썅년의 미학, 플러스 썅년의 미학
민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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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광고문구를 보면 전작보다 더 시원하고 더 강력함을 강조한다. 전작 자체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남녀차별과 남성우월 사고를 통렬히 신나게 비판했는데 이보다 더하다니 작가의 주장에 매료된 독자로서는 기쁘게 속편의 책장을 넘길 것이다.

 

요즘 온라인에서 보면 일부 여성주의는 극단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네들의 극단성은 성취되지 않는 남녀평등에 대한 분노의 표출을 넘어 자신들의 주장에 호응하지 않는 남성 일반과 일부 여성에 대한 혐오까지도 거리낌없이 표출한다. 이의 반작용으로 일부 남성은 오히려 극단적 여성주의자를 향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극단과 극단의 대립 속에서 온건하고 중도적이며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의견은 설 자리를 잃는다. 섣부른 의견은 박쥐처럼 회색분자 취급을 받아 비난의 대상으로 집중포화 받기 일쑤이므로.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본성은 결코 동일할 수 없다. 제아무리 부정해도 수컷과 암컷의 본능은 불변한다. 반려견처럼 인간 모두가 중성화수술을 받지 않는 한. 남성이 여성의 생물학적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성 역할을 바꾸자고 한다면, 그것은 상대방 성을 자신의 성보다 우월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암암리에 드러낸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여성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자긍심을 지니고 있다면 굳이 남자들보고 여자처럼 화장하고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착용하며 월경을 겪어보라고 할 요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평등을 추구하는 요소는 가정 내에서, 사회 속에서 남녀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동등한 인식과 취급이다. 남성 일반은 무채색을 선호하고 자신을 예쁘게 꾸미는 데 무심하다. 여성 일반이 화려한 복장과 예쁜 외모를 가꾸는데 관심 많은 것 또한 본성이다. 동물 프로그램을 보면 수컷이 화려하고 암컷이 수수한데 인간에게는 반대가 되었을 뿐 치장과 유혹, 선택의 과정은 별반 다를 바 없다.

 

사회의 보편 문화가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됨을 인정하자. 유치원과 초등학교 단계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남녀평등 인식의 토대를 쌓으며 그들이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자. 당장 성인에 대해서는 작가가 주장하고, 작가의 전 남친과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차별의 현장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지적하여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지만 성급하면 극단으로 빠지기 마련이다.

 

전작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는 말을 이 책에도 적용할 수 있다. 굳이 동어반복의 비슷한 내용의 책을 서둘러 낼 필요가 있었을까. 아무리 봐도 순전한 상업적 동기 외에 근거를 찾기 어렵다. 전편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편집상의 실수-예컨대 카풀을 car poll로 표기(P.93)하는 등-가 여러 군데 나타나는데 무관하지 않다.

 

여성들이여, 계속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라. 남성들의 허위와 위선을 사정없이 까발려라. 단지 그들을 미워하지 마라. 증오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이 외로운 행성에서 함께 보듬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유일한 같은 종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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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도시희극선 - 구두장이의 축일, 동쪽으로, 각자 기질대로, 왈패 아가씨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41
토머스 데커 외 지음, 이미영 옮김 / 아카넷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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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1. 구두장이의 축일 (토머스 데커)

2. 동쪽으로 (조지 채프먼, 벤 존슨, 존 마스턴)

3. 각자 기질대로 (벤 존슨)

4. 왈패 아가씨 (토머스 데커, 존 미들턴)

 

700면에 가까운 두툼한 양장본. 겉표지에는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이라는 부기가 달려있다. 누가 봐도 심오한 학술서 번역본이구나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셰익스피어 당대의 유명한 희극 모음집이다. 얄팍한 단행본으로 분책하여 나오면 딱 좋겠지만 이 책이 발간된 십년 전만해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고려할 만하다. 현재까지도 <왈패 아가씨> 정도만 별도 번역본이 <왈가닥 여자>라는 표제로 시중에 볼 수 있는 실정이다.

 

이 책은 도시희극의 대표작만 수록하였다. 도시희극은 신화 또는 역사적 사건, 그리고 왕과 귀족계급을 작품소재로 삼지 않고, 17세기 영국 사회, 그 중에서도 대도시 런던에 살고 있는 몰락한 귀족, 신흥 중산층 상인 및 수공업자, 매춘부, 사기꾼 등의 실제적 인물을 등장시켜 기존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는 와중에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벌이는 이러저러한 행동 양태를 희극적으로 그려낸 극작품을 지칭한다.

