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를 보고나서, 시인 윤동주가 살아왔던 모습을 그의 친구 송몽규와 함께 최대한 생생하게 그려내려는 노력이 많이 돋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아쉬운 점도 많았는데, 사소한 것부터 말하자면 정지용 시인의 영향에 대한 부분만 부각되고 백석 시인의 영향이 별로 부각되지 않은 점(영화에선 송몽규가 윤동주에게 <사슴>을 건네는 한 장면만 있으며, 윤동주의 대사에서도 백석 시인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몇 편의 시들이 실제 쓰여진 시기랑 맞지 않게 배치되었다는 점('흰 그림자'는 1942년에 쓰여졌다) 등이 있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영화가 어떤 대립구도를 지향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윤동주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려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윤동주가 송몽규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하긴 나 역시 윤동주의 삶보다 그의 시를 먼저 접하고, 그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알지는 못하니 실제로 그런 열등감이나 질투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았던 시 속의 윤동주의 모습, 그의 부끄러움은 송몽규와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자신 그 자체였고, 단순히 열등감만으로 가득찬 부끄러움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그럼에도 나는 시를 쓸 수밖에 없다는 다짐을 하는 윤동주였다. 그런 시인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아마 '자화상'일 것이다.


영화에서 워낙 두 인물의 삶이 대조되다 보니, 윤동주보다 송몽규가 더 두드러지는 느낌을 받았고, 윤동주는 자신은 왜 몽규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지를 자책하는 모습이 많이 부각됐다. 특히 진술서에 서명하지 못하겠다며 대사를 토해내는 부분에서 그런 자책과 부끄러움이 극대화되는데, 여기서 영화는 두 인물의 대사를 교차편집하며 결국 이 둘의 지향점이 같았음을 말하려는 것 같다. 결국 항일투쟁으로 연결되는 것인데, 시의 배치나 이런 편집이 윤동주의 항일투쟁에 방점이 찍히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실제로 윤동주의 시 중에 시대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라고 기억되는 것은 많지 않다. 지금 생각해봐도 '쉽게 씌어진 시' 정도다. 그 외의 윤동주는, 자신의 자의식, 외로운 자아와 투쟁하는, 하지만 결국 그것을 보듬으며 나아갈 수밖에 없는 '자화상'과 '참회록'의 윤동주다. 그런 시기에 시를 쓴다는 것, 문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대한 저항이 될 수밖에 없는 맥락이 있지만, 윤동주의 시 세계를 지나치게 한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시가 송몽규의 삶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그려지는 것은 너무 나간 것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내 생각도 문학이나 문학교육의 '순수' 이데올로기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잔잔한 흐름을 이어가고, 강하늘의 연기는 정말 윤동주는 저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흑백이지만, 그리고 슬픈 이야기를 다루지만 윤동주의 삶을 아름답게 그려낸 차분한 영화다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너무 항일, 독립운동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닐까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 감상을 정리한다. 나중에 찾아볼 기회가 있겠지..


+) 내가 가지고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두 권인데, 하나는 풍림출판사본(89년 출간인데, 이 책에는 시가 쓰인 연도가 없다)이고, 다른 하나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한국 대표 시인 초간본 총서> 중 한 권이다. 초간본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살까 고민하다가 사지 않은 것은 이미 두 권이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영화를 보고 문득 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냥 <사슴> 초간본을 주문한 것에서 만족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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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3-01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시작 부분부터 종반부로 치달을 때까지 곳곳에서 너무 지나치리만큼 자주 `두 인물의 성격 대비`를 보여주던데, 감독이 자의적으로 연출한 것인지, 실제로 두 인물의 `성격 차이`가 널리 알려질 만큼 그렇게 `시인에게 억울한 쪽으로만` 두드러졌던 것인지 내내 궁금하더군요. 아무 님의 글을 읽어보니 `감독의 의중`이 많이 가미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네요. 시인의 시세계를 온전히 보여주기엔 `형무소 장면`이 너무 지나치게 많았던 것도 아쉬움으로 남고요.

