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표절 권력'이 이번 문학동네 가을호 특집의 제목이자 주제였다. 특집에 실린 글들을 쭉 읽으면서, 창비와는 다르게 반성의 모습을 어느정도 보이고 다양한 필자들의 글을 실으며 쇄신을 시도한 것에는 박수를 보내지만(물론 이것이 반성하고 있다는 하나의 쇼로 끝난다면 또다른 기만이 될 것이다), 글의 논의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도 꽤 있었다. 흥미로운 글들이 많긴 했지만.

 

가을호를 시작하는 머리글에 실린 권희철 문학평론가의 '눈동자 속의 불안'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이런 것 같다. 신경숙의 '전설'은 '우국'의 명백한 표절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고 있는 문학적 성취와 지향점은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문학권력을 말하는 논의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는데, 이는 '문학권력이 상업성을 추구해왔다'는 주장과 '문학권력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문학적인 것을 고집해왔다'는 주장이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전설'과 관련된 언급에서는 두 작품이 문학적으로 성취한 바가 다르지만 결국 표절이라는 식으로 못박고 있으므로, 개별 작품에 대한 비평적 논의는 옳다 그르다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개인적으로는 '비평'에 실린 최원식 문학평론가의 논지에 조금 더 공감하는 바다. 그는 '전설'과 '우국'이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표절관계가 아닌 영향관계에 있지만(이 부분은 동의할 수 없다), '전설'은 작위적인 구성과 신파조로 중세적 열(烈)의 찬미가로 낙후했다고 썼다. 개인적으로 신경숙 소설이 인내하는 수동적 여성상을 꾸준히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눈동자 속의 불안'의 문학권력을 부정하는 근거를 보면서, 참 순진한 근거다...라는 생각을 했다. 권희철 평론가는 비평의 원론적 정의와 역할을 근거로 상찬식의 주례사 비평은 독자와의 대화가 아닌 독백으로 전락한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원론적인 정의 실현대로 흘러간다면 이런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평론가들이 원치 않았다고 해도, 출판 시장의 구조가 결국 비평의 기능을 격하시키고 문학권력이라 부를 만한 구조를 불러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문화연대가 주최한 토론회의 한 장면을 보았을 때는, 대안을 제시한다는 비평세력 역시 지나치게 과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가 공동주최한 토론회(<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 6월 23일)에 참석했을 때 나는 다음의 풍경을 목격하며 조금 놀라고 말았다.

 

토론자(심보선) (전략) 신경숙은 우리의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다른 에이스 혹은 다수의 에이스들을 발굴하고 육성합시다.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갈채)

(후략)

사회자(이동연) (토론자의 발표가 끝난 뒤) "신경숙은 우리의 에이스가 아니었다"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 권희철, '눈동자 속의 불안 - 2015년 가을호를 펴내며'

 

'비평'에는 김병익, 도정일, 최원식 문학평론가의 글이 실렸다. 김병익 문학평론가의 '작품의 내면을 이해하고 그 가능성을 발견하며 그 미덕을 평가하여 우리의 문학적 소산으로 격려하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라는 주장은, 주례사 비평을 옹호할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글에서는 비평이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한 필자의 고뇌가 잘 나타난다) 도정일 문학평론가의 글은 비평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에서 시작해 대학의 문학교육의 문제점과 이로 인한 한국 비평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짚고, 비평이 '개인적 실천임과 동시에 사회적 공적 실천'이라는 논지를 펼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세 글 중 도정일 문학평론가의 글이 비평이 나아갈 길을 (정말 원론적인 접근이지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표절'에는 장은수 문학평론가의 글이 실렸는데, 개인적으로 이번 특집에서 두 번째로 흥미로운 글이었다. 그의 '무엇을 표절이라고 할 것인가'는 이번 사태를 통해 등장했던 논의들을 모아 정리하고, 이에 대한 평가와 동시에 표절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그가 주장하는 '표현의 유사성'이라는 기준에 대한 논의는 좀더 진행될 필요가 있겠지만... 내용을 엄격하게 적용했을 때 표절 아닌 것이 없게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다. 글이라는 것이 더이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시대가 아니게 된 만큼, 텍스트는 이전까지 존재했던 텍스트들의 변용일 수밖에 없으므로... 하지만 그렇다고 내용을 완전히 배제하자니 그것 역시 문제가 된다는 것, 그것이 문학이라는 언어 텍스트가 가진 딜레마인 것 같다.