 

이전 다른 작품들처럼 개별 희극을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내용을 들여다보고 기록을 남긴다면 너무 분량이 많아질 것이므로 지양하고 수록작 네 편을 뭉뚱그려 살펴보고자 한다. <왈패 아가씨>는 별도 번역본에 대한 촌평이 있어 사정이 낫지만 다른 세 편은 아쉽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

 

먼저 각 희극의 중심인물의 신분을 보자면, <구두장이의 축일>은 구두 장인인 사이먼 에어다. 요즘과 달리 당시 구두장이 기능공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사회적 위상이 꽤 높은 듯하다. 구두 만드는 기술을 양반의 기술로 칭할 정도이니 말이다. 에어는 무역 투자로 부자가 되고 런던 시장으로 임명된다. <동쪽으로>에서는 금세공사 터치스톤과 그의 도제 퀵실버와 골딩, 그의 아내와 맏딸이 벌이는 귀족으로의 신분상승 소동이 중심 에피소드다. <각자 기질대로>는 뚜렷한 중심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신사, 상인, 가짜 군인, 물지게꾼, 하인, 판사 등 다양한 유형의 런던 시민들이 표제처럼 각자 자신의 기질을 발휘하여 한몫하고 있다. <왈패 아가씨>는 당연히 소매치기 몰이다.

 

이처럼 중심인물만 놓고 보더라도 신분이 보다 대중화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사회의 발전 모습을 문학에서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음이다. 이의 부수적 효과로 산문체의 비중이 늘어났고, 등장인물의 대사 또한 고상함에서 평이함과 비속함을 넘나들고 있어 나쁘게 보자면 품위가 없지만 좋게 보자면 보다 실제적이고 생동감이 돋보인다. <왈패 아가씨>에서는 10장에서 아예 대놓고 소매치기들의 전문 용어를 죽 나열하고 있다. <각자 기질대로>의 프롤로그는 이렇게 명시한다.

 

(프롤로그) 단지, 실제로 사람들이 쓰는 언어와 행동으로, / 희극이 이 시대를 반영하여 보여 주고자 할 때 / 선택할 만한 인물들을 골라서, / 인간의 죄가 아니라 어리석음만을 조롱할 겁니다. (P.302, 프롤로그)

 

희극이 온전한 웃음을 목적으로 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웃음 속에는 인간과 사회를 향한 체념과 함께 날카로운 비판이 숨겨진 경우가 많다. 도시희극은 칼날을 왕과 귀족에서 도시민으로 향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구가 급증하며 돈이 최고의 가치로 급부상하는 가운데 전통적 신분구조에 대한 집착도 남아 있는 상황에서 오락가락하는 가치관을 보이는 사람들의 양태야말로 웃음거리로 삼기에 딱 좋은 소재다.

 

<구두장이의 축일>에서 전통 귀족 링컨 백작과 신흥 시민 오틀리 경은 서로 배척하는 태도를 암암리에 드러낸다. <동쪽으로>는 한층 노골적이고 직설적이다. 터치스톤은 중산층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기에 도제 골딩을 사위로 삼는다. 반면 터치스톤 부인과 맏딸 거트루드는 귀족으로의 신분상승을 최우선시한다. 귀족이라는 허명에 속아 넘어가 페트러늘 경과 결혼하면서 으스대며 부모를 무시하고 하대하는 대목과, 뒤이어 가난한 처지로 영락하여도 어쨌든 귀족 신분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장면은 극도로 대조적이고 적나라한 비판을 보여준다. <각자 기질대로>는 누구 특정인물에 국한하기 보다는 등장인물 대다수가 풍자의 대상이 된다. 노우웰 노신사의 헛된 계략은 무위로 끝나고, 스티븐과 매슈는 대놓고 우스갯감이다. 보바딜 대위는 사기꾼처럼 등처먹는 존재며, 카이틀리는 똑똑한 척 굴지만 의처증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변신을 거듭하는 하인 브레인웜 만이 유독 돋보인다면 과찬일까. <왈패 아가씨>는 겉모습만 보고 몰을 창녀로, 괴물로 편견을 지닌 채 바라보는 편협한 보수적 시각을 풍자한다.

 

몰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흥미롭다. 칼싸움으로 랙스톤을 단번에 제압하는 실력, 전통적 여성복장을 탈피하고 남장을 하는 자율성, 결혼에 연연하지 않는 당당한 태도 등. 단연 특이하면서도 흥미롭고 매혹적인 인물이다.

