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떠올리면 애잔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할머니를 엄마인 듯 치마꼬리에 매달려 쫓아다닌 기억은 하찮다. 할머니에게 나는 그렇고 그런 손녀 중의 하나일 테니. 내 기억과 애증은 일방통행일 가능성이 크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럴 것이다. 힘들게 살던 때였고 아이들은 넷이나 되었다. 젊다 못해 어린 부모는 자격미달에 직무유기였고, 싸우거나 일하거나 딱히 나쁜 부모는 아니지만 바람직한 부모와도 거리가 멀었다. 모든 기억이 할머니로 통한다는 건 무관심과 방임에 가까운 부모를 대신한 할머니가 늘 가깝게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 할머니가 아프다. 아직은 할머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고, 할머니를 필요로 하면 할수록 부재가 두렵다. 소풍도 목욕탕도 할머니를 따라서 갔구나. 처음 따라나선 새벽 감장도 우시장도 할머니 손을 잡고 있었다. 할머니의 회초리에 맞고 울기도 했고, 그 등에 업혀 잠이 들기도 했다. 할머니의 존재를 내 인생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뭐라 할 말이 없다. 그건 어쩌면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무른 마음 탓일 수도 있고, 미처 성장하지 못한 나의 일부 때문일 수도 있다.




지인의 시아버지가 최근 요양원으로 모셔졌다. 집 문제, 며느리와의 소통, 기타 등등 사유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나 라는 의문이 내내 들었다. 시어머니였으면 또 모르겠다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중환자도 아닌, 단지 거동이 약간 불편한 정도의 노인을 굳이 이런저런 불편을 이유를 들어 다수의 아들 며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설로 보내야 하는가. 요양원에 방치된 수많은 늘고 병든 사람들을 보며 느낀 외로움과 서글픔은 유능한 의사가 있는 깨끗하고 좋은 시설이 환자가 아닌 보호자를 위한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마다의 사정이라는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기심과 허울인 경우가 많다.




할머니와 나의 동거가 언제까지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내 젊음과 시간의 가치가 결코 할머니보다 우위는 아니라는 거. 내 바람은 하나. 할머니의 여생이 부디 고통 없이 평안하기를.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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