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늪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르주 상드 지음, 이재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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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상드의 전원소설 중 하나다. 으스스한 표제와는 달리 내용은 지극히 전원적이고 단선적이다. 남녀 주인공의 결혼, 시골 배경이라는 점에서 먼저 읽은 <사랑의 요정 파데트>와 공통점을 지닌다. 다만 순수하고 흐뭇함을 자아내는 정도에서 전자에 다소 못 미치는데, 주인공의 연령 차이가 결정적이다. 제르맹은 스물여덟 나이에, 애 셋이 딸린 홀아비다. 마리는 방년 십육 세의 처녀다. 누가 봐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조건, 게다가 마리는 애초에 나이 많은 사람을 배우자감으로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제르맹을 동네 아저씨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양치기로 가는 길에 제르맹과 동행하였으며, 못된 농장 주인으로부터 달아나는 길에 제르맹의 도움이 없었다면 곤욕을 치를 뻔하였다.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구원해 준 남자에게 아무래도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마리의 어려운 집안 살림을 알고 제르맹은 남모르게 식량을 구원해준다. 마리 입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제르맹과의 결혼을 받아들이게끔 상황이 돌아갔다. 마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노모의 생계도 고려해야 한다. 제르맹은 마을에서 부농에 속한다. 솔직히 독자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마리는 선택의 여지 없이 제르맹과 결혼하는 게 당연하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작가와 제르맹이 짜놓은 거미줄에 걸린 마리는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다.

 

여기까지가 삐딱한 독자의 관점이라면 사랑과 결혼에는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마리는 제르맹의 호의를 마다할 수 있고, 그의 청혼에 명확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녀가 결국 제르맹을 남편감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대에 연령차가 많은 혼인이 없지 않았으며, 마리와 제르맹의 나이 차는 띠동갑이니 요새만 해도 허용되는 수준이다. 게다가 그녀는 제르맹의 인성을 직접 보고 겪었으니 오판할 여지도 적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가 홀바인의 판화와 한 농부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소박한 시골 생활과 풍습을 그리려고 했다고 밝힌다. 미안스럽게도 엄청나게 감동적이거나 순박함을 느끼지 못하는데, 단순하고 직선적이며 인위적인 작품 전개가 감동을 깎아 먹는다. 그럼에도 상드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우리는 예술의 사명을 정서와 사랑의 전도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소설은 평화롭던 시대의 비유와 우화를 다시 부활시켜야 하며, 그것들의 묘사에서 발생하는 공포를 덜어주기 위해 예술가는 조심성과 화해의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하는 것보다 더 중대하고 더 시적인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P.11)

 

제르맹에게 맞닥뜨린 게랭 미망인과 마리는 양극단의 전형이다. 부유하고 도시적이며 세련된 데다 허영과 교태를 부리며 구애자들을 거느리는 걸 자랑하는 미망인과, 찢어질 듯 가난하며 순박한 시골 처녀. 제르맹은 마의 늪에서 길을 잃고 하룻밤을 보내는 과정에서 마리의 아름다움과 영리함, 따뜻한 마음씨를 발견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애를 기분 좋게 잘 돌보는 태도에서 아빠로서 고마움과 애정을 품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안개는 더욱더 자욱해지고, 달은 완전히 가려졌다. 길은 몹시 험했으며 물웅덩이는 깊었다. (P.60)

 

귀신이 출몰하는 불길한 장소로 기술되는 마의 늪은 작중에서 사건의 전개와 반전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늪에서 헤매고 노숙하는 과정에서 제르맹과 마리는 서로의 속마음을 주고받는 친밀한 관계에 이른다. 나중에 못된 농장 주인에게 쫓기는 마리를 늪 근처의 숲에서 구해낸다. 이로써 제르맹은 마리에게 있어 은인이자 구원자의 지위로 올라선다.

 

가엾은 마리, 넌 마음씨가 착해. 난 그걸 알아. 그러나 넌 날 사랑하진 않지. 그리고 네가 불쾌해하고 싫어하는 것을 내가 알까 봐 얼굴을 내게 숨기는 것이지.” (P.137)

 

두 사람의 결합은 조심스럽지만 급격하게 이루어진다. 절망에 휩싸인 채 부르짖는 제르맹의 외침과, 그에 대한 사랑을 문득 토로하는 마리의 고백은 해피엔딩의 대단원이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싶은 독자라면 이어지는 작가의 <부록> 편을 보자.

 

소설 본문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대목은 실상 <부록>에 있다. 시골 결혼식, 색 리본, 결혼식, 양배추라는 소제목을 각각 달고 있는데, 거칠게 말하자면 제르맹과 마리의 결혼을 통해 본 시골의 결혼 풍습 소개다. 삼굿장이와 무덤 파는 사람이 이끄는 신부와 신랑 무리의 팽팽한 대결은 마치 우리네 함잡이의 짓궂은 장난을 연상시킨다. 특히 삼굿장이는 전통문화의 보존과 전승에 중대한 존재임을 작가는 강조한다.

 

결혼식에서 색 리본을 나눠주거나 풍성한 양배추를 지붕 꼭대기에 올려놓는 관습은 이채롭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산(多産)의 기원이었음을 알게 된다. 신성한 양배추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유일하게 멍청한 주정뱅이라는 점은 문득 디오니소스와의 연관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제르맹의 기쁨의 아침기도.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상정한 가장 단순하고 순박하며 아름다우면서도 순결한 전원의 장면이리라.

