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시저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셰익스피어 전집 1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박우수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브루투스 일파에 의한 시저의 암살은 (의도와는 정반대로) 로마 제정의 서막을 연 중대한 사건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사건을 셰익스피어의 글자 그대로 힘차고 극적이며 웅변적인 대사를 통해 생생한 현장감을 얻는 느낌은 색다르다. 연극 무대에서 실제 공연을 봤다면 감동은 배가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시저는 표제와는 달리 주변적 인물이다. 시저의 존재감은 자신보다는 주변의 말과 평에 의해 두드러진다. 그의 행동과 대사로 판단하는 시저는 오만함과 고결함, 그리고 자신감이 한데 어우러진 인물이고, 작가 자신도 그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4막에서 그의 유령이 나타나고 브루투스가 그의 혼령을 의식하고 있음을 통해 억울한 죽임을 당한 고결한 위인으로서 시저를 바라본다.

 

시저를 살해한 두 주인공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처남 매부 사이인 그들의 시저 살해는 상당히 다른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이 드러난다. 브루투스는 시저를 사랑하고 시저도 그를 아끼는, 즉 그의 행위에 있어 사적인 감정은 개입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오직 로마 시민과 인민들을 위해, 로마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시저를 칼로 찌른 것이다. 로마가 다시 군주정으로 퇴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

 

(브루투스) 내가 시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시저가 죽어서 자유 시민으로 살기보다 시저가 살아서 노예로 죽는 편을 탁하시겠습니까? (P.99, 32)

 

카시우스는 어떤가? 시저 살해의 주범은 바로 그다. 그는 동지들을 포섭하고 브루투스를 한패로 끌어들이는데, 시저에 대한 그의 반감은 개인적 측면이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 자신이 보기에는 자기와 별 차이가 없는 그가 신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왕으로 추대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시저의 눈 밖에 난 처지다.

 

브루투스를 교묘하게 꼬드겨 시저 살해의 실리와 명분을 얻고자 하는 그 의도의 비순수성은 극 중에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시저가 폭군이 되어 로마인들을 도탄에 빠뜨릴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지나친 비약을 담고 있음에도 군주제를 반대하는 브루투스의 내심을 크게 흔들리게 만든다.

 

브루투스가 시저를 죽여야만 한다고 다짐하는 장면에서 그의 논법도 가정과 비약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진정으로 왕이 되고자 하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시저는 이미 죽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브루투스) 지금으로서는 / 시저에 대한 불만의 원인을 찾을 수 없으니 / 이렇게 생각해보자. 지금의 시저가 힘이 / 더 강해지면 이러이러한 전제군주의 권력을 / 행사할 것이다. 그러니 그를 독사의 알로 / 간주하자. 그 알이 깨어나면 본성대로 / 위험해질 것이니 미리 알일 때 죽이자. (P.50, 21)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의 차이점은 시저 사후 카시우스의 언행을 통해 분명해지는데, 4막에서 카시우스의 관직 매매 행위를 둘러싼 정당성 여부에 대한 양자 간의 언쟁이 길게 이어져 독자에게 확실히 인식하게끔 한다. 시저가 죽었으므로 카시우스는 자신의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브루투스는 한치의 흠결이라도 허용한다면 간신히 확보한 자신들의 행위 정당성을 흔들릴 것을 우려한다.

 

브루투스 일파는 시저 죽음 이후를 대비하지 못하였다. 시저가 죽고 나면 만사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품은 데 그쳤을 뿐이다. 안토니[안토니우스]의 역량을 오판한 대가는 참혹하였으니, 두 사람의 유명한 연설은 안토니가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이 출중함을 보여준다. 브루투스는 대중의 이성에 호소한 반면, 안토니는 그들의 감정에 호소하였다.

