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과학자들 - 생명 윤리가 사라진 인체 실험의 역사
비키 오랜스키 위튼스타인 지음, 안희정 옮김 / 다른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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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생명 윤리가 사라진 인체 실험의 역사가 말해주듯 이 책은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으로 자행됐던 인체를 대상으로 한 서양의 부끄러운 근현대사를 파헤치고 있다. 분량에 비해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폭과 깊이가 제법 있다. 다만 대상 사례를 세부적으로 기술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과학, 특히 의학 발전을 위해서 인체를 대상으로 한 실험은 불가피하다. 자신의 몸을 학문과 기술 발전을 위한 실험 도구로 기꺼이 제공하는 사람이라면 사회적 존경과 예우를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이런 자명한 상식이 그동안 인체 실험의 역사에서는 통용되지 못하였음이, 나아가 강압과 불법이 난무하는 비윤리적 현장이었음을 알게 되어 충격적이다.

 

개인의 인권이 과학.의학의 발전과 대립할 때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P.17)

 

인권을 제대로 주장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 즉 죄수, 소수민족, 고아, 군인은 물론이고, 정보 비대칭으로 실험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힐 수 없는 환자들처럼 인체 실험의 대상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 기니피그로 전락할 수 있다는 의미다.

 

새로운 진단법과 치료법의 개발로 인류가 얻을 혜택을 고려하면 절차와 방법의 일부 일탈은 불가피한 것으로 용인되어야 한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인류 역사는 언제나 훌륭한 이상의 실현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점철되지 않았던가. 과거에는 개별적으로 자행되던 비윤리적 인체 실험이 나치와 전쟁에 맞닥뜨려서는 국가 권력의 직접적인 지시와 방관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의 의도는 나름대로 고매한 것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벨몬트 보고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 연구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3가지 윤리 원칙, 즉 인간 존중의 원칙, 선행의 원칙, 정의의 원칙을 담고 있다. (P.105-106)

 

인체 실험의 연구 윤리를 수립한 뉘른베르크 강령과 벨몬트 보고서를 통해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안심하면 오산이다. 벨몬트 보고서가 발간된 게 1979년이니, 이후에는 윤리 위반 사안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사안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상업화한 의학이 초래하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은 생명 윤리 따위는 무시하도록 무분별한 경쟁을 쫓고 있음을.

 

수년간 세계를 휩쓸었던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생각해 보자. 수많은 거대 제약회사들이 백신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신속하고 효율적인 임상시험의 성패는 초미의 중대사다. 먼저 개발에 성공할수록 막대한 수익을 그것도 독점적으로 거둘 수 있었다. 게다가 온 세계가 백신 수요로 넘쳐날 때 그들은 비싼 값을 지불할 수 있는 국가에 우선 공급하였다. 의술과 신약은 단순한 서비스와 상품이 아니라 생명과 직결된 것임에도 자본의 논리는 빠지지 않는다. 자국과 자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부 개인의 피해는 눈감아도 되며 국제적 일반 기준은 준수를 거부한다. 1993년 인체 방사능 실험에 관한 자문위원회와 2008년 식품의약국의 헬싱키 선언 거부는 생명과 인권에 앞선 가치가 실존함을 여실히 입증한다.

 

과학발전은 중요하다. 사회는 엄청난 의학적 발견과 치료법 덕에 많은 혜택을 입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 피해를 입는 것은 불가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학 연구는 어떤 경우라도 생명 존중과 혜택과 정의라는 필요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사회의 요구와 개인의 권리가 대립할 때 우리는 공정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P.149)

 

