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란 무엇인가 1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1
파리 리뷰 지음, 권승혁.김진아 옮김 / 다른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름의 나열이 주는 다양한 느낌들이 있다. 단순한 명단이 묘하게 불러 일으키는 감정들... 학창시절 교실 뒤에 붙은 전교 석차 명단을 보면서 얘네는 뭐하는 애들이냐.. 싶었던 이질감도 생각이 나고, 그 필연적인 결과로, 지원했던 대학교에 찾아가 내 이름이 없는 합격자 명단을 우러러 봐야했을 때 부러움과 자책으로 괴로웠던 기억도 떠오른다. 한창 rock을 듣던 20대 때는 각종 페스티벌의 라인업을 보며 두근두근 흥분에 휩싸였고, 이후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여러 논객들의 글을 찾아 읽게 되면서 칼럼 모음집 표지에 나란히 적혀있는 이름들 앞에서 참 든든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 이렇게 1명도 아닌 무려 12명의 대작가 이름들이 줄지어 있는 한 권의 책... 사뭇 경외심을 갖게 한다.

 

경외감을 주는 이름들이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우리와 다를 게 없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이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달리 뭘 어쩌랴. 타고난 재능은 타고난 재능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신이 주신 선물이라면 이들이 얼마나 그 선물을 잘 받아 쓰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의미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선물을 잘 쓴다는 건 저절로 주어진 것이라고해서 그 행운에 안주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노력을 거듭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소질만을 믿고 우쭐해하거나 우연히 찾아올 1%의 영감을 기다리며 99% 나태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영감을 기대하기는 커녕, 포크너는 "영감이 뭔지 모르며 영감에 대해 들어는 보았으나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뭔가 일상이 여유롭고 머리만 굴려대는 반백수같은 생활이 어울릴 법한 직업이지만 그들의 일정은 빡빡했다. 하루키는 작품을 쓸 때 새벽 4시에 일어나 달리기나 수영을 하고 하루 꼬박 6시간을 작업한다. 파묵은 일상의 감정과 작품의 독창성이 섞이지 않도록 독립된 공간을 마련해 그 곳에서 하루에 열 시간씩을 보낸다. 필립 로스는 아침, 오후, 밤까지 하루 종일 글을 쓰고 그렇게 2~3년을 보낸 이후에야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이언 매큐언은 매일 9시 30분에 일을 하러 나가서 평균 600 단어를 쓰고 "운이 좋으면" 1,000 단어까지 쓴다. 헤밍웨이도 매일 쓴 단어의 갯수를 기록함으로써 글쓰는 생활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컨트롤했다.

 

도표 위에 쓰인 숫자는 매일 쓴 단어 수를 뜻하는데, 이 숫자는 450, 575, 462, 1250, 다시 512와 같이 다양하다. 헤밍웨이가 평상시보다 일을 많이 한 날 써놓은 큰 숫자는, 그가 다음 날 멕시코 만에서 낚시질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더라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한 것이다. (p.395)

 

건강하지 못한 몸에서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운동을 하고, 최소한 작업기간 중에는 술을 멀리 하려는 노력도 한다. 또한, 소설 한 편 잘 됐다고 만족하지 않으며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의 기존 작품들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한다. 자기복제를 방지하기 위해 언제나 지금 쓰는 소설이 첫 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매달린다. 구조물을 세웠다가 부수고, 글을 썼다가 찢고,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지웠다가 다시 쓰고, 쓰고, 또 쓴다. 많은 사람들이 재능을 타고 나지만 모두가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면, 그토록 부단한 노력이 따랐기에 '소설가들의 소설가'로 불릴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선물을 단 한 조각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이 작가들 덕분에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무언가 대단한 비법이라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이 엄청난 작가들. 서가에 5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세상을 너무 많이 알 필요는 없다고 농담처럼 진담을 하는 에코도, 서서 글을 쓰는 습관답게 단호한 돌직구를 날리는 헤밍웨이도, 특별한 비기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인터뷰는 그저 자기가 잘 할 수 있고 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내어놓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오래도록 고된 글쓰기 노동을 해온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꼈고, 많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고, 실패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단어와 문장과의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굳이 대가들의 비법을 꼽으려고 한다면 바로 이 고집만이 자격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책은 다 새로운 책이지요. 예전에 써본 적이 없으며, 써가면서 스스로에게 글 쓰는 법을 새롭게 가르쳐야만 하지요. 제가 과거에 책을 썼다는 사실은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항상 초심자라고 느끼며, 계속해서 똑같은 문제, 똑같은 장애물, 똑같은 절망에 부딪히지요. 작가로서 너무도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너무도 많은 형편없는 문장과 생각을 지워버리고, 너무도 많은 가치 없는 부분들을 버리면서, 마침내 배우는 것이라곤 제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 작가란 직업은 참으로 겸허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해야겠지요. (폴 오스터, p.185)

