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시작한 지 일년이 좀 넘었다. 무기력과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한 건 오래 되었다. 내가 처한 현실의 무거움과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막연하게 짐작만 하였지 적극적으로 돌파하여 개선할 의지도 별로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학교 담벼락에 붙어있는 요가관련 광고판을 보고 이거구나 했다. 살아오면서 숨쉬기와 걷기 말고는 운동을 모른다는 다수의 사람들과 똑같이 나도 운동이란 나와는 무관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겼다. 생각만으로 나는 맞지 않아, 못해, 결코 가까이 하지 못할 무엇처럼 단정하고 고개만 절래절래 젓곤 했는데... 이러한 내가 운동을 시작했고, 일년을 넘겼고, 지금은 삶의 일부가 되었다.

 

필요에 의한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면 기꺼이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주변인이 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떠들어도 소귀에 경 읽기처럼 남의 일로 들렸는데, 직접 체감하는 운동의 효과는 실로 컸다. 느슨하게 풀려있던 정신의 고삐도 바짝 조여지고, 일단은 몸이 가벼워지고 유연해졌다. 몸무게의 변화는 없다. 오히려 1키로그램이 늘었다. 요가는 일차적으로는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몸의 균형을 잡고, 목과 척추 골반을 똑바로 세우니 자잘하게 드나들던 통증들이 사라졌다. 아프지 않은 몸은 삶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활력은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얼굴의 표정까지도 바꾸어주었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운동을 권하고 있는데, 스스로 자각하여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면 운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절대 알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방법이 없다. 알아서 할밖에.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고, 나고 죽은 것도 마찬가지다. 운동을 평생 모르고 사는 인생도 있고, 운동밖에는 모르는 인생도 있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김치찌개는 햄이 들어가는 순간 인스턴트 맛이 났다. 신김치 특유의 군내와 짠내와 감칠 맛을 기대했는데, 아뿔싸, 과유불급이었다. 호박이며 가지, 표고 등 질좋은 재료를 듬뿍 넣어놓고서는 마지막에 귀신에 홀린 것처럼 스팸을 넣어버렸다. 그건 망조였다. 당연하지만 인스턴트 햄의 감칠맛은 기본 재료의 본연의 맛을 모조리 빼앗아갔다. 무서운 녀석이었다. 

 

짭짤하고 부드러운 식감의 가공된 고기맛을 정말이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선물용으로 들어온 것들이 쌓이곤 해서 가끔은 김치찌개용으로 사용한다. 먹으면서 찡그리고 실망하면서도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이상한 현상이다. 결국은 싫어하는 척은 했지만 내면 어딘가에서 좋아했던 것일까. 아마도 맞을 것이다.  

 

언제나 요리는 예측불허의 세계였다. 과한 의욕이 만든 요리는 이상한 맛이 났다. 일생 요리 잘 하는 여자를 우러러 보지만 그들처럼 되고싶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입을 만족을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서 손이 마를 새 없이 요리를 하고 차리는 여자의 삶은 고난의 행군 같아서다. 주방, 그리고 요리의 세계가 즐겁다는 입장도 있지만 살아오면서 본 대부분의 여자들은 어쩔 수 없는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였다. 지금이야 핵가족이 대세고 1인이나 2인 가족도 많아져서 옛날이야기가 되었지만, 과거 가부장적 대가족 속 여자들은 부엌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그 시절의 기억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나는 부엌, 주방, 요리를 결코 사랑하지는 못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야말로 미친 듯이 책을 읽던 시절.

십대에서 이 십대로 넘어가던 

사는 게 힘들어, 어떻게 살아야할 지 몰라서, 너무 외로워, 또 어느 때는 행복해서

사는 게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책에 더 가까와지려 안간힘을 쓰던 시절

이기적이거나 착하거나 그 중간 어딘가에 양다리 걸쳐놓고

자도자도 부족한 잠,

허구헌날 날밤을 센다고 야단치던 할머니의 쨍쨍하던 목소리가

서럽도록 그립구나. 