 

() 제가 언제 결혼할 건지 말씀 드리지요. / 한량들이 채권 추심원을 두려워하지 않고, / [......] / 처녀들이 순결을 간직한 채 늙어 간다는 소식을 / 공께서 듣는 날이 오면, / 바로 그 이튿날 나도 결혼하겠어요. / 만약 그때까지도 내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요.

(놀랜드 공) 마치 최후의 심판 날처럼 들리는군.

() 그날 결혼하는 게 가장 좋을 거예요. / 그래야 결혼을 후회해도, 곧 쉬게 될 테니까요. (P.653, 11)

 

희극 중에도 즐거운 희극과 분명히 희극이지만 그다지 기쁘지 않은 희극이 있다면, <구두장이의 축일>은 시종 유쾌하다. <왈패 아가씨><각자 기질대로>는 왔다갔다 하지만 대체로 희극풍이다. 반면 <동쪽으로>는 매우 통렬하고 진지하며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어 비록 말미에서 희극으로 전환하지만 작위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구두장이 에어의 여유롭고 너른 도량과 쾌활하고 활기찬 분위기는 작품 전체를 축일처럼 만들고 있어 특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오죽하면 왕조차도 그를 즐거운 마음에서 미치광이 시장님”(P.140, 21)이라 칭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작품 성격이 다른 것은 작가가 런던과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성 여하에 좌우된다. <구두장이의 축일><왈패 아가씨>는 긍정적이고 화합지향적이다. <동쪽으로><각자 기질대로>는 속물주의와 허위의식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비난한다.

 

<왈패 아가씨>의 런던은 <구두장이의 축일>에 나오는 축제적 활기도 있고, <동쪽으로>의 탐욕과 속임수도 난무하며, <각자 기질대로>의 과장된 악당들이 여전히 활보하는 그런 세계이다. [......] 즉 도시희극 후기작 <왈패 아가씨>의 런던은 선과 악, 헌신과 속임수, 공평함과 차별이 공존하는 혼란스럽고 양가적인 세계이고, <왈패 아가씨>는 그런 런던을 따뜻하면서도 풍자적인 시각으로 구석구석 그려내고 있다. (P.684-685, 작품해설)

 

이들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외설적 대사를 빼놓을 수 없다. 상대방을 놀리고 비하하거나 가볍게 웃음을 유도하기에 성적인 표현처럼 적절한 요소도 드물 것이다. 셰익스피어 조차도 자신의 희극에서 이를 적재적소에 사용하였으니 도시희극처럼 중하층 계급이 대거 등장하는 장르에서는 아예 대놓고 남발할 정도이며, 표현수위도 한층 높다. 다만 어쨌든 직설적으로 하지 않고 노골적이지만 언어적 유희로 돌려까기하는 대사가 곳곳에 난무한다. 모든 인물이 다 그렇지는 않으며 이를 전담하는 몇몇 역할이 있다. <구두장이의 축일>은 기능공 퍼크, <동쪽으로>는 도제였던 악당 퀵실버, <동쪽으로>에서는 의처증이 있는 상인 카이틀리, <왈패 아가씨>는 랙스톤, 고스호크, 그린위트 같은 신사들이 성적인 농담과 대사를 연기한다. 자칫 눈살을 찌푸릴 수 있겠지만 당대의 윤리 관념과 오락으로서 희극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퍼크) 살이 부푸는 게 느껴진다고요? 혹시 임신하신 건 아니고요? 그런데 우리 주인님이야말로 새신랑처럼 가운 입고 반지까지 끼셨으니 아랫도리 살이 부풀어 오르지 않을까요? 하지만 마님 솜씨가 좋으시니 곧 주인님 기운을 빼놓으시겠지만 말이에요. (P.54, <구두장이의 축일> 7)

 

(퀵실버) 수레바퀴에 매여서 계속 돌아야만 하는 개라도 마님의 수레바퀴 같은 성욕에 나리처럼 비참하게 묶여 있진 않을 거예요. 개가 바퀴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는 건 구르는 바퀴 꼭대기가 개보다 밑으로 내려올 때뿐이듯이, 나리도 마님을 밑에 깔고 있을 때만 마님을 꼭대기까지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P.192, <동쪽으로> 22)

 

이 번역본 자체에는 굉장히 만족한다. 뛰어난 책 만듬새에 덧붙여 충실한 번역, 세세한 주석, 분량은 많지 않지만 알짜배기 작품해설 등. 다만 솔직히 영국 고전 희곡의 매니아가 아닌 이상, 이 두껍고 무거우며 딱딱한 책을 펼쳐 읽는 독자는 거의 없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여기 작가들이 셰익스피어처럼 불멸의 대가라고 할 수도 없으니 더더구나 유인이 약하다. <왈패 아가씨>처럼 각 희극작품들이 낱권으로 출간되어 보다 접근성이 용이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구두장이 에어의 활기와 쾌활을 드러내는 대사를 더한다.