 

우리 모두는 우리가 꿈꾸는 완벽함에 필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가능한 일에 얼마나 멋지게 실패하는가를 기초로 우리들을 평가합니다. 저는 만일 제 모든 작품을 다시 쓸 수만 있다면 더 잘 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예술가에게 가장 유익한 조건이지요. 이것이야말로 계속해서 글을 쓰고 다시 시도하는 이유입니다. 예술가는 매번, 이번에는 글을 성공적으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요. 물론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만, 이렇게 실패하는 것도 유익합니다. 일단 자신이 품고 있는 이미지와 꿈에 필적하게 써내는 데 성공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자신의 목을 따거나 완벽함의 정점에서 자살을 위해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윌리엄 포크너, p.437~438)

 

그들의 이야기에는 소년의 순수와 청년의 열정과 중년의 지혜와 노년의 관록이 넘쳐 흘렀다. 이 사람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는구나. 이렇게 쓰는 책이었구나. 내가 읽는 그들의 책 속에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이 담겨 있었구나... 책 한 권이 예사롭지 않다. 책에 대한 태도를 가다듬어 좀 더 높은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평생을 내면 천착에 쏟아야 할 운명을 지닌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책.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 신의 선물이듯 우리 독자들에겐 이들의 존재가 신의 선물이지 않을까. 아래 헤밍웨이의 말처럼, 살아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진실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이 위대한 작가들 덕분에 우리의 삶은 미처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크고 작은 의미들을 찾게 되는 것일테니까 말이다.

 

일어난 일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알고 있거나 알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재현이 아니라 창작을 통해 살아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진실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지요. 당신은 그것을 살아 있게 할 수 있고, 만일 당신이 충분히 잘할 수 있다면 그것에 영원성을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이유이고 우리가 아는 한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런 모든 이유가 있다면, 그런 이유는 어떤 것일까요? (어니스트 헤밍웨이, p.4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글만리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변함이 없다. 성실한 자료조사와 현장답사에서 나오는 소름돋는 현실감, 끝끝내 인간의 심성을 놓지 않는 따뜻한 가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3-09-30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게 얼마만입니까 건조기후님. ㅠㅠ

건조기후 2013-09-30 13:52   좋아요 0 | URL
헤헤. 서재 막 낯설고 ㅎ 다락방님 잘 지냈어요?
 
주기자 : 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
주진우 지음 / 푸른숲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찡하다. 강자의 권력에 짱돌을 집어던지고 약자의 눈물에 가슴을 내어주는 이런 기자... 악마기자의 쪽팔리지 않는 삶을 위해, 17세 주진우를 끝까지 응원하겠습니다. 화이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 -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며
김제동 지음 / 위즈덤경향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인터뷰어 김제동의 책 끝에 인터뷰이 김제동이 있다. 다소 심드렁했던 마음에 비로소 물결이 찰랑찰랑. 그 이름 석 자, 어딜 가나 부족함을 채워주고야 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발명 마니아 - 유쾌한 지식여행자, 궁극의 상상력! 지식여행자 9
요네하라 마리 지음, 심정명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요네하라 마리 

그녀의 책은 처음이다. 예전에 <공중그네>를 읽다가 관 둔 이후로 일본식 유머(?)가 (공중그네 하나로 대변되는 건 아니지만) 나와 맞지 않는가보다 생각이 들어 '재미있다'는 일본 책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는데, 지난 번 마음산책 이벤트 때 요네하라 마리의 이름이 눈에 많이 띄어서 궁금하던 차에 책 소개글 보고 재밌겠다 싶어서 (아니라면 한 번 더 속은 셈 치자 하고) 주문했다.  