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는 생체 표본의 사용과 배아를 활용한 줄기세포 임상시험은 그것이 가져올 인류 차원의 혜택만큼이나 사용 과정에서 또는 오남용의 위험에서 안전하지 못하다. 공정한 잣대 적용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정답이 무엇인지 단언하기 어렵다. 그래서 저자는 치욕스러운 역사를 통해 배우기를 바라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적 사례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과거에서 교훈을 찾아야만 하므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과 인체 실험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해당 내용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731부대를 떠올렸는데, 때마침 부록으로 일본 731부대의 야만적인 인체 실험을 소개하고 있다. 비윤리적인 인체 실험은 서양세계의 전유물이 아니다. 저자가 731부대에 대해 알았다면 본문에서 이를 절대로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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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초보자가 가장 알고 싶은 최다질문 TOP 45
이승환 지음 / 메이트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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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출간한 전작 <메타버스 비긴즈>는 본격적인 메타버스 소개서다. 그에 비해 이 신간은 메타버스 자체보다는 메타버스가 가져올 세상의 변화와 특히 NFT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메타버스와 관련한 질문에 대한 답변 방식을 사용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소통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 한층 흥미로움을 더해준다. 겉표지의 표제 상단에 병기한 문구-메타버스와 NFT 세상에서 일하고 돈 벌기는 이 책의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어 부제에 가깝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을 때 개인적 태도는 수용적이 되기 마련이다. 잘 알지 못하는 혁신적인 최첨단 문명의 이기 앞에서 개략적이라도 알아야 뭔가라도 비판적 인식을 가질 수 있음이다. 한참 발전이 빠르게 진행 중인 기술과 사회 변화는 명확한 예측이 어렵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변화가 전개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측과 전망은 항상 유보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글로벌 혁신기업들은 점과 선, 면을 넘어선 새로운 연결점을 찾고 있습니다. 바로 가상공간입니다. 면이 모이면 공간을 만들게 되죠. 가상공간에서 실제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것과 같은 공존감을 느끼며 우리가 연결된다면 기존의 연결에서 생겼던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새로운 가치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P.20)

 

메타버스의 각광은 우연과 필연이 결합한 현상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코로나 19의 확산이라는 요소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비대면 소통방식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하였고, 비대면이되 비대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면의 체험을 제공하는 수요가 메타버스의 유행을 앞당겼다. 메타버스가 일과성 현상이 아니고 인터넷의 뒤를 이어 차세대 산업과 사회 혁명의 주인공이 된다면 우리는 싫든 좋든 메타버스 세상 속에서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의 삶이 인터넷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자명한 전망이다.

 

메타버스 태풍의 전조가 될 다양한 플랫폼과 기기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하며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플랫폼과 기기들은 하나의 서비스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기존에 없던 수익모델을 만들고 경쟁 구도는 바뀌게 될 것입니다. (P.36)

 

경제적 유인 효과를 동반하지 못하는 기술발전은 반짝할 따름이다. 메타버스가 순전한 기술적 현상이라면 단지 흥미만 유발하고 오래지 않아 사그라들겠지만, NFT 등장과 맞물려 강력한 수익성을 촉발할 수 있음을 저자는 여러 사례로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메타버스 경제에서 NFT가 핵심적 기능을 담당함을 반복하여 언급하는데, 자신의 소유권과 지적 재산권을 증빙할 수 없다면 가상공간에서 시장경제의 발전이 불가능해서이다.

 

현실의 삶에서 소유가 중요하듯, 메타버스에서도 디지털 자산에 대한 소유가 가능해진다면 상상력을 통해 생산된 무한한 디지털 자산을 소유하고 거래하며, 기존에 없던 가치가 생겨날 것입니다. (P.65)

 

근년 들어 광풍이 일었던 가상화폐 채굴과 NFT 모두 가상공간의 거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용처가 가상공간으로 제한된다면 성장의 한계는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양자 모두 실물경제와의 교환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 실물 화폐와 실물 상품에 비해 양자는 아직 불안정성과 호환성의 제약을 지니고 있음은 사실이므로 제약을 극복하는 시기를 얼마나 앞당길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하겠다. 현재로서는 대박과 쪽박 사이 어디쯤이므로 투자보다는 투기에 가까운 모습으로 비친다.

 

NFT 시즌1에서는 NFT라는 이름만으로도 주목받고 가치가 있었으나 이제 거품이 사라지고 시장은 본질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픽셀의 소유를 넘어 왜 NFT를 가져야 하는지, NFT를 소유해서 어떠한 가치.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진 것입니다. (P.299)

 

메타버스의 이론적, 기술적 원리를 나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현실응용 사례를 제시하는 게 직접적인 이해와 수용에 유용할 수 있다. 저자는 메타버스 사무실로 온라인 출근하는 사례가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워케이션과 통근시간 감소 등의 측면에서 효율적이지만, 비대면에 따른 조직관리와 비전 공유의 약점 등을 극복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완벽한 가상감과 몰입감을 구현하기 어려운 데 따른 기술적 요인도 빠뜨릴 수 없겠다. 모두가 온종일 HMD를 착용한 채 일할 수 있는 건 아니므로.

