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열린책들 세계문학 246
케이트 쇼팽 지음, 한애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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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문학작품으로서 꽤 유명한 작품인 듯하다. 우연히 케이트 쇼팽의 단편소설을 읽고 흥미가 생겨 내친김에 이 소설도 읽게 되었다. 국내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표제는 주로 <각성>이며, 기타 <내 영혼이 깨어나는 순간>, <이브가 깨어날 때>로 의역하는 사례도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인 여성상은 이른바 현모양처다. 가정 내에서 좋은 아내이자 주부로서 역할을 다하고, 자식을 낳아 잘 키워내는 것이 절대 미덕으로 인정받았다. 남성은 가족 부양을 위한 대외 활동을 맡고 여성은 가계를 꾸려나가는 대내 활동을 담당한다는 분업에 기반하여 남성의 지위상 우위를 인정하는 소위 남존여비가 공개적으로 또는 암암리에 묵인되었다.

 

이 작품의 표제 각성은 여성이 전통적 가치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삶의 주체로 깨어남을 가리킨다. 평안히 잠들어 있던 의식에서 깨어나 현실 속에서 고통스러울지라도 자기의 길을 걸어야 함을 말이다.

 

퐁텔리에 부인은 우주 속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자신이 자기 내면과 주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P.31)

 

작가는 에드나가 서서히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노출한다. 단조롭고 엄격한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자유롭게 개방적인 크리올 가톨릭 문화에 일견 충격을 받으면서도 그 분위기에 자연스레 잦아든다. 다만 그녀는 크리올의 개방성이 서로 간의 성적 신뢰와 정조 관념에 기반함은 미처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의 잘못된 첫걸음이리라.

 

에드나가 독립된 개체로서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수영에 성공해서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바다에서 타인의 도움 없이 마음껏, 힘껏 멀리 헤엄쳐 나갈 수 있다는 성취감과 자신감! 이제 고개를 드는 봉인된 독립심.

 

이후 그녀의 행위는 양가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화요일 정기 손님맞이 의식을 없애버리고, 남편의 명령조의 말에 반발하여 따르지 않고,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며, 남편의 출장 동안 집을 따로 구해 출가하는 등.

 

무미건조한 일상과 애정을 못 느끼는 남편, 자식과 가정의 구속에 대한 싫증을 강조하면 통상적인 여성주의 견해로 귀결된다. 소설 속에서 에드나의 남편에게 별다른 비난을 퍼붓기는 쉽지 않다. 그가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가족 부양에 소홀하지도 않다. 이후 에드나의 독자 행보에 강력한 대응을 하지 못한 걸 보면 오히려 소심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에드나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분명 상류층이다. 그랜드 아일섬이나 뉴올리안스에서 그녀는 라티뇰 부인, 라이즈 양, 로베르 가족 등에 견주어 보면 풍요로운 생활 수준을 누린다. 그녀는 살림과 육아로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생계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애쓸 이유도 없다. 삐딱하게 보자면 돈 많은 유한부인의 한가한 넋두리라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애초 표제는 각성이 아니라 고독한 영혼이라고 한다. 출판업자에 의해 표제가 바뀌게 되었어도 작가는 고독한 영혼을 부제로라도 삼고 싶었다고 하면, 후자가 작가의 집필 의도를, 그리고 에드나의 모습을 더 잘 반영하는 게 아닐까.

 

에드나는 똑바로 정면을 쳐다보았지만, 골똘히 생각에 몰두한 표정이었다. 주변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거리와 아이들, 과일 행상, 눈앞에 자라는 꽃들이 갑자기 적대적으로 변한 낯선 세계의 일부처럼 보였다. (P.115)

 

맞아요.에드나가 말했다. 지난 세월이 꿈만 같아요. 계속 자면서 꿈을 꾼 것 같아요.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꿈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죠. , 그래요! 평생 망상에 사로잡혀 바보처럼 사느니 고통스럽더라도 결국 깨어나는 게 낫겠죠.(P.234)

 

남편과 가정에서 벗어나 에드나의 시선은 자기를 숭배하고 쫓아다니며 대화가 잘 통하는 로베르에게 향한다. 로베르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떠나면 그녀는 비로소 그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 사랑의 대상의 부재는 그녀의 영혼을 한층 격렬하고 불안하게 자극함을 독자는 이후 그녀의 행동에서 볼 수 있다. 로베르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성적 욕망을 일깨운 아로뱅. 그녀에게 아로뱅은 로베르의 대체물 자격도 안되지만 그에게 애정 없는 육체관계를 허용한다. 아마도 이 작품이 가장 큰 비난을 받는 장면이 여기라고 생각한다.

