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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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엄띄엄 읽다보니 두 달이 넘게 걸렸다. 중간에 책읽기를 아예 쉬었던 기간도 있고 해서 그런가... 천천히 읽는 것이 이 기록을 대하는 예의일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변명할 따름...


프리모 레비의 책을 사게 된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는데, 황정은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로 몇 번이나 꼽았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그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나는 그의 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 책을 샀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다 읽고 이렇게 글을 남기는데,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중구난방식의 글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고...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241쪽)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에 기록될 최대의 절망과 잔악함으로 여전히 맴돌고 있다. 얼마 전 EIDF에서 <홀로코스트의 아이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개봉하기도 했지만, 반백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도 끊임없이 환기되어야 하고 탐구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환기와 소환에 '지겹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광기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는 인식 때문일까. 하지만 정말 이 시대가 그런 광기에서 벗어난 시대인지는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 같다. 광기는 좀더 그럴듯하게 포장되었을 뿐,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맴돈다.


파시즘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면을 쓰고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파시즘은 새옷을 입고 다시 나타나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원래의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없게, 좀더 존경받을 수 있게, 그리고 파시즘으로 초래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에 걸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269쪽)


작가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저항하는 단체에서 활동하다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생활은 참담하고, 끔찍하기도 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두려워질 정도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공포와 분노의 감정으로 덧칠하지 않았다. 이성과 사유의 언어로 담담하게 써내려갈 따름이다. 이 기록이 가지고 있는 비극성은, 수용소 생활을 통해 이끌어내는 인간에 대한 성찰과 사유를 담담한 어조로 서술한다는 것에 있다.


1월 26일. 우리는 죽음과 유령들의 세계에 누워 있었다. 문명의 마지막 흔적은 우리 주위에서, 우리 내부에서 사라져버렸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인들이 시작했던, 인간을 동물로 만들려는 작업은 부패한 독일인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263쪽)


그러나 그들을 괴롭혔던 것은 나치 친위대뿐이 아니었다. 수용소는 울타리를 통해 외부 세계와 격리되었고, 그 안에서도 외부 세계와 격리된 새로운 세계와 질서가 생겨났다. 그 와중에 그들은 연대하지 못하고 붕괴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과 고통, 그리고 굶주림 때문이었다. 유대인이 유대인을 감독하며 통제하기도 하고, 더 편안하고 덜 허기진 삶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해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사람도 있었으며, 도둑질과 다툼, 밀거래가 끊이지 않았다. 수용소라는 '존재방식'이, 그들이 지금까지 품고 있던 '인간'에 대한 정의를 무너뜨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포를 배신한 유대인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지니고 있던 선을 넘은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걸까. 이 말은 위험한 말이지만, 결국 악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광기가 아니라 평범한 것임을, 악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고 멀쩡한 사람을 덮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작가의 말'에도 나오지만, 수용소 역시 광기의 산물이 아닌,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절도 행위나 배신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진 않는다. 다만 이렇게 쓰고 있을 뿐이다.


나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라는 단어가 수용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가 스케치한 그림과 위에 예시한 예들을 토대로 세상의 일반적인 도덕이 철조망 이쪽 편에서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각자 판단해보시기를. (130쪽)


이 책은 단순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담담한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방금 위에서 고통과 공포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며 담담히 서술한다고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 책은 문학적인 표현들로 가득하다. '작품 해설'을 쓴 서경식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의 줄기에는 단테의 <신곡>과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신곡>을 통해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테처럼, 아우슈비츠에서 나타나는 지옥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지옥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그 세계에도 그가 인간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것은, 로렌초나 알베르토와 같은 사람들이 '인간다움'이라는 의미의 생존을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렌초의 이야기는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그가 끝까지 지옥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작은 힘이 되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서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187쪽)