 

가상 인간의 등장 역시 비용 효과성을 고려하면 향후 지속적 증가가 예상된다. 초창기에 단순히 호기심과 신기함으로 받아들여졌던 그네들이 실제 인간과 경쟁 또는 대체하는 단계에 이르면 현실 세계에서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파장이 발생할 수 있다.

 

이 책의 두드러진 차별성은 단순히 메타버스 이해에 있지 않고 메타버스가 주류가 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일하고 돈 벌기가 가능할지 살펴보는 데 있다. 메타버스를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세상에 적응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메타버스 안에서 할 수 있는 활동과 영역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NFT 발행과 거래를 통해 수익을 도모할 수 있다면 무작정 외면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비록 가상공간 내 활동이 유치해 보이고, NFT가 영 미덥지 않다고 여겨지더라도 로블록스와 샌드박스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며, NFT가 실제로 거래되고 일부는 수익을 창출하고 있음도 무시하기 어렵다. 일례로 삼성전자는 신규 스마트폰 사전예약자에게 NFT를 증정하고 있다.

 

메타버스 혁명은 아무래도 대중보다는 몇몇 선도적 기업의 주도로 발전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메타, 유니티, 엔비디아, MS와 같은 외국계 다국적 기업뿐만 아니라 네이버, 현대자동차, LG이노텍 등 국내 대기업들의 SWHW 연구개발이 메타버스 발전을 가속화하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주요 메타버스 기업의 기업전략을 하나씩 소개하면서 투자 관점에서 어디에 주목해야 할지 덧붙여 말한다.

 

메타버스에 관심 있지만 접근이 막막한 독자라면 발간 순서와 무관하게 오히려 이 책을 먼저 읽은 후, 전작을 읽는 게 독자로서는 한층 자연스럽고 편하게 메타버스 세계에 다가서는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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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타이먼 지만지 희곡선집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강태경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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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서도 이례적으로 처절할 정도의 강렬함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처절함에서는 <리어왕>, 강렬함에서는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과 맞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나도 선명한 주제의식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성까지 굉장히 목적 지향적 작품으로 비치는 이 작품은 배금주의 비판과 인간 혐오 사상을 바닥에 짙게 깔고 있다.

 

(타이먼) 과연 돈이란 신과도 같구나! 이런 돼지우리만도 못한 육신도 금을 가지고 있으니 숭배를 받는구나! 범선의 돛을 올리고 망망대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게 하는 것도 황금이요, 일확천금한 노예가 만인의 존경을 받게 하는 것도 돈이라. 돈이여, 영원히 경배받아라! 그대를 보고 환호하며 오직 그대만을 섬기는 신도들에게 역병의 면류관을 씌워 주어라! (P.151-152, 51)

 

작품 전반부에서 보여주는 타이먼은 성인의 모습과도 같다. 국가와 사회에 헌신하며,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어 사람들을 대접하는, 그러면서도 남에게 보답을 바라지 않고 자체로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를 기리고 그와 친구가 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그의 베풂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며 때가 되면 반드시 갚을 것을 항상 표현한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하여 그의 재력이 고갈되자 타이먼은 표변하는 세상인심을 절감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네 범인과 타이먼의 선택은 달라진다. 우정을 저버린 사람들을 향한 비난과 저주는 공통적이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재기를 기약하며 재기 후에는 등 돌린 자들을 외면할 뿐이다. 타이먼은 전혀 다르다. 그는 인간과 사회 자체에 혐오를 느끼며 저주를 퍼붓고는 아테네를 떠나 숲으로 은거해버린다. 3막 후반부터 독자가 대하는 타이먼의 육성은 인간 혐오의 메시지를 매우 거칠고 반복적으로 담고 있다. 염세주의자의 극단적인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타이먼을 소개해주면 충분할 정도다.

 

(타이먼) 이놈의 집을 불태워라! 썩어 빠진 아테네는 와르르 무너져라! 지금부터 이 타이먼은 인간과 인류 전체를 증오하며 살겠다! (P.102, 36)

 

(타이먼) , 친절한 신들이여 들으소서. 이 성 안팎의 모든 아테네인들을 멸하소서! 타이먼의 가슴속에 싹튼 이 증오심이 모든 종류의 인간, 전 인류를 향한 증오심으로 자라나도록 해 주소서! 아멘! (P.109, 41)

 

독자는 여전히 마뜩잖은 뒷맛을 느끼는데, 제아무리 큰 실망과 배신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전 인류에 대한 타이먼의 증오와 혐오가 과도하며 온당치 않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타이먼은 절대적으로 옳고,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가. 세상은 타이먼의 외침처럼 무너져 망해버려야 할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한 곳이며, 세상 사람 모두는 그런 대가를 받아 마땅한지를.

