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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의 여왕 - 베스트세계문학 18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 신원문화사 / 1993년 7월
평점 :
절판
<수록작품>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베르킹 이야기 [벨킨 이야기]
에프게니 오네긴
석상 손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푸쉬킨의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종래 그는 내게 별다른 감흥을 남기지 않아 외면하고 있었는데 <루슬란과 류드밀라> 이후 본격적으로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 처음에는 새 책 새 번역본으로 시작할 생각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30년 전 구입했던 이 책이 서가 구석에서 자신을 잊지 말라고 애원하는 눈빛을 차마 외면하기 어려웠다. 500여 면에 이르는 두툼함, 살짝 작은 크기 활자의 빽빽함. 요즘은 보통 세 권 정도로 분책하게 마련인데 이를 한 권에 몰아넣었다. 시대적 간극으로 요즘 어휘와 문체와 다른 점은 애교로 넘어간다. 두 편의 희곡 <석상 손님>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감상은 다음 기회로 넘기고 여기서는 소설 작품에 집중한다.
1. 스페이드의 여왕
일생을 한판에 걸었는데, 그것이 실패했다면 제정신이 불가능하리라. 겔만의 탐욕과 파멸에 쉽사리 돌멩이를 던지지 못함은 우리도 본성에서는 겔만과 마찬가지여서다. 매주 인생 역전을 꿈꾸며 소심하게 번호를 맞추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도저히 부의 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면 누구나 비상한 방안을 찾기 마련이다. 겔만처럼 절대 필승의 카드 패를 알 수 있다면 나 같아도 주저 없이 올인하겠다. 다만 그의 잘못은 백작 부인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이며, 순진한 리자베타를 기만한 점이다. 전자는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핑계라도 대겠지만 후자는 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한 도구로 속여넘긴 것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꿈속에 백작 부인의 본의 아닌 등장과 소원을 풀어주라는 분부는 결국 겔만의 탐욕과 부도덕성을 징벌하기 위한 장치였다.
2. 대위의 딸
분량으로는 경장편, 내용으로는 역사소설에 해당한다. 군더더기 없는 진행으로 분량에 비해 내용적 밀도는 여느 장편소설 못지않게 짙다. 예전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이 작품의 미덕이다. 푸가초프의 반란과 그리뇨프와 마리아의 사랑을 병치시키면서 두 연인 사이에 개입하는 악인 슈바브린의 존재가 팽팽한 긴장감을 일으킨다.
슈바브린의 악인성은 독자 누구나 동의하지만, 푸가초프는 작중에서 악인과 영웅 사이의 모호한 경계선상에 놓여있다. 지배층을 위협하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혔으니 분명 악인이지만, 그가 그리뇨프에게 나타내는 인정미와 반란군의 수장으로서 보여주는 위엄과 당당한 태도는 분명 예사 인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무서운 인간이고 냉혈한이며, 악당이었던 이 사내와의 이별에 있어서 내가 품고 있었던 기분을 분명하게 기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찌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156)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행보 외에 주목할 점은 하인 사베리치의 충정이다. 그리뇨프에게 고집스러울 정도로 충정을 바치는 그는 일면 엉뚱하다는 면에서 작중에서 유일하게 희극적 역할을 맡아 작품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다. 그가 주인공과 주인에게 취급되는 대우를 생각하면 제아무리 미화해도 당대 러시아 계급사회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다.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지만 푸쉬킨은 여기에서 러시아 국토의 아름답고 쓸쓸한 분위기를 한껏 나타낸다. 푸가초프 반란과 진압 과정에서 발발한 민중의 고초와 참상에 대해서도 검열을 의식해서인지 간단하나마 지나치지 않는다. 이는 그가 당대 러시아 사회의 현실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까다로운 독자라면 이 소설의 커다란 흠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지나친 우연의 남발. 주인공과 푸가초프의 만남, 주인공과 즈린 소령의 만남, 결정적으로 여주인공과 여왕 폐하의 우연한 만남이 그러하다. 작가의 지나친 개입은 작품 서사의 사실성을 약화시키고 전개와 결말의 설득력을 떨어뜨려 동화와도 같은 인상을 남기는 단초를 제공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작품에 품은 깊은 감명의 끈을 도저히 놓고 싶지 않다.
