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 - 전예원세계문학선 셰익스피어 전집 14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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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시저>의 속편 격이다. 시저 사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앤토니]의 협력과 반목, 그리고 대결을 다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안토니우스의 패배와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는 로마제국의 실질적 성립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안토니우스 부인이 일으킨 내전, 삼두정치, 아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 그리고 유명한 악티움 해전,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내용상으로도 분량상으로도 작품의 중추를 이루면서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으므로 당대 로마사를 희곡으로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역사극으로 간주할 만하다.

 

셰익스피어는 굳이 작품명에서 앤토니와 옥타비아누스가 아닌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택하였다. 작가가 이 작품을 단순히 역사극이 아닌 두 사람의 관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앤토니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동맹이자 연인 관계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앤토니와 손을 잡은 이유는 당초 이집트의 보전에 있었다. 그리고 앤토니의 인간적 매력에 사적 관계로 발전할 것이다. 물론 앤토니는 클레오파트라의 여성적 매력에 애초부터 매혹당하였을 것이고.

 

(미시너스) 이제 앤토니 장군은 그 여인을 버려야 할 거요.

(이노바버스) 천만의 말씀. 버릴 수 없지. 나이를 먹어도 시들지 않고 사귀면 사귈수록 익힌 재주가 무궁무진하여 그녀는 항상 새로운 변화를 보이는걸. 다른 여자들은 남자에게 만족을 주고 나면 염증을 받게 마련인데, 여왕은 가장 포식했을 때 더더욱 욕구를 느끼게 하는 거지. 세상에서 가장 야비한 짓도 여왕이 하면 좋게만 보이고, 그래서 거룩한 사제들도 그녀의 방종만은 오히려 축복한다 이 말이지. (P.64, 22)

 

작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완전한 사랑과 화합보다는 다소간 애증의 관점으로 묘사한다. 앤토니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푹 빠져 있지만, 그녀를 심적으로 진정 사랑하기보다는 애욕적 차원이었음을 곳곳에서 표출한다. 그녀와의 관계와 생활을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어떡하든지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결혼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이참에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는 내심도 있었으리라. 앤토니가 마지막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재차 도주에 퍼붓는 욕은 단순한 패전의 실망감 탓은 아닐 것이다.

 

(앤토니) 내 마음을 홀리는 요부 같은 여왕과는 손을 끊어야 해. 나의 이 타락한 생활을 상상도 못할 무수한 해악을 빚어낼 거다. (P.31, 12)

 

(앤토니) 모든 것이 끝장이다! 그 더러운 이집트 년이 날 배반했어. 내 함대는 모두 적에게 투항하고 거기서 모자들을 높이 던지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함께 축배를 들며 야단들이다. 세 번씩이나 사내를 갈아치운 화냥년! 저 애송이 놈에게 날 팔아먹었겠다. 내 마음은 너에 대한 증오뿐이다. [......] 난 배신을 당했다. , 이 부정한 이집트 년! 이 지독한 화냥년! 그년의 눈짓 하나로 아군을 전쟁터로 몰아내고 끌어들이고 했잖은가. 그 여자의 가슴은 나의 면류관이요, 나의 목적이었거늘-집시의 본성을 드러내, 술책을 써서 날 속여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처넣었다. (P.160-161, 412)

 

앤토니는 그럼에도 클레오파트라를 놓지 못한다. 그를 향한 그녀의 애정은 한결같았고, 그녀가 없이는 그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에 자살을 감행한 앤토니가 아니었는가.

 

이 작품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보다는 앤토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일개 여인으로 비친다. 그녀는 시저에 대한 애정은 풋내기의 것이었고 지금 앤토니와의 사랑이 여인으로서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밝힌다. 클레오파트라가 보기에 앤토니는 더없이 고결하고 용맹하고 이지가 조화된 완벽한 인간이다. 그녀가 앤토니의 부인 펄비어의 사신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앤토니와 새로 결혼한 옥테이비어에 경쟁심과 질투심을 보이는 대목은 역설적으로 앤토니에 대한 그녀의 애정 정도를 보여준다.

 

(클레오파트라) , 어쩌면 그렇게도 균형이 잡힌 성품이실까! 봐라, 차미언, 그게 바로 그분이시다. [......] 하지만 두 가지의 중간이란 참으로 훌륭한 조화시다! , 참으로 신묘한 천품이시다! (P.47-48, 15)

 

(클레오파트라) 하지만 그런 분이 실지로 있다 하더라도 또 과거에 있었다 하더라도 도저히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큰 인물이오. 불가사의한 힘을 창조해내는 힘은 자연이라도 공상을 따를 수는 없는 법, 그래도 앤토니 같은 분은 공상에 도전한 자연의 걸작이며 꿈의 그림자를 압도하고 남는 분이에요. (P.187, 52)

 

문제는 앤토니가 클레오파트라에 푹 빠져 있다는 점에 있다. 앤토니는 명성, 경력, 군사, 재력 등 모든 측면에서 옥타비아누스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일거에 동원하였다면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는 이름이 바뀌었을 것임에도 앤토니는 이집트에서 미적거리며 벗어나지 않았다. 이집트가 당대 로마의 시각에서 보면 머나먼 변방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한 셈이다.

