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함에 대하여 - 악에 대한 성찰 철학자의 돌 2
애덤 모턴 지음, 변진경 옮김 / 돌베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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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폭력'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어떤 분명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복잡다단한 성질과 특징들이 '악'이라는 이름 안에 뭉뚱그려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를 고민하던 와중에 내가 구입했던 책이 애덤 모턴의 <잔혹함에 대하여>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제의식의 제기 자체는 좋았으나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한, 그래서 많이 아쉬웠던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반에 저자가 제시하는 문제의식은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일반화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우리 주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잔혹한 행위의 원인을 '악'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특수한 것으로, 우리와 별개의 것으로 규정한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악 또는 잔혹성의 이면에 숨겨진 특수한 측면과 일반적인 측면을 규명하고 악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자신의 논지를 이끌어가는데, 처음에 제시하는 것이 흔히 악이라는 개념에 씌워진 이미지들의 진위를 규명하는 일이다.


본질적으로 나쁜 인간이나 인간을 유혹하는 불가사의한 힘 등을 가정하는 식으로 악을 설명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잘못된 방향에서 악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악행자들의 욕망에 주목하는 것도 실수다. 일반적으로 악행자들의 욕망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유사하다. 그 대신에 우리는 악행자들의 욕망이 행동으로 전환되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52-53쪽)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뚜렷하게 구분짓지 않고 사용하는 언어들을 재규정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돋보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잘못'과 '악'이 각기 다른 반응을 불러올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잘못과 구별되는 악의 특징을 혐오감, 잔혹성, 이해 불가능성으로 규정한다. 마지막 장에서 역시 '화해'와 '용서'의 차이를 구분짓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언어들의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시도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잘못'과 '악'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뒤로 갈수록 흐려지게 되는데, 이는 잘못된 행동과 악한 행동 사이의 연속성,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과 악한 행동 사이의 연속성을 규명하려는 과정에서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악의 장벽 이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해보았던 일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와닿고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선을 넘는다'는 관용 표현이 있듯이, 우리는 흔히 금지된 행위나 생각의 선, 또는 장벽을 상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이 이론을 통해 정의되는 '악'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수많은 행동들은 과연 '악'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품게 된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저자는 '악'의 개인적, 미시적 측면보다 거시적, 구조적 측면에서 실현되는 악에 대한 설명에 초점을 맞춘다. 구조적인 악을 설명함에 있어서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논의, 즉 '악의 평범성'이라는 측면에 많이 기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수용하면서도 악의 한 가지 측면으로만 수용하며 거리를 유지하는데, 정작 논의되는 내용을 보면 악의 평범성의 측면을 장벽 이론에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심리적, 도덕적 측면에서 악을 규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 아렌트가 집어내는 정치적인 측면이나 구조적 차원에서 행해지는 잔혹행위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다양한 사례를 인용하고, 가정적 상황들을 즐겨 사용해 독자의 이해를 쉽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 사례와 소설, 영화가 예시로 제시되기 때문에 딱딱하다는 느낌 없이 술술 읽힌다는 점도 하나의 장점일 터다. 하지만 그 사례가 정말 적절한 건지는 의문이 들었는데, 특히 <시계태엽 오렌지>를 폭력 억제 기제(VIM)의 사례로 제시한다든가, 스타워즈나 한니발 렉터를 활용해 논지를 전개하는 내용에서는 예시를 축소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악'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답안은 상상력과 직관적 이해다. 악한 행동의 동기와 그들이 잔혹 행위 금지 장벽을 어떻게 넘을 수 있었는지를 상상하고, 이를 직관적 이해를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잔혹 행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예시로 드는 것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 저자가 앞에서 제시했던 '근본적 귀인 오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적 요인을 과대평가하는 귀인 오류에 빠지면 안 된다고 말해놓고 상상력을 제시하는 건 결국 상상력이라는 내적 요인이 오늘날 허구적인 악의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결론이 내려지게 된 것은 정치경제적인 측면의 분석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결국 시스템인가...


하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며,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관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자신과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들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분명히 도움이 되었고, '악'이라는 주제를 탐구할 수 있는 좋은 입문서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개인적으로는 이 책 덕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게 되었다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책 하나만 읽고 끝나는 것은 위험하다. 악의 문제를 상상력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너무 국소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화해'라는 대안이 현실적으로 실행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된다. 질문을 던져주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마무리해야겠다. 이제 다른 책을 찾아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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