 

(안토니) 시저는 로마로 수많은 포로들을 데려왔고 / 그 보석금으로 국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 이것이 시저의 야심이었습니까? / 가난한 사람들이 울 때 시저도 울었습니다. / 야심가는 더 모진 사람이어야지요. / 그러나 브루투스는 시저가 야심가였다고 합니다. / 그런데 브루투스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P.103, 2)

 

공화제를 지키려는 브루투스 일파의 시도는 시저 살해를 계기로 오히려 세력을 잃고 말게 되었다. 안토니와 옥타비우스는 이를 반시저파를 제거하는 명분으로 삼아 철저하게 궤멸시켰고, 양자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이가 결국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셰익스피어 당대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리는 군주제 시절이므로 시저와 브루투스는 먼 옛날의 한 일화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셰익스피어는 군주제와 공화제의 대립, 시민의 자유를 향한 브루투스의 고고한 외침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의 사후 30년도 지나지 않아 청교도 혁명이 발발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심히 넘기기는 곤란하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군주제와 공화제에 대한 명시적 견해 표명을 하지 않는다. 그의 펜으로 묘사된 시저와 브루투스는 양자 모두 위대하고 고결한 인물이다. 시저는 왕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고, 왕이 되더라도 브루투스의 추측대로 폭군이 또는 폭군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다만 작가는 고상한 의도를 품은 한 인물이 사적인 친분 관계를 뛰어넘어 보다 고결한 목적을 위해 희생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비록 브루투스는 역사의 패자가 되었지만, 카시우스와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이 작품의 표제는 줄리어스 시저이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브루투스이기에 마지막 대목에서 안토니의 대사는 그를 향한 작가 자신의 평가나 다름없다.

 

(안토니) 브루투스는 로마인들 중에서 가장 고결한 인물이었소. / 그를 제외한 모든 음모론자들은 위대한 시저를 / 시기해서 살인에 가담한 자들이오. / 오직 브루투스만이 로마 시민들의 복지와 / 사심 없는 명예심에서 음모에 가담했소. (P.166, 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단의 집 창비청소년문학 34
윌리엄 슬레이터 지음, 최세진 옮김 / 창비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방이 막혀 있고 오로지 계단만 존재하는 공간. 크기도 위치도 확인할 수 없으며, 인공조명에 의해 밝혀져 시간조차도 알 수 없는 곳. 영문도 모른 채 그곳에 끌려온 아이들은 보편적 인간 성격과 행동 유형의 전형적 인물형이다. 그곳의 환경과 방식에 적응하고 대응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뚜렷한 차별성을 드러낸다.

 

독자는 소설 내내 그리고 끝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궁금해하게 된다. 원체 독립심 강하고 반항주의자인 롤라야 그렇다 하더라도 제일 소심하고 약골인 피터가 아닌 나머지 아이들이 기계의 조작에 길들여지는 까닭을. 유쾌한 올리버는 깊은 생각이 없으며 지배욕이 강하고, 블라썸은 음식을 중시하는 물욕주의자인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들의 험담과 이간질도 서슴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 권장되는 인물형이다. 상냥한 애비게일이 제일 안타까운데, 그녀는 기계의 작동 원리를 언뜻 예감하였지만 더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진실을 마주 대하는 두려움과 용기 부족. 이것은 전형적인 현대 사회의 대다수 소시민의 모습이리라. 결국 이런 것들이 그들의 타락을 가져왔다.

 

그녀는 직전에 느꼈던 소름 끼치는 예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동안 답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애비게일은 돌연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게 무서워졌다. 그녀는 춤추는 일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춤추고, 또 춤추고, 먹고, 잊어버렸다. (P.144)

 

가장 소심하고 나약한 피터의 반전은 놀랍다. 롤라의 의견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유혹에 빠지려고 하는 롤라를 오히려 올바로 이끄는 인내와 단호함. 끝내는 롤라를 저버릴 수 없어 기계와의 싸움에서 기꺼이 패배를 감수하려는 용기를 보여준다. 굶주림으로 육체가 약해질수록 그의 내면은 더욱 강건하게 성장하였음을 우리는 에필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책이라고?”

올리버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왜 책을 봐? 너무 느리잖아. 게다가 대부분 프로그램화도 안 돼 있고 말이야.” (P.115)

 

그의 반전의 근원은 바로 남들과 달리 그가 책을 본다는 사실에 있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당대가 아닌 알지 못할 미래를 설정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시대가 더는 책의 가치를 중시하지 않음을 피터의 말에 대한 올리버와 애비게일의 반응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프로그램 화면과 실시간 홀로그램의 효율성과 편안함에 비할 때 독서는 느리고 고통스러운 노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독서를 통해 스스로 상상하며 주체적 사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그와 다른 아이들의 차이점이다. 다른 아이들은 소리와 불빛의 메시지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음식을 얻기 위해 변덕스러운 기계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수렁에 빠지듯이 그들은 서서히 기계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감옥에 있는 거야, 알겠니? 감옥, 이건 그냥 평범한 감옥도 아냐. 고문실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고문실. 하지만 우리 몸을 고문하는 건 아냐. 팔다리를 뽑는다는가 벌겋게 달군 칼을 손톱 밑에 쑤셔 넣는 것처럼 간단하고 직접적인 게 아니라고. 절대 아니지, 이건 더 지독해. 우리를 미치게 하려는 거야. 알겠니?” (롤라, P.70)