3. 베르킹 이야기
이는 ‘사격’, ‘눈보라’, ‘장의사’, ‘역장’, ‘가짜 평민의 딸’이라는 다섯 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표면적으로는 베르킹[벨킨]이라는 인물이 남긴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수록작에 일관된 주제 의식을 찾기는 어렵지만, 억지로 찾자면 일상적이거나 평범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유사성을 보여준다.
‘사격’은 진정한 용맹성의 의의를 되새긴다. 자신 외에 아무런 책임질 게 없을 때의 목숨과 사랑하는 약혼녀를 포기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목숨을 앞에 두고 똑같은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실비오는 백작을 쏘지 않았지만 쏘지 않음으로써 쏘았을 때보다 더한 사격 효과를 거두었다.
‘눈보라’는 눈보라가 일으킨 두 연인의 애꿎은 엇갈림을 통해 운명의 의의를 새삼 상기시킨다. 마리아는 브라지밀과 야반도주하여 비밀 결혼식을 치르기로 하였다. 심한 눈보라는 브라지밀을 낯선 곳으로 이끌고, 그녀가 교회에서 결혼 의례를 치른 인물은 생면부지의 낯선 남자. 그녀는 처녀지만 유부녀가 되었고, 상대방은 총각이지만 유부남이 되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른 채 눈보라는 이들을 다른 운명과 장소로로 인도하였다. 그래도 불민과 마리아는 우연히 해후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리라. 브라지밀은 후반부에서는 아예 잊힌 존재가 되었으니 참으로 불쌍하다.
‘장의사’는 심령과 괴기를 다룬 단편이다. 장사가 잘되어 번듯한 집으로 이사한 장의사. 망자와 환자가 넘칠수록 장의사와 의사는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들에게 우리는 부자 되세요! 하고 일말의 거리낌 없이 축사를 전할 수 있는지. 장의사의 성공은 전적으로 망자들의 덕택이다. 그러면 이사 턱을 베풀고 감사를 표할 대상은 생자가 아닌 망자임이 마땅하다. 우리의 장의사는 망령들을 초대한다.
‘역장’은 딸을 빼앗긴 역장의 삶을 통해 러시아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예쁜 처녀에게 마음을 뺏긴 귀족이 그녀와 함께 몰래 떠날 수 있음은 그럴 수 있다고 양보하자. 딸을 찾아 수소문하다 간신히 귀족을 찾아간 역장을 대하는 귀족은 지극히 고압적이고 폭압적이다. 도니야의 아버지를 냉대하고 내쫓는다. 그에게 도니야는 어떤 가치를 지닌 사람인가? 정식 부인은 당연히 아닐 테고 결국 첩에 지나지 않으리라. 아무리 성장을 갖추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더라도 그녀의 삶은 참다운 행복이 아니기에 역장의 탄식과 슬픔에 마음이 아프게 다가온다.
‘가짜 평민의 딸’은 반대로 희극적이다. 이를 오페레타나 뮤지컬로 만든다면 꽤나 흥미진진한 작품이 탄생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뜻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게 하지만 적대적인 두 아버지는 꼬리 잘린 암말의 덕택으로 화해와 우정의 길로 나아간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당사자인 알렉세이와 리자는 당황한다. 알렉세이는 리자를 하녀 아쿠리나로 알고 있기에 리자와의 결혼이 탐탁지 않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와는 달리 푸쉬킨은 해피엔딩을 지향한다.
4. 에프게니 오네긴
이 작품은 푸쉬킨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완성에 오랜 시간이 소요된 운문 소설이다. 푸쉬킨의 대표작은 산문 소설로 <대위의 딸>, 운문 소설로 이 작품을 꼽는다. 작가 자신이 이미 시인으로 유명하므로 시 형식으로 소설을 쓰는 게 낯설지는 않다. 서사시와 유사하므로. 산문 대신 굳이 운문을 택한 까닭은 오네긴과 타치아나, 오네긴과 브라지밀의 관계는 <대위의 딸>과 달리 극적인 서사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차라리 시적 분위기와 정서를 자아내고 유장한 미를 추구한 게 아닐까 추측한다.
오네긴은 훗날 오블로모프로 극단적으로 정형화된 잉여 인간의 부류에 가깝다. 푸쉬킨의 오네긴은 레르몬토프의 페초린과 일맥상통한다. 방탕과 냉소와 환멸에 빠진 귀족 자제. 타고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지 않은 채 세상과 삶을 겉도는 인물이다. 무관심, 하품, 싫증 등이 오네긴을 표상하는 어휘들이다. 부족이 아니라 넘칠 정도로 과도함이 오히려 호기심과 관심을 떨어내듯 말이다.
