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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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ㅣ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ㅣ 계동준 (옮김) ㅣ 열린책들 (펴냄)




우리는 생각보다 우리 자신을 잘 모른다.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이곳을 통해 제법 많은 고전문학과 벽돌책을 읽고 있다. 여기서 많다는 의미는 나의 평소 독서량을 반영한 표현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어렵다]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투에서 만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이런 나의 편견을 과감히 깨뜨려 주었다. 그리고 난 단숨에 그에게 빠져들었다. 나는 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이런 이름을 붙여도 된다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세상은 사랑과 전쟁이 공존하는지, 왜 성숙과 타락이 존재하는지, 왜 부와 가난이 존재하는지... 이러한 의문의 시작은 그 끝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감상적이었다. 단편적였고, 모호했다. 깊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왔고, 그러다 보면 밥 벌이와 관련도 없는 이런 생각을 뭐 한다고 하고 있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멈추고 나는 도로 열심히 먹고 자고 일했다.


그런 내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갈증에 대한 충족과 기쁨을 주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두 번째로 만난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철학적, 정치적 사유를 한 층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다. 첫 책장을 펼쳐들었을 때 나는 이것이 반의어와 역설적 표현을 표방하는 자기 고백적인 글이 아닐까?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수기'라는 단어가 주는 영향력도 있었다. 



1부 지하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구성이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그의 책에서는 종종 언급되는 농노 문제, 인민 속으로, 혹은 사회주의에 대한 언급 등등 나는 막연하게 그의 흔적을 따라가며 책을 읽었다. 하지만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좀 더 접근해 볼 필요도 있겠다 싶어 사전 조사를 해보았다. 네이버 지식 백과 『고전 해설 ZIP  -지식을 만드는 지식-』을 참고해 보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체르니솁스키는 1860년대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상적인 존재였다.>라는 글에서 도스도예프스키가 이 책을 쓴 이유가 엿보였다. 그것은 바로 젊은 날 자신이 지녔던 이데올로기의 헛된 신념을 보았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 이론은 인간의 실제적 본성과는 전혀 맞지 않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성을 고려하지 않은 허구라고 보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사상을 연상시키는 듯한 문장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도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 또 다른 집단을 파멸시키는 행위를 끊임없이 자행해 오지 않았나?

이런 자신의 생각을 언급하고 있다. 이 단 몇 줄의 문장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토론거리가 떠오르던지... 그는 문학가이며 사상가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어떤 이들은 도스도예프스키가 아주 오만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다.(그의 생애를 읽어 보니 그는 대단한 민족주의자며 우월주의자로 추정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역사는 증명해 주지 않았나... 

 

 

H.T 버클은 영국의 역사가로『영국 문명사』에서 이와 같은 견해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도스도예프스키의 시각을 옹호한다. 과거 문명이 발전할수록 부족 단위나 씨족 단위의 전쟁은 점점 더 공화국과 제국으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세계 전쟁을 불사했다. 특히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 멋진 양복을 차려입고 많이 배운 지식인들은 

세련된 피를 흘리기 위한 막강한 권력과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욕구, 변덕, 광기, 몽상 그리고 이익들 중 이익 이것들 때문에 모든 쳬계와 이론들은 끊임없이 와해되어 버린다.


인간은 창조와 개척을 좋아하면서

왜 파괴와 혼돈을 사랑하는가?


인간의 진정한 고통은 파괴와 혼돈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러한 고통은 의식의 유일한 원인이며 그래서

인간은 의식하기 때문에 고통받는다.


하지만 인간은 영원히 파괴되지 않을 수정으로 된 건물을 믿고 있다. 


당신은 삶의 문제들을 혼동된 논리로 해결하고 있다.


2부 진눈깨비 때문에 

 

 

1부에서 40살인 그는 진눈깨비를 보면서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 그가 경험했던 자신의 추악한 내면을 고백하고 있다. 지하실에 거주하고 있는 '나'는 고상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타인과 타협하기를 원하면서도 거부하고, 겉으로 보이는 친분들이 위선이라 여기며, 출세 지향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속물이라 멀리한다. 그 역시도 가난에 대한 지독한 열등감이 존재한다.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시모노프는 처음에는 그의 생각에 매료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의 끊임없는 명령과 요구에 그는 친구를 잃는 두려움 때문에 '나'가 원하는 대로 실천해보지만 오히려 '나'는 그 목표에 도달한 그를 매몰차게 내버린다.

 


친구들과의 불쾌한 저녁 식사 이후 들린 사창가에서 만난 창녀 '리자'역시도 그녀의 삶을 책에서 본 그대로 스스로가 노예의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라고 갖은 교훈적인 말을 해주며 자신을 찾아오라고 집 주소가 적힌 주소를 주고 가지만, 막상 그를 찾아온 리자를 보면 극도의 혐오감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그의 내면에는 늘 도덕적 판단력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끊임없이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도 소설에서 밝혔다시피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과는 너무나 상반되며 오히려 반사회적으로도 보이는 듯하다. 보통 사람들의 삶을 편협한 시각에서 깎아 내룬다거나, 자신의 지적, 혹은 진실된 사유를 우월하게 생각한다거나,,, 하지만 잘 나가는 즈베르꼬프에게는 상당한 열등감이 있으며, 그가 유일하게 자만하고 있는 자신의 내적 성찰마저도 친구 시모노프는 꿰뚫어보고 그를 위선자라 바라본다.   


우리 모두에게는 내면에 추한 모습의 얼굴들을 가지고 있다. 단지 스스로가 의식​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의식​하는 이들에 의해서 역사는 진보되어 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수많은 피를 흘리면서,,, 2부에서는 '나'의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인간이 추구하는 수정궁의 양면성을 보여주려 했다고 생각한다. 고상한 이데올로기를 건축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식을 통해 끊임없이 진보의 역사를 걸어가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수정궁을 완성 시키지는 못 할지라도 인간이 지닌 박애주의라는 정신마저 잃는다면 우리의 삶은 또다시 멋진 양복 입은 신사의 결정권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야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비난, 조롱, 열등, 우월, 자만, 위선 등등 결단코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이가 있다면 그건 위선이다. 아니면 자신에 대해서 그만큼 의식 없이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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