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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 잔 여운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자전적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이 전해져 오는 듯한 서술 방식은 마음에서 여러 감정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했다. 우리는 흔히 '조국'을 '모국'이라 표현하지 않나?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모국어라 칭하지 않나... 자기가 나고 자라 말을 배우고 추억이 깃든 곳이 점차 지옥처럼 변해가고 사랑하던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그렇게 상식을 가지고 바라볼 수 없는 세상에 나 홀로 던져진다면? 나 역시도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이 소설의 특이점으로는 주요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주로 여성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정확한 시대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베네수엘라를 언급하고 아델라이다 팔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충분히 그 나라의 시간을 예측할 수 있었다.
[줄거리]
아델라이다 팔콘은 어머니 장례를 치른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떠나버렸고, 과거에는 종종 만났던 쌍둥이 이모들과는 최근 연락이 뜸하다. 아델라이다 팔콘이 어머니 병간호를 하는 동안 나라 상황은 풍전등화처럼 변했고, 정부군과 혁명군 그리고 게릴라 군은 누가 누군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죽고 죽이는 일들을 빈번히 일으킨다.
"엄마가 생사를 헤맬 때, 국가는 미쳐갔어요... 다른 사람을 등쳐먹거나 침묵하거나, 다른 사람의 멱살을 잡으러 달려들거나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거나." 264쪽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집에 무단 침입한 보안관들에게 쫓겨나고, 생존을 위해 우연히 들어선 이웃집 여자의 방에서 아우로라 페랄타의 주검과 맞닥뜨리게 된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녀는 죽은 걸까?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지금 그녀가 사는 세상은 이런 갑작스러운 죽음이 더 이상 놀랍지 않다.
그녀의 대학 친구 아나 ... 그리고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아나의 남동생 산티아고... 학교에서 공부하던 동생이 정보 군에 끌려갔다는 소식 이후로 동생의 생사는 알 길이 없고, 그런 산티아고를 아델라이다는 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언제 무슨 일로 죽음에 이를지 모르는 두 사람은 극한의 공포 속에서 함께 밤을 보낸다.
{감상}
이 소설은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이 키우던 판초가 죽음의 위기에 놓였을 때 어린 아델라이다는 거북이를 구할 수 없었다. 판쵸의 비명을 듣지 않기 위해 요리에 쓰일 토마토 심부름을 했던 아델라이다! 그녀는 어머니 말씀을 뒤로한 채 토마토를 사들고는 다른 길로 새 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온 어린 아델라이다를 무서운 침묵으로 일관했던 어머니...
베네수엘라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이곳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살기를 원한다. 오직 그뿐이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그녀의 간절함은 이웃집 여자의 인생을 훔치게 되고, 베네수엘라를 떠나게 된다. 스페인행 비행기를 탄 아델라이다는 산티아고와의 하룻밤으로 꿈에서 태아를 만나게 되고 산티아고의 주검을 보면서 놀라 깨어난다. 작가가 설정한 이런 꿈의 전개는 정말 꿈일까? 아님 생시일까?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거리 자체가 메타포로 채워져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린 아델라이다가 사랑했고 예뻐했던 판쵸를 지켜주지 못했던 엄마는 조국 베네수엘라를 닮았다. 국가란 자고로 자식 같은 민중을 사랑해주고 보호해줘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 나는 발걸음을 뗐다.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우리 이름, 엄마와 내 이름, 아델라이다 팔콘에서 뽑혀 나간 글자들을 곱씹으면서, 나는 입안의 이가 다 빠진 것처럼 허전한 마음으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278쪽
이가 빠진 것처럼 허전한 마음을 안고 떠나야만 했을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새로운 삶과 생명을 이어가는 그곳에선 더 이상 죄책감이 일어나지 않기를... 인상깊었던 구절 몇 자 옮겨 적어 본다.
"데이지 꽃을 화병에 꽂다가 불개미 한 마리에 검지를 물렸다. 나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뛰다시피 뒷걸음질 쳤다. 제법 크게 물렸다. 찌르는 통증에 두근거리고 따끔거렸다." 280쪽
"나는 내가 잘 알지 못했던, 내가 모든 걸 빼앗아버린 여자에게 주려고 산 데이지 꽃 다발을 내려놓았다. 산후안이 천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처럼, 지상에는 평화가 없었다. 그날 오후 공동묘지의 나무들에서 목 잘린 닭의 깃털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토마토가 다시 터지는 것을, 거북이가 펄펄 끓는 물이 담긴 냄비 안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것을. ... 그리고 다른 어머니, 스페인 여자가, 자신이 생을 마감할 곳으로 선택한 땅의 불개미들이 독을 생성하도록 자기 몸을 양분으로 내어주는 것을..." 282쪽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