 

에드나의 행동을 정당화할 근거는 무엇일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여성의 각성은 꼭 부도덕한 사랑이나 성욕의 형태로 발산되어야 하는지. 에드나의 선택지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가정과 남편과 불평등의 틀을 깨고 독자적 인생을 구현하기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지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것을 사회적 문화적 억압의 강도와 깊이로 해명하는 건 그저 핑계로 비칠 뿐이다. 그녀 자신의 성향과 한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그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게 되었다.

 

퐁텔리에 부인은 라티뇰 부인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녀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음을 딱하게 바라본다. 오히려 우리는 퐁텔리에 부인을 딱하게 생각한다. 라티뇰 부인은 자신의 삶과 선택에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 삶의 우선순위를 무엇에 두는가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것이 자신과 다르다고 무턱대고 비난하는 건 굉장한 오만함이다. 자유분방한 삶의 동경과, 자신과 라이즈 양의 삶을 바꾼다는 건 다른 차원의 사안이다.

 

이 작품을 향한 세간의 비난에 작가는 크게 상심했다고 한다. 에드나를 여성주의 투사로 작가가 설정하였다면 응당 이러한 비난이 있을 것을 예견했을 것이다. 이는 작가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어쩌면 우리는 이 작품을 오독하는 건지도 모른다.

 

에드나는 여성으로서 온전히 주체적 삶을 지향하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현재 불행감을 남편 탓으로만 여긴다. 사랑 없이 결혼하고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남편 대신 로베르처럼 서로 공감과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다른 남성을 남편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그녀는 더없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에 로베르가 자신을 떠나자 절망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다. 에드나의 각성은 불완전한 반쪽짜리 각성이다. 그녀가 아로뱅과 일탈에 빠지는 장면은 작가의 깊은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에드나의 잘못된 길을 더 명확하게 보여 주고자 하는 장치다.

 

레옹스와 두 아들 생각이 났다. 그들은 그녀 삶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들은 에드나를, 에드나의 몸과 영혼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P.242)

 

세상 누구도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없다. 좋든 싫든 부모와 형제는 있게 마련이며, 연애와 결혼을 한다면 이성과 자식이 있게 마련이다. 인생이 평탄하게 행복하다면 오히려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인생은 항상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자신의 인생은 결국 자기 선택의 결과이다. 이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어떤 유의미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의 책임 또한 자신에게 있다. 남편과 자식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자신을 좌지우지하는 삶의 전부로 그것에 종속당할지는 결국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작가는 에드나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보여 주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백사장 위아래 어디에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날개 부러진 새 한 마리가 비틀비틀 퍼덕이다가 힘없이 상공을 돌더니 바닷물 속으로 추락했다.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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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 스타킹 한 켤레 - 19, 20세기 영미 여성 작가 단편선
세라 오언 주잇 외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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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세라 오언 주잇 - 백로

메리 E. 윌킨스 프리먼 - 뉴잉글랜드 수녀

샬럿 퍼킨스 길먼 - 누런 벽지

케이트 쇼팽 - 아카디아 무도회에서

케이트 쇼팽 - 폭풍우

케이트 쇼팽 -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윌라 캐더 - 감상적이지 않은 토미

이디스 워턴 - 다른 두 사람

수전 글래스펠 - 여성 배심원단

버지니아 울프 - 벽의 자국

캐서린 맨스필드 - 작고한 대령의 딸들

엘런 글래스고 - 3의 그림자 인물

조라 닐 허스턴 -

 

