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효과. 고등학교 때 <카오스>란 책을 보다 알게된 이론이다.

 "중국 상해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미국 뉴욕에서 태풍이 일어난다."

 카오스 이론은 98년 당시 수능문제지에 자주 등장하던 지문이었다. 기억이 새록새록. 아련한 먼 옛날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고...

 영화 <나비효과>는 기대이상이었다. 정말 대단한 영화였다. 물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어떤 이들은 뭐 이런 영화가 있냐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극찬을 한다. 나는 극찬을 하는 입장이다. 놀라운 소재를 대중적으로 잘 풀어낸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아리송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슬슬 감을 잡게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이 '나비효과'인 것은, 주인공의 끊어진 기억이 6년후 10년후의 주인공과 친구들의 미래를 뒤바꿔놓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작은 일이 큰 일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쓰인 듯 하다.

 영화 속에서 켈리를 사랑하는 에반은 자신의 여러 기억의 통로를 통해 이동한 미래의 현실이 자신에게 혹은 켈리에게 너무나 암울한 것을 발견하고 다시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 미래를 뒤바꾼다. 켈리는 때로는 에반과 사랑하는 대학생으로 나오고, 때로는 창녀로, 때로는 고향 음식접의 서빙녀로 등장하며 다양한 인생살이를 보여준다. 결국 에반은 켈리와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온전한 삶을 위하여 켈리와 자신이 모르던 사이가 되는 길을 택하고 만다. 비록 사랑하는 켈리와 헤어지더라고 말이다.

 극장판에서는 에반이 켈리와 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감독판에서는 에반이 어머니 뱃속 태아로 돌아가 자살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한다. 전자가 좀더 로맨스적이고, 자연스럽다면, 후자는 스릴러적이다. 감독판은 후에 원하는 사람에 한해 디비디로 감상하고, 전자의 줄거리가 좀더 대중적 인기를 끌기에는 적합한 듯 하다.

 오랫만에 대단한 영화를 본 느낌이다. 영화 팜플렛에 나온대로 이 영화는 <메멘토>와 <매트릭스>를 섞어놓은 듯한 대작이다. <메멘토>의 단점은 영화를 여러번 봐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감지하기가 쉽지 않은 반면, <나비효과>는 영화가 의도하는 바가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좀더 대중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나비효과> 강력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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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4-11-23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본 게 감독판인 모양이네요 감독판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요? 뱃속에서 죽은 걸로 끝나야 점성술사가 영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게 맞죠^^
 
칸트 평전 - 한 꼬마가 세계적 현자가 되기까지 미다스 휴먼북스 10
만프레트 가이어 지음, 김광명 옮김 / 미다스북스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칸트의 사후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적으로 동시 출간되는 로볼트 출판사의 <칸트 평전> 한국어판인 이 책은 칸트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라고는 하나 쉽게 읽히지 않는다.

 저자는 미국의 촘스키 언어학을 공부한 철학자이며, 역자는 나의 학과 선생님이신 김광명 선생님이다. 김광명 선생님은 서울대 철학과와 같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칸트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우리학교에서 칸트를 가르치시고 있다. 그래서 더욱 눈이 가는 책이다.

 선생님께서는 수업중에도 칸트의 생활상의 에피소드를 가끔씩 말씀해주시곤 한다. 이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칸트평전>을 읽어봤다.

 일단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어렵다다. 나는 석사과정생이 아니라 칸트를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철학을 전공하고 있고, 그래도 서양철학에 더 관심을 가지고 4년을 보냈음에도 칸트는 잘 알지 못한다. '칸트연구'라는 수업을 들었음에도, 칸트는 헤겔과 더불어 알기 어려운 철학자 중 하나이다. 오히려 헤겔보다 칸트는 더 어려워 보인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정말이지 무슨말인지 모르겠다.

 전기이지만 칸트의 생활상보다는 그의 학문적 줄거리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탓에 칸트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어렵고 지루하다. 지나치게 칸트의 학문적 업적이나 다른 철학자들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후반부에 칸트의 생활상에 대해서도 나오기는 한다.

 칸트의 일생은 생의 말미에 좀 풀리기는 했지만, 그가 교수직을 얻기까지는 너무도 암울했다. 그는 교수직에 여러번 도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고, 계속해서 방 두개짜리 조그마한 집에서 세를 얻어살며 생을 근근히 이어가야했다. 칸트는 3살과 22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잃고, 홀로 생활해야했다.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자 학비를 벌기 위해 개인가정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그의 생활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물론 나중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형이상학 논리학 교수직을 얻은 뒤로는 대체로 경제적으로도 여유있는 생활을 했고, 말미에 가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 어려운 책인 <순수이성비판>을 우여곡절 끝내 출판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시간이 지난후에 정당한 평가를 받았지만 말이다.

 칸트의 고독한 생활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다. 칸트는 누이와도 25년간 연락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결혼을 해서 부인과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사교적인 생활을 좋아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길 즐겼다.