아무 2016-03-01 23:33   좋아요 0 | URL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도 역사적 사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맞다 아니다를 답변드리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윤동주 평전>이나 <처럼>을 찾아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이준익 감독이 `저항`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아요. `흰 그림자`를 낭송하는 부분에서도 마지막 연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가 생략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하필 임정으로 가는 몽규를 보여주면서 이런 식으로 `흰 그림자`를 보여주는 부분이 지나치다고 느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송몽규라는 인물을 재조명해주었다는 점에서, 윤동주의 삶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준다는 점에서 좋았던 영화로 전 기억하고 있습니다. 흑백으로 처리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oren 2016-03-03 00:27   좋아요 1 | URL
책을 읽다가 묘한 구절을 만나고 보니, 문득 이 페이퍼에 담긴 `글쓴이의 깊은 뜻`이 다시금 생각나서 밤 늦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 대목을 공유해 볼까 해서요...
* * *
위대한 인간들을 공적 이익이라는 궁색한 관점으로 바라보면, 오해하게 마련이다. 그들에게서 어떠한 이득도 취할 줄 모른다는 것, 이것 자체가 바로 위대함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 니체, 『우상의 황혼』

아무 2016-03-03 00:30   좋아요 0 | URL
방금까지 읽던 책에서도 니체를 잠시 다룬 부분이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되네요ㅎㅎ 감사합니다^^ 첫 문장부터 인상적이네요....

프레이야 2016-03-01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소영의 시인 동주,에는 그런 대목이 좀 엿보이더군요. 백석의 사슴 초판본은 출간이 연기되었다고 하여 더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 2016-03-01 23:36   좋아요 1 | URL
<시인 동주>를 읽어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 영화를 본 걸 계기로 윤동주의 삶이 어땠는지 궁금해지고 관심이 가게 되더라구요... `별 헤는 밤`을 이야기할 때 항상 나오는 것이 `흰 바람벽이 있어`와의 영향관계일 만큼 백석의 영향 역시 정지용 못지 않은 것이었죠. 분량상 어쩔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에 그건 그렇겠거니.. 합니다. 저도 <사슴> 초판본 연기되었다고 해서 마냥 기다리고 있는데, 영화에서 나온 표지가 알라딘에 뜬 표지랑 정말 똑같더군요..

파란자스민 2016-03-01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소영의 시인,동주를 먼저 읽고 영화를 봐서 그런지 대립 구도가 조금 납득은 가더라구요^^ 이준익 감독도 사실적인 이야기가 바탕이긴 하지만, 좀 더 영화스럽게 끌고가려다보니 그렇게 연출하신 것 같아요. 실제로 윤동주 시인이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낀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아무 2016-03-02 01:21   좋아요 1 | URL
사실 정말 그랬을 수도 있겠죠. 다만 그 이야기를 해줄 두 분이 해방 전에 돌아가셨으니...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윤동주답다고 여겨졌던 부분은 연희전문학교에서 문예지를 만들 때 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말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윤동주의 시와 삶에서 `일제강점기`나 `저항`을 빼놓고 말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너무 그쪽만 강조하는 것도 전부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화가 그들의 삶을 재조명해주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제 소심한 아쉬움 같은 것이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8200001&sid1=001

며칠 전부터 관련 기사를 볼 때마다 자꾸 불편한 지점이 있는데, 여자가 나무로 변하는 이야기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내 여자의 열매`다. 한강의 문체가 갖는 서정성이 잘 표현이 될까라는 의문이 있었는데,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는 다루는 내용 자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주목받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외국인들이 한강 소설의 어떤 부분에 열광한 걸까라는 생각과, 이것도 한때의 유행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닐까하는 우려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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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2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도에 나온 작품 이란 것까지 적어주시면 더 좋을것 같아요!^^
잘 읽고 가요.

아무 2016-02-21 23:14   좋아요 1 | URL
<채식주의자>는 단행본이 2007년에 나왔고 `내 여자의 열매`가 실린 단편집은 2000년에 나왔다고 하네요. 연재된 날짜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채식주의자>의 작가의 말에서도 `내 여자의 열매`와 비슷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내용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정확히 어떻게 쓰여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그장소] 2016-02-22 00:22   좋아요 1 | URL
요즘에 한강작가의 인터뷰 들을 읽고 있어요.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 ㅡ제 나름의 방법들인 셈인데 ..이런 글은 도움이 된다고 봐서 ..고맙거든요. 최근작과 멀어질수록 책이 발표된
년도를 표기치 않아서 전작을 읽기 하는 저 같은 경우 ㅡ약간 불편하거든요. 순서대로 읽으면 더 좋겠는데..싶고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 아직 갈길이 멀다 ㅡ 생각이 들어요.^^

아무 2016-02-22 00:10   좋아요 1 | URL
작가의 인터뷰는 항상 호기심을 부르죠.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썼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저는 한강 작가의 책을 장편 두권, 연작소설 한권, 단편 한 편을 읽었는데, `내 여자의 열매`와 <채식주의자>는 인상적인 작품이어서 아직까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ㅎㅎ 전작을 읽으려면.. 저도 아직 갈길이 멀죠^^;;