어떻든 그녀 이름은 타치아나. / 동생 오리가와는 정반대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얼굴에 / 장밋빛의 싱싱한 맛도 없다. 반기지도 않고 우울하고 말도 없고 / 숲에 사는 수사슴처럼 겁이 많고 / 부모 곁에 살면서도 말 한 마디 못하고 묵묵하기만 했다. (P.311, 2장)
세련된 도시 귀족 청년의 눈에 촌스러운 시골 아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음은 당연하다. 타치아나의 일방적 사랑에 오네긴이 반드시 응해야 할 책임은 없다. 오네긴에게 보내는 그녀의 장문의 편지를 읽고 오네긴이 아무 반응 없는 까닭,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보이는 정중한 구애의 거절을 갖고 우리는 오네긴을 비난할 수 없다. 원래 사랑은 공평하지 않기 마련이기에 사랑의 실연은 문학의 오랜 제재 아니던가. 그녀의 편지에서 우리는 차라리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시골 외딴곳에서 영원히 갇혀 지내는 삶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구애의 거절로 두 사람 사이가 일단락되었으면 좋겠지만, 오네긴의 괴팍함 덕택에 브라지밀은 결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여러 면에서 오네긴과 브라지밀은 대조적이다. 냉정과 열정, 무관심과 사랑. 항상 아쉬워하지만 양극단이 조화를 이루어 중용이 되었으면 모두가 좋았을 텐데. 이 소설에서 유난히 강조되는 장면은 러시아 시골의 전원 풍경이다. 외지고 척박하고 황량한 대지가 아니다. 자연과 평화와 소박한 삶이 한데 어우러진 러시아의 근원이라고 할 만하다. 타치아나가 숨 막힌 사교계와 도시 생활에 진저리 내고 끊임없이 시골과 고향을 희구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훗날 세련된 귀부인이 된 타치아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 오네긴. 이는 전반부에 대한 완벽한 패러디다. 그 실례가 앞과는 달리 타치아나에게 보내는 오네긴의 편지다. 작가는 이 대목에서 탄식한다. 잃어버린 것의 소중한 가치를 뒤늦게야 발견하는 가련한 인간들이여. 에덴동산의 이브가 그러하듯 우리는 눈앞의 것보다 멀리 떨어진 닿을 수 없고 가져서는 안 되는 금단의 열매에 마음이 끌린다. 그게 인간의 숙명이다.
오네긴이 진작에 타치아나의 마음을 수락하였다면 많은 슬픔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오네긴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순간에 없어지겠는가. 그럼에도 타치아나는 현재의 남편에게 충실할 것을 새삼 각오한다. 비록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그녀의 본분임을 잘 알기에. 우리는 그녀의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일말의 아쉬움은 있겠지만 대놓고 불륜하라고 떠밀 수는 없는 법. 오히려 오네긴의 뒤늦은 각성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오! 경쾌했던 나의 청춘이여! / 즐거움 슬픔 달콤한 괴로움이나 시끄러움, 폭풍우, 멋진 연회석상 / 모든 것에 네가 보내 준 모든 것에 나는 감사드린다. / 오로지 너를 받아들였다...마음껏. 그것으로 됐다! (P.389, 6장)
작가는 오네긴의 실패를 이렇게 해석한다. 눈부신 청춘은 찰나에 불과하다. 기쁜 마음으로 진심으로 청춘의 봄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우물쭈물 망설이면 어느덧 봄날은 가고 만다. 환멸과 권태에 빠지지 말고 사랑과 열정의 소박함을 맞이해라. 화려한 꾸밈과 겉멋에 속지 않고 소박함과 수수함의 미덕을 발견할 수 있다면 참다운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
왜 지난날엔 푸쉬킨 작품의 아름다움과 맛을 찾지 못하였을까. 문장 한줄 한줄, 단락 한 마디마다 새록새록 기쁨과 즐거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당시 나는 푸쉬킨을 이해하기에는 좀 어렸나 보다. 빙하가 장구한 세월을 거쳐 암석을 깎아내듯 시간과 경험의 무게가 푸쉬킨에 덧씌운 외피를 벗겨내니 비로소 그의 내면과 속살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저 위안 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