 

[제르맹]는 자신이 갈다 놓아둔 밭고랑에서 무릎을 꿇고, 땀으로 아직도 축축한 뺨 위로 흘러내리는 두 줄기 눈물만큼이나 고귀한 심정으로 아침기도를 드렸다.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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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의 여왕 - 베스트세계문학 18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 신원문화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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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록작품>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베르킹 이야기 [벨킨 이야기]

에프게니 오네긴

석상 손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푸쉬킨의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종래 그는 내게 별다른 감흥을 남기지 않아 외면하고 있었는데 <루슬란과 류드밀라> 이후 본격적으로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 처음에는 새 책 새 번역본으로 시작할 생각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30년 전 구입했던 이 책이 서가 구석에서 자신을 잊지 말라고 애원하는 눈빛을 차마 외면하기 어려웠다. 500여 면에 이르는 두툼함, 살짝 작은 크기 활자의 빽빽함. 요즘은 보통 세 권 정도로 분책하게 마련인데 이를 한 권에 몰아넣었다. 시대적 간극으로 요즘 어휘와 문체와 다른 점은 애교로 넘어간다. 두 편의 희곡 <석상 손님><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감상은 다음 기회로 넘기고 여기서는 소설 작품에 집중한다.

 

1. 스페이드의 여왕

 

일생을 한판에 걸었는데, 그것이 실패했다면 제정신이 불가능하리라. 겔만의 탐욕과 파멸에 쉽사리 돌멩이를 던지지 못함은 우리도 본성에서는 겔만과 마찬가지여서다. 매주 인생 역전을 꿈꾸며 소심하게 번호를 맞추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도저히 부의 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면 누구나 비상한 방안을 찾기 마련이다. 겔만처럼 절대 필승의 카드 패를 알 수 있다면 나 같아도 주저 없이 올인하겠다. 다만 그의 잘못은 백작 부인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이며, 순진한 리자베타를 기만한 점이다. 전자는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핑계라도 대겠지만 후자는 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한 도구로 속여넘긴 것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꿈속에 백작 부인의 본의 아닌 등장과 소원을 풀어주라는 분부는 결국 겔만의 탐욕과 부도덕성을 징벌하기 위한 장치였다.

 

2. 대위의 딸

 

분량으로는 경장편, 내용으로는 역사소설에 해당한다. 군더더기 없는 진행으로 분량에 비해 내용적 밀도는 여느 장편소설 못지않게 짙다. 예전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이 작품의 미덕이다. 푸가초프의 반란과 그리뇨프와 마리아의 사랑을 병치시키면서 두 연인 사이에 개입하는 악인 슈바브린의 존재가 팽팽한 긴장감을 일으킨다.

 

슈바브린의 악인성은 독자 누구나 동의하지만, 푸가초프는 작중에서 악인과 영웅 사이의 모호한 경계선상에 놓여있다. 지배층을 위협하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혔으니 분명 악인이지만, 그가 그리뇨프에게 나타내는 인정미와 반란군의 수장으로서 보여주는 위엄과 당당한 태도는 분명 예사 인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무서운 인간이고 냉혈한이며, 악당이었던 이 사내와의 이별에 있어서 내가 품고 있었던 기분을 분명하게 기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찌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156)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행보 외에 주목할 점은 하인 사베리치의 충정이다. 그리뇨프에게 고집스러울 정도로 충정을 바치는 그는 일면 엉뚱하다는 면에서 작중에서 유일하게 희극적 역할을 맡아 작품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다. 그가 주인공과 주인에게 취급되는 대우를 생각하면 제아무리 미화해도 당대 러시아 계급사회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다.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지만 푸쉬킨은 여기에서 러시아 국토의 아름답고 쓸쓸한 분위기를 한껏 나타낸다. 푸가초프 반란과 진압 과정에서 발발한 민중의 고초와 참상에 대해서도 검열을 의식해서인지 간단하나마 지나치지 않는다. 이는 그가 당대 러시아 사회의 현실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까다로운 독자라면 이 소설의 커다란 흠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지나친 우연의 남발. 주인공과 푸가초프의 만남, 주인공과 즈린 소령의 만남, 결정적으로 여주인공과 여왕 폐하의 우연한 만남이 그러하다. 작가의 지나친 개입은 작품 서사의 사실성을 약화시키고 전개와 결말의 설득력을 떨어뜨려 동화와도 같은 인상을 남기는 단초를 제공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작품에 품은 깊은 감명의 끈을 도저히 놓고 싶지 않다.

 

3. 베르킹 이야기

 

이는 사격’, ‘눈보라’, ‘장의사’, ‘역장’, ‘가짜 평민의 딸이라는 다섯 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표면적으로는 베르킹[벨킨]이라는 인물이 남긴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수록작에 일관된 주제 의식을 찾기는 어렵지만, 억지로 찾자면 일상적이거나 평범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유사성을 보여준다.

 

사격은 진정한 용맹성의 의의를 되새긴다. 자신 외에 아무런 책임질 게 없을 때의 목숨과 사랑하는 약혼녀를 포기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목숨을 앞에 두고 똑같은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실비오는 백작을 쏘지 않았지만 쏘지 않음으로써 쏘았을 때보다 더한 사격 효과를 거두었다.