앞서 읽은 책과 마찬가지로 영미권의 여성작가 단편 소설집이다. 먼저 책과 다른 점은 시기도 19세기와 20세기로 한정하였으며, 작품 선정 성향도 여성주의 색채를 좀 더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윌라 캐더의 작품이 실려 있기에 이 책도 고르게 되었다. 수록 작품 중 <뉴잉글랜드 수녀>, <실크 스타킹 한 켤레>, <다른 두 사람>, <>은 이전 책과 중복이므로 따로 논하지 않는다. <작고한 대령의 딸들>도 이전 맨스필드 작품집에서 다루었기에 마찬가지로 언급하지 않는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성과의 만남, 교제, 그리고 결혼, 출산, 육아는 인생에서 중요한 통과의례 중 하나다. 성별에 따라서 실질적 비중은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그런 순서에 따라 수록 작품을 보면 주잇의 <백로>는 만남에 해당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시골 소녀 실비아에게 멋진 청년이 다가왔다. 백로의 둥지를 알려 주면 돈은 물론, 넓은 세상으로 나갈 기회가 생긴다. 무엇을 망설이랴, 그깟 새 한 마리뿐인데. 숲속의 키 큰 나무꼭대기에 힘겹게 올라간 실비아는 둥지 위치도 확인하였다. 이제 그에게 말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실비아는 입을 열지 않는다. 우리는 그녀의 어리석음을 한탄해야 할까. 유달리 자연묘사가 아름다운 이 짧은 소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끝맺는다.

 

그녀가 놓친 보물이 무엇이든, 숲과 여름이여 기억해주렴! 이 외로운 시골 소녀에게 선물과 은혜를 가져다주고 너희들의 비밀을 말해주렴! (P.35)

 

캐더의 <감상적이지 않은 토미>, 쇼팽의 <아카디아 무도회에서>는 교제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소재로 한다. 캐더의 주인공은 당대 시각에서 보면 비전형적인 여성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신 구조를 지니고, 어지간한 남성은 물론 남자 친구인 제이 엘링턴보다도 지적인 측면에서는 뛰어나다. 가족을 떠나 홀로 대학에서 수업받는 길을 선택할 정도로 독립적이기도 하다. 친구인 제시가 제이 엘링턴을 매우 사랑하는 걸 보고 그녀에게 그를 양보하며, 그의 마음을 일깨운다. 확실히 그녀는 감상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토미가 제이 엘링턴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요즘으로 치면 그녀는 비혼주의자에 가깝다. 작가가 토미의 외모를 좀 더 여성적으로 기술하였다면 설득력이 더 뛰어났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토미는 꽃을 집어들고 잠시 입술을 깨문 채 서 있었다. 그러곤 꽃을 벽난로 안에 던져넣고 마른 어깨를 으쓱하더니 돌아섰다.

멍청한 것들. 절반은 저녁에 뭐 먹나, 그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데. , 그런데도 왜 이렇게 좋은지!” (P.135)

 

연애와 결혼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흔히들 결혼은 현실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알세와 칼릭스타 또한 마찬가지다. 젊은 부유한 농장주와 아름다운 마을 아가씨의 만남이 행복한 결말로 이어질 거라는 섣부른 기대는 오산이다. 자존심 강한 클래리스가 마음을 굽히자마자 알세는 칼릭스타를 버리고 그녀에게 달려간다. 입에 발린 사랑의 말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칼릭스타는 홧김에 보비노와 결혼 맹세를 한다. 어차피 누가 되었든 상관없는 일이니. 이렇게 작가는 사랑과 결혼의 엇갈림을 <아카디아 무도회에서>를 통해 보여준다.

 

한 시간 전에 칼릭스타의 귀에 입을 맞추며 실없는 소리를 속삭이던 사람도 바로 그였다. 하지만 이제 칼릭스타는 먼 전설 같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현실은 그의 앞에 서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클래리스뿐이었다. (P.103-104)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결혼생활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결혼은 정말로 사랑의 굳건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가, 사랑은 결코 흔들리거나 변함이 없는가, 애정 없는 결혼생활은 어떠한가. 수많은 예술작품과 TV 막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바로 결혼생활의 갈등과 파탄, 그리고 배신과 외도가 아니었던가. <폭풍우>를 보자. <아카디아 무도회에서>의 속편에 해당하는 작품인데, 수년의 시간이 지난 후 폭풍우 치는 날에 우연히 알세와 칼릭스타는 단 둘이서 조우하게 된다. 그들이 결혼 후에도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을 거라고 오해할 독자를 위해 작가는 친절하게도 둘만 본 적은 이게 처음이라고 밝힌다. 마음속에 간직한 원망은 여전한 마음을 뜻하고, 원숙한 미모는 욕망을 자극한다. 두 사람의 열정은 폭풍우의 격렬함 속에서 한껏 불타오르는데. 결론은 다소 시니컬하다. 상투적인 권선징악은 없다.