 

'권력'에는 작가들의 좌담이 실렸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사회 아래 김도언, 손아람, 이기호, 장강명 작가의 좌담이 실렸는데, 개인적으로 이 글을 읽으면서 두근두근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용 자체가 좋았다기보다는, 글에서도 느껴지는 치열한 대립의 열기 때문이었는데, 굳이 비유를 하자면 손아람 작가와 이기호 작가가 양 쪽 대척점에 서 있고, 신형철 문학평론가 역시 이기호 작가 쪽에 서서 문학동네에 속한 평론가이자 편집위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으며, 김도언 작가는 중간 지점에 있고, 장강명 작가는 자신만의 작가의식의 영역에서 서로 의견을 나누며 다양한 논의를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손아람 작가는 때때로 지나친 비판의 입장을 견지해 비약이 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비주류 작가로서의 입장과 문학계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어서 눈길이 갔고, 이기호 작가는 자신도 인정했듯 어느 정도 혜택을 받았던 사람의 입장에서 현재의 시스템이 갖고 있는 순기능을 피력했다. 장강명 작가는 다양한 문학의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 주로 권력의 분산의 측면에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는데, 북토크 때도 느꼈듯 독자 중심적인 주장이 주된 흐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네 작가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는 지점이 있다고 느껴져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문단이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만 깊어가는 밤이다.

 

개인적으로, 출판사가 유통과 문예지를 모두 독점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떤 대안도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 부분에 있어선 <악스트>에 실린 박민규 작가의 '파이' 얘기에 동감하는 바다. 안 그래도 작은 경제적 파이를 대형 출판사들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그 안에 있는 작가나 평론가들이 작가의식을 지키려 해도 문학권력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현재와 같은 기형적인 구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선택과 배제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창비나 문지, 문학동네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번 특집에 실린 글들을 찬찬히 보았을 때, 문학동네가 표절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이를 간과한 것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문학권력에 대한 논란은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이런 논의의 장이 마련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신형철 평론가의 바람처럼 문학동네가 개혁의 시작으로 나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것은, 없는 자가 기회를 잡는 것보다 어려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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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9-09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우선..작가 독점선점돌려가며 쓰는것.. 요! (아...미미월드!..에도시대..흐헉~^^)

아무 2015-09-09 00:51   좋아요 1 | URL
돌려가는 것도 문제가 많죠.. 문학상 같은 경우도..ㅠㅠ 김도언 작가는 요즘 작가들이 창비나 문동 같은 곳에 글 싣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구는 작가의식도 문제라며 비판했지만, 경제적인 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 들어 문학상도 진짜 돌려가며 주는 모양새가 보이는게..ㅠㅠ

ㅐㅐ 2015-09-0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표절 문제로 한창 시끄러웠을 때 출판사카페는 이상하리만치 이 건에 대해 조용했고 작가이자 직원인 분들 트위터를 좀 돌아보니 역시나 표절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 가운데 신작가 옹호하는 글만 리트윗하는 모습이 꽤 보이더군요. 그러다 이번 문학동네 가을호에서 표절 인정 쪽으로 가닥을 잡으니 6월부터 이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도 안 하던 모 시인은 창비가 반성해야 한다고 꾸짖기 시작. 이들의 경제적 파이를 쥔 쪽이 어디인지 알겠고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현대문학 거부한다고 외칠 때와 너무 다른 모습들이라 그저 쓴웃음만 나오네요.

아무 2015-09-09 21:07   좋아요 0 | URL
결국 출판사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재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 구조에서 벗어나면 바깥으로 밀려나게 될 거라는 암묵적 공포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찌됐든 경제라는 것이 우리의 행동과 생각에 작용하는 바가 크니까요...

없없없음 2015-10-2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출판사-문예지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아무 2015-10-21 23: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출판사-문예지의 결합은, 현대사의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는 생각도 드네요. 문학 외적인 배경으로 한국문학의 존립이 위태로웠던 때의 궁여지책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것이 고착화되어 신경숙 사태로 폭발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 역시 문학동네 가을호 리뷰 잘 읽었습니다. 예리해서 제 글이 부끄러워지네요..^^;;

eunkimwell 2015-10-23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말고 악스트!!!