 

눈보라는 눈보라가 일으킨 두 연인의 애꿎은 엇갈림을 통해 운명의 의의를 새삼 상기시킨다. 마리아는 브라지밀과 야반도주하여 비밀 결혼식을 치르기로 하였다. 심한 눈보라는 브라지밀을 낯선 곳으로 이끌고, 그녀가 교회에서 결혼 의례를 치른 인물은 생면부지의 낯선 남자. 그녀는 처녀지만 유부녀가 되었고, 상대방은 총각이지만 유부남이 되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른 채 눈보라는 이들을 다른 운명과 장소로로 인도하였다. 그래도 불민과 마리아는 우연히 해후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리라. 브라지밀은 후반부에서는 아예 잊힌 존재가 되었으니 참으로 불쌍하다.

 

장의사는 심령과 괴기를 다룬 단편이다. 장사가 잘되어 번듯한 집으로 이사한 장의사. 망자와 환자가 넘칠수록 장의사와 의사는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들에게 우리는 부자 되세요! 하고 일말의 거리낌 없이 축사를 전할 수 있는지. 장의사의 성공은 전적으로 망자들의 덕택이다. 그러면 이사 턱을 베풀고 감사를 표할 대상은 생자가 아닌 망자임이 마땅하다. 우리의 장의사는 망령들을 초대한다.

 

역장은 딸을 빼앗긴 역장의 삶을 통해 러시아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예쁜 처녀에게 마음을 뺏긴 귀족이 그녀와 함께 몰래 떠날 수 있음은 그럴 수 있다고 양보하자. 딸을 찾아 수소문하다 간신히 귀족을 찾아간 역장을 대하는 귀족은 지극히 고압적이고 폭압적이다. 도니야의 아버지를 냉대하고 내쫓는다. 그에게 도니야는 어떤 가치를 지닌 사람인가? 정식 부인은 당연히 아닐 테고 결국 첩에 지나지 않으리라. 아무리 성장을 갖추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더라도 그녀의 삶은 참다운 행복이 아니기에 역장의 탄식과 슬픔에 마음이 아프게 다가온다.

 

가짜 평민의 딸은 반대로 희극적이다. 이를 오페레타나 뮤지컬로 만든다면 꽤나 흥미진진한 작품이 탄생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뜻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게 하지만 적대적인 두 아버지는 꼬리 잘린 암말의 덕택으로 화해와 우정의 길로 나아간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당사자인 알렉세이와 리자는 당황한다. 알렉세이는 리자를 하녀 아쿠리나로 알고 있기에 리자와의 결혼이 탐탁지 않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와는 달리 푸쉬킨은 해피엔딩을 지향한다.

 

4. 에프게니 오네긴

 

이 작품은 푸쉬킨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완성에 오랜 시간이 소요된 운문 소설이다. 푸쉬킨의 대표작은 산문 소설로 <대위의 딸>, 운문 소설로 이 작품을 꼽는다. 작가 자신이 이미 시인으로 유명하므로 시 형식으로 소설을 쓰는 게 낯설지는 않다. 서사시와 유사하므로. 산문 대신 굳이 운문을 택한 까닭은 오네긴과 타치아나, 오네긴과 브라지밀의 관계는 <대위의 딸>과 달리 극적인 서사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차라리 시적 분위기와 정서를 자아내고 유장한 미를 추구한 게 아닐까 추측한다.

 

오네긴은 훗날 오블로모프로 극단적으로 정형화된 잉여 인간의 부류에 가깝다. 푸쉬킨의 오네긴은 레르몬토프의 페초린과 일맥상통한다. 방탕과 냉소와 환멸에 빠진 귀족 자제. 타고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지 않은 채 세상과 삶을 겉도는 인물이다. 무관심, 하품, 싫증 등이 오네긴을 표상하는 어휘들이다. 부족이 아니라 넘칠 정도로 과도함이 오히려 호기심과 관심을 떨어내듯 말이다.

 

어떻든 그녀 이름은 타치아나. / 동생 오리가와는 정반대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얼굴에 / 장밋빛의 싱싱한 맛도 없다. 반기지도 않고 우울하고 말도 없고 / 숲에 사는 수사슴처럼 겁이 많고 / 부모 곁에 살면서도 말 한 마디 못하고 묵묵하기만 했다. (P.311, 2)

 

세련된 도시 귀족 청년의 눈에 촌스러운 시골 아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음은 당연하다. 타치아나의 일방적 사랑에 오네긴이 반드시 응해야 할 책임은 없다. 오네긴에게 보내는 그녀의 장문의 편지를 읽고 오네긴이 아무 반응 없는 까닭,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보이는 정중한 구애의 거절을 갖고 우리는 오네긴을 비난할 수 없다. 원래 사랑은 공평하지 않기 마련이기에 사랑의 실연은 문학의 오랜 제재 아니던가. 그녀의 편지에서 우리는 차라리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시골 외딴곳에서 영원히 갇혀 지내는 삶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구애의 거절로 두 사람 사이가 일단락되었으면 좋겠지만, 오네긴의 괴팍함 덕택에 브라지밀은 결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여러 면에서 오네긴과 브라지밀은 대조적이다. 냉정과 열정, 무관심과 사랑. 항상 아쉬워하지만 양극단이 조화를 이루어 중용이 되었으면 모두가 좋았을 텐데. 이 소설에서 유난히 강조되는 장면은 러시아 시골의 전원 풍경이다. 외지고 척박하고 황량한 대지가 아니다. 자연과 평화와 소박한 삶이 한데 어우러진 러시아의 근원이라고 할 만하다. 타치아나가 숨 막힌 사교계와 도시 생활에 진저리 내고 끊임없이 시골과 고향을 희구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훗날 세련된 귀부인이 된 타치아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 오네긴. 이는 전반부에 대한 완벽한 패러디다. 그 실례가 앞과는 달리 타치아나에게 보내는 오네긴의 편지다. 작가는 이 대목에서 탄식한다. 잃어버린 것의 소중한 가치를 뒤늦게야 발견하는 가련한 인간들이여. 에덴동산의 이브가 그러하듯 우리는 눈앞의 것보다 멀리 떨어진 닿을 수 없고 가져서는 안 되는 금단의 열매에 마음이 끌린다. 그게 인간의 숙명이다.