 

(플라비어스) 그래도 말씀드려야 해. 재산을 탕진하고 나서야 후회하시겠냐고, 그땐 후회해도 아무 소용 없다고 말이야. 선심이라는 것은 자신의 곳간을 들여다보는 눈이 없으니 한탄할 노릇이지. 남에게 선심을 베풀다가 자신이 망하는 것도 알지 못하니 말이야. (P.35-36, 12)

 

(애피멘터스) 타이먼, 자네의 무절제한 적선 행위는 너무 오래 계속되어 왔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자네 자신마저 기부금 약정서가 되어 사라지고 말걸. 도대체 허영과 사치로 가득한 이따위 연회를 왜 열어야 한단 말인가? (P.41, 12)

 

작품 곳곳에 타이먼의 소위 자선 행위에 대한 경고와 조언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집사 플라비어스는 충직한 마음에서, 애피멘터스는 철학적 견지에서 타이먼에게 그의 행위가 무절제하고 과도함을 지적하지만 타이먼은 이를 간단히 무시해버린다. 그는 오히려 집사의 직무 태만을 언급하며 책임회피의 태도마저 드러낸다. 1막에서 시인의 시상이 나타내는바 또한 행운의 여신이 그를 내치면 앞날이 달라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타이먼은 제4막에서 자신이 세상을 과자 가게로 만들려고 했었다며 변명한다. 타이먼의 바람처럼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면 타이먼의 행위도 변호 받을 만하다. 이에 대한 반증을 독자는 제3막의 시민 1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시민 1은 타이먼에게서 은혜를 받거나 그의 식객이 된 적이 없다고 한다. 여기서 타이먼의 연회에 초대받은 사람은 원로원 의원, 귀족과 부유한 상인, 그에게 대가를 바라는 예술가들임을 극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타이먼의 베풂은 처음부터 대상의 한계가 분명하여 일반 시민은 직접적으로 혜택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나중에 모든 아테네 시민과 세상 사람 모두를 저주한다.

 

(타이먼) 그만! 더 이상 설교는 그만두게. 칭찬을 받으려고 베푼 것이 아니야. 그런 마음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저 주고자 해서 베푼 것이 현명하진 못했다 하더라도 비열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P.58-59, 22)

 

타이먼은 자신의 베풂이 칭찬과 대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니라 베풂 자체의 미덕을 좋아해서라고 밝힌다. 집사와 철학자는 연회의 흥청망청함과 선물의 과도함을 지적하지만 그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다. 소위 친구들을 향한 보은 요청이 거부당하였을 때 어차피 베풂에 방점을 둔 행위였다면 그로서는 그렇게 극도로 절망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다소간 실망을 할 테고 자신의 자선 행위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정도였으리라. 타이먼의 반응이 정반대이다. 그는 우정의 배신자들을 증오하고 악담을 퍼붓는다. 나아가 배금주의로 타락한 사회와 세상 전체를 저주한다. 남녀노소조차도 구분없이 모두를 죽여버리라고 촉구한다. 극단적으로 지나친 반응이랄까? 타이먼에 그다지 공감되지 않는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타이먼) 어서 가서 신들이 타락한 도시에 쏟아붓는 역병과도 같이 아테네를 휩쓸어벼려. 그 칼로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마. [......] 닥치는 대로 저주하고 파괴해. 어머니들의 호소도 처녀들의 애원도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듣지 않도록 투구를 귀밑까지 뒤집어쓰고 피범벅 된 사제들의 흰옷을 보지 않도록 방패로 눈을 가리는 거야. (P.121-122, 43)

 

타이먼은 자신의 행위를 오해하고 있다. 자신은 자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를 제외한 누구도 자선으로 여기지 않는다. 애피멘터스의 말마따나 두툼한 고기를 뜯어 먹고 있을 뿐이며, 잔칫상에 몰려드는 파리 떼일 뿐이다. 그는 세상의 배금주의를 비난하지만 그 또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돈의 위력을 마음껏, 아낌없이 휘두르면서 고귀하고 위대한 타이먼으로 찬미 받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던 게 아닐까.