아. 그렇지만 속지 않았다. 속기는 커녕 내내 킥킥대며 웃다가 와와하며 감탄하고 으음하며 얼굴 굳어져가면서, 아주아주 열심히 읽었다. 쉽게 읽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재밌어서 책이 손에서 잘 안 떨어지더라는. 당장이라도 실용화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디어는 더없이 기발하고, 이건 좀..ㅋ 싶은 황당한 발명들은 실현은 못 할지언정 그 발상만으로도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줬다.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여러 개의 다른 시선을 또 얹어주는, 소중한 배움이다. 이렇게 유쾌하고 따뜻한 발명품들을 보고있자니 아무리 비현실적인 것이라도 언젠가는 실현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믿게 된다. 뭐, 된다 안 된다 보장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으니까. 

마냥 장난꾸러기같으면서도 너무나 눈이 깊은 그녀라서, 그 소소하고도 거창한 아이디어들이 하나하나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끊임없이 재미있는 것을 찾고, 뭔가 늘 다르게 바라보는 그 방향에는 항상 환경을 보호하고 동물을 사랑하며 주변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고, 반대로 그렇게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물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썩소를 날려주는 그녀. 더할 수 없이 발랄하고 더할 수 없이 신랄하다.

발랄한 그녀   

개와 고양이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그녀는 이 동물들과 함께 여행을 하거나 비가 와도 편하게 산책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결국 함께 먼 길의 여행을 하는 것은 포기해야 했지만ㅋ 강아지의 등에 배낭처럼 지지대를 메어 그 안에서 넓적한 우산이 펼쳐나오게 한다는 발명은 생각만해도 웃겼다(표지에도 있는 그림). 울집 강쥐넘 저거 메고 비 오는 날 돌아댕기는 모습 상상만해도 아하하하하. 실제로 있을 것 같기도 한데, 한 번 찾아볼까.

그녀는 물건도 잘 잃어버려서 어느 날은 물건마다 센서를 달아보는 게 어떨까 생각한다. 전화기, 리모콘, 지갑, 열쇠 등등에 모조리 센서를 부착해 컴퓨터 모니터만 켜면 위치를 알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아 정말 편한 것 같은데, 결정적인 부작용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도둑이라도 들면 필요한 물건 여기있으니 가져가시오 친절알림서비스가 된다는 거. 모니터를 보며 낄낄대고 좋아 죽는 도둑님 뒤에서 퍼질러 자는 마리 여사가 귀엽다.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이나 사이클을 탈 바에야, 버스나 택시 안을 피트니스 센터라 생각하고 승객들이 단체로 페달을 밟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도 기발하다. 연료 아껴, 따로 운동할 시간 안 내도 되니까 시간 절약돼 돈 절약돼. 나도 걸어서 출퇴근하는데(30~40분 거리) 솔직히 버스 기다리고 신호 걸리고 차 막히고 하면 걷는 거랑 별 차이가 없다. 자전거라면 버스보다 당연히 훨씬 빠르고. 물론 거리가 멀어질수록 효용이 떨어지므로 적당한 범위 내에서나 가능하겠지만 실제로 생기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 그림도 웃긴데, 승객 중 한 사람이 하는 말. "다 같이 페달을 밟게 되면서 치한이 없어져서 좋아." ㅋㅋㅋㅋㅋ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열조 백조가 될 지도 모를 아이디어다.

