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젖은 길은 이내 말라버리곤 했지만, 나는 그 길보다 더 아름답고 빛나는 길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날부터인가 나 역시 그 밭의 채소들처럼 할아버지의 발소리를 기다리게 되었다. 반 통의 물을 잃어버린 그 발소리를.  (28쪽)   

 

몸이 불편한 할어버지가 물을 길어 채소밭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따라가는 시인의 시선이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읽는 동안 마음이 울렁거린다. 자박자박 느리게 걷듯이 읽기에 좋다. 가는 한해를 무심히 바라보며 내가 뱉은 일그러진 비틀린 말들이 잊혀지기를.   

 

산사의 고요한 종소리 같은. 내 손에 들린 것은 투명한 비닐로 깔끔히 커버를 씌운 헌책이다. 이전 주인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을, 그럼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중고시장에 팔려나오게 됐는지. 허긴 영원한 사랑의 맹세는 책에 관해서도 의미가 퇴색하더라. 목숨이라도 줄 듯 품던 것들도 세월과 함께 정리될 품목으로 분류한 게 엊그제니까. 이사 다니면서 악착같이 챙겼던 많은 책들이 너무 낡았다는 이유로, 다시는 볼 일이 없다는 이유로, 싫증이 났다는 이유로 묵은 먼지와 함께 재활용 되거나 팔려갔으니. 요즘은 사실 새 책을 사서 꽂는 일보다 묵은 책을 골라내는 횟수가 더 많다.  혼잣말로 나이 탓을 해가며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아 났음을 자축하며. 채우기에만 급급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지금의 비워가기 이후는 무엇이 올까.

눈 내리는 회색 하늘과 마주선 창가에 작은 화분 두 개가 있다. 로즈마리의 푸르른 잎에게 인사를 건네며 하루가 시작되고 끝난다. 다양한 화초들과 인연을 맺은 한해였다. 난생 처음이었다. 진지하고 바른 자세로 마주한 식물과의 교감은. 벌써부터 봄 여름 가을 화단에 심을 씨앗을 생각하며 설렌다. 이것도 지나가는 한때라고들 하지만 이런 한때가 있는 삶이 싫지 않으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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