이 책에 대해서 아쉬운 점은 딱 한 가지다. 책에 자주 등장하는 수용소와 관련된 용어들에 대한 정리가 맨앞이나 뒤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용어가 최초에 등장할 때 설명을 붙인 뒤에는 따로 주를 달지 않았는데, 뒤로 갈수록 기억은 안 나고 그 용어에 대한 설명이 어디에 있었는지 찾지 못해 이해가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너무 띄엄띄엄 책을 읽어 기억이 희미해진 탓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 책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글을 쓰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책이 품고 있는 가치는 내가 쓴 것보다 훨씬 무궁무진하다. 아우슈비츠에서 이미 파괴되어 버린 '인간'의 척도를 다시 성찰하는 작가의 모습은 날카롭고, 그 자체로 인간적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인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상실한 지금에 서서, 이 책을 딛고 서서 묻고 싶다. 무엇이 인간인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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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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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식주의자


첫인상을 요약하자면, 피가 한 줌 흩뿌려진 '내 여자의 열매' 같았다. 이 작품의 초점은 갑작스럽게 육식을 중단한 '나'의 아내, 영혜에게 집중되어 있다. 왜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는가. 꿈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은 육식으로 대표되는 동물성을 거부하겠다는 한 동물의 몸부림처럼 보인다. 이 세계는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육식을 해야 한다고 인간에게 강요하는, 그런 세계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것이 정언 명령인 양 육식의 논리, 즉 동물성의 규칙을 지키며 살아간다. 육식의 논리는 잡아먹는 자와 먹히는 자의 상하 관계를 생산하고, 이를 거부하는 영혜는 채식주의자, 라는 이름으로 규정되어 핍박받는다. 그렇다면 영혜는 정말 채식주의자인가. 영혜는 소위 건강을 위해서나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채식을 하는 채식주의자와는 다르다. 그녀가 채식을 하는 것은 잔혹함과 폭력성을 품고 있는 동물성 자체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채식으로의 변화에는 어린 시절 겪었던, 개에 대한 폭력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60쪽)


하지만 인간은 이 세계의 질서를 거부하는 자를 가만두지 않고 잡아먹으며 살아왔다. 아니, 생존해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것이 약육강식이라는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고기를 먹이려던 장인의 몸부림은, 자신의 혈육을 이 세계에서 살아남도록 하려는 어떤 보호본능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미 동물의 삶을 거부하기 시작한 영혜에게,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결말부에서 밖으로 나와 환자복 상의를 벗고 있는 영혜의 모습은 광합성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그녀가 단순히 동물성을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물성을 지향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다만 의문이 드는 것은, 왜 그녀가 동박새를 물어뜯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동물성의 폭력에 대한 작은 저항일까.


2. 몽고반점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키워드는 탐미와 관능인 것 같다. 여기에서 초점은 영혜의 형부인 '그'에게로 옮겨간다. 비디오 아트를 제작하는 그는 오로지 대상의 이미지를 탐(구)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 그를 사로잡은 몽고반점의 이미지, 그리고 영혜의 이미지는 그에게 끝없는 창작과 소유의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데, 그의 동물적 욕망을 들끓게 하는 것이 다름아닌 영혜의 식물성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식물성의 이미지는 바로 몽고반점, 성년에 이른 어떤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몽고반점으로 집약된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101쪽)


아마 그의 욕망은 자신과 전혀 다른 어떤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소유욕, 더 나아가면 파괴의 욕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체의 몸에 꽃을 그린 영혜를 탐하고 취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대상의 이미지를 취하고자 하는 동물의 욕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 그 사람 몸에 뒤덮인 꽃이요...... 그게 날 못 견디게 했던 거야. 그것뿐이에요." (131쪽)


영혜는 이제 동물성을 거부하는 것에서 나아가 식물성을 지향한다. 그리고 자신의 본질과 전혀 다른 식물성에 대한 지향은 식물성을 탐닉하는 것으로 변하는데, 몸에 꽃을 그리고 온 형부와의 결합을 허락한 것은 식물성의 이미지를 욕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식물성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에게 식물성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은 "안돼 보여. 온몸에 꽃을 그려놓은 형 모습이......"(137쪽)와 같은 반응을 보이고, 식물성의 이미지를 욕망하는 것조차 불허한다. 식물성을 탐했던 인간은,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동물성의 법칙을 주입받고 교정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읽으면서 그가 찍고 싶어했던 남녀의 교합으로 점철된 '몽고반점 2'는 절대 찍힐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래서인지 뒷부분을 읽으면서 뜨악했던 순간이 있었다. '몽고반점 2'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굉장히 관능적으로, 때로는 퇴폐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기까지 한다. 자신이 욕망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자기파괴적인 충동이 인상적이기도 하면서, 어쩌면 그것 역시 동물성의 한 면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 단편의 흐름과 상관없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최근의 이슈가 잠시 떠오르기도 했다. 난 예술에 있어서는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분명히 많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지점이긴 하다. 이미 그 논의는 확산되지 못하고 수렴되어 버렸지만...