 

(에어) 그럼 식탁 백 개를 또 만들고, 또 만들면 되지. 내 유쾌한 견습공들이 다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말이야. [......] 구두장이들의 명예를 위해 깊이 건배하자고. 하지, 다들 신나게 마시고 있나? 퍼크, 모두 재미있게 놀고 있어? (P.129, <구두장이의 축일>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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썅년의 미학 썅년의 미학
민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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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고등학교의 추천도서 목록을 살펴보는데, 표제에 특수기호가 들어간 책명이 보이길래 이게 뭘까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이른바 비속어가 들어있어서 나름 중화시킨다고 특수기호로 가린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 권장도서인데 책명을 가리다니. 대담한 제목은 작가의 당당한 선택이다. 여기서 썅년은 남성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주의를 외치는 작가를 포함한 여성들을 지칭하는 남성들의 욕설인 동시에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이 책은 웹툰 에세이다. 웹툰과 글이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아무래도 독자의 눈에 확 들어오기는 만화다. 작가는 본인이 겪거나 생각한 일상생활 속 성차별의 사례를 재밌고 때로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에 그림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는 글로써 미진한 부분을 설파하는데 글은 그림의 보완과 확장인 동시에 한층 강력한 주장을 펼친다. 개인적으로 만화만으로 구성하였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다. 여성주의 글은 이미 충분히 많기에.

 

이 책만의 특징은 무엇보다 웹툰 형식을 도입하여 흥미를 끌었으며, 표현 방식과 수위가 매우 직설적이라는 점이다. 작가의 주장에 공감하는 많은 여성들은 사이다를 들이켰을 때의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시원하게 볼일을 보았을 때의 상쾌한 배설 쾌감과도 비슷하다. 그만큼 작가는 여기서 은유적이고 우회적이며 점잖고 온화한 표현을 벗어던지고 주변 눈치 보지 않은 상태에서 썅년이란 소리를 들을 각오로 통렬하게 남성주의 문화를 비난한다.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다. 우리 사회와 개인에게 알게 모르게 젖어있는 남녀 차별과 남성 우월의 관념은 계속해서 지적과 개선이 필요한 영역이므로. 다만 우려는 작가의 판단기준과 수위가 지나치게 여성 중심적이고 과격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작가의 말대로 나쁜 남성은 열 명 중 두 명, 착한 남성은 한 명이며, 나머지 전부는 기회주의자라고 간주한다면, 대다수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 가해자다. 작가의 주변 남성, 즉 아빠와 남자 형제, 또는 남사친과 남자 지인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공격적이며, 과도한 부풀리기 인식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타협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에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잠재적 적군으로 간주한다. 적당한 공감은 거부한다. 굳이 우군은 필요없다고 선포한다.

 

기존 사회체제에서 남성은 가해자, 승리자, 지배자로, 여성은 피해자, 패배자, 피지배자로 단순하게 나눠 보는 관점은 적절하지 않다. 남녀 모두가 사실은 피해자다. 과거에는 그것이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며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문제로 대두되었다. 모두가 합심하여 개선 또는 철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사안이지 아군과 적군으로 양분해 갈라치기 한다면 갈등과 반발을 초래하여 문제해결에 역행할 뿐이다.

 

여성주의 이슈는 항상 조심스럽다. 저마다의 생각과 기준은 동일할 수 없고 다양하지만, 이 사안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이원론밖에 없다. 옳고 그름, 찬성과 반대, 선과 악. 오늘날 성차별과 남성주의 문화가 당연하다고 믿는 남성은 극소수다. 대다수는 남녀평등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인정한다. 개선하는 속도와 범위에서는 이견이 생길 수 있지만. 이 책에서 아쉬운 대목이 바로 이런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작가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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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M.T. 키케로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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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는 유명한 카이사르와 동시대인으로서 그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다가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에게 암살당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키케로의 명성은 공화주의자 정치가보다는 그가 남긴 불후의 저작에 따른 사상적, 문학적 영향력에 힘입어서다. 이 책에 실린 <노년에 관하여><우정에 관하여>는 대표작으로서 에세이에 가까운 형식을 지닌다.