아무 2015-10-23 16:01   좋아요 0 | URL
악스트에도 계속 관심을 주는 중입니다^^ 벌써 다음 호 나올 때가 오고 있네요 ㅎㅎ
 

 

제르진스키가 살았던 시대에, 사람들은 대체로 철학을 어떠한 실제적 중요성도 없는 것으로, 심지어는 대상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 어떤 시대에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장 널리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 세계관이 그 사회의 경제와 정치와 풍속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9쪽)

그는 카프카가 그리고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수치심으로 얼룩진 그 슬로 모션의 세계, 존재와 존재가 별들 사이의 텅 빈 공간만큼이나 막막하고 허허로운 공간에서 마주치기만 할 뿐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도 맺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세계, 그것은 바로 브뤼노의 정신 세계였다. 이 세계는 느리고 차가웠다. 그래도 따뜻한 것이 있기는 했다. 여자들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
(68쪽)

과거를 회상하다 보면, 모든 게 다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기 쉽다. 십중팔구는 틀린 생각인데도 말이다.
(75쪽)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자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완전하게 자각하는 것은 <거짓말>을 매개로 할 때이다. 개별적인 삶은 사실상 이 거짓말과 혼동될 수 있다. 아나벨은 열여섯 살 때까지 부모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다. 미셸에게도 비밀로 하는 것이 없었다(그것이 아주 드물고 소중한 일이었음을 그녀는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그날 밤 아나벨은 몇 시간 만에 인간의 삶이 거짓말들의 끊임없는 연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84-85쪽)

새벽녘에 갑자기 천둥이 치고 사나운 돌풍이 불었다. 그는 자기가 조금 겁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이어서 천둥 소리가 잦아들고 비가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들이 텐트의 천을 투덕투덕 때리고 있었다. 얼굴 바로 위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그의 몸에는 빗방울이 닿지 않았다. 문득 자기 인생이 그 상황과 비슷하리라는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앞으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 사이로 지나가게 될 것이다. 때로는 그것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으리라. 다른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감정들 가운데 어떤 것도 나에게 닿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리라.
(93쪽)

그의 세계관은 대속이나 은총 같은 기독교의 개념과도 거리가 멀었고 자유나 용서와 같은 개념과도 무관했다. 그의 세계관은 기계적이고 비정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초기 조건이 주어지고 초기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에 매개 변수가 정해지면, 사건들은 인간의 마음과 무관한 텅 빈 공간에서 전개된다. 이 사건들이 결정론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그 밖의 가능성은 없었다. 그 일에 대해 누구도 책임질 수 없었다.
(97쪽)

사실,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종교와 과학을 융합할 수 있다는 기대는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고, 인간의 허영과 잔인성은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지. 사랑이 작은 위안은 되겠지만, 그것도 희망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야.
(175쪽)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사람살이가 추잡하고 험악하다는 생각을 키워 온 바 있었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하나의 싸움터였다. 이 짐승들은 견고한 우리에 갇혀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 지평은 분명히 지각할 수는 있으나 도달할 수는 없다. 그 지평의 다른 이름은 도덕률이다. 하지만 혹자는 말한다. 사랑에 도덕률이 포함되어 있고, 사랑을 통해 도덕률이 구현된다고 말이다.
(222쪽)

인간의 행위가, 특히 개인의 정치적 행동이 이성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된다는 믿음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토대다. 하지만 이 믿음은 아마도 자유와 예측 불가능성을 혼동한 결과일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다가 교각 주위에 다다르면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 강물의 소용돌이는 구조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용돌이를 놓고 <자유롭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44쪽)

인생은 혼미하고 긴 우수(憂愁)의 시간대로 점철되어 있다. 사람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맥이 빠진 채로 보낸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267쪽)