그때까지 그는 자신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작품으로 화를 겪을 수는 있으리라는 상상은 해본 적이 있었지만, 음란물을 제작한 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다. 작품을 만들며 그는 언제나 자유로웠으므로, 자신에게 무한정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실감한 적이 없었다. (75쪽)


3. 나무 불꽃


제목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지금 쓰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나무로 대표되는 식물을 파괴하는 불로 인해 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을 표상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작품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 나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어떻게 생각을 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영혜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186-187쪽)


식물성의 이미지를 탐했던 영혜는 이제 식물이 되려 한다. 그러나 동물이 식물로 변하는 방법은, 죽음뿐이다. 그런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는 동물성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무너진 것을 느낀다. 그것은 어떤 질병의 형태로 오는데, 이 세계가 보았을 때 그것은 떼어내기만 하면 되는 폴립의 형태로 존재한다. 끝없이 식물이 되려는 영혜의 모습이 동물성의 세계에서 살아남고자 인내하면서 쌓여왔던 내면의 고통과 압박감을 수면 위로 드러내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견뎌내고자 세계의 질서에 순종했던 그녀의 삶은 결국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201쪽)


세계가 가하는 고통이 너무나 극심했던 어느 새벽, 아이의 젖내와 배냇내가 배어있는 보라색 면티셔츠마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지 못했던 새벽에 그녀는 아파트 뒷산을 오르고, 그곳에서 고통과 두려움과 함게 '이상한 평화'를 느낀다. 그리고 새벽마다 빈 욕조 안에서 '캄캄한 숲이 덮쳐'오는 것을 본다. 그것은 동물적인, 그래서 폭력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영혜처럼 이 세계를 거부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어쩌면 꿈인지 몰라'라고 되뇌며 영혜를 병원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연작소설을 매듭짓는 성과를 거두고 있긴 하지만, 세 편 중에선 가장 인상적이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한강스럽지 않았던 작품들 뒤에 갑자기 한강의 색채가 물씬 배어든 작품이 나온 것 같았다고나 할까... 세 작품 중 한강 특유의 서정성이 돋보여서 이질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좀더 처절하지 못해서, 격렬하지 못해서 만족하지 못했나 싶기도 하고...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혜의 언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의 질서를, 동물적이어서 폭력적이고 잔혹한 그 질서를 차마 거부할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 거부하면 죽음의 길만이 드리워질 것을 알기에 그냥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 어쩌면 세계는 이미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동물성 그 자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식물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한 것일까.


별점에 대해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는데, '몽고반점'이 주었던 강렬한 인상을 생각해서 네 개를 매기기로 했다. 사실 '몽고반점'이 워낙 강렬해서 다른 두 작품의 빛이 바래지는 것 같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도 되게 선명한 작품인데도.. 지금까지 읽었던 한강의 작품(그래봤자 장편 두 권이지만)과 다른 면모가 보여서 인상적이었던, 그래서 궁금해지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앞으로 더 찾을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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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이발관 - 혼자 추는 춤 [싱글앨범][디지팩 한정반]
언니네 이발관 노래 / 블루보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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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을 기다렸다. 그들의 감성은 여전했다. 근데 `혼자 추는 춤`보단 `애도`가 더 나은 것 같다. 결국 정규 앨범은 또(또!!!!!) 미뤄졌지만, 이 정도면 조금은 더 기다릴 수 있을 듯. 요약하자면, 나에겐 2015년의 가뭄 속 단비 같은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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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5-12-1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고 이 글을 쓴 뒤 밤새 두 곡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평이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혼자 추는 춤`으로 기운 듯.. 굳이 따지면 그렇다는 거고 사실 둘 다 되게 이발관스러워서 좋다. 얼른 다시 돌아왔으면..
 