 

<노년에 관하여>는 대 카토를 화자로 해서 그가 자기 집을 방문한 라일리우스와 스키피오에게 노년의 삶의 가치와 편견을 담담하게 진술한다. 예나 지금이나 늙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노인이 되는 것을 끔찍하게 여기고 대비되는 싱싱한 청춘의 삶을 예찬한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카토는 노년이 비참해 보이는 네 가지 이유를 이렇게 제시한다.

 

나는 노년이 비참해 보이는 네 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되네. 첫째, 노년은 우리를 활동할 수 없게 만들고, 둘째, 노년은 우리의 몸을 허약하게 하며, 셋째, 노년은 우리에게서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가며, 넷째, 노년은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네. (P.29, 5)

 

카토의 말은 대체로 옳다. 육체적 활동은 쇠퇴하지만 지혜와 판단력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 청년은 육체적 활동에서 장점을 지닌다면 노년은 원숙미를 발휘하는 활동을 하면 된다. 노인이 되면 감각적 쾌락에 무뎌진다는 건 결점인 동시에 장점이 될 수 있다. 쾌락의 유혹에 굴복하여 일신을 망치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한다면 절제 있는 쾌락을 즐길 줄 아는 노년도 괜찮다.

 

반면 둘째와 셋째 이유에 대한 반론은 다소 빈약하다. 그는 건강 상태를 잘 유지할 수 있다면 노인이라고 무조건 허약한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야. 하지만 모든 노인이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쾌적한 생활을 누리지는 못한다. 제아무리 우겨봐도 젊은이에게 비하면 육체는 쇠약해지고, 질병에 취약해지는 게 노년의 자연스러운 생리다. 아울러 죽음을 맞닥뜨리는데 청년과 노년의 순서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확률적으로 노인의 죽음이 훨씬 크다는 점을 무시할 순 없다.

 

죽음이 영혼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면 죽음은 무시되어 마땅하고, 죽음이 영혼을 영생할 어떤 곳으로 인도한다면 죽음은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네. (P.78, 19)

 

카토의 주장에서 돋보이는 대목은 영혼 불멸에 대한 그의 믿음이다. 영혼은 항상 저절로 움직이고 단일한 본성을 지니며 결코 나누어질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영혼은 멸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언뜻 고대 그리스의 원자를 떠올리게 하는데, 유물론이 아닌 유심론이라는 차이가 있다. 살아생전 훌륭한 인생을 가꾸었고 영혼이 불멸한다면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비극이고 최종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통과 절차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카토는 사람은 적절한 때에 죽는 게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끝맺는다.

 

<우정에 관하여>는 대화체 형식을 사용한다. 라일리우스가 두 사위인 스카이볼라와 판니우스에게 자신과 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우정을 들려주고 훗날 스카이볼라가 이를 회고하는 방식이다. 대화체이지만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라일리우스가 일방적으로 주도한다. 앞서 노년의 삶의 가치를 역설하는 과정에서 다소 무리수를 두어 보편적 설득력에서 아무래도 흡인력이 덜한 반면, 우정에 관한 담론은 참으로 매끄럽고 설득력이 있다. 자고로 우정을 기리지 않고 평가절하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으므로. 우정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요청을 받고 라일리우스도 최고의 찬사를 바친다.

 

(라일리우스) 우정이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모든 사물에 관한, 선의와 호감을 곁들인 감정의 완전한 일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네. 지혜를 제외하고는 그것은 불사의 신들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나는 믿고 싶네. (P.117, 6)

 

돌이켜보면 혈연관계도 아닌 생판 남남인 사이에서 세월과 죽음도 무릅쓰고 고귀하고 굳건한 상호 간의 믿음과 호의가 싹 트고 유지된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진실한 우정은 어떤 이익도 기대하지 않고, 신분과 능력의 우열, 인종 간의 구별도 뛰어넘는다. 그렇기에 라일리우스는 우정은 필요가 아닌 선의와 호감의 본성에 비롯되며 진정한 우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본다.

