포와 광기도 극에 달하였다. 타루는 그가 페스트의 공범이라고 기록하였으며, 죽음에 대한 동의야말로 그의 진정한 죄악이라고 평한다.

 

그렇다. 페스트는 죄악이다. 평범한 도시에서 죄악은 그늘 속에 항상 드리워져 있다. 어떤 계기로 그것이 존재를 드러내기 전까지 사람들은 죄악의 정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리외를 포함한 일군의 사람들이 위대한 것은 그들이 죄악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데 있다. 비록 그것의 성패를 확신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카뮈가 생뚱맞은 이 작품을 발표한 해가 1947년이다. 그 시절에 페스트가 발병한 사례도 없는데 그는 왜 잊혀버린 치명적 전염병을 제재로 들고나왔을까? 작품 해설에서처럼 나치주의에 반대하는 유럽 레지스탕스의 투쟁”(P.365)은 빈말이 아니었으리라. 그의 눈에 나치즘은 페스트 못지않은 광기와 죄악으로 비쳤을 테니까.

 

타루는 페스트가 도시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으며, 시민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려는 욕망이 강할 거라고 말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을 테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모든 것을 잊을 수는 없으며, 적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페스트는 흔적을 남길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P.326)

 

히틀러가 자살하고 나치 독일이 패망한 것처럼 페스트가 소멸하였다고 해서 모든 죄악이 사라지고 세계가 정화되었다고 믿는다면 순진하리라. 나치에 동참한 사람들, 나치를 겪은 사람들, 나치에 희생된 사람들. 그들에게 세상에는 이제는 순수한 기쁨과 행복은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과거의 악몽을 지우고자 해도 기억과 인식은 의식 밑바닥 깊은 곳에 숨어서 떠오를 때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것이다. 세상도 여전히 변함없이 바쁘게 돌아갈 것이다. 수천 년간 인간이 반복해 온 삶의 패턴이다. 제아무리 무심하고 반성과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비난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모든 걸 기억하고 모든 걸 의식 속에 항상 담아둔다면 사람은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에.

 

코타르도, 타루도, 리외가 사랑했고 잃어버린 남자들과 여자들도, 죽은 자들도, 범죄자들도 모두 기억나지 않았다. 노인의 말이 옳았다. 인간들은 언제나 똑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인간의 힘이자 순수함이었다. 리외가 모든 고통을 넘어 그들과 다시 만난다고 느낀 지점도 바로 여기였다. (P.360)

 

다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리외가 마지막 대목에서 상기하듯이 페스트는 결코 소멸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병균이 어딘가에 숨어서 재기를 노리듯이 겉보기에 세상에 죄악이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나치즘과 같은 죄악의 병균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마냥 순수하고 천진하게 환희에 빠져들 수 없는 까닭이다.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가 정점에서 서서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정부에서도 방역단계를 차츰 완화하고 있다. 강력한 신규변종이 발생하지 않는 한 코로나19 팬데믹도 머지않은 시기에 종결을 선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사스, 메르스 등 근년 들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유행병은 치명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페스트보다 약하지만 전염성의 기준에서는 그것에 못지않다. 결국 질병은 인간과 사회에 끊임없이 도전장을 보낼 것이며 관건은 그에 대한 우리들의 대응이 될 것임을 이 소설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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