A와 B라는 친구가 있었다. A는 B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A가 B를 일방적으로 싫어했다는 말이 맞겠다. 생각해보면 B가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이 좋지 않았는데, 나는 A와 친했고 B와도 그냥 나쁘지 않은 사이여서 그냥 그렇게 지냈다. 시간이 지나 나는 군대를 다녀왔고, 다시 A를 만났다. 그때 A가 이런 말을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자신이 왜 B를 싫어했는지 그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이유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싫어했던 감정만 남았다고.















악스트 3호의 작가는 공지영이었다. 나는 공지영의 소설을 네 권 읽었고, 작가 공지영은 좋게 생각했었다. <즐거운 나의 집>을 읽고 실망하긴 했지만. 그렇지만 나에게는 공지영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는데, 이번에 책 표지를 보고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공지영에게서 등을 돌린 이유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작가로서의 그녀가 싫었던 것도 아니었고, 페미니스트로서의 그녀가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더욱이 나는 내가 모르는 것에 있어서는 물러서므로,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대체 뭐란 말인가? 트위터 때문에? 혹시나 싶어 트위터를 보았지만 최근 글에는 리트윗한 것들뿐이어서 관두었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아, 이유를 생각하는 일을 관두고 무의 상태로 다시 보기로 했다. 아마 내가 등을 돌렸던 이유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 때문이었을 것 같지만, 그 기억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어찌됐든, 어떤 사람에게나 새겨들을 말은 있기 마련이다. 설령 적이라도.


그럼에도 그러한 소설들이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수동적인 여자들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들이 그런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말을 바꾸면 어떤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게 남성들이고 남성들이 선택한 게 수동적인 여성상을 선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소위 진보적인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조차도 소설 안에서의 여자가 진보적인 건 수용할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로 소위 진보 문학권에서도 『토지』를 인정한 적 없잖은가. 『토지』의 서희가 우리 문학의 여자 계보에서 보면 대단히 선진적인 여자가 분명함에도 인정받은 적 없다고 생각한다. (...)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나는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더니티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를 지금 읽으면 지금에서의 모더니티가 살아난다. 왜 그러냐면 캐릭터가 시대에 함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면 그 시절에 맞는 모더니티가 생겨나는 것이 작품의 생명력이다. (...) 우리 소설의 주인공들은 아직 춘향이도 못 넘고 있다. (112쪽)


"저보다 더 늙은 것 같아요, 젊은 작가들이"라는 말에는 뼈가 있었다. 요즘의 한국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무기력함을 보면 수긍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모든 활동들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정치적인 이념의 영역이지만, 그녀가 자신이 불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거침없이 말하고 뛰었던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듯하다. 인터뷰를 천천히 읽으면서 내가 왜 등을 돌렸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내가 한국문학에서 그렇게 후진 존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같은 말을 자기 입으로 하는 건 좀... 나랑은 안 맞는다), 그녀에게 상당히 가혹한 프레임이 씌워지고 대표로 공격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거침없음을 불편해 하던 사람들에게 등을 돌릴 계기를 부여해준 꼴이라고나 할까...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런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음을 유지하고 끌고가는 작가의 모습이었다.


인생을 살아오며 절절히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언제나 똑같은 원칙이 보였다. 그것은 그나마 진실이 모두를 덜 다치게 한다는 것. 진실이 우리를 해칠 것 같고, 바르게 얘기하면 고통을 받을 테니 숨겨야 할 것 같지만, 아니다. 진실만이 우리를 가장 덜 다치게 할 수 있다. (124쪽)


공지영이 바라보는 한국사회는 가혹하고 폭력적이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도 어떤 희망적인 시선을 놓지 않는 듯하다. 종교의 힘인 것일까? 3호의 작가가 공지영이라는 사실에 걱정이 들었었지만, 나에게는 작가 공지영을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괜찮았던 것 같다.