비슷한 방식으로, 고층아파트에서 펌프로 옥상 저수탱크까지 물을 길어올려 각 층에 급수하면서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하는 대신, 옥상에 놀이터를 만들어 시소나 그네같은 놀이기구를 펌프와 연동시키는 방법도 제안한다. 아파트 1층이나 지하에도 피트니스 센터를 만들고 모든 기구를 발전기에 연동해서 전력을 생산한다는 것. 이것 정말 실용화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만하다.  

종이 재활용에 관한 내용도 의미심장하다. 종이를 재활용한다는 것이 폐지를 질척하게 녹여뭉개서 다시 다른 제지류로 재생산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공장을 가동시키며 발생하는 또 다른 오염과 운송, 생산에 들어가는 금전적 부담을 생각해봤을 때 과연 환경보호에 기여하기나 하는지 의문스럽다는 것. 그래서 그녀가 착안한 것은 애초의 원형을 보존하면서도 2차, 3차로 사용이 가능하게끔 제작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잡지를 다 보고 나면 종이가방으로 만들어 쓸 수 있게 한다거나 편지봉투를 만들거나 기타 등등으로. 모든 종이를 그렇게 재사용하기엔 쉽지 않겠지만 역시 발상 자체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환경보호라는 미명아래 환경을 더 해롭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동 위험방지 시스템 역시 유용하다. 각종 사건사고을 막기 위해 자동 제어장치를 만드는 것인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안전벨트를 매야 놀이기구가 작동을 한다던가, 열차에 일정한 속도를 넘어가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하는 거다. 이렇게 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을 넘어서서, 온실가스가 허용 한도를 넘어서면 국내 온실가스 방출 설비가 일제히 가동을 정지하는 시스템이나 예산 범위를 넘자마자 관료들의 급여 지불이 중단되는 시스템도 개발되기를 바라는 그녀. 저도 동의해요.ㅋ 이어지는 그림 역시 재미있다. 식사를 하는 두 여자, 한 명이 스테이크를 포크에 찍어 입안에 넣으려는데 안 들어간다. "어머, 웬일이야. 아무리해도 입이 안 열리네. 더, 더, 더 먹고 싶은데!" "오늘 아침에 비만 방지 시스템을 설치했잖아요. 벌써 잊었어요?"

신랄한 그녀  

이렇게 따뜻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일상의 소소한 재미와 실생활에 쓸만한 개선책을 찾는 와중에, 툭툭 튀어나오는 날 선 눈빛이 매섭다. 비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콕콕 집어내고 이 세상을 불행으로 몰고가는 것들을 자근자근 밟아버리기도 한다. 미국의 오만을 가차없이 비난하며 '궁극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자조적으로 그리고, 부시에 무기력하게 휩쓸리는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도 수시로 날린다. 그러나 그 분노에 찬 시선 역시 결국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비아냥대며 흘리는 냉소 뒤에는 갈수록 팍팍해지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자꾸만 파괴되는 것이 많아지는 세상에 대한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발명1 뭐든지 하이브리드, p.16

까마귀를 메추라기와 교배해보면 어떨까? 알과 고기가 맛있으니 순식간에 다 잡아먹혀서 보호새로 지정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조류의 영장이라 일컬어지는 까마귀의 똑똑한 머리를 활용하기 위해 앵무새와 교배해서 인간과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하는 방법도 있다. 언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일지 모르는 세상이다. 앞으로 복지 예산이 대폭 삭감되고 나면 보육새, 간호새라 해서 귀하게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위에 자동 위험방지 시스템에 관한 글도 있지만, 책 전체 면면에서 범죄행위에 대한 분개와 예방책에 대한 절실함이 묻어난다. 아이들이 등하교할 때 일대일로 개와 함께 동행하도록 한다거나, 피해자를 실물과 같은 인형으로 만들어 범인 취조실 구석에 두고 마치 귀신이 나타난 것처럼(수사관들은 미리 짜고 못 본 척 연기한다) 해서 자백하게 만들자는 것이 그녀의 생각. 인형에는 실제 피해자와 비슷한 목소리까지 입력시켜 짤막한 말도 하게 한다. 좀 오싹하지만 효과는 짱일 듯.