 

오네긴이 진작에 타치아나의 마음을 수락하였다면 많은 슬픔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오네긴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순간에 없어지겠는가. 그럼에도 타치아나는 현재의 남편에게 충실할 것을 새삼 각오한다. 비록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그녀의 본분임을 잘 알기에. 우리는 그녀의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일말의 아쉬움은 있겠지만 대놓고 불륜하라고 떠밀 수는 없는 법. 오히려 오네긴의 뒤늦은 각성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 경쾌했던 나의 청춘이여! / 즐거움 슬픔 달콤한 괴로움이나 시끄러움, 폭풍우, 멋진 연회석상 / 모든 것에 네가 보내 준 모든 것에 나는 감사드린다. / 오로지 너를 받아들였다...마음껏. 그것으로 됐다! (P.389, 6)

 

작가는 오네긴의 실패를 이렇게 해석한다. 눈부신 청춘은 찰나에 불과하다. 기쁜 마음으로 진심으로 청춘의 봄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우물쭈물 망설이면 어느덧 봄날은 가고 만다. 환멸과 권태에 빠지지 말고 사랑과 열정의 소박함을 맞이해라. 화려한 꾸밈과 겉멋에 속지 않고 소박함과 수수함의 미덕을 발견할 수 있다면 참다운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

 

왜 지난날엔 푸쉬킨 작품의 아름다움과 맛을 찾지 못하였을까. 문장 한줄 한줄, 단락 한 마디마다 새록새록 기쁨과 즐거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당시 나는 푸쉬킨을 이해하기에는 좀 어렸나 보다. 빙하가 장구한 세월을 거쳐 암석을 깎아내듯 시간과 경험의 무게가 푸쉬킨에 덧씌운 외피를 벗겨내니 비로소 그의 내면과 속살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저 위안 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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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
M. T. 앤더슨 지음, 장호연 옮김 / 돌베개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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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의 교향곡 매니아 사이에는 BMS라는 작곡가 약칭이 있다. 브루크너, 말러, 쇼스타코비치가 그것이다. 중후장대하고 강렬하며 극적인 대편성 교향곡의 묘미를 한껏 누릴 수 있는 작품들을 이 세 사람은 남겼다. 저자가 이 책에서 천착하는 것은 바로 쇼스타코비치다.

 

쇼스타코비치의 삶은 서양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같이한다. 볼셰비키 혁명과 스탈린의 공포정치, 2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냉전 시대까지. 게다가 그는 당대의 가장 저명한 작곡가로서 언제나 당국의 예의주시 대상이었다. 정권은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찬양과 비판을 번갈아 하며 그를 본보기로 삼아 예술계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표면적인 쇼스타코비치의 태도는 공산주의에 순응하는 전형적인 소비에트인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뒤바뀌게 된 계기는 볼코프의 <증언>이 발표된 이후로 스탈린 정권에 반항적이고 냉소적인 쇼스타코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과연 증언이 쇼스타코비치의 목소리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다.

 

이 책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그의 7번 교향곡, 일명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다. 이 곡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소전쟁에서 독일에 의한 레닌그라드 포위전 와중에 쓴 작품이다. 70분에 육박하는 장대함,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나타나는 강렬함과 심각함 등이 어우러져 압권을 이루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무엇보다 이 교향곡은 작품 전후, 그리고 서방 초연을 위한 소련과 미국의 협업 등의 음악 이외 요소로 더욱 대중의 흥미를 끈다.

 

이 책은 20세기 전반기 소비에트 사회와 예술을 다룬 역사서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이면서 쇼스타코비치의 간략한 전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 중심에는 전쟁 한복판에서 이 교향곡이 만들어지고 전달되고 연주되고 사람들에게 힘을 준 이야기가 있다. (P.498, 옮긴이의 말)

 

예술작품은 작가와 시대와 동떨어져 난데없이 뚝 떨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레닌그라드 전투의 성격을 알려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배경, 나아가 나치와 볼셰비키 정권의 탄생과 본질에 대해서도 다가갈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음악 이야기이지만, 음악을 둘러싼 인간과 사회, 역사를 다룬 다큐에 더 가깝다.

 

쇼스타코비치 애호가라면 그가 스탈린 정권에 의해 박해받은 사실을 알고 있다. 5번 교향곡의 성공으로 1930년대의 대공포 시대라는 1차 위기를 넘겼고, 7번 교향곡으로 스탈린 정권의 생명 연장에 기여하였지만, 전후인 1948년 형식주의 비판은 통과하지 못하였다.