현대인들의 의식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주 오래오래 줄기차게 자기들 나이에 대해서 생각한다. 일찍이 어떤 시대, 어떤 문명에서도 나이에 대한 생각이 이토록 집요했던 적은 없다. 현대인들 각자의 머릿속에는 미래에 대한 한 가지 단순한 전망이 들어 있다. 자기의 남아 있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육체저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을 밑도는 때가 오리라는 전망 말이다. 사람에 따라 이르거나 늦거나 하는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남아 있는 쾌락과 고통의 양을 비교하는 때를 맞게 된다. 인생의 어느 고비부터 이런 성찰은 자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267쪽)

현대인들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 예가 하나 더 있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 만일 폭탄 테러를 당하게 된다면 자기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느냐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팔다리가 잘리거나 얼굴이 흉해지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그들이 삶에 조금 지쳐 있다는 것도 물론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된 이유는 불구가 되거나 몸의 기능을 잃고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포함한 그 어떤 것보다도 끔찍해 보인다는 것이다.
(268쪽)

어떤 사람들을 몇 년 동안, 때로는 몇십 년 동안 자주 만나다 보면, 개인적인 문제나 정말 중요한 화제를 회피하는 것이 서서히 버릇처럼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더 좋은 기회가 오면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끝없이 뒤로 미루어지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인간관계도 좁고 고정된 틀에 완전히 매여 있는 것은 아니기 대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그 기대는 몇 년동안, 때로는 몇십 년 동안 유지된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결정적인 사건(대개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서 이미 때가 너무 늦었음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품었던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음을 말이다.
(288쪽)

유머는 사람을 구하지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거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죠. 유머를 가지고 인생사를 대하는 게 몇 년 동안은 가능할 겁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죽음이 임박하는 순간까지 유머를 잃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결국 인생은 사람의 마음을 부숴 버립니다. 평생에 거쳐 용기나 침착함이나 유머 같은 특성을 키워 왔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이 되면 마음이 허물어지고 말죠. 그러면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십니다. 결국 남는 것은 고독과 추위와 침묵뿐입니다. 종당엔 그저 죽음이 있을 뿐이죠.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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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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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자장에서 벗어나자는 탈근대적인 운동도 이미 오래된 이야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인류 문명은 근대의 사고에 빚지고 있는 것이 많은 문명이다. 세계사는 인간 이성이 어떻게 발달해 왔는지 그 자취를 추적하는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건만, 우엘벡의 입장에서는 그건 아니올시다, 인 듯하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성(性)에 묶여 있는,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느리고 차가웠다. 그래도 따뜻한 것이 있기는 했다. 여자들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 (68쪽)

 

이 소설의 서사를 지배하는 힘은 바로 육체가 갖고 있는 원천적인 에너지, 바로 섹스다. 작가가 풍부한 지식을 뽐내며 이야기하는, 인류의 성 풍속 변천사의 흐름 안에 두 인물, 브뤼노와 미셸이 있다. 둘은 여러 측면에서 대조적이지만, 성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둘의 대립점은 극에 달한다. 브뤼노가 자신의 성적 욕구에 충실하며 자신을 역사의 흐름에 내던진다면, 미셸은 반대로 성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며 살아간다. 작가는 두 인물의 이야기, 특히 브뤼노의 이야기를 통해 섹스를 끝없이 갈망하던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몰락해 나가는지 보여준다. 브뤼노는 68혁명 이후 문란해지고 타락하는 인류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늙는다는 게 바로 그런 걸 거야. 감정의 반응은 무뎌지고 원한도 기쁨도 별로 간직하지 않게 돼. 그 대신 몸 여기저기에 이상은 없는지, 기관들의 균형이 무너져 있지는 않은지에 주로 관심을 갖게 되지. (205쪽)

 

성적 욕망을 향한 끝없는 갈망은 젊음을 욕망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이는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혐오를 낳았다. 사람들은 늙은이들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것으로 자신의 미래(늙은이가 될 것이라는 미래)를 부정한다. 하지만 늙음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지는 못하고 공허함만이 남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 공허함을 성 풍속의 해방으로 해소하려 하였다. 이를 바라보는 우엘벡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못해 조롱하는 것 같다.

