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표절 권력'이 이번 문학동네 가을호 특집의 제목이자 주제였다. 특집에 실린 글들을 쭉 읽으면서, 창비와는 다르게 반성의 모습을 어느정도 보이고 다양한 필자들의 글을 실으며 쇄신을 시도한 것에는 박수를 보내지만(물론 이것이 반성하고 있다는 하나의 쇼로 끝난다면 또다른 기만이 될 것이다), 글의 논의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도 꽤 있었다. 흥미로운 글들이 많긴 했지만.
가을호를 시작하는 머리글에 실린 권희철 문학평론가의 '눈동자 속의 불안'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이런 것 같다. 신경숙의 '전설'은 '우국'의 명백한 표절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고 있는 문학적 성취와 지향점은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문학권력을 말하는 논의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는데, 이는 '문학권력이 상업성을 추구해왔다'는 주장과 '문학권력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문학적인 것을 고집해왔다'는 주장이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전설'과 관련된 언급에서는 두 작품이 문학적으로 성취한 바가 다르지만 결국 표절이라는 식으로 못박고 있으므로, 개별 작품에 대한 비평적 논의는 옳다 그르다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개인적으로는 '비평'에 실린 최원식 문학평론가의 논지에 조금 더 공감하는 바다. 그는 '전설'과 '우국'이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표절관계가 아닌 영향관계에 있지만(이 부분은 동의할 수 없다), '전설'은 작위적인 구성과 신파조로 중세적 열(烈)의 찬미가로 낙후했다고 썼다. 개인적으로 신경숙 소설이 인내하는 수동적 여성상을 꾸준히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눈동자 속의 불안'의 문학권력을 부정하는 근거를 보면서, 참 순진한 근거다...라는 생각을 했다. 권희철 평론가는 비평의 원론적 정의와 역할을 근거로 상찬식의 주례사 비평은 독자와의 대화가 아닌 독백으로 전락한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원론적인 정의 실현대로 흘러간다면 이런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평론가들이 원치 않았다고 해도, 출판 시장의 구조가 결국 비평의 기능을 격하시키고 문학권력이라 부를 만한 구조를 불러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문화연대가 주최한 토론회의 한 장면을 보았을 때는, 대안을 제시한다는 비평세력 역시 지나치게 과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가 공동주최한 토론회(<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 6월 23일)에 참석했을 때 나는 다음의 풍경을 목격하며 조금 놀라고 말았다.
토론자(심보선) (전략) 신경숙은 우리의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다른 에이스 혹은 다수의 에이스들을 발굴하고 육성합시다.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갈채)
(후략)
사회자(이동연) (토론자의 발표가 끝난 뒤) "신경숙은 우리의 에이스가 아니었다"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 권희철, '눈동자 속의 불안 - 2015년 가을호를 펴내며'
'비평'에는 김병익, 도정일, 최원식 문학평론가의 글이 실렸다. 김병익 문학평론가의 '작품의 내면을 이해하고 그 가능성을 발견하며 그 미덕을 평가하여 우리의 문학적 소산으로 격려하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라는 주장은, 주례사 비평을 옹호할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글에서는 비평이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한 필자의 고뇌가 잘 나타난다) 도정일 문학평론가의 글은 비평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에서 시작해 대학의 문학교육의 문제점과 이로 인한 한국 비평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짚고, 비평이 '개인적 실천임과 동시에 사회적 공적 실천'이라는 논지를 펼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세 글 중 도정일 문학평론가의 글이 비평이 나아갈 길을 (정말 원론적인 접근이지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표절'에는 장은수 문학평론가의 글이 실렸는데, 개인적으로 이번 특집에서 두 번째로 흥미로운 글이었다. 그의 '무엇을 표절이라고 할 것인가'는 이번 사태를 통해 등장했던 논의들을 모아 정리하고, 이에 대한 평가와 동시에 표절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그가 주장하는 '표현의 유사성'이라는 기준에 대한 논의는 좀더 진행될 필요가 있겠지만... 내용을 엄격하게 적용했을 때 표절 아닌 것이 없게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다. 글이라는 것이 더이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시대가 아니게 된 만큼, 텍스트는 이전까지 존재했던 텍스트들의 변용일 수밖에 없으므로... 하지만 그렇다고 내용을 완전히 배제하자니 그것 역시 문제가 된다는 것, 그것이 문학이라는 언어 텍스트가 가진 딜레마인 것 같다.
'권력'에는 작가들의 좌담이 실렸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사회 아래 김도언, 손아람, 이기호, 장강명 작가의 좌담이 실렸는데, 개인적으로 이 글을 읽으면서 두근두근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용 자체가 좋았다기보다는, 글에서도 느껴지는 치열한 대립의 열기 때문이었는데, 굳이 비유를 하자면 손아람 작가와 이기호 작가가 양 쪽 대척점에 서 있고, 신형철 문학평론가 역시 이기호 작가 쪽에 서서 문학동네에 속한 평론가이자 편집위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으며, 김도언 작가는 중간 지점에 있고, 장강명 작가는 자신만의 작가의식의 영역에서 서로 의견을 나누며 다양한 논의를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손아람 작가는 때때로 지나친 비판의 입장을 견지해 비약이 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비주류 작가로서의 입장과 문학계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어서 눈길이 갔고, 이기호 작가는 자신도 인정했듯 어느 정도 혜택을 받았던 사람의 입장에서 현재의 시스템이 갖고 있는 순기능을 피력했다. 장강명 작가는 다양한 문학의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 주로 권력의 분산의 측면에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는데, 북토크 때도 느꼈듯 독자 중심적인 주장이 주된 흐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네 작가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는 지점이 있다고 느껴져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문단이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만 깊어가는 밤이다.
개인적으로, 출판사가 유통과 문예지를 모두 독점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떤 대안도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 부분에 있어선 <악스트>에 실린 박민규 작가의 '파이' 얘기에 동감하는 바다. 안 그래도 작은 경제적 파이를 대형 출판사들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그 안에 있는 작가나 평론가들이 작가의식을 지키려 해도 문학권력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현재와 같은 기형적인 구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선택과 배제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창비나 문지, 문학동네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번 특집에 실린 글들을 찬찬히 보았을 때, 문학동네가 표절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이를 간과한 것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문학권력에 대한 논란은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이런 논의의 장이 마련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신형철 평론가의 바람처럼 문학동네가 개혁의 시작으로 나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것은, 없는 자가 기회를 잡는 것보다 어려우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