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각성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46
케이트 쇼팽 지음, 한애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평점 :
여성주의 문학작품으로서 꽤 유명한 작품인 듯하다. 우연히 케이트 쇼팽의 단편소설을 읽고 흥미가 생겨 내친김에 이 소설도 읽게 되었다. 국내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표제는 주로 <각성>이며, 기타 <내 영혼이 깨어나는 순간>, <이브가 깨어날 때>로 의역하는 사례도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인 여성상은 이른바 현모양처다. 가정 내에서 좋은 아내이자 주부로서 역할을 다하고, 자식을 낳아 잘 키워내는 것이 절대 미덕으로 인정받았다. 남성은 가족 부양을 위한 대외 활동을 맡고 여성은 가계를 꾸려나가는 대내 활동을 담당한다는 분업에 기반하여 남성의 지위상 우위를 인정하는 소위 남존여비가 공개적으로 또는 암암리에 묵인되었다.
이 작품의 표제 ‘각성’은 여성이 전통적 가치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삶의 주체로 깨어남을 가리킨다. 평안히 잠들어 있던 의식에서 깨어나 현실 속에서 고통스러울지라도 자기의 길을 걸어야 함을 말이다.
퐁텔리에 부인은 우주 속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자신이 자기 내면과 주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P.31)
작가는 에드나가 서서히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노출한다. 단조롭고 엄격한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자유롭게 개방적인 크리올 가톨릭 문화에 일견 충격을 받으면서도 그 분위기에 자연스레 잦아든다. 다만 그녀는 크리올의 개방성이 서로 간의 성적 신뢰와 정조 관념에 기반함은 미처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의 잘못된 첫걸음이리라.
에드나가 독립된 개체로서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수영에 성공해서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바다에서 타인의 도움 없이 마음껏, 힘껏 멀리 헤엄쳐 나갈 수 있다는 성취감과 자신감! 이제 고개를 드는 봉인된 독립심.
이후 그녀의 행위는 양가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화요일 정기 손님맞이 의식을 없애버리고, 남편의 명령조의 말에 반발하여 따르지 않고,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며, 남편의 출장 동안 집을 따로 구해 출가하는 등.
무미건조한 일상과 애정을 못 느끼는 남편, 자식과 가정의 구속에 대한 싫증을 강조하면 통상적인 여성주의 견해로 귀결된다. 소설 속에서 에드나의 남편에게 별다른 비난을 퍼붓기는 쉽지 않다. 그가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가족 부양에 소홀하지도 않다. 이후 에드나의 독자 행보에 강력한 대응을 하지 못한 걸 보면 오히려 소심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에드나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분명 상류층이다. 그랜드 아일섬이나 뉴올리안스에서 그녀는 라티뇰 부인, 라이즈 양, 로베르 가족 등에 견주어 보면 풍요로운 생활 수준을 누린다. 그녀는 살림과 육아로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생계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애쓸 이유도 없다. 삐딱하게 보자면 돈 많은 유한부인의 한가한 넋두리라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애초 표제는 ‘각성’이 아니라 ‘고독한 영혼’이라고 한다. 출판업자에 의해 표제가 바뀌게 되었어도 작가는 ‘고독한 영혼’을 부제로라도 삼고 싶었다고 하면, 후자가 작가의 집필 의도를, 그리고 에드나의 모습을 더 잘 반영하는 게 아닐까.
에드나는 똑바로 정면을 쳐다보았지만, 골똘히 생각에 몰두한 표정이었다. 주변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거리와 아이들, 과일 행상, 눈앞에 자라는 꽃들이 갑자기 적대적으로 변한 낯선 세계의 일부처럼 보였다. (P.115)
「맞아요.」 에드나가 말했다. 「지난 세월이 꿈만 같아요. 계속 자면서 꿈을 꾼 것 같아요.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꿈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죠. 아, 그래요! 평생 망상에 사로잡혀 바보처럼 사느니 고통스럽더라도 결국 깨어나는 게 낫겠죠.」 (P.234)
남편과 가정에서 벗어나 에드나의 시선은 자기를 숭배하고 쫓아다니며 대화가 잘 통하는 로베르에게 향한다. 로베르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떠나면 그녀는 비로소 그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 사랑의 대상의 부재는 그녀의 영혼을 한층 격렬하고 불안하게 자극함을 독자는 이후 그녀의 행동에서 볼 수 있다. 로베르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성적 욕망을 일깨운 아로뱅. 그녀에게 아로뱅은 로베르의 대체물 자격도 안되지만 그에게 애정 없는 육체관계를 허용한다. 아마도 이 작품이 가장 큰 비난을 받는 장면이 여기라고 생각한다.
에드나의 행동을 정당화할 근거는 무엇일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여성의 각성은 꼭 부도덕한 사랑이나 성욕의 형태로 발산되어야 하는지. 에드나의 선택지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가정과 남편과 불평등의 틀을 깨고 독자적 인생을 구현하기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지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것을 사회적 문화적 억압의 강도와 깊이로 해명하는 건 그저 핑계로 비칠 뿐이다. 그녀 자신의 성향과 한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그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게 되었다.
퐁텔리에 부인은 라티뇰 부인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녀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음을 딱하게 바라본다. 오히려 우리는 퐁텔리에 부인을 딱하게 생각한다. 라티뇰 부인은 자신의 삶과 선택에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 삶의 우선순위를 무엇에 두는가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것이 자신과 다르다고 무턱대고 비난하는 건 굉장한 오만함이다. 자유분방한 삶의 동경과, 자신과 라이즈 양의 삶을 바꾼다는 건 다른 차원의 사안이다.
이 작품을 향한 세간의 비난에 작가는 크게 상심했다고 한다. 에드나를 여성주의 투사로 작가가 설정하였다면 응당 이러한 비난이 있을 것을 예견했을 것이다. 이는 작가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어쩌면 우리는 이 작품을 오독하는 건지도 모른다.
에드나는 여성으로서 온전히 주체적 삶을 지향하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현재 불행감을 남편 탓으로만 여긴다. 사랑 없이 결혼하고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남편 대신 로베르처럼 서로 공감과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다른 남성을 남편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그녀는 더없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에 로베르가 자신을 떠나자 절망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다. 에드나의 각성은 불완전한 반쪽짜리 각성이다. 그녀가 아로뱅과 일탈에 빠지는 장면은 작가의 깊은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에드나의 잘못된 길을 더 명확하게 보여 주고자 하는 장치다.
레옹스와 두 아들 생각이 났다. 그들은 그녀 삶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들은 에드나를, 에드나의 몸과 영혼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P.242)
세상 누구도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없다. 좋든 싫든 부모와 형제는 있게 마련이며, 연애와 결혼을 한다면 이성과 자식이 있게 마련이다. 인생이 평탄하게 행복하다면 오히려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인생은 항상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자신의 인생은 결국 자기 선택의 결과이다. 이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어떤 유의미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의 책임 또한 자신에게 있다. 남편과 자식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자신을 좌지우지하는 삶의 전부로 그것에 종속당할지는 결국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작가는 에드나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보여 주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백사장 위아래 어디에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날개 부러진 새 한 마리가 비틀비틀 퍼덕이다가 힘없이 상공을 돌더니 바닷물 속으로 추락했다. (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