 

그렇게 폭풍우는 지나갔고 모두가 행복했다. (P.113)

 

<누런 벽지>의 화자는 신경과민성 우울증을 앓고 있다. 여름 별장 삼아 빌린 오래된 저택의 누런 벽지에 마음에 들지 않는 화자. 벽지의 누런 색깔과 무늬에 혐오감을 느끼며 자세히 관찰하는 화자.

 

도대체 벽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으니! (P.69)

그래서 내가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거다. (P.75)

 

마침내 벽지 뒤에 숨어 있는 여자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화자. 그 여자가 언제 나와서 돌아다니는지 유심히 관찰하는 화자.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려서는 안 되기에 철저하게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화자. 결말은 우울하다. 우리는 그녀의 정신질환의 원인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없다 태생적인 것인지 아니면 결혼생활 도중 발생한 것인지. 확실한 것은 그녀의 우울증이 오래된 저택으로 이사 온 지 급격히 악화하였다는 것이다. 남편이 화자의 의견대로 벽지를 뜯어고쳤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드디어 나왔어.” 내가 말했다. “당신과 제니가 기를 썼지만 말이야! 벽지를 거의 다 뜯어냈으니까 날 다시 저기에 집어넣지는 못할걸!” (P.85)

 

<여성 배심원단>은 앞서 읽은 책에서 수록한 작가의 <사소한 것들>과 내용을 공유한다. 단막극과 단편 소설로 형식을 달리한다. 전자는 사건의 여러 내용을 압축하여 대사로 표현하였기에 모호하고 추측에 의존하는 대목이 많다. 상징적이랄까 표현주의적이라고나 할까. 그렇기에 소설은 독자에게 훨씬 친절하다. 우리는 비로소 라이트 씨의 사망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라이트 부인의 이상한 태도도. 게다가 부부 사이 갈등의 골이 매우 깊었음을 텅 빈 새장과 죽은 새의 발견을 통해 슬며시 드러낸다. 이런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것들은 남자들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모든 결혼한 여성들은 누구나 괴로움을 안고 산다. 라이트 부인은 마음을 털고 함께할 이웃을 갖지 못하였다. 그것이 비극으로 치달은 것이다. 여성 배심원단으로서는 그녀의 유죄를 결코 인정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가까이 살면서도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우리 모두 똑같은 일을 겪으며 사는데-조금씩 다를 뿐이지 사실 다 똑같잖아요! 그게 아니라면-당신과 내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어요? 지금 알게 된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차렸겠어요?” (P.202)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목적으로 애정 없는 사기 결혼을 하였다면 그네들의 삶은 얼마나 불행할까. 차라리 몰랐으면 다행일 텐데 남편의 속임수를 뒤늦게 알아차린 아내. 하지만 사회적으로 워낙에 매력과, 인품과 명성으로 자자한 인물인 탓에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수밖에, 게다가 남편이 의사가 아니던가. 아내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꽤나 흥미진진한 소재감이 <3의 그림자 인물>이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의 광휘를 마주한 채 거기 선 나는 내가 이 집안에서 어느 편에 서야 할지 결정할 순간이 왔다는 사실을 온 직관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집에 있는 동안은 매러딕 부인 편에 서든지 아니면 그 반대편에 서야 했다. (P.279)

 

야간 간호사로 의사 아내를 돌보게 된 화자가 아내가 제정신임을 알아차리고, 죽은 아이를 목격하게 된 까닭은 그녀가 아직 어리고 순수한 영혼을 지녀서였으리라. 그녀는 자신이 파악한 진실과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권위와 체제에서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다. 막대한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어린 의붓딸을 죽이고, 아내마저 정신병원에 수감하는 이중인격자 의사가 승리의 순간에 맞이하는 비극적 결말.