 

1948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금지되었다. 그해 가을에 그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모아둔 돈이 떨어지자 그는 스탈린을 칭송하는 영화들의 음악을 작곡하며 돈을 벌었다. (P.477)

 

당대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저 그러려니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은 스탈린의 공포주의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를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몇백만 사람의 목숨을 깃털처럼 가볍게 여겼다. 반체제라고 의심하면 저명한 지식인, 예술가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거나 유형에 처해졌다. 개인뿐만 아니라 일가족 모두가. 오늘은 무사하더라도 내일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살아가야 했다. 제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혹자는 그가 더 당당하게 정권에 맞섰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전설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보통의, 평범한 소시민이다. 축구에 열광하고, 친구들과 예술에 대하여 교류하며 우정을 나누는 그.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 부모와 친척들을 지켜야 할 의무와 본분이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쇼스타코비치는 예술세계에 가려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그의 인간적 면모다.

 

아쉽게도 우리는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할 수 없다. 그의 공식적인 발언은 시대의 압력을 감안해야 하며, 볼코프의 증언은 진의를 알 수 없고, 후대 친척과 지인의 회상은 오염과 과장을 감내해야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일체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으리라. 그렇기에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생각과 감정을 추정하려는 시도가 나오게 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시기에 자신의 감정에 대해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일기 때문에 누군가가 투옥되고, 편지 때문에 누군가가 총살되는 시대였다. (P.151)

 

그의 삶은 스탈린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작곡가로서 그의 주활동기는 스탈린 집권 시대와 정확히 맞물린다. 아니 그의 삶 전체는 공산주의 혁명의 발발로부터 시작하여 냉전과 데탕트, 신냉전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소비에트와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제아무리 속마음은 다를 수 있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 체득한 분위기까지 고려한다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그의 작품 바탕에 깔려있음을 외면하기 어렵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레닌그라드 전투의 배경과 발발, 전개 과정을 통해 비로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관계, 독소전쟁이 불가피하였고 레닌그라드의 처절한 비극이 생긴 까닭은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반복해서 말했듯이 레닌그라드는 스탈린에 의해 이미 짓밟혀졌고, 나치는 이를 마무리하려고 덤벼든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탈린은 전쟁에 앞서 레닌그라드, 나아가 소련 전체의 국방력을 불구로 만들었고, 나치 침공을 자초하였으니.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다.” 한 여성이 일기에 썼다. “우리는 쥐덫에 걸렸다.”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으로 기록되는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쇼스타코비치 가족은 다른 250만 명과 함께 덫에 걸려들었다. (P.274)

 

나치의 전략이 잔인하지만 지능적이며 효율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전투를 피하고 포위한 채 인명과 물자 유통을 끊어버림으로써 아사시키는 작전을 썼다. 레닌그라드는 스스로 포위를 풀 역량이 없었고, 스탈린은 외부에서 독일군을 무너뜨릴 힘이 없었다. 딱한 것은 레닌그라드 주민들뿐. 이 책은 포위된 채 굶어 죽어가는 도시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한다. 전쟁 자체가 비인간적이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이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없이 비인간적이다. 그 극치는 바로 인육을 먹는 사람들과,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사냥하는 무리들이다. 하지만 이 책은 반대로 극한상황에서도 인간성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독일군에게 침을 뱉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땅에서 썩을 겁니다. 수십만, 수백만이 이미 썩고 있어요. 그에 반해 우리의 도시는 굳건하게 버티며,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일하고 시를 쓰고 러시아 노래를 부를 겁니다.” (P.392)

 

레닌그라드 교향곡이 이 책의 내용처럼 영미와 소련 간 동맹을 맺는데 정말 결정적인 기여를 했는지는 역사적 검토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서양에서의 연주를 위해 마이크로필름에 담긴 악보가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하면서 간신히 전달되는 역경은 자체로서도 극적이다.

 

이 책의 압권은 포위된 채 굶주림에 연주자들이 쓰러져 죽어가면서도 레닌그라드 초연을 감행하는 오케스트라와 그 연주를 듣기 위해 참석하는 시민들의 태도다. 그들에게 이는 단순한 교향곡과 연주회가 아니다. 생사를 넘나들며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바로 자신들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 교향곡을 듣고 열광한 다른 나라 사람들, 소련의 다른 지역 사람들과 차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감정으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이 음악을 와서 들으려고 이 순간까지 살아남은 것이니까요.” 그날 밤 공연장에 있었던 한 여성의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겪은 진짜 교향곡이었습니다. 우리의 교향곡, 레닌그라드 주민들의 교향곡입니다.” (P.450)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처럼 7번도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해석의 차가 분분하다. 공산주의의 승리, 나치의 패배 같은 전통적 해석에서 폭압적인 전체주의 일체에 대한 냉소로 보는 해석까지. 거기에 순음악적 접근도 가능하다. 단일한 정답은 없다. 문자적 언어가 아닌 음표로 표현된 음악은 폭넓은 의미를 포용한다.

 

이 책에서 결국 저자가 주목하는 것도 음악과 인간의 관계, 좀 더 명확히 한다면 극단적 상황에서도 용기를 부여하는 음악의 힘과 그것이 실증해 보이는 역사의 실례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파괴하는 음악은 참다운 음악이 아니다. 음악은 인간에게 기쁨과 위안과 용기를 주어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어야 한다. 저자가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 레닌그라드를 제재로 삼아 장대한 다큐를 쓴 의도 또한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는 음악의 힘과 의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은밀한 메시지들과 에두르는 말의 이야기, 암호로 작동하는 음악의 이야기,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을 견디도록 힘을 주고,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할 때 감옥 창살 사이로 속삭이게 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여 위안을 주는 음악의 이야기이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닥치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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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포네, 또는 여우 - 벤 존슨 희곡선 대산세계문학총서 42
벤 존슨 지음, 임이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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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존슨은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극작가다. 나이로 보면 살짝 후배에 가깝다. 오늘날 벤 존슨의 성가는 셰익스피어의 불후의 명성에 비해 매우 초라하다. 최초로 2절판 작품집을 출간하였으며, 사실상 최초의 계관시인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생전 그의 인기가 선배 못지않았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만만찮은 인물임을 짐작케 한다.