 

(애피멘터스) , 신들이여! 수많은 무리가 타이먼이라는 두툼한 고기를 뜯어먹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르다니요! 수많은 사람들이 발기발기 찢은 고기 조각들을 죄다 한 사람의 피에 찍어 먹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요! 정말 미친 짓은, 피 흘리는 본인이 그러라고 모두를 북돋우고 있답니다. (P.27-28, 12)

 

장군 알시바이어데스의 행보는 타이먼과 비교된다. 타락한 아테네의 권력층에 의해 추방당한 그는 숲속에 들어가 맨몸으로 광인처럼 울부짖는 대신 군대를 모아서 아테네로 쳐들어간다. 그가 원로원 의원을 향한 그의 일갈은 피지배층의 지배층에 대한 시원한 사이다에 다름 아니다. 다만 그는 조국을 무너뜨리는 대신에 아테네의 개혁 약속에 동의한다.

 

(알시바이어데스) 지금까지 당신들은 국가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당신들 마음대로 휘둘러 왔소. 당신들 뜻대로 정의를 조작하고 전횡을 일삼아 왔소. 지금까지 나와 같이 당신들이 휘두르는 권력의 그늘 아래 잠들어 있던 자들은 두 팔을 꽁꽁 묶인 채 고통의 한숨만 헛되이 내쉬며 무기력하게 방황해 왔소. (P.166, 54)

 

작가도 타이먼의 길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다. 타이먼은 시민 1과 플라비어스처럼 올곧은 마음씨를 지닌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애피멘터스도 제4막에서 타이먼이 인간성의 양극단만 알지 중용을 모른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이쯤에서 눈에 뻔히 보이는 오류를 품고 있는 타이먼을 전면에 내세운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 배금주의에 물들어 잠식되고 있는 사회에 대한 경고라면, 작가는 적당한 수준의 비난은 별로 효과가 없으리라 판단한 모양이다. 극약 처방을 해야지 그나마 약발이 먹힌다고 생각했던 듯, 타이먼의 발언 강도와 양은 시종 극단적이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결코 중단하지 않는다. 그의 묘비명을 보라.

 

여기 나 타이먼이 잠들다. 내 살아서는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을 증오했고 죽어서도 영원한 저주만을 남기노라. 그러니 내 무덤 앞에 그대의 발걸음을 멈추지 말라.’ (P.170,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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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 - 전예원세계문학선 셰익스피어 전집 14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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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시저>의 속편 격이다. 시저 사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앤토니]의 협력과 반목, 그리고 대결을 다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안토니우스의 패배와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는 로마제국의 실질적 성립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안토니우스 부인이 일으킨 내전, 삼두정치, 아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 그리고 유명한 악티움 해전,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내용상으로도 분량상으로도 작품의 중추를 이루면서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으므로 당대 로마사를 희곡으로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역사극으로 간주할 만하다.

 

셰익스피어는 굳이 작품명에서 앤토니와 옥타비아누스가 아닌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택하였다. 작가가 이 작품을 단순히 역사극이 아닌 두 사람의 관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앤토니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동맹이자 연인 관계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앤토니와 손을 잡은 이유는 당초 이집트의 보전에 있었다. 그리고 앤토니의 인간적 매력에 사적 관계로 발전할 것이다. 물론 앤토니는 클레오파트라의 여성적 매력에 애초부터 매혹당하였을 것이고.

 

(미시너스) 이제 앤토니 장군은 그 여인을 버려야 할 거요.

(이노바버스) 천만의 말씀. 버릴 수 없지. 나이를 먹어도 시들지 않고 사귀면 사귈수록 익힌 재주가 무궁무진하여 그녀는 항상 새로운 변화를 보이는걸. 다른 여자들은 남자에게 만족을 주고 나면 염증을 받게 마련인데, 여왕은 가장 포식했을 때 더더욱 욕구를 느끼게 하는 거지. 세상에서 가장 야비한 짓도 여왕이 하면 좋게만 보이고, 그래서 거룩한 사제들도 그녀의 방종만은 오히려 축복한다 이 말이지. (P.64, 22)

 

작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완전한 사랑과 화합보다는 다소간 애증의 관점으로 묘사한다. 앤토니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푹 빠져 있지만, 그녀를 심적으로 진정 사랑하기보다는 애욕적 차원이었음을 곳곳에서 표출한다. 그녀와의 관계와 생활을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어떡하든지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결혼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이참에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는 내심도 있었으리라. 앤토니가 마지막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재차 도주에 퍼붓는 욕은 단순한 패전의 실망감 탓은 아닐 것이다.