발명13 '테러와의 전쟁' 게임, p.75  
 
테러리스트에게 정확히 조준하더라도 지나가던 민간인이나 개가 거의 매번 살상당한다. ... 사용자가 발사한 미사일 때문에 사상자의 유족이나 친구들이 유해를 둘러싸고 탄식하며 슬퍼한다. 그러고 나서 좀 지나면 슬퍼하던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용자가 테러리스트 소탕에 몰두하면 할수록 화면상의 테러리스트 수는 늘어난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화면 구석에 오기를 기다렸다 미사일을 명중시키면 민간인을 말려들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 기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보았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 전혀 공격하지 않고 있었더니 웬걸, 테러리스트의 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결국에는 없어져버렸다.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게임이다. 미친듯이 테러리스트 '박멸'에 집중하다가 그 늘어나는 수에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손을 놓았을 때, 자연히 사라지는 테러리스트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이 들까?

발명75, 비아그라도 무색케 할 무적의 성욕 증진법, p.377

(2004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발생했던 미군의 이라크인 수감자 성학대 사건을 두고) 궁극적인 성욕 증진법은 전장에 몸을 두는 것이다. ... 적일 가능성이 있는 이상 인정사정없이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당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죽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장은 항상 유혈과 시체로 차고 넘친다.  

이렇게 많은 죽음과 시체를 마주한 인간에게는 어떻게든 그것에 저항하려는 강렬한 본능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적을 섬멸함으로써 스스로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분신을 생산하여 자기의 유전자를 영속시키려는 욕구가 맹렬한 기세로 싹트는 것이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온갖 전쟁에서, 병사들은 생존본능에서 비롯한 강렬한 성욕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따라서 전장에는 성욕이 왕성한 젊은이가 아니라 성욕 감퇴로 괴로워하는 노인들이 가야 마땅할 것이다. 헌법의 평화조약을 걷어치우고 전쟁터에 일본 병사를 보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고이즈미 총리와 국회의원 선생들을 제일 먼저 보냈으면 좋겠다.
  
 

전쟁이라는 것이 인간을 정말 다방면으로 망가뜨리는구나, 새삼 소름이 돋는다. 전쟁을 결정하는 자들은 그저 책상머리에서 싸인이나 쓱 휘갈길 뿐, 정작 전쟁터로 내몰려 직접 총을 들어야하는 청년들의 삶에 대해 한 번이라도 '내가 그들이라면'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어도 진심으로는 아무 생각이 없겠지. 본능과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는 곳을, 외부의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역겨워하기는 쉬운 일일 거다. 그렇더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사람이 변할까 싶기도 하지만, 역시 겪어 보지 않았으니 무조건 매도하기가 저어되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인간이란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약하기도 하지 않나. 정작 당사자들이 그 곳에서 빠져나와 '내가 있었던 곳' '내가 했던 짓'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게 될 시간들은 전장에서의 위험보다도 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현실이 아닌 고작 테러와의 전쟁 게임을 허무하게 끝내고 났을 때 밀려올 그 자괴감처럼.

마리 여사가 고안해낸 100개의 발명은 무엇보다 재미있어서 좋았고, 단지 재미가 전부가 아니라서 더 좋았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선에서 유쾌하고도 진지하게 풀어내는 그녀의 글과, "내 아이디어 정말 기발하지 않아?"라고 외치기라도 하듯 쓱쓱 거침없이 그려낸 그림은 더할 수 없이 발랄하고 신랄한 즐거움을 선사해줬다. 기발한 아이디어의 바탕에 깔려있는 세상을 향한 날카롭고도 따뜻한 시선, 그 덕분에 마음좋은 웃음을 웃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억지스럽게 끌려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그냥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쿡쿡 튀어나오는 웃음. 기분이 무척 좋다. 유쾌한 그녀를 만나, 나도 한껏 유쾌해진,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하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7-16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6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