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두보를 만나다
다카시마 도시오 지음, 이원규 옮김 / 심산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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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백과 두보! 우리는 그들을 라이벌이라 부른다. 또한 뛰어난 시인이라 부른다. 동시대에 살면서 같은 분야에서 이룩한 그들의 성취를 서로 비교했을 때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용호상박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훗날 사람들은 서로의 취향과 입장에 따라 이백이나 두보를 서로 치켜세우기도 하는데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이들은 우열을 가리는 일을 쓸테없는 일이라 치부한다. 비록 문학이라는 같은 업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서로 추구하는 이상이 엄연히 달랐고 그 이상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이라는 형식도 상이하였기 때문에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인데 공감이 가는 주장이다. 이백이나 두보의 성취에 감히 접근하지도 못한 부류들이 어디에 대고 함부로 입을 놀리며 누가 더 뛰어나다고 주절대는 것 자체가 도대체가 희극이다. 이백은 이백대로 두보는 두보대로 그들이 걸어온 족적 그 자체로써 스스로들 이미 충분히 뛰어날 뿐이다. 우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 입을 다물라!


그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달랐다. 이백은 보잘것없는 집안의 태생이다. 조상이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가까이는 아버지마저 도재체 뭐하는 인물이었는지 속시원히 밝혀진 것이 없다. 이는 한마디로 별볼일 없는 출신들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두보는 대대로 선비집안의 출신이다. 먼 조상들 중에는 중국역사에 제법 이름을 올릴 만한 인물들도 더러 있었다. 집안으로만 따지자면 어디에 내놓아도 위축되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런 점에서 이백과는 뼈대가 다른 집안이다. 문학적 성향면에서 이백은 낭만적이며 도교적인 기풍을 가지는 데 비해 두보는 현실적이고 유교적이다. 이백이 호방하며 당당한 자의식을 거리낌없이 표출하는 남성적이라며 두보는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왜소한 자신을 하염없이 자책하는 여성적이다.  이백은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독불장군식 스타일이어서 사람이 붙지 않았고 그래서 항상 외로웠음에 비해 두보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와 타인에 대한 배려로 그를 보살펴주는 이가 꽤 많았다


하지만 또 많은 점에서 그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인생의 많은 세월을 무위도식으로 보냈다. 기본적으로 가진 재산이 바닥을 드러내면 알음알음 아는 지인들의 원조를 받아가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면서도 밥을 굶는 일도 없었고 또 술은 언제나 입에서 떠나질 않았다. 천자의 부름을 받지 못해서 그리고 국왕의 신임을 얻지 못해서 유랑하고 방랑하면서도 스스로 일을 하며 얻은 댓가로 의식주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가지고 태어난 글재주를 팔아가며 연명하는 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날품팔이 문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게 전부다. 그들의 타고난 글재주는 천자의 영광을 노래하고 개인의 신세를 한탄하는 도구로만 씌였을 뿐 그들이 살고 있던 당나라의 국란과 왕조의 전횡으로 인하여 신음하며  고통받는 백성의 아픔을 위로하고 사회를 개선코자 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문학이 그리고 그들이 가진 재주가 기껏 지배자의 평안을 염원하고 불안한 체제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에 제공된다면 그들은 타고난 기재에 바탕을 둔 뛰어난 테크니션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진실로 참다운 위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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