 

울프의 <벽의 자국>은 다른 수록작과 결을 달리한다. 독자는 화자가 여성이라는 것만 알지 정확한 신상 정보를 알지 못한다. 심지어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물이 남자인지 확실치 않다. 문득 벽에 난 자국이 보인다. 그건 못 자국은 아닌 듯하다. 뭔가 튀어나온 듯한데, 단순히 벌어진 나무 틈새인가. 화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삶의 불가사의에 대해, 인류의 무지에 대해. 삶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아야 할지. 튀어나온 모습에서 무덤을 연상하기도 한다. 무덤 그리고 죽음. 나무 틈새로는 나무와 얽힌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두서없이 흘러간다. 행위와 사건보다 의식의 흐름이 중심이 되는, 역시 울프답다. 결말의 어처구니없음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확인해볼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 가서 보더라도 십중팔구 확실하게 콕 집어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결코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 세상에! 삶은 어찌나 불가사의한지! 사고는 어찌나 불확실한지! 인류는 어찌나 무지한지! (P.210)

 

서두의 <책을 엮으며>에서 옮긴이는 여성과 여성성을 다루는 의의를 주장한다. 여성주의 담론이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은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차별과 평등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 확실히 많이 개선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책에 실린 19세기와 20세기 여성작가에게는 상전벽해의 수준일 것이다.

 

옮긴이가 주장하듯이 여성성사회적.문화적 구조물”(P.7)이라는 논의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담고 있지만, 과연 전적으로 생물학적 속성을 배제해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남성성, 여성성 논의는 결국 우리가 태생적으로 남성 또는 여성임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수컷과 암컷은 양성생식체에게 있어 불가결한 기능적 분화이다. 우리의 지향은 이 자연적 사실을 부인할 게 아니라 그 역할의 차이를 기능과 가치의 우월로 동일시하는 과거의 인식과 사회적 오류를 교정하는 데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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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이야기 - 영미 여성 작가 단편 모음집
루이자 메이 올콧 외 지음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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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루이자 메이 올컷 - 내가 하녀가 되었던 경위

제인 오스틴 - 세 자매

윌라 캐더 - 폴의 사례

케이트 쇼팽 - 실크 스타킹 한 켤레

메리 E. 윌킨스 프리먼 - 뉴잉글랜드 수녀

엘리자베스 개스켈 - 이부형제

샬럿 퍼킨스 길먼 - 변심

수전 글래스펠 - 사소한 것들

조라 닐 허스턴 -

에이미 레비 - 현명한 세대

캐서린 맨스필드 - 행복

이디스 워턴 - 다른 두 사람

버지니아 울프 - 새 드레스

 

좋아하는 작가 윌라 캐더의 <폴의 사례>를 위하여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작가 또는 작품은 좋아하지 않는다. 삶은 남성 혹은 여성만을 표방해서 이해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종래의 관습과 타성에 묻혀 있던 여성성을 발견하고 추구한다면 몰라도 그것을 과장하고 극단화하는 방향성은 내 선호에 부합하지 않는다.

 

여성주의 논의는 차치하고 이 책에 실린 13편의 단편들은 자체로서 대체로 흥미롭고 재밌기까지 하다. 맨스필드의 <행복>은 재회가 반갑다. 올컷과 오스틴, 개스켈, 허스턴, 울프 등 나름 친숙한 작가의 단편 작품은 처음 접한다. 워턴과 쇼팽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실제 독서는 처음이다. 프리먼, 길먼, 글래스펠과 레비는 완전 생소한 작가인데, 덕택에 존재를 알게 된 것만 해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단언해도 좋다.

 

수록된 작품들을 통해 근대 여성의 삶의 공통점을 몇 가지 간추려볼 수 있다. 그녀들에게 결혼은 인생의 거의 전부에 해당한다. 그것은 현대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지만, 결혼에 대한 의존도와 절대적 중요도는 현대와는 비교 불가능하다. <세 자매>에서 볼 수 있듯 사랑과 결혼은 분리할 수 있다. 여자는 신분과 경제적 안정을 위해, 남자는 번듯한 가정을 꾸리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뉴잉글랜드 수녀>에서 루이자는 스스로 수녀와 같은 삶을 선택한다. 무척이나 이색적인 결정이지만, 그녀가 조와 오랜 기간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어쨌든 그녀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다면 그녀의 선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루이자의 경우는 제한적인 동시에 시사적이다.