 

두꺼운 책이 마치 자존심인냥, 적당한 허영과 허세도 젊다는 이유로 봐줄만 했다. 

제각각 비극적인 사연 하나 씩은 가슴에 품고서

술 한잔에 찔끔찔끔 비집고 흘러나와 눈물 바다를 이루고

죽지 말고 살아남자고 맹세하던 손가락들

그 거리, 식당, 커피전문점들

이제는 마음에 묻어둔 기억이고 추억이다.

 

노안으로 침침한 눈은 돋보기가 없으면 절망이고

체력, 기력에 노력까지 딸려 포기도 쉬워졌다.

더 이상 꿈도 이상도 찾아지지 않는 널널한 현실이

당연하다고 말하고

오래된 책을 골라 버리는 게 일상이 되고

책장이 텅 비어 가면 갈수록

나의 뇌도 텅텅 비어 가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집을 수리하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녹슨 철대문을 칠하는 일은 일생일대의 사건이랄 수 있다. 내 집의 입구이면서 얼굴인 까닭에 칠이 벗겨진 대문은 화장기 없는 칙칙한 민낯이나 다름 없다. 색은 블랙의 에나멜로 결정했다.

 

 블랙은 이유없는 로망이기도 했다. 주변의 어떤 색도 싹 휘어잡을 수 있는 무겁고 고고한 무광의 블랙 대문은, 적당히 빈티지한 느낌으로 완성됐다. 기술이나 기교도 없는 시간과 노력과의 묵묵한 전투였다.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일은 약간의 실수와 시행착오가 있어도 만족도가 높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집을 수리할 때 가능한 남의 손을 빌리지 않는 이유다. 완성도 면에선 떨어져도 성취감은 크다는 것.

 

페인팅의 후유증은 계속해서 칠할 거리를 찾는 다는 거.

오늘은 날이 흐리고 비가 와서 쉬고 있지만, 날이 좋은 오후가 되면 또 다시 붓과 통을 들고 어슬렁거릴 것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는 오후다. 무겁고 깊은 울림이 마음 속을 휘젓고 있다.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다시 가라앉는 마음이 자꾸만 밖으로 내달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는 지나치게 마르고 시크한 신인이었다. 대사도 연기도 서툰 타고난 비주얼이 아니라면 지극히 평범했을, 딱 그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본 그는 기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과하지 않은 근육이 잡힌 마른 듯한 몸에 깃든 형형한 눈빛의 남자는 영화 속의 싸이코패스 살인마 그 자체였다. 악역이지만 한 인간의 성장을 목격하는 감동은 컸다.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구나 싶었다. 나왔을 때 반짝 떴다가 계속해서 퇴보하는 연기자들을 너무 많이 봐온 탓일까. 형사보다 악인을 보면서 감탄하고 그 연기 자체를 응원하는 경험은 생경했다. 오랜만의 팬심이었다.

 

영화는 한 인간의 뒤틀린 인격이 어떻게 악마를 탄생시키는지 보여준다. 불우한 가정, 부의 폭력, 그리고 가난이라는 삼종셋트 안에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살인마로 성장한 청년이 있다. 그에게 살인은 밥 먹는 것처럼 쉽고 간단하다. 운 좋게 들키지도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살인을 제 입으로 죽였었노라 실토하게 되는 과정은 평법하다.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던 죽음이 있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가 없는, 사라졌지만 찾는 가족이 없고, 늙은 가족은 빽도 돈도 없어 압력도 부탁도 하지 못하는 서글픈 죽음들. 살아서도 죽어서도 존중받지 못할 죽음에 가지는 작은 호기심과 정의감이 어떻게 거대한 악을 추적해 가며 결론에 이르는지 영화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살인으로 구속 수감된 살인자의 오만이 파열음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순간의 희열. 성과와 실적 쌓기에 급급한 안일과 무관심 대신 고집과 투지에 불탄 열혈형사와 악마의 대결은 선의 승리였다. 댜행히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