 

세상에는 참된 우정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정의 외피를 쓴 거짓 우정도 난무한다. 라일리우스는 이를 매우 경계한다. 자칫 우정의 허명을 중시하여 우정이 지닌 참된 가치를 무너뜨리는 시도를 배격한다. 선의 미덕에 근거하지 않고 악덕에 이끌린 우정은 잘못된 우정이다. 우정의 이름으로 벗에게 배덕, 범법을 요구한다면 그는 진정한 벗이 아니다. 친구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그릇된 길로 나아간다면 이를 방관하거나 영합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충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참된 벗이다.

 

내 거듭 말하노니, 우정을 맺어주는 것도 미덕이고 우정을 지켜주는 것도 미덕이라네. 조화와 안정과 신뢰는 모두 거기서 비롯된다네. (P.175, 27)

 

따라서 우리는 친구를 사랑할 때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며, 친구와 바른길로 더불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친구의 본성이 바뀌어 같이 할 수 없다면 우정의 배반이라는 인상이 들지 않게끔 서서히 소진되는 것처럼 하라는 조언은 차라리 현실적이다.

 

진정한 친구는 제2의 자아”(P.162, 21)라고 할 정도로 인간에게는 중요한 존재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기에 뜻이 맞고 함께 어울릴 수 있으며 상호 신뢰가 가능한 친구를 찾을 수 있다면 더없는 행복이다. 키케로는 라일리우스의 입을 빌어 우정에서 미덕의 중요성을 더해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우정을 가리는 잣대가 됨을 강조한다.

 

공화주의자로서 키케로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는 귀족, 즉 원로원이 중심이 되는 사회질서를 이상적인 체제로 보았다. 군주제는 물론이고, 평민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일체의 시도에도 맹렬히 반대하였다.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와 그의 개혁에 대한 키케로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임을 <우정에 관해서>에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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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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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피곤한 아이

2. 올드 언더우드

3. 어린 가정교사

4. 늦은 밤에

5. 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

6. 해와 달

7. 환희

8. 영원한 사랑

9. 낯선 사람

10. 미스 브릴

11. 파커 아주머니의 인생

12. 만에서

13. 인형의 집

14. 차 한 잔

15. 파리

16. 결혼한 남자의 이야기(미완)

 

<가든파티>에 이은 맨스필드 작품집 두 번째 도전이다.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골고루 작품을 선별하였다. 따라서 맨스필드의 작품세계가 변화 발전한 모습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다. 앞선 책과 중복 수록된 <낯선 사람>, <미스 브릴>, <파커 아주머니의 인생>, <만에서>는 여기서 별도로 언급하지 않으련다.

 

맨스필드는 우아하고 고상한 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독자의 섣부른 예상과 기대에 영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시각에서 개인의 삶과 세상에 깃들인 냉혹함과 부조리를 담담하게 때로는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기술한다. 특별히 과장된 묘사와 수사를 동원하지 않으며 서서히 나아가다 일순간에 독자에게 일침을 가하는 작가의 수법은 묘한 뒷맛을 남긴다.

 

<피곤한 아이>는 초기작으로서 모방작이지만 맨스필드 만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어린 하녀 아이는 피곤함에 지쳐 어쩔 줄 모르지만 부인은 인정사정없이 아이를 부려 먹는다. 사생아라는 출생 상의 약점이 아이에 대한 인간적 대우를 망각하는 단초가 되는데, 결말은 다소 충격적이다. 작가의 후기작 같은 은근하고 미묘한 암시는 여기서 나타나지 않는다.

 

소리 없이, 생글거리며, 살금살금, 아이는 부인의 침대에서 분홍색 베개를 가져와 아기의 얼굴 위에 올려놓고, 버둥거리는 아기를 있는 힘껏 눌렀다. ‘대가리가 잘려나간 오리처럼 꿈틀거리네.’ 아이는 생각했다. (P.17)

 

<올드 언더우드>에서 영문을 모르는 독자가 서서히 알게 되는 진실은 올드 언더우드가 살인죄로 복역 후 출소하였으며, 살인 동기는 아내의 불륜이었는데 연놈이 아닌 아내만을 살인하였다는 사실이다. 늙어서 쇠락한 올드 언더우드의 가슴속에서 울리는 쉼 없는 망치질 소리는 무엇일까. 그의 상념의 변화에 따라 울림의 세기와 빠르기는 증폭된다. 선창의 어떤 배에서 자고 있는 건장한 사내의 모습, 환하게 웃으며 사내를 바라보는 아내의 사진. 작가의 글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지만 독자의 상상력은 그칠 줄 모른다.