 

미셸과 브뤼노, 두 형제의 삶은 암울하다. 특히 브뤼노의 암울한 삶은 성적 욕망만을 추구하다 모든 것을 잃은 현대 인류(우엘벡은 특히 68세대를 겨냥하는 듯하다)의 반영이다. 여성과의 섹스를 끝없이 갈망하지만 번번이 좌절되는 브뤼노의 모습은 68혁명이 가져다 준 성적 해방과 자유가 인간을 얼마나 황폐화시켰는지 보여준다. 이런 그의 삶은 크리스티안을 만나면서 행복을 찾는데, 이는 섹스와 사랑이 결합한 형태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뤼노가 크리스티안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다른 사람과 달리 크리스티안이 자신의 몸을 받아주었기 때문이라는 점, 자신의 육체가 생명력을 잃자 그녀가 자살을 택했다는 점은 결국 인간은 (싱싱한) 육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였다는 사실의 반영이다. 사랑 없는 섹스가 만연한 시대에 섹스마저 잃은 인간의 미래는,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미셸의 삶에는 활력이 없다. 이는 그가 섹스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며, 사랑과도 격리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와 거리를 둔 그는 놀라운 지적 성취를 이루며 다른 인물들과 대비되는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성관계를 통해 만나고 헤어지는 시대에서 섹스 없이는 사랑도 없기에, 그의 삶은 외롭고 쓸쓸하다. 아나벨과의 늦은 만남이 그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아나벨은 두 번의 죽음을 맞으며 그와 이별한다. 자궁을 들어내 생식 기능을 상실한 여성은, 이 시대에 머물 곳이 없다는 비극이 드러나는 것이다.

 

에필로그를 통해 드러나는 제3의 종이라는 대안은, 현재의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냉소다. 생식 기능을 제거한 인류의 출현만이 생존의 대안이라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성적 욕망이 증폭되어 그것이 존재 이유인 양 행동하는 인류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랑이 구원이 될 수 있지만 이미 그것이 가치를 상실한 현실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우엘벡 식의 비관론이 이 소설을 지배하는 법칙인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미셸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한 것인데, 이 때문에 미셸이 어떤 계기와 과정을 거쳐 자신의 사고를 완성하게 되었는지 추적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미셸보다는 브뤼노의 모습에 눈길이 많이 간 것이 사실이다. 그게 바로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브뤼노의 모습은, 68혁명의 여파가 지난 현실을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일까.

 

참신하고 충격을 줄 수 있는 내용과 이를 담아낼 수 있는 탄탄한 형식을 모두 갖추어 잘 전달하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흔히 말한다. <소립자>는 형식에 있어서 미흡한 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놀랄 만큼 충격적이고, 독보적이기까지 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 우리는 이 소설을 보며 지난 시기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지 않을까. 물론 조금이나마 변화했다는 전제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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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부터 한 걸음씩 다가오는 초졸(楚卒)들을 이춘갑은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졸들은 한 칸씩 기어붙었고 좁은 길을 뚫어서 복병을 불러들였다. 장기판에서는 갈 수 없는 길들이 빤히 보였다. 갈 길은 못 갈 길 뒤에 숨어 있다가 빼도 박도 못하게 되면 비로소 보였고 보이면 갈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한 칸씩 다가와서 흘러가고 또 흩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아내와 헤어진 십육 년이 지나갔을 것이었다. 잔전(殘戰)은 썰렁했다. 수(手)들은 말로가 드러났고 중원은 비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무런 힘도 작동시킬 수 없었다.
- 김훈, `저녁 내기 장기(將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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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개인의 운명을 바꾸었느니, 전쟁이 기성 질서와 생활 감정을 어쨌느니, 전쟁이 무엇을 무엇했느니, 그래 전쟁이 없었다면 네가 운동의 네번째 법칙을 발견할 것을 못 했단 말인가. (...) 전쟁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당치도 않은 피해망상을 실습해보는 갈보의 센티멘틀리즘, 거짓의 무리들이여 열세 번이나 지옥으로 가라. 만일 그대들의 말이 옳다면 나의 옆에 다소곳이 앉은 이 여자의 눈이 보여주는, 저 순결성을 어떻게 풀이할 것인가. 그녀도 분명 전쟁을 나라 안에서 겪은 바에는. 전쟁은 게으른 자와 음탕한 자들에게만 핑계를 주었다. 그뿐.
(164쪽)