 

통상 그를 도시 희극의 대가라고 일컫는다. 주로 영국 런던이라고 하는 당대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중하층 계급의 삶, 특히 권력, , 섹스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상공업 발전에 따라 자본주의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적 상황에서 연극 향유 계층도 귀족에서 시민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궁정과 왕실보다는 자기네와 같은 서민들의 적나라한 삶에 동질감을 느꼈으며, 작가들은 도시적 삶에서 기존의 전통적 가치보다는 물욕과 금전욕 같은 일차원적 욕망이 팽배한 적나라한 사회 현실을 풍자하였다. 따라서 벤 존슨의 작품은 오히려 현대적이다.

 

존슨의 희극이 근래에 들어 재평가되고 무대에 자주 올려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존슨이 풍자하는 인간의 탐욕과 대도시의 생활상이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P.400)

 

이 책에 수록된 두 작품도 모두 희극이다. 사기꾼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속여 넘기는 내용에서 공통성을 띤다. 선량한 시민들이 사기꾼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까닭은 탐욕에 있다. 그들은 독신 부자 노인의 상속자가 되어 거액의 유산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또는 현자의 돌을 얻어 희대의 부를 누리려는 욕망 등과 같은 저마다의 욕심에 현혹당한다. 탐욕에 지배당하면 이성이 마비되고 판단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독자들이 보기에는 조잡하고 유치한 사기극에 그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빠져들고 도덕 윤리마저 쉽사리 내버리는 현실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선량함이 현명함과 반드시 대응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모스카) 그자들이 뭘 보려 해야 말이지요. / 불이 너무 많으면 눈이 어두워지는 법이에요. 각자 / 자기 자신의 희망에 가득 차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서는, / 자신의 희망과 반대되는 것은 / 그 이상 진실되고 명백할 수가 없고, / 그 이상 빤할 수가 없는데도, 그냥 거부하려는 거지요... (P.157, 52)

 

권선징악 또는 인과응보로 끝나는 결말에 우리는 대체로 익숙하다. 선인이 피해를 보고 몰락하는 것으로 끝나고 악인이 승승장구하면서 해피엔딩이 된다면 우리네 양심이 용납 못 한다. 이는 사회질서를 뿌리째 뒤흔드는 위험한 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속고 속이는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극 중의 악인은 불행을 당하거나 엄혹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볼포네>에서 사기의 주역인 볼포네와 모스카는 물론, 피해자라고 할 법한 볼보테, 코르바치오, 코르비노가 모두 처벌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 사유다. 그들이 헛된 욕심에 법과 윤리를 저버리는 행위를 해서다. <연금술사>는 약간 다르다. 사기의 세 주역 중 돌과 서틀은 아무 이득 없이 쫓겨나다시피 한다. 페이스, 즉 제레미는 간계를 부려 오히려 주인으로부터 한밑천을 단단히 잡게 된다. 역시 피해자인 매몬, 대퍼, 드러거와 트리뷸레이션 일행은 허망하게 재산만 날리고 만다.

 

(볼포네) 이제, 이 여우가 법에 의해 처벌되더라도, / 여러분께 뭔가 잘못을 저질러서 / 벌을 받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P.199, 512)

 

관객은 <볼포네>에서 사법적 정의가 잘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사실 관객은 극 중에서 심적으로 내내 볼포네와 모스카 편이다. 왜 사기꾼을 편드냐고 하면 그들이 덜 어리석고 덜 탐욕적이어서다. 그들은 오히려 탐욕스러운 이들을 벌주는 역할에 가깝다. 그들의 악행은 더 큰 정의 구현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할까나. 관객과 그들은 심리적 공범이므로 독자는 전적으로 그들을 욕할 수 없다. 작가조차도 이를 인식하고 있기에 사법적 단죄 후에 볼포네에게 다시 한번 무대에 설 기회를 부여한다. 그래야 엄혹한 결말로 마음이 불편했을 수도 있는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존슨은 탐욕보다 어리석음을 더 비판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볼포네와 모스카의 술수와 책략을 전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의 편에 서서 같이 즐길 수 있게 된다. (P.401)

 

<연금술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집주인 러브윗은 집사 제레미의 불법 행위를 슬쩍 눈감고 오히려 동참한다. 그가 자신의 재산을 불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유한 미모의 과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볼포네>의 판사처럼 위법 행위를 정죄하는 역할을 수행할 만한 배역이 이 작품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는 여기에서 엄격한 사법 정의를 굳이 들이밀지 않는다. 러브윗의 말을 들어보자.