 

그곳의 본질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롤라다. 피터도 롤라의 생각에 동의한다. 기계가 하라는 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과 가치를 포기하고 욕망에 굴복하는 동물로 전락하는 것임을 두 아이는 알아차린다. 다른 아이들은 하지만 욕망의 노예가 되기를 선택한다. 눈앞의 배고픔과 두려움을 거부할 용기와 판단이 결핍된 탓이다. 롤라의 너무나도 명료한 설명에도 그들은 자신들만의 껍질 속에 틀어박힌다.

 

그래서 피터와 난...... 우리는 기계를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어. 이건 피터의 생각이기도 해. 우리가 모두 함께 기계에 맞서 싸우면, 그들도 우리를 조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그들은 포기하고 우리는 승자가 되는 거지. 하지만 누구라도, 단 한 명이라도 그들 편에 서서 기계를 따른다면 그들은 우리 모두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할 거야. 그러면 우리가 가진 기회는 거의 사라지겠지. 그러니까 제발 함께 맞서 싸우자.” (롤라, P.173)

 

이 모든 게 거대한 실험이었음이 에필로그에서 드러난다. 로런스 박사는 행동의 조건화 이론을 토대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최고지도자가 원하는 유형의 인간을 양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밝힌다. “언뜻 부당하거나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어떤 명령에든...... 의심 없이 따를 수 있는”(P.239) 인간이라! 명령에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군대라든지 일체의 독자적 사고기능이 없는 기계를 연상하게 된다. 그것은 히틀러의 나치가 제3 제국 신민들에게 요구한 가치관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다수의 보통의, 평범한 독일 국민들이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거부함 없이 따랐던 것이다.

 

로런스 박사는 고아원 출신 아이들만을 실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혹시 모를 사회적 저항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박사의 실험은 부분적으로 실패하였지만 - 롤라와 피터는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더 나은 곳으로”(P.244) 떠난다. - 세 명의 아이들은 신호등 불빛에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을 보인다.

 

이 소설은 스키너와 밀그램의 심리학 이론에 근거를 두고 씌어졌다.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불합리한 제도와 명령에 기꺼이 순응하는 인간 행동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심리학 이론의 소설화다. 체제에 무조건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은 정치권력자로서 흐뭇한 유형이다. 전체주의 체제 또는 독재정치라면 더더욱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나치와 파시스트가 권력의 강제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을 열렬히 지지하고 헌신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그들의 권력 기반을 탄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혁명이나 쿠데타가 아닌 민주적 선거 수단으로 권력을 쟁취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사회의 부당한 지배 가치에 대항하여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반대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전체주의 체제는 계속해서 순응적 인간을 길러내고자 할 것이다. 인간 본성의 약점을 노리는 로런스 박사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작가는 소설 속에서 분명히 알리고 있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작 영화에 바탕을 두고 소설화한 작품이다. 이 경우든지 또는 반대의 경우든지 성공한 원작의 유명세가 개작의 성공을 담보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장르에는 각기 고유한 예술 미학이 있기 마련이므로 원작의 오리지낼리티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개작의 독자성을 확립할 것인가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 국한하여 평한다면, 원작을 관람하지 못한 나로서는 소설에서도 나름의 감동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궁벽한 탄광촌, 가난한 살림살이,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편부 가정, ‘상류층의 계집애나 하는발레에 관심과 재능을 보이는 아들, 편견과 반대를 극복하고 발레단의 주연 남자무용수가 되는 아들. 줄거리의 요점을 대강 짚으면 이렇다, 매우 진부하면서도 감동을 심어주는 설정이자 구성이다.