 

<현명한 세대>는 독특하다. 여기는 소위 남녀 사이의 밀당을 둘러싼 심리전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자신에게 호감을 나타낸 남자가 부유한 아가씨와 결혼하자, 필립 앞에서 부자 귀족 가이 경과 다정한 장면을 연출한다. 워릭 양이 가이 경을 실제 좋아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녀는 필립을 아직 떠나보내지 않았고, 그에게 한 방 먹일 생각을 품고 있다. 사교계 풋내기 아가씨가 노련한 여성이 되어 두 남자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이 흥미롭다. 결론은 모호하다. 가이 경의 청혼을 끌어내는데 성공의 기쁨을 만끽하는 그녀, 그녀는 가이 경을 받아들일까. ‘현명한 세대답게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은 분명하다.

 

결혼으로 남편을 얻고 가정을 꾸리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행복하지는 않다. 모든 남자가 부자가 아니기에 경제적 요인은 항상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결혼은 양성의 행복한 결합을 전제로 하지만, 누구 말처럼 사랑은 움직이는 법이다. 여기에 전근대적 남성우월주의가 결부된다면 가정폭력은 일상사가 된다.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매맞는 아내의 사례가 남아있다고 하니 과거에는 한층 심하였을 것이다.

 

<실크 스타킹 한 켤레>는 나쁘게 보면 주부의 덧없는 허영심을 풍자한 소설이지만, 가정생활의 무게에 짓눌린 여성의 억압된 꿈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비록 현실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잠시나마 그 꿈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은 남녀를 불문하고 공통적이다. 여성이 상대적으로 의복에 집착하는 까닭은 그것이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위치, 결혼생활의 안정성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라는 점을 <새 드레스>는 알려 준다. 메이블이 스스로 위축되고 비참해하는 까닭은 그녀가 가난해서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쟁반 중앙에 처박힌 불쌍한 파리와 동일시한다.

 

<행복>에서 버사는 온몸 가득 행복을 느끼지만 그 순간 그녀의 행복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다른 두 사람>은 조금 묘하다. 두 남편과 이혼하고, 세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 앨리스. 그녀의 경쟁력은 매혹적인 미모와 우아한 언행이다. 우연찮은 사건으로 웨이손은 그녀의 전전남편, 전남편과 계속 마주치게 되고 점차로 그들의 존재를 불편해하지 않게 된다. 오늘의 앨리스를 만든 건 어쩌면 두 남편 덕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표제의 다른 두 사람은 과거와 오늘의 앨리스를 너무나 다른 인물임을 뜻하는 걸까?

 

허스턴의 <>은 여성, 그리고 흑인의 열악한 상황을 더욱 강렬하게 인식하게 만든다. 대표작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억압받는 흑인 여성의 실태를 드러내고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명확히 표출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흑인 남성은 오히려 여성에 비해 자질 면에서 열등하다. 그것을 만회하는 방식이 바로 폭력인 것이다. 사이크스의 비명에 딜리아가 움직일 수 없었던 건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인지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가정생활의 파탄에 처해서 가장 담대한 용기를 보여주는 인물은 <변심>의 매로너 부인이다. 고상한 남편이 어린 하녀에게 마수를 뻗치고 아기를 갖게 했을 때 갈등의 축은 부인 대 하녀가 되기 십상이다. 어쨌든 가정을 깨뜨리기를 원치 않기에 하녀를 쫓아내게 마련이다. 매로너 부인은 달리 생각한다. 게르타 또한 피해자라고 인식의 전환을 하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진다. 이제 비난의 대상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뀐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에게 지은 죄야.” 그녀가 말했다 이것은 여성성을 상대로 범한 죄야. 모성을 상대로 범한 죄야. 아기-에게 저지른 죄야.” (P.157)

 

