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승철 교수님의 이 문장이 마음에 와닿았다. 내가 아는 것을 글과 말로 잘 표현하면 가장 좋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아는 것! 이 문장이 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오랜 시간을 거쳐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 문학작품, 미술품, 음악 등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에두아르는 아무런 수확없이 피렌체를 떠나 산마르코수도원을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청빈한 분위기와 기능적 구성에 감동받는다. 수도원은 사적 공간과 공용 공간이 분리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었다. 덕분에 수도사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미사와 노동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아치형 회랑은 두 영역을 연결해주고 주변의 아름다운 정원도 감상을 가능하게 했다. 각자의 독립된 개인 공간 그리고 모두가 함께 활동할 수 있는 집단 공간이 그의 기억에 오래 남게 된다. 그리고 훗날 에두아르는 1950년대 마르세유에다 '위니테 다비타시옹'이라는 아파트를 이 수도원을 모델로 삼아 짓는다.
에두아르는 프랑스로 여행지를 옮기면서 철근 콘크리트의 대가 오귀스트 페레를 만나게 된다. 그와의 만남은 그의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오귀스트 페레는 철근콘크리트뿐만 아니라 에두아르의 건축물 중 대표작이라 말할 수 있는 롱샹성당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돔이노 제작에 있어서도 혁혁한 조언을 해준 스승이다. 철근콘크리트가 미래의 대체 재료가 될 것임을 직관적으로 느낀 에두아르는 페레의 사무실에 가서 그가 그린 스케치를 페레 보여주게 되고, 그 덕에 시간제로 철근콘크리트 건축 도면 그리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페레의 사무실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고, 수학 공부에도 매진하게 된다.
독일 뮌헨에서는 공대 교수 테오도어 피셔 교수를 통해 도시계획 강의를 듣게 되는데, 사실 그는 건축 재료와 구조에 대해서는 상당한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에두아르의 스케치를 본 피셔는 그를 붙잡고 싶어 했다. 만약 에두아르가 학교에서 정식 공부를 했었더라면, 우리는 그의 작품을 좀 더 일찍 만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기회를 잡지 않고 베를린에 있는 페터 베렌스를 찾아간다. 그의 건축에 세 번째로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인데, 그와 함께 그의 건축물을 견학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건축 양식을 접하게 된다. 특히 실용적인 면을 중시하는 에두아르는 베렌스의 건축양식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두 개의 전시 관람을 통해 새 산업 재료가 건축의 구조와 형태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킬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에두아르는 이를 미리 대비하고 싶어 했다. 철근콘크리트에 어울리는 건축양식 그것이 무엇일까? 에두아르는 고민했다.
시간이 흘러... 세계 1차 대전이 벌어졌다. 그는 기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많은 부상병을 보게 되었고, 폭탄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과 도시를 마주 보게 되었다. 그는 실용적이면서도 효율적이고 짧은 시간에 집을 지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쉽게 층을 올리고 집 없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나갔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돔이노 하지만 이 재주 많은 청년은 30대에 갑자기 예술 활동에 나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