 

세상사에 깃든 위험과 부조리함은 <어린 가정교사>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어린 여성 홀로, 낯선 땅에서의 여행은 아무래도 위험한 게 현실이다. 사방의 적대자에 둘러싸인 그녀에게 친절을 베푼 늙은 신사는 얼마나 안전하고 믿음직한 존재였을까. 어린 가정교사는 그를 완벽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꿈이다! 현실이 아니야! 노인이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했다. , 끔찍해라! 어린 가정교사는 경악하며 노인을 보았다. (P.42)

 

페미니스트라면 응당 여성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사회 현실과 늙은 나이에도 강압적으로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남성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리라. 물론 어린 가정교사도 잘못은 있다. 타인의 이유 없는 과도한 친절을 무비판적으로 덥석 수용한 결정은 순진하기보다는 어리석음에 가깝다. 물론 어리기에 그러했겠지만.

 

<늦은 밤에>는 짧은 작품이지만 사랑을 갈망하는 여성의 이율배반적으로 갈팡질팡하는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호감을 표시하는 듯하지만 자신이 다가서면 물러서 버리는 남성을 향한 불만. 자신에게 보낸 편지가 호감일지 모욕일지 궁금해하면서 부정적인 해석으로 기울어가는 마음을 억지로 붙들려는 애처로움이 인간 심리의 미묘함을 나타낸다.

 

, 됐다그래. 제발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태워버려! 아니, 지금은 안 돼. 불이 꺼졌잖아. 이제 자야지. 정말 일부러 모욕을 주려고 쓴 걸까. , 피곤해. (P.48)

 

<해와 달>은 어른 세계를 향한 아이들의 순수한 시각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아이들의 이름이 해와 달이기에 다소 우화적 느낌도 풍긴다. 뭉개진 아이스크림 푸딩 장식은 즐거운 파티의 정도에 대한 척도기에 어른의 관점에서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해는 그렇지 않다. 아름답고 정교하게 준비된 파티 음식과 디저트는 그에게 순수한 미의 척도에 있어 망가뜨려서는 안 될 존재다. 완벽한 순간과 존재가 어른들의 향락과 욕망을 위해 일순간에 허물어지다니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으리라. 그래서 해는 이렇게 외친다.

 

돌연 해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끔찍해요-끔찍해요-끔찍해요!” 해가 흐느꼈다. (P.99)

 

이 책의 표제작인 <차 한 잔><환희>는 묘하게 닮은꼴이다. 우선 주인공이 유부녀이며 상류층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신의 처지에 매우 만족함을 표명하고 있다. 후자에서 버사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만족과 환희는 눈부실 만큼 싱그럽고 흐뭇하기조차 하다. 기쁨과 사랑과 행복에 휩싸인 그녀만큼 행복한 여성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전자의 로즈메리는 결을 달리하지만 삶에 별다른 불만이 없는 점은 똑같다. 그녀는 대신 자신의 마음대로 호화와 사치를 누릴 수 있으므로.

 

두 사람의 완벽한 세계가 무너진 계기는 사소하다. 버사는 파티에 어울리지 못하며 남편에게 미움받는 미스 풀턴에게 동정과 애정을 함께 느낀다. 차 한 잔을 구걸하는 가난한 여자를 기어코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오는 로즈메리 또한 동정과 자부심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우월자의 지위에서 열등한 사람을 내려다보는 그네들의 시선은 -의도의 선악에 무관하게- 현상의 뒤바뀜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이제 버사는 사랑과 행복에 젖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미스 풀턴임을, 로즈메리는 거지 여인의 빼어난 미모에 남편의 관심이 쏠리자 돌연 위기감을 느낀다. 독자는 버사와 로즈메리의 섣부른 도취를 손쉽게 비판할 수 있지만, 기실 그네들에게 진정 잘못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 그런 면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남편의 관심을 회복하려는 로즈메리의 노력이 딱할 따름이다.

 

로즈메리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필립.” 로즈메리는 속삭이고, 그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예뻐?” (P.252)

 

<인형의 집><가든파티>와 비슷하다. 버넬가를 배경으로 키지어와 베럴 이모가 등장할 뿐 아니라 주제 의식 역시 유사하다. 빈부격차에 기반한 사회계급의 명확한 구별은 바로 이웃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해도 가든파티 개최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인형의 집을 구경할 수 있는 자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켈비네 아이들이 따돌림당하는 까닭은 단지 그들이 가난하고 신분상 천하다는 이유다.