 

자칫 상투적이기 쉬운 이 작품에 다른 읽을거리를 부여한 점은 탄광의 파업이다. 소위 영국병을 치료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접근방식을 도입한 대처 총리가 강경하게 밀어붙인 곳이 탄광이다. 자본과 효율성의 논리로 보자면 당연한 조치라고 하겠고, 그것이 당대 및 후대에 좋은 평가를 얻었다는 점도 원리적으로 보면 마땅하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히 수익성과 효율성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사양산업이지만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생계가 달려있으므로 그들에게는 생사가 달린 절박하고 절실한 사안인 것이다.

 

법은 무기지만, 우리를 위한 무기가 아니다. 법이 언제 우리 노동자 편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변호사, 판사, 경찰 간부들. 그들은 대개 자본가 편에 선 작자들이 아니던가. (재키, P.79)

 

소설 곳곳에는 정부와 경찰에 대한 비판과 경멸에 가까운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작품의 주인공 가족이 상대적 약자인 광부이므로 그들의 시각에서 파업을 저지하고 노조를 탄압하는 정부를 좋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정부 조치를 실제로 현장에서 실행하는 경찰도 마찬가지다. 굶느냐 마느냐, 추위에 덜덜 떠느냐 마느냐, 나아가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투쟁의 현장에서 생계유지와 전혀 무관한, 즉 없어도 하등 아쉬울 것 없는 발레를 한다는 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따름이다. 이렇듯이 이 작품은 좁게는 한 소년의 꿈의 실현이라는 성장 소설적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넓게 보면 사회계급 간 갈등과 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모색한 것이다.

 

작가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하였으니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다. 계집애나 하는 발레를 남자아이가 한다고 해서 그 아이의 성향이 곧 계집애는 아니다. 운동은 남자, 예술은 여자로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사회적 선입견은 뿌리 깊다. 빌리의 가족이 처음에 펄쩍 뛰었던 것도 그러한 인식과 우려와 무관하지 않다. 작중에서 빌리의 친구 마이클은 서서히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내며 이에 대한 빌리의 우정은 변함없다. 물론 이 작품의 핵심이 동성애 사안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집으로 오는 내내 혼자 연습을 하면서, 비로소 나는 내가 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말 아찔한 기분이었다. (빌리, P.64)

 

자신이 정말 하고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일찍 알아차릴 수 있다면 행운이다. 게다가 하고 싶은 것이 자신이 남다른 재능이 있으며 그걸 알아차릴 수 있다면 더 큰 행운이다. 빌리는 행운아다. 재능을 지닌 많은 아이가 눈에 띄지 못한 채 서서히 스러지는 게 다반사인 세상이다. 그래서 빌리가 윌킨슨 선생님을 만난 것도 행운이다. 뛰어난 예술가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재능을 알아차리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스승이 필요하다. 전문적인 훈련을 쌓기 위한 경제적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그게 부모든 아니면 다른 후원자든. 빌리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빌리의 학비 일체를 마련하기 위해서 재키가 얼마만큼의 고민과 노력을 감수해야 했는지. 소중히 간직한 결혼반지를 전당포에 넘기고, 파업 동지를 배신하고 탄광에 복귀하려고 하는 참담한 심정. 배신자의 돈을 받아야만 하고, 파업 실패 소식에 오히려 일해서 학비를 벌 수 있다는 안도감 등을.

 

빌리가 발레 수업을 허락받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자신의 용기뿐만 아니라 가족의 반대도 극복해야 했다. 사회적 편견뿐만 아니라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는 아버지의 현실적 사유도 반대의 충분한 명분이 된다. 이 과정에서 죽은 엄마 사라는 현실 인물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망설이는 빌리는 꿈에서 엄마의 뜻과 바람을 확인한다. 재키는 죽은 아내의 처지에서 빌리의 사안을 새로이 바라보며 자신의 반대가 올바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사라라면 빌리의 발레를 무조건 지지하고 응원하였을 터이므로. 부모가 원하는 꿈이 아니라 자식이 바라는 꿈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게 부모의 참다운 역할임을.

 

나는 정말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자꾸만 사라가 내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재키, P.192)

 

발레는 단지 빌리 엘리어트의 개인적 성공만을 가져오지 않았다. 발레를 통하여 빌리네 가족은 하나가 되었다. 엄마의 죽음과 파업 사태 이후 뿔뿔이 흩어지고 반목하던 재키와 토니, 빌리는 빌리의 발레가 갖는 의미를 깨닫고 이룰 수 있도록 분투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가치를 깨닫는다. 재키는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책임질 수 없음을, 토니는 아빠의 눈물을 보면서 더 만사를 아빠에게 책임 지우고 의존할 수 없음을.