 

(앤토니) 내 마음을 홀리는 요부 같은 여왕과는 손을 끊어야 해. 나의 이 타락한 생활을 상상도 못할 무수한 해악을 빚어낼 거다. (P.31, 12)

 

(앤토니) 모든 것이 끝장이다! 그 더러운 이집트 년이 날 배반했어. 내 함대는 모두 적에게 투항하고 거기서 모자들을 높이 던지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함께 축배를 들며 야단들이다. 세 번씩이나 사내를 갈아치운 화냥년! 저 애송이 놈에게 날 팔아먹었겠다. 내 마음은 너에 대한 증오뿐이다. [......] 난 배신을 당했다. , 이 부정한 이집트 년! 이 지독한 화냥년! 그년의 눈짓 하나로 아군을 전쟁터로 몰아내고 끌어들이고 했잖은가. 그 여자의 가슴은 나의 면류관이요, 나의 목적이었거늘-집시의 본성을 드러내, 술책을 써서 날 속여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처넣었다. (P.160-161, 412)

 

앤토니는 그럼에도 클레오파트라를 놓지 못한다. 그를 향한 그녀의 애정은 한결같았고, 그녀가 없이는 그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에 자살을 감행한 앤토니가 아니었는가.

 

이 작품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보다는 앤토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일개 여인으로 비친다. 그녀는 시저에 대한 애정은 풋내기의 것이었고 지금 앤토니와의 사랑이 여인으로서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밝힌다. 클레오파트라가 보기에 앤토니는 더없이 고결하고 용맹하고 이지가 조화된 완벽한 인간이다. 그녀가 앤토니의 부인 펄비어의 사신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앤토니와 새로 결혼한 옥테이비어에 경쟁심과 질투심을 보이는 대목은 역설적으로 앤토니에 대한 그녀의 애정 정도를 보여준다.

 

(클레오파트라) , 어쩌면 그렇게도 균형이 잡힌 성품이실까! 봐라, 차미언, 그게 바로 그분이시다. [......] 하지만 두 가지의 중간이란 참으로 훌륭한 조화시다! , 참으로 신묘한 천품이시다! (P.47-48, 15)

 

(클레오파트라) 하지만 그런 분이 실지로 있다 하더라도 또 과거에 있었다 하더라도 도저히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큰 인물이오. 불가사의한 힘을 창조해내는 힘은 자연이라도 공상을 따를 수는 없는 법, 그래도 앤토니 같은 분은 공상에 도전한 자연의 걸작이며 꿈의 그림자를 압도하고 남는 분이에요. (P.187, 52)

 

문제는 앤토니가 클레오파트라에 푹 빠져 있다는 점에 있다. 앤토니는 명성, 경력, 군사, 재력 등 모든 측면에서 옥타비아누스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일거에 동원하였다면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는 이름이 바뀌었을 것임에도 앤토니는 이집트에서 미적거리며 벗어나지 않았다. 이집트가 당대 로마의 시각에서 보면 머나먼 변방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한 셈이다.

 

(앤토니) 이집트 여왕이여, 내 마음이 당신 배의 키에 꽁꽁 묶여 있었소. 그래서 끌려갈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오. 내 영혼은 완전히 당신의 종이 되어 당신이 눈짓만 해도 신의 명령이라도 물리치고 당신에게로 달려간다는 걸 당신은 알았을 거요. (P.122, 311)

 

악티움 해전의 결전에서 앤토니 군은 그야말로 대패를 겪는다. 클레오파트라의 후퇴와 잇따른 앤토니의 철수로 제대로 된 대전도 하지 못한 채 불명예스러운 패배를 겪게 되었는데, 후폭풍이 어마어마해서 부하들의 불만과 이탈이 뒤따르게 된다. 군사적 역량과 재능에서 남다른 우위에 있었던 앤토니지만 이제 그의 우위가 소멸하고 만 셈이다.