 

독자는 키지어의 용감한 행동에 박수를 보내는 한편 베럴 이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편협한 사고에 심한 불편함을 느낀다. 특히 대놓고 모욕적 언사를 퍼붓는 베럴 이모에게는 적개심이 생길 정도다. 한편 내쫓기는 찰나의 순간에 인형의 집의 조그만 램프를 본 것에 기뻐하며 미소 짓는 엘스를 바라보는 우리네 마음은 따스함과 안타까움 그 어디쯤이리라.

 

<영원한 사랑><결혼한 남자의 이야기(미완)>은 부부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함께 다루어봄 직하다. 전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병든 아내를 간호하기 위하여 함께 요양 온 남자의 이야기다. 쇠잔하고 연약한 아내는 남편의 도움을 전적으로 필요로 한다. 남자는 분명 아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어찌 보면 눈물겨울 정도로 아름다운 부부의 사랑이다. 한데 이상하다. 아무리 해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것은 부부의 사랑을 다루는 맨스필드의 필치가 극히 담담하고 건조하기 때문이리라.

 

후자는 미완작이지만, 완성된 부분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여기서 부부는 이미 서로 간에 마음이 떠났다. 남성 화자는 아내를 가리켜 마음이 산산조각 난 여자라고 칭한다. 한때의 사랑과 아름다운 부부애는 한순간에 시들고 이제 그들은 남남과 같은, 어쩌면 남남보다도 못한 관계에 처해 있다. 그렇게 남처럼 살 거라면 헤어지지 않고 뭐 하는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떠나지 않는 이유를 파헤쳐보면 미스터리를 발견한다. 단순히 그들은 못 떠나는 것이다. 묶여 있다. 그들을 옭아맨 굴레가 무엇인지는 자신들만 안다. 내 말이 모호한가? 글쎄, 이 문제가 애초에 대낮처럼 명백하지 않지 않은가? (P.267)

 

결혼 관계는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자 굴레이기에 애정의 소멸에도 상관없이 관계가 유지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들 부부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특별히 이상하지 않다. 화자는 양자의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한 연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화자의 유년 시절이 부부의 현재 애매한 상황에 어떤 빛을 던져줄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이 작품이 미완성작이기에, 우리는 작가의 의도를 모른다.

 

이 책의 작품 중 가장 문제작이라면 단연 <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파리>를 꼽고 싶다. 그만큼 두 작품은 독자인 내게 당혹감과 충격을 주었다. 철저한 악행과 무자비한 잔인함으로. 후자에서 사장은 양면적 상황에 놓인다. 하나는 죽은 아들의 무덤 소식을 통해 잊고 싶었던 과거의 아픈 기억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파하는 아버지의 모습. 다른 하나는 잉크병에 빠진 파리에게 희망 고문을 선사하는 잔인한 인간의 모습. 존재는 분명 하나이련만 비극과 아픔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변모를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사장은 비단 유별난 인물은 아니리라. 압권은 가해와 살육의 즐거움에 빠져 자신이 조금 전 왜 눈물 흘릴 뻔했는지 기억 못 하는 대목이다.

 

조용히 걸어가는 늙은 개 뒤에서 사장은 조금 전에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려 했다. 무엇이었지? 그건.... 사장은 손수건을 꺼내 목깃 아래를 훔쳤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는 기억할 수 없었다. (P.260-261)

 

전자의 주인공은 단연코 위선자다. 신사이자 작가로 자처하는 그는 게으르지만 안락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몸을 파는 일조차도. 그런 그가 파리의 한 카페에서 마주친 글귀-Je ne parle pas francais(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를 통해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며, 연인에게 버림받아 곤경에 처한 여성 마우스. 그녀에게 주인공은 어떤 행동을 하였던가. 이 작품에서 맨스필드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사회 밑바닥, 그리고 양심의 구렁텅이에까지 영락한 인간성의 한계를 확인해 보고 싶었을까. 또는 사회적 타락은 주인공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일반의 현상이기에 그 부조리함은 일개인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가든파티>를 통해 맨스필드 문학에 입문한 내게 이 책은 또 다른 의미에서 당혹감을 안겨준다. <가든파티> 수록작이 그나마 작가 후기의 완성되고 정제된 작품이라면 이 책에는 날 것, 미숙한 것, 원숙한 것 듯이 혼재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작가 맨스필드의 생소하면서도 온전한 실체를 단번에 알아차리기엔 이 책이 더욱 유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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