올컷의 <내가 하녀가 되었던 경위>는 목사라는 허울 속에 든 위선에 대한 폭로이자, 하인 또는 하녀에 대한 역할과 처우의 존중 필요성을 유머러스하게-비록 화자에게는 고통의 나날이겠지만-제시하는 글이다. 글래스펠의 <사소한 것들>은 단막극이다. 남편 라이트의 죽음, 정신이 나간 듯 무력하게 앉아있는 라이트 부인. 사망 원인을 조사하는 목격자 해일, 보안관과 경찰, 집안을 둘러보는 해일 부인과 보안관 부인. 두 부인의 대화에서 독자는 이 집의 분위기와 라이트 부부의 현 상황에 대한 단서를 미묘하게나마 유추할 수 있다. 개스켈의 <이부형제>는 계모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질투와 학대의 전반부와,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화자의 생명을 대신하여 바치는 그레고리 형의 장엄한 비극의 후반부를 대비한다. 아버지의 뒤늦은 후회와 자책, 그리고 유언장도 눈시울을 뜨겁게 하지만 무엇보다 그레고리 형의 처지에서 회상했을 때 어린 나이에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그가 너무나 가슴 아프다.

 

<폴의 사례>는 다소 다른 성격의 작품이다. 소년 폴은 현실 세계보다 꿈과 환상에 젖어 있다. 학교 교사를 절망에 빠뜨릴 정도의 언행을 보이는 그는 극장과 카네기 홀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대개의 사람은 양자를 조화하거나 현실을 위해 환상을 잠시 잊거나 억누르기 마련인데 폴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폴의 사례를 나쁜 사례라고 생각한다. 퇴학당하고 극장에서도 쫓겨난 폴에게 우연히 거액의 돈을 횡령할 기회가 생기고, 그는 호텔과 극장을 오가는 화려한 신사의 삶을 마음껏 향유한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잃어버린 참모습이며 이제야 간신히 되찾았다는 듯이. 어느덧 횡령은 들통나고, 돈은 바닥나고 아버지는 그를 찾으러 올 것이다.

 

감옥보다 더 끔찍할 것이다. 코델리아 스트리트의 미지근한 물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그를 삼켜 버릴 것이다. 회색빛 단조로움이 그의 앞에 무미건조하고 희망 없는 세월로 펼쳐졌다. (P.86)

 

그가 두려운 것은 잡히는 게 아니다. 그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가 마지막으로 후회한 것은 멀리 미국을 떠나 지중해로 가고자 하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않은 자신의 성급한 실수였다. 우리는 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회도덕과 질서를 깨뜨린 비행소년, 사회 부적응자.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한 몽상가, 망상가. 현실에서 포용하지 못한 자유롭고 열정적인 상상력을 지닌 안타까운 소년의 사례.

 

여기 소개된 여러 작가는 초면이다. 케이트 쇼팽의 작품은 주인공의 일탈에 저도 모르게 동정과 공감을 품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은 계속 나의 목록에 있는 작가다. 윌킨스 프리먼, 퍼킨스 길먼, 수전 글래스펠의 다른 작품들도 몇 권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데 역시나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보련다. 에이미 레비는 글쓰기 양식이 독특하여 좀 더 경험해 보고 싶은데 다른 작품은 출간되지 않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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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연대기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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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의 첫 몇 권을 읽었을때, 그 방대함과 난삽함에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일반독자 수준에서 이해가 잘 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책이 있었으면 바랐는데, 딱 원하는 책입니다. 처음으로 펀딩에 참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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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암동 블루스
고형진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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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고려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면서 펴낸, 일종의 정년퇴임 기념 문집이다. 다만 일반적인 문집과는 구성이 사뭇 다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어는 저자 자신이 아니라 고려대학교다. 평생을 봉직하면서 저자가 지녔던 고려대를 향한 사랑을 고려대의 문학적 유산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겪었던 고려대와 고려대인의 추억을 회고한다.

 

1부는 고려대학교를 제재로 삼은 여러 작가의 시, 수필, 단편소설을 한데 묶은 것이다. 조지훈, 오탁번, 이희중, 강연호, 심재휘 등 여러 고대 출신 문인들이 등장하여 각자의 시각에서 고려대를 표현한다. 동시대에 학교를 다니거나 학교에 대한 추억을 지닌 독자라면 작가들이 그리는 당시 고려대의 모습에서 맞아, 그랬지 하고 저도 모르게 회상에 빠질지 모른다. 훨씬 후대의 독자라면 당대 고려대의 풍물이 그러했구나 하고 새삼 신기하게 여길 수도 있다.