서평으로 돌아와서, 이번에 실린 서평들을 읽으며 내가 처음 들었던 생각은 전반적으로 '문학적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이 표현이 서평에 붙을 수 있는 찬사인가, 비판인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서평이란 리뷰(review)로써 독자에게 프리뷰(preview)를 제공해야 하는 글쓴이의 외줄타기 같은 것인데, 문학적인 서평은 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의문이 남는다. 이는 아직도 내가 서평이 어떤 글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결심이 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나는 목차를 보고 내가 읽은 소설이 고작 세 편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하였다. 그리고 황현진의 서평을 읽으면서 자신이 쓴 단편이 포함된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 서평과 서평이 다루는 책은 결국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중언부언이기도 하다. 과연 저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난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도 확신할 수 없는데.


쭉 읽으면서 지난 호보다 장르가 다양하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만화에 대한 서평(그렇다. 그것도 아직 연재중인 순정만화에 대한 서평이다)이 실려 있어 약간 놀랐다. 정영목 번역가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대한 서평은 영화 <가족의 탄생>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본 사람이라면 좀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읽으면서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책과 영화를 끌어온 건가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서평은 조르주 바타유의 <불가능>에 대한 김뉘연 편집자의 서평이었는데(제일 짧아서 그랬던 건 아니다), 최근에 이성복 시집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이 쓰여있어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시란 "도달할 수 없는 가능성들에 대한 언어적 환기일 뿐"이라는 바타유의 말처럼, 결국 나도 이 시에 도달할 수 없는 건가라는 아득함이 몰려왔다. 결국 나는 '불가능'을 말할 수밖에 없는가. <불가능>을 읽어보고 싶은 밤이었다. 바타유, 바타유...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였더라...


볼라뇨의 <2666>에 대한 서평을 읽으면서, 1752쪽짜리 소설을 서평으로 다루겠다는 글쓴이의 분투가 대단하기도 하고,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결국 이 서평을 통해 전체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건 맹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이다. 작년에 잠시 불었던 볼라뇨 신드롬을 잠시 생각하며, 그때 구입한 그대로 책장에 꽂혀 있는 그의 처녀작 <아이스링크>를 바라보았다. 저걸 읽고 마음에 들면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사야지, 라는 생각으로 샀던 것인데 아직 저 책도 읽지 못한 현재에서, 대작인 <2666>은 나에게 미독이 아닌 비독의 영역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저어하였다. 그렇게 하나둘씩 멀어지는 건가, 하고.


작가 인터뷰까지 읽었는데 세 시간이 흘렀다. 몇 년 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다(아, 옛날이여...). 소설들은 뒤로 미루고, 따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야심한 시각에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소설 다 읽고 따로 리뷰를 쓸 마음이 들긴 할까. 아니, 곧 바쁜 시간이 엄습해서 4호가 나오는 다음 달까지 미루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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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12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셨어요~^^
가끔 뭔지 모르게 휘둘릴적 있죠..
싫다는 건 그만큼 지배받는단 것이기도 해요..^^

아무 2015-12-12 09:23   좋아요 1 | URL
싫다는 건 지배받는다는 것이라는 말이 와닿네요^^ 그땐 뭔가에 휘둘렸던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결국 지금부터 다시 찬찬히 보고 판단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들고..

AgalmA 2015-12-12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등을 돌렸어도 서로가 재고할 수 있다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겠죠. 그 재고에 구구절절 근거를 따진다면 접어야죠. 마음이 있다면 이성의 잣대란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니잖아요? 1.2.3....그렇게 재고한다면 그건 교우가 아니라 비지니스겠죠.
헌데 작가는 참 곤란한 상황인 듯. 한 번 돌아선 독자가 작가에게 다시 마음을 주고 책을 사서 혹은 빌려서라도 읽기란 참 어려운 일이잖아요. 독서는 가장 이기적인 교우라고 할 수 있으니. 작가의 일방적 노력이 절대적이죠. 아무님께 공지영 작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했다니 Axt 큰일 했는데요!

