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르고 별러

이런 저런 핑계 끝에 집 수리 중이다

사랑하던 가족을 잃고 떠났던 마음이

시간과 함께 돌아와 정 붙였나보다

봄이 좋은 건 메마른 땅을 뚫고 파릇한 싹이 나고

비쩍 마른 나뭇가지 끝에 초록빛 순이 돋아나기 때문이다.

 

죽은 듯 앙상하던 수국나무에 엄지손톱만한 움이 텄다

그 옆의 라일락나무에도 새끼 손톱만한 흔적이 보였다

그보다 더 먼저는 수선화가 이파리를 끌어 올렸고

냉이며 돋나물은 탱글탱글 먹음직한 물기를 머금었다

시골 엄마는 쑥버무리를 만들테니 밀가루를 사 보내라 하시고,

중언부언 하시던 아버지는 대뜸 집을 수리하자고 기별하시었다.

 

겨울이 떠나자마자

그 옷자락이 사라지기도 전에 봄이 불쑥 고개를 내밀어

당혹해 하는 찰나였다, 그 모든 시작은.

겨울은 굿바이

봄은, 수리중

비오고 바람 불어, 바쁜

어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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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보이는 저마다의 상호를 가만히 불러볼 때가 있다. 가치가 있는 커피, 소녀감성, 나무상자, 오후, 또바기 기타등등. 길게 한참을 보고 설 때도 있고 스치듯 지나가기도 한다. 각각의 이름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 카페를 가면 꼭 묻는 질문 중의 하나기도 하다. 이유가 뭐예요? 호기심이 많아 질문을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이다. 대답하는 이가 귀찮아 하거나 사교성이 부족하면 퉁명한 대꾸가 돌아오지만 열에 아홉은 친절히 이름의 숨은 의미를 풀어놓기 마련이다. 사람들 각자에게 쌓인 스토리도 흥미롭지만 물건이나 장소에 얽힌 스토리를 듣는 것도 재밌다. 천성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습성도 있지만, 관계의 시작이나 사귐에서 질문하고 답을 듣는 방법보다 확실한 게 또 있을까.

 

이름 없이 그져 커피라는 커다란 간판만 내걸고 있던 작은 가게에 드디어 이름이 생겼다. 블루문. 보는 순간 기뻤다. 블루도 문도 내가 친애하는 단어들이고, 그 작은 가게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어린 20대 초반의 청년이 야심차게 시작한 가게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아마도 마음 속의 좋아요를 백번은 눌렀을 만큼, 그렇게.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라는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첫 눈에 반하고 말았다. 안녕, 블루문. 종종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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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 그리운 맛을 찾아가는 과정이 요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문득 한다. 시레기 된장국, 찌게, 지짐이 그 중의 하나인데, 겨우내 몇 번의 시도를 하였지만 실패를 먹었다. 쌀뜨물도 활용하고 들깨가루도 첨가하고 마늘, 파는 기본, 표고버섯도 넣어보지만 맛이 영 아닌 거다. 내 입맛, 기억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그 추억의 맛이란 게 상당히 추상적이고 감상적인지라.

그리고 어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를 했다. 된장의 양을 추가하고 고춧가루에 후추도 넣어보고 김수미의 요리법에서 본대로 조물조물해서 한참을 숙성한 뒤에 쌀뜨물을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할때 불을 줄여 느리게 느리게 국물을 조렸다. 그리하여 드디어 기억의 그 맛을 찾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된장 맛이 깊게 밴 시레기 나물의 식감이 제대로였다. 감동이 밀려왔다.

 

서둘지 않고 포기없이 걷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르는 걷기처럼, 요리에도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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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햇빛, 공기냄새, 하늘의 구름까지 좋은 날.

걷고 걷고 걷다보니 제자리

푸념이건 자랑이건 시샘이건 과시건

무슨 상관이랴.

듣고 웃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라면.

 

내 맘이 열리면 그대의 마음도 열린다.

왜곡이나 비평이 없는 온전한

오롯이 온전한

좋은 이웃, 벗, 무어라 부른들

늘 한결같기를.

 

사소한 욕망, 시시한 험담, 그리고 가끔은 뼈있는 농담까지

적당히 불편할때도 긴장은 없이

언제나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너의 행운을 빌어줄께

나의 행운을 빌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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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하기엔 접대가 변변찮아서 미안한 친구가 찾아왔다. 열심히(?) 만들었지만 실패한 떡볶이와 국수를 대접한다고 했는데, 맛도 모양도 영 맘에 들지 않아 속상했다.

맛있다고 먹어준 친구야, 고맙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솔직하게 말해도 돼. 거짓은 마음에 두고두고 남는 법이거든. 오늘의 교훈은 요리는 설렁설렁 해야지 잘한다고 노력하면 더 엉망이 된다는 거다. 요리 못하는 여자는 그냥 요리 못하는 여자로 살아야한다.

 

나이가 중년을 넘어서니 치매 및 건강이 대화의 주된 관심사다. 치매 예방에 좋다는 친구의 말에 시민대학의 글쓰기 강좌에 수강신청을 하러 나섰다. 매사에 게으르고 미적대는 나와는 달리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그녀는 말과 행동이 하나이기에. 지하철도 간만이고 옛 도청건물에 들어선 시민대학을 방문하는 것도 실로 간만의 일이었다. 낡은 느낌이지만 엄청난 이야기를 품고 있을 듯한 중후하고 예스러운 낮은 근대사 건물들은 은근 정취가 남달랐다. 쌀쌀한 날씨지만 하늘은 맑고 미세먼지는 양호한 좋은 날이었다.

 

여자들의 구경이나 하자는 말은 절대 믿어선 안된다. 그냥, 구경이나 할 셈이었던 지하상가에서 우리는 폭풍 쇼핑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래봤자 구제라고 위안할 수 있지만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된다. 그릇이며 모자, 원피스 냄비 까지 기타등등 두 손이 무거워 들 수 없다는 현실에 멈추었지만 우리들의 행태는 한마디로 음, 이었다. 소소하지만 큰 만족일지도 모른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게 훨씬 클 수도 있다. 물질이지만 정신을 풍요롭게 채워주었고, 더불어 봄바람도 살랑살랑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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