 

그렇다. 파업은 어떤 집을 갈라놓기도 하지만, 또 어떤 집은 단단하게 뭉치게도 한다. 그렇더라도, 나는 재키와 토니가 발레란 것 때문에 또 이렇게 뭉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지, P.224)


문득 원작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과 구성에서 소설과는 얼마나 다를 것인지 궁금하다. 무엇보다도 영상 매체를 통한 예술적 느낌이 글자 매체로 읽었을 때의 감흥과 동등한 수준일지 확인해 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물섬 비룡소 클래식 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에드워드 윌슨 그림, 정영목 옮김 / 비룡소 / 200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렸을 때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추억의 모험소설이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읽음에 그런 생생한 감정을 갖지 못하니 한편 아쉽다. 나이의 다소, 축약본과 완역본의 차이 등이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 반면 완역본이 주는 풍요로운 내용의 향유, 줄거리만 쫓아가느라 놓쳤던 대목과 장면의 재발견 등은 장점에 해당한다.

 

<배의 주방장>이 원래 제목이라는 작가의 말을 통해 존 실버라는 인물의 비중과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확실히 전반부를 짐 호킨스가 단독으로 끌고 간다면, 후반부는 호킨스와 실버가 공동 주연이라 하겠다. 특히 강렬한 개성의 표출이란 면에서는 실버를 당할 인물이 없다.

 

실버는 해적치고는 독특한 유형이다. 해적이 어떤 사람들인지 겪어봐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호킨스조차 의심의 눈초리로 실버를 살펴봤음에도 그에게서 전혀 해적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물며 지주와 의사 같은 사람들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음을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오직 선장만이 유보적 태도를 취하는데, 딱히 개인적 차원의 의심이 아니라 선장이라는 직업적 속성의 발로라고 할 것이다.

 

나는 선장, 검둥개, 장님 퓨를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해적이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고 생각했다. 해적이란 내 생각에 따르자면 이런 깨끗하고 유쾌한 술집 주인과는 아주 다른 인간이었다. (P.103, )

 

, 지주님, 전체적으로 나는 지주님이 찾아낸 사람들을 크게 신뢰하지는 않습니다만, 존 실버만큼은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해 두고 싶군요.” 의사가 말했다.

저 사람은 완벽하게 믿을 만하오.” 지주가 말했다. (P.113)

 

일행이 폭동의 음모를 간파하고 무사히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개입 덕분이었다. 그를 나타내는 표현을 들자면, 음흉, 교묘, 영리, 그리고 잔인이라고 하겠다. 대개의 악역이 무모하고 성급한 데 비해 실버는 참고 때를 기다릴 줄 알면서 자신을 위장하는 데 능숙하다. 교묘한 언변으로 무지한 해적들의 충동을 억누르면서도 필요하면 냉정하고 잔인한 면모를 서슴없이 보여 준다. 해적들이 그의 말을 따랐다면 이 소설은 금방 끝이 나고야 말았으리라.

 

실버와 대비되는 인물은 선장이다. 선장은 선원들은 물론 처음부터 지주와 짐의 호의도 얻지 못하였다. 깐깐하고 고지식함에서 비롯한 오해와, 무엇보다 그들의 조심성 없음을 나무라고 특별 취급을 하지 않는 데 대한 반감일 것이다.

 

내가 서둘러 주방으로 달려가는데, 선장이 의사에게 아주 큰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배에서는 누구라고 특별히 예뻐하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지주와 생각이 똑같아 선장을 무척 미워했다. (P.124)

 

선장으로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승객들이 어리석고 답답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이것은 기분전환 뱃놀이가 아니며, “죽느냐 사느냐의 아슬아슬한 모험”(P.117)임을 깨닫지 못하므로. 부정적 인상을 받은 선장의 진가는 예방 조치와 통나무집에서 포탄의 위협에 깃발을 내리길 거부하는 단호함에서 드러난다. 실버의 위협 앞에서도 그는 당당하게 실버를 공박하며 모욕적 언사를 퍼부을 정도다. 그는 세련되고 사교적인 인물이 아니지만 깊은 책임감을 지닌 옹골차며 강인한 인물이다.