<예술가의 항해술>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존 스테제이커에겐 일명 ˝B타령˝이란 게 있어요. 수십 년간 블랑쇼, 바슐라르, 바타유, 바르트 등 첫글자에 B가 들어가는 인물들의 이론만 가르쳐대니 뿔난 원로들과 사서들이 그의 책을 금지하는 사태도 있었다지 뭡니까ㅋㅋ 그런데 전 존 스테제이커 그 심정을 너무 알겠더란 말이죠. 제가 흠모하는 철학자를 그렇게 줄줄이 말하고 있는 그의 강의가 얼마나 듣고 싶은지!

바타유! 바타유!

아무 2015-12-12 09:52   좋아요 2 | URL
경험해본 바에 따르면 한 번 등돌린 작가의 책을 읽어본다는 건 확실히 어렵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공지영 소설이 가진 사회적인 힘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소설을 낼지, 그 소설을 다시 찾아 읽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낸 소설들을 다시 찾아볼 거라는 생각은 드네요..

저라는 사람이 과격한 것, 또는 극단의 위치에 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요즘 같은 세상에 회색분자라고 욕먹기 딱 좋은 사람이죠) 제가 등을 돌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내용이 가치있어도 그것을 담는 표현이나 형식이 잘못된 것이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어서... 아마 그런 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등을 돌리게 된 이유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은 하는데.. 하지만 특히 공지영 작가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고,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한 여류 소설가`라는 이름을 씌워 별난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이혼율이 이렇게나 높은 사회에서 이런 프레임으로 비난의 빌미를 준다는 게 우스운 일이기도 하고..

오래 전에 인터뷰 기사에서 본 것 같은데, 그녀가 이상문학상을 받을 때 시상식에 온 작가가 그 전 해 수상자였던 박민규 작가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구요(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다시 생각해보니 작가들이 보여주는 탈정치적인 모습도 보이고, 사회적 목소리를 드높이는 작가에게 우리 사회는 얼마나 가혹한지도 생각해 보게 되네요. 꼭 진보적인 작가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예술가의 항해술>은 아직 못 읽었지만, 바타유에 대한 부분은 유심히 보게 될 것 같은...^^ 조만간 읽어봐야겠어요!

AgalmA 2015-12-12 15:13   좋아요 2 | URL
해외엔 마르케스도 결혼 3번, 그 이상인 작가도 많죠. 결혼 2번은 아주 흔해서 얘기거리도 안되고ㅎ 누군 그 정도 해도 되고 누군 안되고 그런 게 있습니까. 특히나 매우 사적인 일을 공적으로 비난하는데 누구 윤리를 말하는지 우스워지는 대목입니다. 작가들 이혼은 빈번한 일이기도 한데 그걸 특이사항으로 볼 정도인가요. 일반인 재혼도 많은 마당에. 공지영 작가 이혼에 대한 가타부타는 아주 많은 레이어들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뿌리깊은 가부장제 의식, 여성 사회 참여에 대해 우습게 보는 일(이외수 작가 트윗과 좀 다른 맥이 있지 않나 싶죠), 유명세에 대한 시기와 폄훼, 글과 현실 동종에서 품위를 바라는 대중적 기대심리...참 많은 게 섞여있죠. 모두들 자신은 있는 그대로(이상인 걸 알면서) 봐주길 바라며 작가라면 이름값 하라는 식은 우리 안의 또다른 엘리트주의 아닐까요.
공지영 작가 소설이 제겐 대체로 다 취향에 맞지 않지만(노력해도 이건 참^^;;) 한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사회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노력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작가면 뭘 무조건 옳고 제대로 해! 식의 채찍질...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고 말해야 될 테죠. 작가도 시행착오를 겪으며 좌충우돌하는 인간이잖아요. 이리 말해도 저도 종종 경솔할 때 많죠. 작가에게도, 친구에게도.