 

(러브윗) 하인 덕분에 이렇게 부유한 미망인을 / 아내로 얻는 행복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 그 주인이 정직함을 조금 훼손해서라도, / 하인의 꾀를 관대하게 봐주지 않거나, / 하인도 한밑천 마련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 아주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P.395-396, 55)

 

그런데 사기를 당하는 등장인물들을 우리는 과연 선량하다고 볼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긴다. <볼포네>에서 보나리오와 실리어의 고발로 진실이 드러날 뻔한 상황이 닥치자 볼토레는 자신의 사법 지식을 악용하여 오히려 그들을 죄인으로 만든다. 코르바치오는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하며 불효자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코르비노는 최악이다. 그는 아름답고 순결한 자신의 아내 실리어를 제 손으로 볼포네에게 바친다. 이를 거부하는 아내에게 퍼붓는 욕설과 악담을 듣다 보면 그의 심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코르비노) 집에 가서, 그 양반을 준비시키게. 내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 그리고 기꺼이 아내를 보내는지 꼭 얘기하고. / 얘길 듣자마자 / 내 자진해서 그러기로 했다고 맹세했다고. (P.85, 26)

 

(코르비노) 이 역병 같은 메뚜기야, 하늘에 맹세코, 메뚜기야. 창녀, / 악어, 네년은 악어처럼 눈물을 준비했다가, / 때가 되면 흘리려고 그러지. (P.110, 37)

 

<연금술사>의 경우 대퍼와 드러거의 욕망은 그나마 순진하고 소박한 측면이라도 있다. 트리뷸레이션과 아나니아스는 종교적 목적의 실현이라는 외피라도 지닌다. 매몬은 위선자다. 그는 대의명분을 위해 현자의 돌을 구하는 것처럼 표방하지만 그의 내심은 개인적 쾌락 충족에 있다. 관객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동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매몬) 이제 나도 / 솔로몬 왕과 맞먹는 숫자의 부인과 첩을 / 거느리려고 한단 말일세. 솔로몬도 / 나처럼 돌이 있었거든. (P.249, 22)

 

(매몬) 진귀한 고기 요리로 쾌락을 최고로 높일 준비를 합시다. / 그리고 다시 좀 하강했다가, 엘릭시르를 마셔 / 젊음과 기력을 새롭게 하며, / 영원히 즐기도록 합시다. / 인생과 쾌락을. (P.325, 41)

 

이 두 작품은 일부 선인도 존재하지만 비중은 크지 않을뿐더러 결말도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전편에서 유이하게 긍정적인 인물로 보나리오와 실리어가 있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희생 당사자에서 벗어나지만, 부친과 남편의 처벌이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후편에서 유일하게 사기를 당하지 않는 인물이 설리다. 그는 연금술이란 게 사람을 기만하는 술책임을 간파하고 그들을 징벌하려고 애쓰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이로써 권선징악이 작가의 목적이 아님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폴리틱 우드-비 경과 카스트릴은 광대역에 가까운 배역이다.

 

마지막으로 <볼포네><연금술사>를 관통하는 특징 중 연극적 요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볼포네와 모스카는 코르비노, 코르바치오, 볼보테를 대상으로 각각 죽음에 임박한 환자 역할로 속인다. 볼포네는 한술 더 떠 약장사로 변신하여 실리어의 마음을 떠본다. 그가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고 법정 하사관으로 변장하다가 역시 볼포네의 상속자로 변신한 모스카에 뒤통수를 맞는 대목은 연극적 유희의 극치다.

 

<연금술사>에서 돌, 서틀, 페이스의 사기 행각은 자체로 연극이다. 그들은 각 고객의 신분과 유형에 맞춰 배역을 넘나들면서 분장과 연기를 완벽하게 수행한다. 이해관계가 엇갈린 등장인물들이 교대로 등장하여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과정을 절묘하게 설계하는 장면에서 일종의 연극적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전편과 후편의 차이는 주요 인물의 다양한 배역과 변신이 후편에서 한층 더하다는 데 있다. 후편에서는 설리, 플라이언트 부인과 심지어는 집주인 러브윗마저도 변장에 동참한다.

 

존슨의 두 작품에 두드러지는 연극성은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풍자하되, 웃음을 통해 그 악덕들을 유쾌한 문학 상품으로 포장하는 극작가의 전략인 셈이다. (P.407)

 

작품 해설에서는 이러한 연극성을 작가의 뛰어난 작법 솜씨인 동시에 중하층 관객을 향한 직접 비난과 자기반성을 통한 불쾌감과 반발을 희석하려는 장치로 이해한다. 대놓고 손가락질하면 기분 나쁘지만 코미디를 통해 풍자하면 웃음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심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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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요정 파데트
조르주 상드 지음, 이혜은 옮김 / 파롤앤(PAROLE&)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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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에 충실하자면 <꼬마 파데트> 정도이며, 이재희 번역본은 <소녀 파데트>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앞에 사랑의 요정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까닭은 처음에 동화책으로 번역 출간하면서 접근성과 흥미를 높이기 위한 것이 너무나 친숙해져서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이 책은 사정이 낫다, ‘파데트라는 주인공 이름을 살리고 있으므로. 다른 책들은 통상 <사랑의 요정>이라고만 표제를 붙인다.

 

이 작품을 단순히 파데트와 랑드르 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간주한다면 참모습을 놓치는 것이다. 랑드르와 실비네 쌍둥이 형제 이야기가 소설 전반부를 주도하고 있으며, 형제간 감정의 엇갈림과 갈등이 소설 말미에 이르기까지 내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즉 프랑스 농촌 지역을 배경으로 쌍둥이 형제간 사랑과 랑드르와 파데트 간 사랑이라는 두 축을 지닌 작품을 봐야 한다.

