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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2년 7월
평점 :
원작 영화에 바탕을 두고 소설화한 작품이다. 이 경우든지 또는 반대의 경우든지 성공한 원작의 유명세가 개작의 성공을 담보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장르에는 각기 고유한 예술 미학이 있기 마련이므로 원작의 오리지낼리티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개작의 독자성을 확립할 것인가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 국한하여 평한다면, 원작을 관람하지 못한 나로서는 소설에서도 나름의 감동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궁벽한 탄광촌, 가난한 살림살이,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편부 가정, ‘상류층의 계집애나 하는’ 발레에 관심과 재능을 보이는 아들, 편견과 반대를 극복하고 발레단의 주연 남자무용수가 되는 아들. 줄거리의 요점을 대강 짚으면 이렇다, 매우 진부하면서도 감동을 심어주는 설정이자 구성이다.
자칫 상투적이기 쉬운 이 작품에 다른 읽을거리를 부여한 점은 탄광의 파업이다. 소위 영국병을 치료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접근방식을 도입한 대처 총리가 강경하게 밀어붙인 곳이 탄광이다. 자본과 효율성의 논리로 보자면 당연한 조치라고 하겠고, 그것이 당대 및 후대에 좋은 평가를 얻었다는 점도 원리적으로 보면 마땅하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히 수익성과 효율성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사양산업이지만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생계가 달려있으므로 그들에게는 생사가 달린 절박하고 절실한 사안인 것이다.
법은 무기지만, 우리를 위한 무기가 아니다. 법이 언제 우리 노동자 편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변호사, 판사, 경찰 간부들. 그들은 대개 자본가 편에 선 작자들이 아니던가. (재키, P.79)
소설 곳곳에는 정부와 경찰에 대한 비판과 경멸에 가까운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작품의 주인공 가족이 상대적 약자인 광부이므로 그들의 시각에서 파업을 저지하고 노조를 탄압하는 정부를 좋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정부 조치를 실제로 현장에서 실행하는 경찰도 마찬가지다. 굶느냐 마느냐, 추위에 덜덜 떠느냐 마느냐, 나아가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투쟁의 현장에서 생계유지와 전혀 무관한, 즉 없어도 하등 아쉬울 것 없는 발레를 한다는 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따름이다. 이렇듯이 이 작품은 좁게는 한 소년의 꿈의 실현이라는 성장 소설적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넓게 보면 사회계급 간 갈등과 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모색한 것이다.
작가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하였으니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다. 계집애나 하는 발레를 남자아이가 한다고 해서 그 아이의 성향이 곧 계집애는 아니다. 운동은 남자, 예술은 여자로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사회적 선입견은 뿌리 깊다. 빌리의 가족이 처음에 펄쩍 뛰었던 것도 그러한 인식과 우려와 무관하지 않다. 작중에서 빌리의 친구 마이클은 서서히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내며 이에 대한 빌리의 우정은 변함없다. 물론 이 작품의 핵심이 동성애 사안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집으로 오는 내내 혼자 연습을 하면서, 비로소 나는 내가 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말 아찔한 기분이었다. (빌리, P.64)
자신이 정말 하고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일찍 알아차릴 수 있다면 행운이다. 게다가 하고 싶은 것이 자신이 남다른 재능이 있으며 그걸 알아차릴 수 있다면 더 큰 행운이다. 빌리는 행운아다. 재능을 지닌 많은 아이가 눈에 띄지 못한 채 서서히 스러지는 게 다반사인 세상이다. 그래서 빌리가 윌킨슨 선생님을 만난 것도 행운이다. 뛰어난 예술가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재능을 알아차리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스승이 필요하다. 전문적인 훈련을 쌓기 위한 경제적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그게 부모든 아니면 다른 후원자든. 빌리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빌리의 학비 일체를 마련하기 위해서 재키가 얼마만큼의 고민과 노력을 감수해야 했는지. 소중히 간직한 결혼반지를 전당포에 넘기고, 파업 동지를 배신하고 탄광에 복귀하려고 하는 참담한 심정. 배신자의 돈을 받아야만 하고, 파업 실패 소식에 오히려 일해서 학비를 벌 수 있다는 안도감 등을.
빌리가 발레 수업을 허락받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자신의 용기뿐만 아니라 가족의 반대도 극복해야 했다. 사회적 편견뿐만 아니라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는 아버지의 현실적 사유도 반대의 충분한 명분이 된다. 이 과정에서 죽은 엄마 사라는 현실 인물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망설이는 빌리는 꿈에서 엄마의 뜻과 바람을 확인한다. 재키는 죽은 아내의 처지에서 빌리의 사안을 새로이 바라보며 자신의 반대가 올바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사라라면 빌리의 발레를 무조건 지지하고 응원하였을 터이므로. 부모가 원하는 꿈이 아니라 자식이 바라는 꿈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게 부모의 참다운 역할임을.
나는 정말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자꾸만 사라가 내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재키, P.192)
발레는 단지 빌리 엘리어트의 개인적 성공만을 가져오지 않았다. 발레를 통하여 빌리네 가족은 하나가 되었다. 엄마의 죽음과 파업 사태 이후 뿔뿔이 흩어지고 반목하던 재키와 토니, 빌리는 빌리의 발레가 갖는 의미를 깨닫고 이룰 수 있도록 분투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가치를 깨닫는다. 재키는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책임질 수 없음을, 토니는 아빠의 눈물을 보면서 더 만사를 아빠에게 책임 지우고 의존할 수 없음을.
그렇다. 파업은 어떤 집을 갈라놓기도 하지만, 또 어떤 집은 단단하게 뭉치게도 한다. 그렇더라도, 나는 재키와 토니가 발레란 것 때문에 또 이렇게 뭉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지, P.224)
문득 원작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과 구성에서 소설과는 얼마나 다를 것인지 궁금하다. 무엇보다도 영상 매체를 통한 예술적 느낌이 글자 매체로 읽었을 때의 감흥과 동등한 수준일지 확인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