[그장소] 2015-12-12 1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 ..떠올릴 만한 근거가 당장은 주변에 없으므로..
왜였는지도 기억이나지 않을 수있죠..언젠가 그모든것이
번개가 치듯 연쇄적으로 떠오를 수도 있겠고..영영 깊이 가라앚을 수도 ..있는 ..거죠.
불현듯 ㅡ떠오르는게 기억인 거거든요.. 꺼내려 않해도..^^
애쓰지 마시길~^^
 
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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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것은 정확히 말하면 세계문학전집 판본이 아니고, 그 전에 나온 판본(2007년)이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모파상이나 오 헨리의 단편을 제외하면 외국작가의 단편집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한국문학에서 말하는 단편과 외국문학에서 말하는 단편은 장르가 아예 다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외국문학이 단편(short story)이라는 이름처럼 짧은 이야기를 통해 한 단면을 보여주는 스케치라면, 한국문학의 단편은 삶의 한 단면을 더 깊게 파고들고자 하는, 일종의 짧은 장편(novel)을 지향하는 소묘와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카버의 <대성당>을 읽은 뒤 내가 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대성당>에는 총 열두 편의 단편이 실렸다. 각 단편들의 분량은 제각각이라 '이거 장편(掌篇)소설인가?'하고 생각했던 이야기도 있고, 길다는 생각이 들었던(물론 분량을 확인해보니 단편의 분량이었다) 이야기도 있었다.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고, 다른 환경에서 살고, 다른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읽고 나서 이 열두 편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몸을 뒤로 기댄다. 그녀는 손을 내게 내맡겨둔다. "이렇게 말할 거예요. '꿈은 아시다시피 빨리 깨면 좋은 거지요.' 그렇게 말할 거예요." 그녀는 무릎까지 치마의 주름을 편다. "누가 물으면 그렇게 대답할 거예요. 하지만 이젠 그렇게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녀는 다시 숨을 내쉰다.

- '굴레' (p310)


굳이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미국 중산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중산층'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지, 얼마나 에둘러 하는 말인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정리하고 싶지는 않다. 작가가 잠시나마 보여주는 이들의 생활은, '중산층'이라는 말로 묶어버리기엔 너무나 개별적이기 때문에.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카버의 단편들은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기서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 같다. 그저 작가가 스케치하는 사람들의 모습, 삶의 모습을 따라가며 읽다 보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과 아련함, 찌르르한 떨림이 온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읽은 느낌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이 많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빵 한 조각을 내놓는 일밖엔 없는 것 같다.


"뭘 좀 드셔야겠습니다."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가 말했다.

-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p141)


가장 좋았던 단편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 '열'이었다. 생각해보니, 이 세 단편의 공통점은 '공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롤빵으로 나타나는 위로와 공감, '열'로 나타나는 이별의 아픔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웹스터 부인, 맹인과 함께 '대성당'을 그리며 얻게 되는 이해와 공감. 김연수 소설가의 말처럼 그간의 카버 작품과 달리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작품들에 끌렸다고 해야 할까. 치밀한 분석과 집착은 보이지 않았지만, 단순한 스케치만으로도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물론 '리얼리즘의 대가'로 불리는 카버의 치밀한 묘사력이 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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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2-0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화로 치자면, 제게 카버는 인상파죠. 화가가 보여주는 그 날의 빛, 터치 같다고 할까.
한국 단편이 주로 신춘문예나 등단용으로 활성화돼서 카버식의 단편을 미완성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그간 한국 단편은 굉장히 편향적이었죠. 그러니 문단 중심주의, 작가 중심주의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거고. 요즘은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작가 만큼이나 독자도 다양한 시각과 이해력을 갖춰야 안정적으로 나아지겠죠.

아무 2015-12-09 23:53   좋아요 1 | URL
인상파라는 표현이 스케치보다 확 와 닿네요^^ 확실히 카버의 단편이 신춘문예에 투고되었더라면 지금도 등단작이 되기는 힘들 것 같은... 요즘의 한국 단편들을 보면 미니멀리즘보단 복잡함을 추구하는 경향 같은 게 보이기도 해요.
그나저나 오늘 서울 올라오면서 빨간책방을 듣는데, 이동진 씨가 저랑 똑같이 세 편을 꼽아서 조금 놀랐습니다. 소오름...;; 몇 편을 다시 보고 있는데, 다시 읽을수록 새롭게 보이는 것들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