[그장소] 2016-02-22 00:23   좋아요 1 | URL
초반에 읽던 때와는 좀 시간이 많이 지나서 한강 작가가 가진 고유한 것들을 그녀 목소리로 잘 듣는 게 중요할것 같아서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이전에 제가 쭉 읽어 왔던 작가라면 안그랬을텐데..혹, 제가 의도치않게 잘못읽고 있는 부분이나 이해를 다른 면으로하고있는게 있을까 싶어 ㅡ저를 경계키 위한 ㅡ것이랄까.
그렇다고 너무 그 말들에 삼켜지는 글은 싫고요.
방향만 잡아보는 정도 ㅡㅎㅎㅎ
저는초기작부터 만나서요.검은 사슴.여수의사랑 희랍어시간.등등 ..단편은 나오는 데로 본 것 같아요.시집때문에 ..다시 읽기 시작했네요..이 작가는..

아무 2016-02-22 00:31   좋아요 1 | URL
희랍어시간은 저도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여태 안 보고 있는 책 중에 한 권입니다 ㅎㅎ... 시집은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목이 묘하게 끌리긴 하더라구요. 조만간 다시 찾아보기로.. (이러고 또 잊어버리려나..) 전작읽기는 참 험난하죠ㅠㅠ 파이팅입니다!!

[그장소] 2016-02-22 00:35   좋아요 1 | URL
시집은 꼭 ㅡ보셔도 좋을 듯 ㅡ
희랍어시간을 중간에 툭 읽는 바람에
전체적 인상이 제가 가지고 있던 선들과 좀 엉켰던것 같아요.
앞으로 더 읽어봐야겠지만 .^^
아직 읽을게 남았다니 기쁘네요.^^
저녁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ㅡ시집 ㅡ좋아요!

2016-03-13 0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3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치와 진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9
김선욱 지음 / 책세상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정치와 진리』는 아렌트의 사상을 중심으로 정치는 진리의 영역, 진리 추구의 수단이 아니며 인간의 '복수성'에 기반을 둔 공적 영역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렌트의 사상에 대해 좀더 알기 위해 구입한 책인데, 저자의 주장과 논리 대부분이 한나 아렌트의 이론을 기반으로 하고 하버마스와의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는 매우 유용한 책이었다. 하지만 '직업' 정치가가 아닌 시민이라고 해서 대표성을 띨 수 있는 불편부당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경제가 사적 영역에서 사회적 영역으로 옮겨가고, 준거와 기준을 요구하는 성격 탓에 정치의 성격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에는 공감하지만, 시민이 자신의 지역적, 사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세계적 연대로 나아갈 수 있을 지는 의문이 든다. 그만큼 신자유주의의 파도 아래 개인이 경제에 종속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아렌트의 사상을 통해 설득적으로 의견을 전개하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은 뒤『인간의 조건』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내 책상엔 아렌트에 대한 책이 두 권이나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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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함에 대하여 - 악에 대한 성찰 철학자의 돌 2
애덤 모턴 지음, 변진경 옮김 / 돌베개 / 201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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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폭력'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어떤 분명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복잡다단한 성질과 특징들이 '악'이라는 이름 안에 뭉뚱그려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를 고민하던 와중에 내가 구입했던 책이 애덤 모턴의 <잔혹함에 대하여>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제의식의 제기 자체는 좋았으나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한, 그래서 많이 아쉬웠던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반에 저자가 제시하는 문제의식은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일반화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우리 주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잔혹한 행위의 원인을 '악'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특수한 것으로, 우리와 별개의 것으로 규정한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악 또는 잔혹성의 이면에 숨겨진 특수한 측면과 일반적인 측면을 규명하고 악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자신의 논지를 이끌어가는데, 처음에 제시하는 것이 흔히 악이라는 개념에 씌워진 이미지들의 진위를 규명하는 일이다.