 

내 깃발을 내리라고요!”

선장이 소리를 지르더니 덧붙였다.

안 됩니다. 나는 못 합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모두 그 말에 동의했던 것 같다. 그것이 강인하고, 뱃사람답고, 선한 감정이었을 뿐 아니라, 적에게 우리가 그들의 포격을 우습게 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전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P.227)

 

짐 호킨스는 소설의 공동 주인공인 동시에 사태 해결의 열쇠를 푸는 역할이다. 작품의 커다란 굴곡점에는 항상 그가 개입한다. 보물섬 지도를 품에 넣고, 실버 일당의 음모를 엿들었으며, 벤 건을 만나고 닻줄을 끊은 히스파뇰라 호를 숨겨두는 등 작중 유일한 소년인 그가 없었다면 소설은 쓰이지 못하거나 해적 일당의 손쉬운 승리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비판적 의견도 가능하다. 보물섬에서 짐은 언제나 단독 행동을 감행한다. 이것이 가져온 성공적 결과는 소설이기에 가능하다고 봐야겠다. 게다가 항상 우연의 행운이 짐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덕택도 무시할 수 없다. 사려 깊고 심사숙고하지 못함은 그의 소년으로서의 한계인 동시에 소설 독자를 염두에 두었다고 봐야겠다. 그럼에도 결과가 항상 만사를 면죄해주지 못한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어리석은 짓으로, 앞서 내 멋대로 보트를 탔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짓이었다. 요새 안에는 성한 사람이 둘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이번 일 역시 결국은 우리 모두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P.271)

 

배를 탄 많은 인물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거나 무인도에 버려지는데, 악역 중에서 유일하게 실버만 무사히 생환에 성공한다. 해적의 우두머리이자 최고의 악당인 그가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은 데는 그에 대한 작가의 편애가 있어서다. 엄청난 악당이자 소름 끼치는 사기꾼이고, 무자비한 해적이자 잔인한 살인자이고 간교한 배반자. 상황을 직시하는 명확한 판단력과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결단력, 무엇보다 짐에 대한 일말의 호의가 그를 살린 동시에 그를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고 있다. 이 때문에 독자는 그를 미워할 수는 있되 차마 싫어할 수 없다.

 

어마어마한 보물은 자석처럼 사람들의 탐욕과 허용을 끌어당긴다. 위험할 줄 알면서 목숨을 감수하면서도 보물을 찾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이 작품에서도 보물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다. 보물을 발견하면 모두가 행복할까? 그렇지 않음을 소설의 결말은 또한 우리에게 보여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비룡소 클래식 3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에드워드 윌슨 그림, 박광규 옮김 / 비룡소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사람은 천사와 악마 그 중간 어디쯤에 놓여 있다. 선인은 천사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고, 악인은 악마에 더 가까울 뿐이다. 사람의 내면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선천적 본성과 후천적 학습과 사회의 규율에 따라 악을 억누르고 선을 표방하며 살아가는 게 사람의 모습이다. 권선징악은 인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구호다. 우리는 악을 혐오하고 악인을 미워하는 성향을 지닌다. 그럼에도 역사를 통틀어 수없이 발생하는 악을 향한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은 우리에게서 악을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증명할 뿐이다.

 

지킬 박사의 비극은 그가 제2의 파우스트 박사가 되려고 한데 있다. 절대 지식을 추구하고 선악의 극한을 탐험하는 위험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잃을 가능성이 커짐을 뜻한다. 절제되지 않는 쾌락이 탐닉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듯이 제어되지 않는 악은 타락의 덫에서 놓여나오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심신이 쇠잔해질 때까지 그리하여 인간성이 상실될 때까지 말이다. 그 끝에서 하이드 씨가 나타난다. 모든 사람이 하이드 씨를 접할 때 보이는 공통적 반응은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한 현상을 목도함에 따른 것이다. 순수 악 또는 절대 악의 구현, 즉 악마를.

 

뭔가 불쾌하고 싫거든요. 그렇게 혐오감을 주는 사람은 평생 처음이었지만, 왜 싫은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딘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는, 어디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P.20)

 

이 소설의 전반부가 변호사 어터슨의 시각에서 사건을 조망하는 반면, 후반부는 래니언 박사의 진술과 헨리 지킬의 참회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킬 박사는 인간의 이중성을 분리하여 추한 모습을 하나의 실체로 구현하였다. 자신의 능력으로 하이드를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자신의 생각이 오만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하이드에게 지배당하였다.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한발 두발 가라앉는 상황에서도 그는 사악한 탐욕의 쾌락을 포기하지 못하였다.