 

(앤토니) 이집트 여왕이여, 내 마음이 당신 배의 키에 꽁꽁 묶여 있었소. 그래서 끌려갈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오. 내 영혼은 완전히 당신의 종이 되어 당신이 눈짓만 해도 신의 명령이라도 물리치고 당신에게로 달려간다는 걸 당신은 알았을 거요. (P.122, 311)

 

악티움 해전의 결전에서 앤토니 군은 그야말로 대패를 겪는다. 클레오파트라의 후퇴와 잇따른 앤토니의 철수로 제대로 된 대전도 하지 못한 채 불명예스러운 패배를 겪게 되었는데, 후폭풍이 어마어마해서 부하들의 불만과 이탈이 뒤따르게 된다. 군사적 역량과 재능에서 남다른 우위에 있었던 앤토니지만 이제 그의 우위가 소멸하고 만 셈이다.

 

(스캐어러스) 계집이 뱃머리를 바람 부는 쪽으로 돌리자마자 그 계집에게 혼을 뺏긴 앤토니는 돛을 펄럭거리면서 암컷에 반한 수오리처럼 치열한 전투를 팽개치고 여왕을 뒤따라 달아났다구. 이런 수치스런 전쟁은 내 일평생을 두고 본 일이 없소. 전투의 경험과 남자의 기개와 명예를 그렇게 더럽히다니. (P.118, 310)

 

극 중에서는 강점을 지닌 육전을 주장하는 부하 장수의 의견을 무릅쓰고 해전을 감행하는 그의 무모함과, 지나친 공을 세우는 부하의 위험성을 설파하는 수하 벤티디어스의 의견을 통해 그의 결점을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이노바버스의 배반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넓은 아량과, 명예와 고결함에 대한 자신과 타인의 공통된 칭송을 통해 그의 미덕도 알려준다. 특히 이노바버스의 충성과 배반, 그리고 자책에 따른 죽음은 약점과 강점을 고루 갖춘 앤토니의 인간적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다.

 

앤토니와 옥타비아누스의 역사적 대결을 생각하다 보니 중국 역사에서 항우와 유방의 일대 사건이 저절로 비교된다. 양자는 여러 면에서 유사점을 지닌다. 우선 승리자는 후대 제국의 시초가 되었다, 로마제국과 한 제국. 초반 형세와 탁월한 개인적 능력만을 놓고 보면 승리자보다는 패배자가 된 앤토니와 항우가 우세하였다는 점. 시저를 살해한 브루투스 일파를 제거하고 사태를 장악한 인물은 앤토니였고, 용맹, 지위와 세력 모든 면에서 그는 옥타비아누스보다 압도적이었다. 항우는 두말할 나위 없다. 옥타비아누스와 유방은 자신의 개인적 능력보다는 부하들의 역량에 많이 의존하였는데, 이들을 잘 아우르고 부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능력이 빼어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 항우와 우미인은 모두 연인과 더불어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다는 점도 그러하다.

 

(시저) 이 세상의 어떤 무덤도 이렇게 고명한 한 쌍을 품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비참한 사건은 그 사건을 일으킨 자에게 큰 감동을 주는 법.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비극을 빚어낸 승리자의 영광이기도 하겠으나 온 세상의 영원한 동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P.200, 52)

 

경쟁자의 최후를 바라보는 승리자의 개인적 소회일 수도 있으며 패배자에 대한 배려가 담긴 발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시신을 앞에 둔 옥타비아누스의 마음도 복잡다단할 것이다. 홀가분하면서도 허탈한 심경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 전망에 대한 기대감 등등. 어쨌든 그로서는 이제 승리자의 아량을 보여주지 않을 이유가 없으리라.

 

셰익스피어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보다 앤토니에게 더욱 깊은 관심과 연민을 보인다. 결점과 미덕을 골고루 보여주어 그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도 않으며, 전설적인 패배자로서 영웅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권력과 사랑 사이에서 죽음에 이르러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 한 인물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 스스로의 말마따나 앤토니는 시저에게 패배당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정복당하였다. 보기 드문 영웅이 지닌 유일한 결점, 즉 한 여인을 향한 깊은 사랑 때문에. 독자는 그런 앤토니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의 약점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회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며, 그것이 인간 사회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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