숱하게 터져나가던 포탄들의 숫자를 그 자신의 인간 수업의 수입란에다 염치 없이 적어넣었었다. 숯덩이처럼 나동그라져 구르던 주검이며, 동강난 팔이며 다리들을 그 자신의 수난으로 셈한 데 잘못이 있었다. 피를 부르며 부서지던 그 포탄들은 장군의 전황 지도에 필경 가장 관계 깊은 사실이었고, 동강난 팔과 다리는 `남`의 팔 `남`의 다리였지, `그`의 팔 `그`의 다리가 아니었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실을 느지막이나마 깨닫고야 말았다. 그의 팔다리는 여전히 붙은 자리에 붙은 채 전쟁은 끝났던 게 아닌가.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은 채 전쟁을 치른 것이다. 이 시대에 살 수 있는 세금을 치르지 못했을 뿐더러, 부듯해졌다고 생각했던 몸의 밀도는 바늘 끝으로 살짝 건드리면 소리만 요란스럽게 터지고 말 저 풍선의 밀도마냥 얄팍한 거짓이었다. 퇴역 후 의젓한 긍정의 기분에 싸일 수 있었다는 것도, 남들은 눈알을 뽑히고 다리를 날려보낸 그 끔찍한 도살장에서, 말끔한 몸으로 살아났다는 사실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긍정이라느니 차라리 까불싸한 맛조차 있었던 퇴역 직후의 그의 마음, 계집애들 분홍 손수건마냥 반지레하던 그 느긋함 속에는,

남의 주검을 발돋움삼아서 죽음의 골짜기를 빠져나온 자기 겸연쩍음을 얼버무리려고 자기를 속이는 빛은 없었던가.
(173-174쪽)

거울 속에는 쫓기는 사람의 초조함을 숨기느라고 짐짓 평정을 꾸민 가짜 성자의 탈이 있었다. 신의 창조에 들러리 선 사람만이 가질 만한 자신을 꾸민 눈, 바로 그것을 어기고 있는 입의 선. 탈의 데생은 위태로워 어느 선 하나 차분함이 없다. 양식의 모방에 과장된 필체로 그려진 서투른 초상화였다. 저 탈을 피가 흐르도록 잡아 벗겼으면. 그 뒤에는 깨끗하고 탄력 있는 살갗으로 싸인 얼굴이 분명 감춰진 것을 알고 있다.
(175쪽)

이 사랑이란 불씨는, 사람들이 어쩌지 못할 죽음의 냉기를 막기 위하여 만들어낸, 인간 자신의 재산이다. 온대에 사는 신의 나라에 사랑이 있었을 리 없다. 삶을 을러대 추위 속에서 태어난 인간의 발명품이다. 사랑이 아무리 불타도, 눈이 닿는 곳까지 허허한 얼음 벌판의 추위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게다. 그러나 사람들은 태우고 또 태웠다. 지구의 양 꼭지에만 남기고 대부분의 땅을 녹여버린 것은, 그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사람들이 태워온 사랑의 열매일까.
(200쪽)

그러나 지구는 또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얼음은 더욱 차갑다. 눈에 보이지 않는 탓으로 우리는 옛사람들보다 불씨를 허술히 다룬다. 휘몷아치는 바람 속에, 깊은 얼음구멍 속에, 우리의 불씨를 빠뜨렸을 때, 우리는 얼어죽는다. 춥다. 현대는 정말 춥다. 혼자서는 불을 못 피운다. 바람을 막으며 손바닥만한 얼음 위에 불을 피우려면 두 사람이어야 한다.
(200-201쪽)

민은 한 발도 움직이기는커녕 손의 자리도 바꾸지 못했다. 만일 자기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녀의 균형이 무너질 것 같았다. 자꾸 머리가 어지러워온다. 자기만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인형으로 알고 살아오던 사람이, 처음으로 또 다른 자기 밖의 `사람`을 발견한 현장에서 느끼는 멀미였다. 사막과 인형들을 상대로 저 혼자만의 독백을 노래하며, 포탄에 찢어진 `남의 팔다리`를 가로채면서 살아온 자에게는, 지금 테라스 위에서 맞서오는 `사람`의 모습은 어지러웠다. `사람`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
(249-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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