 

죄를 범하는 것은 결국 하이드였으니까 그건 하이드인 거라고 생각했지. ‘지킬은 잘못이 없다고. 다시 자기로 깨어나 보면, 선량한 본질은 상실되지 않고 그대로 있으니 지킬 박사는 기회만 있으면 하이드가 저지른 죄를 서둘러 지워 버리고자 애쓰기도 했지. 이렇게 하는 동안 양심은 차츰 마비되어 갔지. (P.132-133)

 

지킬 박사의 참회는 결국 궤변이다. 지킬과 하이드는 별개의 인물이므로 하이드가 누린 쾌락은 물론 그가 저지른 온갖 악행은 지킬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라는. 하나의 정신과 하나의 육체에 두 인간이 공존할 수 없음을 그는 알지 못하였다. 하나의 생명체라고 인정하는 즉시 하이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행동에 나설 것이다. 그것이 생명체의 본성이므로. 하이드는 지킬을 제거하고 완전한 하이드가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 나는 라고 하고 있네. ‘라고는 부를 수가 없어. 이 지옥의 아들에게는 인간다운 데가 조금도 없었네. 마음속에 공포와 증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지. (P.147)

 

지킬 박사는 하이드를 라고 부르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임을 인정한다. 최초에 그의 것이자 동시에 자신의 것인 추한 얼굴에 기쁨을 느꼈던 그가 이것을 부인하고 만다. 영혼의 공존이 영혼의 분열로 이어지고 끝내는 반쪽 영혼의 소멸로 귀결된다. 남은 반쪽에 대해 지킬 박사는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지킬 자신이 아닌 남인 하이드 씨이므로. 지킬은 이제 죽었다고 말하며.

 

나는 상관없네. 지금 나는 정말로 죽음을 맞이하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든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펜을 놓고 이 참회록을 봉하고 불행한 헨리 지킬의 생애를 마치고자 하네. (P.153)

 

여기서 반문한다. 이 소설에서 하이드 씨는 옴짝달싹 못 하고 자살을 선택하고 말지만, 만약 그가 세상 속으로 활개 치며 돌아다닐 수 있었다면 그가 남긴 온갖 흔적은 정말 지킬 박사와는 무관한 것인가.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그는 너무나 무책임하지 않은가. 나는 그럴 줄 몰랐어요, 애초에 의도는 순수하고 좋았어요. 그것과 나는 상관없어요 하고 어깨를 으쓱하면 그걸로 끝인지. 오늘날 과학연구의 순수성을 주창하는 일부 과학기술자들이 그러하듯이.

 

부디 내게 주어진 어두운 길을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게나. 나는 지금 비할 데 없는 천벌과 위험을 스스로 불러들였다네. 세상에 다시없을 죄인임과 동시에 더할 수 없는 고뇌를 짊어진 인간이지. 이토록 인간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고뇌와 두려움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네. (P.71)

 

이 글만 읽으면 우리는 글쓴이의 고뇌와 연약함에 동정을 금할 수 없다.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허덕이는 가련한 인간의 한계. 거짓 필적으로 하이드의 존재를 숨긴 인물은 누구인가. 변호사에게 유언장을 남기고 하이드를 지켜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지킬 박사는 위태로운 동거의 결말을 예감하면서도 죄악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하고 스스로 나락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결코 그에게 주어진 길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이 소설을 인간에 내재한 선과 악의 모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생생하게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자체로서도 빼어난 성취이지만, 작가는 제어되지 못한 지식과 욕망의 위험성을 현대판 파우스트 박사를 소환하여 다시금 일깨우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래니언 박사에게 제안하는 하이드는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메피스토펠레스와 닮은꼴이다.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지식과 명예를 얻을 새로운 길을 지금 당장 이 방에서 눈앞에 열어 드리겠습니다. 악마도 놀라 당황할 정도의 기적으로 당신의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드리지요. (P.118)

 

완전하고 더없이 순수하다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며, 그것이 반드시 올바르고 좋은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 속에 내재한 양면적이고 모순적인 본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인간이 인간적인 이유는 불완전성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