 

(스캐어러스) 계집이 뱃머리를 바람 부는 쪽으로 돌리자마자 그 계집에게 혼을 뺏긴 앤토니는 돛을 펄럭거리면서 암컷에 반한 수오리처럼 치열한 전투를 팽개치고 여왕을 뒤따라 달아났다구. 이런 수치스런 전쟁은 내 일평생을 두고 본 일이 없소. 전투의 경험과 남자의 기개와 명예를 그렇게 더럽히다니. (P.118, 310)

 

극 중에서는 강점을 지닌 육전을 주장하는 부하 장수의 의견을 무릅쓰고 해전을 감행하는 그의 무모함과, 지나친 공을 세우는 부하의 위험성을 설파하는 수하 벤티디어스의 의견을 통해 그의 결점을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이노바버스의 배반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넓은 아량과, 명예와 고결함에 대한 자신과 타인의 공통된 칭송을 통해 그의 미덕도 알려준다. 특히 이노바버스의 충성과 배반, 그리고 자책에 따른 죽음은 약점과 강점을 고루 갖춘 앤토니의 인간적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다.

 

앤토니와 옥타비아누스의 역사적 대결을 생각하다 보니 중국 역사에서 항우와 유방의 일대 사건이 저절로 비교된다. 양자는 여러 면에서 유사점을 지닌다. 우선 승리자는 후대 제국의 시초가 되었다, 로마제국과 한 제국. 초반 형세와 탁월한 개인적 능력만을 놓고 보면 승리자보다는 패배자가 된 앤토니와 항우가 우세하였다는 점. 시저를 살해한 브루투스 일파를 제거하고 사태를 장악한 인물은 앤토니였고, 용맹, 지위와 세력 모든 면에서 그는 옥타비아누스보다 압도적이었다. 항우는 두말할 나위 없다. 옥타비아누스와 유방은 자신의 개인적 능력보다는 부하들의 역량에 많이 의존하였는데, 이들을 잘 아우르고 부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능력이 빼어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 항우와 우미인은 모두 연인과 더불어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다는 점도 그러하다.

 

(시저) 이 세상의 어떤 무덤도 이렇게 고명한 한 쌍을 품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비참한 사건은 그 사건을 일으킨 자에게 큰 감동을 주는 법.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비극을 빚어낸 승리자의 영광이기도 하겠으나 온 세상의 영원한 동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P.200, 52)

 

경쟁자의 최후를 바라보는 승리자의 개인적 소회일 수도 있으며 패배자에 대한 배려가 담긴 발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시신을 앞에 둔 옥타비아누스의 마음도 복잡다단할 것이다. 홀가분하면서도 허탈한 심경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 전망에 대한 기대감 등등. 어쨌든 그로서는 이제 승리자의 아량을 보여주지 않을 이유가 없으리라.

 

셰익스피어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보다 앤토니에게 더욱 깊은 관심과 연민을 보인다. 결점과 미덕을 골고루 보여주어 그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도 않으며, 전설적인 패배자로서 영웅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권력과 사랑 사이에서 죽음에 이르러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 한 인물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 스스로의 말마따나 앤토니는 시저에게 패배당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정복당하였다. 보기 드문 영웅이 지닌 유일한 결점, 즉 한 여인을 향한 깊은 사랑 때문에. 독자는 그런 앤토니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의 약점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회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며, 그것이 인간 사회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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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올라누스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셰익스피어 전집 1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조덕희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21년 6월
평점 :
품절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으로 내게 익숙한 코리올라누스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소개된 인물이라고 한다. 그만큼 고대 로마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장군인데, 이 희곡을 통해 살펴본 그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어렵게 군주정을 종식하고 얻은 공화정인데 로마에서 추방당하자 오히려 외적을 이끌고 조국을 쳐들어온 인물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가 없으리라.

 

이 작품은 역사극이자 한층 정치극이다. <작품 해설>에 이 희곡의 특징이 요약되어 있어 인용한다.

 

민중들의 반란, 민중들에 대한 귀족들의 혐오감, 민중들의 이중성과 가벼움, 그러한 민중의 속성을 이용하려는 세력, 그 세력과 귀족들의 대립, 민중과 대립했던 귀족의 몰락, 그 귀족이 취한 적과의 동맹, 그 동맹 안에서 다시 벌어지는 계략과 그로 인한 죽음 등 이 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인 톤을 유지한다. (P.268)

 

공화정이 곧 민주정을 지칭하지 않는다. 로마 공화정은 형식적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아 실제로 귀족이 통치하는 체제다. 최고 통치자인 집정관이 되려면 민중 앞에서 유세하고 표를 줄 것을 호소하는 모습이 흡사 오늘날의 선거와 유사하다. 시장이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전통시장을 돌아다니며 상인들 각자에게 깊은 관심과 동정을 기울이는 체한다. 실제로 관심 없고 하기 싫어도 겉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코스다. 고대 로마의 귀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뭐 민중들의 안위와 생활에 큰 관심이 있겠는가. 그랬다면 기근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구제를 위해 식량을 풀었을 테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여기에 앞장선 이가 바로 마르티우스, 훗날 코리올라누스다.