본질적으로 나쁜 인간이나 인간을 유혹하는 불가사의한 힘 등을 가정하는 식으로 악을 설명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잘못된 방향에서 악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악행자들의 욕망에 주목하는 것도 실수다. 일반적으로 악행자들의 욕망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유사하다. 그 대신에 우리는 악행자들의 욕망이 행동으로 전환되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52-53쪽)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뚜렷하게 구분짓지 않고 사용하는 언어들을 재규정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돋보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잘못'과 '악'이 각기 다른 반응을 불러올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잘못과 구별되는 악의 특징을 혐오감, 잔혹성, 이해 불가능성으로 규정한다. 마지막 장에서 역시 '화해'와 '용서'의 차이를 구분짓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언어들의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시도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잘못'과 '악'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뒤로 갈수록 흐려지게 되는데, 이는 잘못된 행동과 악한 행동 사이의 연속성,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과 악한 행동 사이의 연속성을 규명하려는 과정에서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악의 장벽 이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해보았던 일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와닿고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선을 넘는다'는 관용 표현이 있듯이, 우리는 흔히 금지된 행위나 생각의 선, 또는 장벽을 상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이 이론을 통해 정의되는 '악'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수많은 행동들은 과연 '악'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품게 된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저자는 '악'의 개인적, 미시적 측면보다 거시적, 구조적 측면에서 실현되는 악에 대한 설명에 초점을 맞춘다. 구조적인 악을 설명함에 있어서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논의, 즉 '악의 평범성'이라는 측면에 많이 기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수용하면서도 악의 한 가지 측면으로만 수용하며 거리를 유지하는데, 정작 논의되는 내용을 보면 악의 평범성의 측면을 장벽 이론에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심리적, 도덕적 측면에서 악을 규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 아렌트가 집어내는 정치적인 측면이나 구조적 차원에서 행해지는 잔혹행위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다양한 사례를 인용하고, 가정적 상황들을 즐겨 사용해 독자의 이해를 쉽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 사례와 소설, 영화가 예시로 제시되기 때문에 딱딱하다는 느낌 없이 술술 읽힌다는 점도 하나의 장점일 터다. 하지만 그 사례가 정말 적절한 건지는 의문이 들었는데, 특히 <시계태엽 오렌지>를 폭력 억제 기제(VIM)의 사례로 제시한다든가, 스타워즈나 한니발 렉터를 활용해 논지를 전개하는 내용에서는 예시를 축소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악'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답안은 상상력과 직관적 이해다. 악한 행동의 동기와 그들이 잔혹 행위 금지 장벽을 어떻게 넘을 수 있었는지를 상상하고, 이를 직관적 이해를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잔혹 행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예시로 드는 것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 저자가 앞에서 제시했던 '근본적 귀인 오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적 요인을 과대평가하는 귀인 오류에 빠지면 안 된다고 말해놓고 상상력을 제시하는 건 결국 상상력이라는 내적 요인이 오늘날 허구적인 악의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결론이 내려지게 된 것은 정치경제적인 측면의 분석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결국 시스템인가...


하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며,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관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자신과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들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분명히 도움이 되었고, '악'이라는 주제를 탐구할 수 있는 좋은 입문서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개인적으로는 이 책 덕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게 되었다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책 하나만 읽고 끝나는 것은 위험하다. 악의 문제를 상상력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너무 국소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화해'라는 대안이 현실적으로 실행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된다. 질문을 던져주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마무리해야겠다. 이제 다른 책을 찾아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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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열린책들은, 흠.. 내가 책읽기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도록 해준 <개미>를 출간해준 출판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멀리 가면 나는 지금은 이름도 기억 못하는, 90권짜리 동화책 세트를 내준 출판사에 고마워해야겠지만, 본격적으로 읽고 모으기 시작한 것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덕분이었으니... (덧붙여 <개미제국의 발견>을 쓰신 최재천 교수께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이후에 베르베르의 책들을 미친듯이 모으면서, 나는 열린책들을 통해 쥐스킨트를 알았고, 에코를 알게 되었고, 아멜리 노통브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여러 외국 작가들의 책을 접하면서, '열린책들'이라는 출판사의 이름에 신뢰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열린책들이 고집하는 전작주의에 대한 믿음인 것 같기도 하고... 어찌됐든 열린책들의 책들이 내 청소년 시절의 독서 체험에서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하루종일, 야자 시간까지 투자한 끝에 다 읽어버린 일이라든가... 그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페이스북에는 30주년 이벤트가 올라온 지 꽤 되었는데(끝난지도 꽤 되었다), 그 때는 한 번도 응모를 안하다가 알라딘에서 보고 책장을 정리한다. 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굳이 양장본을 할 정도의 분량이 아닌데 양장본으로 책을 낸다든가, 줄 간격이라든가, 하는 것들), 정리를 하고 나니 여전히 나에게는 출판사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나보다. 물론 저 중에 여전히 다 읽지 않은 것들도 많지만...


저의 일천한 책읽기의 시작을 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30주년 축하드려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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