 

현대사의 굵직한 고비마다 시대와 함께 풍운을 겪었던 대학이니만큼 수록 작품에서도 이를 담고 있어 가슴이 뜨거워진다.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의 울분과 답답함, 미안함은 여전하며 <80년대라는 이름의 강의실>(심재휘), <오월의 숲>(이희중)에서 대학의 대학다움이 무엇일지 새삼 생각해 본다. “고려대학교 정문에는 문패가 없다”(P.34)라며 도발적으로 시작하는 오탁번의 <고려대학교>는 당당한 자긍심이며, 문과대 옆 스팀목련은 올해도 때아니게 꽃을 피움에 공감을 품는다.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

하늘도 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P.23, 조지훈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굴뚝과 천장>(오탁번)은 본관 건물에서 발견된 오래된 사체를 작가의 상상력이 풍선처럼 부풀려 한 편의 인간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작중의 화자는 죽은 그와 친소를 반복하는 라이벌의 삶을 사는데, 그는 민주화의 투쟁으로 화자는 안정된 개인적 삶의 투쟁으로 길을 달리한다. 어딘가로의 실종 또는 잠적으로 그는 화자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머나먼 존재로 승격시키는데 난데없는 사체의 발견으로 그 신비로움이 깨졌음을 화자는 애석해한다. 독자는 화자의 어조가 속이려 하지만 자신에게 일말의 부끄러움이, 겉보기에 보잘것없는 삶을 선택한 그에게 존경과 동경의 마음이 서려 있음을 깨닫게 될 뿐이다.

 

끝까지 끝까지 그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차원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이런 나의 감정이 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증오 때문인지 대결 의식 때문인지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P.142)

 

2부는 저자 자신의 글로 오롯이 담고 있다. 본인이 학생 시절 만났던 은사인 정한숙과 오탁번에 대한 회상록이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원로 교수의 인간미 물씬 풍기는 일화를 접하는 재미가 있다. 쏠쏠한 지적 자극을 주는 글도 들어 있는데, <고려대학교 교가의 문학성과 음악성>은 교가의 가사와 악곡을 진지하게 분석하고 있어 고대인조차 미처 생각지 못한 교가의 아름다움을 새삼 일깨워준다. 조지훈 작사, 윤이상 작곡의 조합이 이루어낸 교가에 대해 저자는 교가로서 최고의 작품이라고 극찬한다. 당시 신진 작곡가였던 윤이상에게 작곡 의뢰한 당시 사람들의 안목도 대단하다고 할밖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부르기 쉽고 오래 기억되기까지 하기에 학교의 많은 구성원이 집단으로 부르는 교가로선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P.208, 고려대학교 교가의 문학성과 음악성)

 

건축학적 분석과 예찬으로 이어지는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나의 백석 연구>는 박동진 건축가가 설계한 도서관이 근대 건축의 뛰어난 작품임을 설명하고, 자신이 시인 백석을 연구함에 있어 도서관 소장 희귀 도서에서 큰 도움을 받아 성과를 올릴 수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백석 시집 원본을 찾기 위한 노력 등과 같은 연구 비화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저자는 사범대학장과 교육대학원장을 맡았는데, 그때 사범대 건물인 운초우선교육관 미화를 위해 애쓰던 활동과, 미당 서정주의 시 <동천>에서 영감을 얻어 조명등을 설치한 일을 마지막으로 기술한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당시에는 다들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이지만 시간이 흘러 기억에서 사라지면 아무도 당시 일을 알지 못하게 된다. 기록의 중요성이 여기서 비롯된다.

 

이 책은 고려대 학생이었던 저자가 고려대 교수가 되어 평생을 바쳐온 고려대를 정년퇴임을 하면서 고려대에게 바친 헌서다. 어찌 보면 진부할 수 있고, 특정된 단편적 추억에 지나지 않다고 깎아내릴 수 있을 수 있다. 달리 보면 좁게는 고려대 일개 대학의 대학 생활의 잡사이면서 넓게는 국내 대학의 전반적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개인과 대학, 나아가 사회 전반의 풍물 변천을 조망할 수 있는 통사로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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