 

마르티우스에 대한 평가는 내외가 일치한다. 고결하고 도도하며 지극히 오만하다는 점. 전자는 귀족들 내부의 평가이며 후자는 호민관의 생각이다. 그는 민중들을 대놓고 혐오하며, 이것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그는 다른 귀족보다 솔직한 셈이다.

 

(마르티우스) 전쟁은 두려워하면서도 평화롭게 살게 해 주니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냐 이 미천한 똥개 같은 놈아. (P.27, 11)

 

(마르티우스) 목매달아 죽여도 시원치 않은 놈들 같으니! (P.29, 11)

 

(코리올라누스) 이 똥개 같은 놈들! 나는 너희가 숨 쉴 때마다 풍기는 악취를 혐오한다. (P.169, 33)

 

그의 반민중관의 가장 압권은 31장에서 나타난다.

 

(코리올라누스)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저 변덕스럽고 시궁창 내 풍기는 종자들에게 똑똑히 들려주어서 제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똑똑히 알게 해줘야겠습니다. 내 다시 말하지만 저딴 놈들에게 알랑방귀를 뀌어대며 우리 귀족들과 어우러져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애써 일군 땅에 폭동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P.129, 31)

 

(코리올라누스) 또다시 민중들에게 양보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정의는 그 가치를 잃고 말 것이요, 로마는 건전한 원칙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P.134, 31)

 

이 희곡에서 코리올라누스가 내뱉는 대사의 대부분은 이렇듯 민중을 폄하하고 혐오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귀족들의 속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솔직하지만, 집정관이 되기 위해서는 낙제점이다. 모름지기 정치의 요체는 가면을 쓰는 데 있지 않은가. 그의 어머니 블룸니아의 말처럼 말이다. 그의 명예와 고결은 철저히 개인 중심주의에 근거하였다고 보는 게 맞다. 그토록 모친에게 순종적이던 그가 여기서는 그의 어머니 말을 좇는 데 실패하였으니.

 

코리올라누스가 진정으로 고결한 사람이라면 로마를 증오하고, 로마에 복수하고자 하는 반역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는 유아독존적인 독선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반사회적인 행위조차도 서슴없이 자행하였으니 그에게 있어 고결함이란 목적이 아닌 도구 또는 수단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코리올라누스) 난 단지 나를 내쫓은 자들에게 내 이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주고자 이곳에 왔소. 허니 만약 그대가 그동안 그대의 원한을 풀고 조국의 치욕을 씻고 싶은 복수심을 키워왔다면, 나의 이 비참한 처지를 이용하여 나를 그대의 편에 서게 하시오. 나는 지옥 불처럼 끓는 분노심을 가지고 나의 조국과의 싸움에 임할 것이니, 조국에 대한 나의 증오는 그대에겐 이득이 될 터. (P.193, 45)

 

앞서 읽은 <줄리어스 시저>가 군주정과 공화정의 대립을 다룬다면, 이 작품은 귀족정과 민주정의 갈등을 제재로 한다. 민중의 표변성과 우매성은 새삼스럽지 않다. 전작에서 이미 폼페이를 잊은 민중에 대한 비난이 있었듯이, 수백 년 더 이전을 다룬 여기에서도 민중은 코리올라누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지만 곧 그를 민중의 적으로 내쫓는다. 내놓고 자신들을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사람을 제아무리 바보라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두 사람의 호민관, 시씨니우스와 브루투스는 민중과 코리올라누스의 관계 설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정적을 제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작가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지만 호민관의 입김에 휘둘리기 쉬운 민중의 작태를 보면 민주정이 중우정으로 타락하는 것은 한순간임을 알 수 있다. 정상적인 선거로 집권한 후 독재와 전체주의를 강화한 역사적 사례를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오늘날 영국 사회에 여전히 명목상의 귀족 신분이 존재하지만 실질이 없다면 당대는 명백한 신분제 사회였다. 군주-귀족-평민으로 구분되는 신분 질서에서 귀족과 평민이 단합하여 군주의 권력을 약화시켰지만, 귀족과 평민의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불 속에 던져진 숯처럼”(P.181, 43)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양 계급의 대치가 빚어내는 잠재적 위험과 비극을 코리올라누스의 행적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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