 

실비네는 몸도 마음도 동생보다 훨씬 더 어렸으며, 생각하는 것은 랑드리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랑드리로부터 똑같은 사랑을 받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비네는 둘이 재미있게 놀았던 외진 곳이나 숨겨진 장소인 둘만의 장소에 랑드리와 가고 싶어 했다. 그곳에서 지금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은 예전에 하던 놀이를 하고 싶어 했다. (P.46)

 

아마 많은 독자는 쌍둥이 형제의 깊은 우의와 애정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실비네의 과도한 집착에 탄식을 하게 될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의 운명이라고들 하는 부정적 전망이 소설 초반에 나오는데 그래서일까 독자의 뇌리에 형제의 유전적 우열이 계속 떠오른다. 쌍둥이 상대방에게만 애정을 느끼며 가족 이외에 주변과 사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실비네. 나약하고 소심하기에 더더욱 감싸고 보호하는 조치와 맞물려 사회화를 성취하지 못하는 실비네.

 

심리학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실비네의 성격과 행동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리라. 형제간 단순 애정을 넘어서 상대방이 자신을 제외한 타인에게 애정을 쏟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 상태. 성인이 되어서도 둘만의 어린 시절의 사랑과 추억에 머물고자 하는 심리 상태. 동성 형제의 이성을 향한 사랑에 질투와 분개를 품는 태도. 이런 것을 누구도 정상적인 성장 과정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실비네가 바로 그러하다. 파데트가 랑드리를 떠났다는 소식에 기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실비네에게 파데트는 사랑의 경쟁자이다.

 

파데트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비네는 우선은 자기한테 유리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기뻤다. 이제부터는 랑드리가 자기하고만 사이좋게 지낼 것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했다. (P.185)

 

실비네에게 파데트는 랑드리의 애정을 두고 싸우는 연적이었기 때문이다. (P.203)

 

작가도 바로 이렇게 단언한다. 사실 이러한 설정은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형제간 사랑과 남녀 간 사랑은 다른 현상이며 마땅히 달라야만 한다. 양자를 혼동하면 인간과 사회 윤리의 토대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파데트의 대화로 현명하게 마무리되지만, 결말도 자못 산뜻하게 떨어지지 않는 찝찝함을 지닌다. 실비네는 쌍둥이 동생에 대한 애정을 단념하고, 파데트를 향한 새로운 감정을 억누른 채 일생을 독신과 전장에서 살아간다. 실비네의 삶은 과연 행복할까.

 

랑드리와 파데트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 이 작품은 한없이 아름답고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전원 소설이다. 게다가 세속적 신분 차이를 뛰어넘어 사랑을 쟁취하는 파데트에게는 누구나 애정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파데트와 마을 사람들 간 오해와 불화는 누구 한 편의 잘잘못이 아니고, 양자 모두의 잘못이다. 사람은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난 타인의 언행, 복장, 행동 등에 불편함을 느낀다. 이는 곧잘 비정상으로 간주되기 마련이며, 비난과 놀림의 대상이 되기 쉽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 성향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설사 대놓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들과 경계선을 명확히 설정한다. 개인적 친밀감 또는 애정을 품은 사람만이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파데트의 참된 모습을 알게 되는 랑드리처럼.

 

내가 네 얼굴 본 적이 없니?” 참을성이 바닥난 랑드리는 말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 네 얼굴이 잘 보이게 달빛 쪽으로 와봐. 네가 못생겼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난 네 얼굴이 좋아. 너를 좋아하니까. 나한텐 그게 중요해.” (P.128)

 

나중에 파데트가 자신의 말투나 태도, 옷차림 등을 조신하게 바꾸자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진다. 파데트나 동생 메뚜기의 파르르 한 반응이 없어지자 더는 갈등과 다툼의 여지가 사라짐은 자연스럽다. 게다가 파데트는 다년간 축적된 자신에 대한 편견과 인식을 바꾸기 위해 마을을 떠나 타향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자 실행한다.

 

초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훗날 사랑의 결실을 거둔다는 설정은 자못 동화적이다. 가난한 여주인공이 부잣집 아들과 결혼한다는 신분 상승의 이야기는 말할 나위도 없다. 세속적인 시각에서 파데트는 형편없는 출신에, 못난 외모에 형편없는 태도의 여자아이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완전히 뒤집히는 데서 독자는 통쾌함을 느낀다. 원래 탁월한 지혜와 현명함을 가진 바탕에, 사실은 누구 못지않게 빼어난 외모를 지녔으며, 갑자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부에서도 꿀릴 이유가 없다는 점. 이렇게 보면 조건에서 오히려 랑드리가 밀릴 지경이다. 만약 반전이 없었다면, 즉 외모도, 재산도 처음 설정과 마찬가지였다면 바르보 씨의 결혼 승낙이 어찌 되었을까 매우 궁금하다. 오로지 곧은 심성과 현명함만이 가진 게 전부인 파데트 말이다.

 

그럼 넌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파데트가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랑드리를 계속 바라보던 파데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동시에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아 신이시여! 신이시여!” 랑드리가 파데트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내가 착각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P.178)

 

의젓하고 성실하며 진실한 랑드리와 어린아이 같았지만 현명함과 의지력을 갖춘 파데트 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독자를 흐뭇하게 만든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실비네의 애정과 아픔을 인식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이 사랑의 요정따위로 치부되어서는 적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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