 칸트의 결혼에 대한 에피소드를 번역자인 김광명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는데, 이 책에는 그 재미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어쩌면 그것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칸트는 사귀던 여자에게 청혼을 받았는데 그는 이 결혼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몰라 도서관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나왔더니 이미 여자는 결혼한 뒤였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칸트의 철학의 성격과 그의 생활상의 성격이 들어맞는 절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체계적이고 이성에 의한 명석판명함을 좋아했던 그는 시간 약속에 있어서도 철저했다고 한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독서를 자고 자고 일어나는 시간들이 매사에 정확했다고 한다.

 서양철학에 있어서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다, 라고 말한 화이트헤드의 말도 있지만, 같은 의미에서 칸트의 이후의 철학은 모두 칸트의 주석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적 단편>이라는 책에서, 리오따르는 <차이>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칸트의 윤리학적 측면을 고려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쩌면 칸트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철학함에 있어 플라톤만큼이나 칸트를 알아야하는지도 모른다.
 
p.s. 나는 대체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탓에 어느 한 친구로부터 "니가 칸트냐?"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그럴때마다 난 웃곤한다. 내가 아무리 규칙적이라 할지라도 칸트를 따라갈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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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학 시간 나의 개인적인 질문에 선생님께서 칠판에 그림을 그리며 하신 말씀이다.
 
 나와 남의 관계에는 네 가지 영역이 존재한다. 첫째, 내가 알고 남이 모르는 영역, 이것은 비밀이다. 둘째, 내가 모르고 남이 아는 영역, 이것은 단점이다. 셋째, 나도 알고 남도 아는 영역, 이것은 개방이다. 넷째,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영역, 이것은 무의식이다.

 이 도식은 어떤 말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려놓았던 것인데, 나는 나의 질문과 선생님의 핵심적인 답변보다 이 도식에 눈길이 갔고, 결국 질문과 답변을 잊은 채 내 머리 속에는 도식만이 남았다. 그리고 도식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우선, 나와 타인간의 관계가 이렇게 네가지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놀랍다. 우리는 이 안에서 관계맺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남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으며, 누구나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있고, 누구나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개방된 영역이 있으며, 누구나 알 수 없는 의식의 저편, 무의식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개방된 영역이나 무의식의 세계보다, 그리고 비밀의 세계보다, 단점의 세계에 대해 생각을 펼쳐나가본다.

 나에게도 다른 사람만이 알고 있는 단점이 있을 것이다. 나는 모르고 있는. 물론 내가 알고 있는 단점 또한 있다. 이는 내 스스로가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엄밀히 네 가지 영역중에서 단점의 영역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면 이미 알고 있는 나의 단점은 남은 물론 나도 알고 있는 것이기에 이미 개방된 영역으로 옮겨간 상태다. 내가 모르는 나의 단점은 무엇일까? 이것을 안다는 것은 이미 '단점'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기에 나는 이에 대해 영원이 알 수 없다.

 하지만 알려고 시도는 할 수 있다. 내 주변의 타인에게 물어봄으로써 지적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렵다. 대개 단점을 지적해달라는 요구에 타인은 나와의 관계가 깨질까 두려워 쉽게 지적하지 않는다. 지적한다고 해도 그다지 크지 않은 단점 몇가지만을 겨우겨우 입에서 내놓을 뿐이며, 정말 '단점'같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도는 할 수 있지만 알기는 어렵다.

 단점의 영역에 있는 것들이 개방된 영역으로 옮겨갈 때 아마도 나는 좀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네 가지 영역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역의 크고 작음은 나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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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학 시간에 선생님께서 예전에 가르쳤던 한 고등학생이 이번에 수능을 봤다고 한다. 그 학생이 수능이 끝난 뒤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고민을 털어놨다는데, 시험을 잘 보지 못했으며, 자신이 삶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시험과 삶의 불행은 연관관계는 없다. 부모님의 기대가 너무나 크고 자신이 그 기대를 채워야만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괴롭고, 할 수만 있다면 독립해서 따로 살고 싶다고 했단다.

 그리고 이는 이 날 아침에 우리집에서 발행했던 잠깐동안의 사건- 엄마와 나 사이의- 과도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부모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자식은 당연히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리고 오랜시간 부모의 보호와 관심 아래서 자라난다. 한국의 '자식'들은 대개 아무리 빨라도 20살, 늦으면 30살정도까지도 부모의 도움을 받고 산다. 물론 나이를 먹을수록 그 도움의 정도가 미미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완전히 독립할 수 없다는 면에서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의존 관계는 해체되지 않는다.

 또, 부모가 자식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기대를 하고 자식이 자신의 기대를 채워주기를 바라는 것은 대개의 부모들의 특징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관심과 기대의 정도가 너무 지나치면 부작용을 일으킨다는데 있다. 또한 부작용을 넘어서 그것은 한 개인으로서의 인격체에 대한 권리침해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부작용이라는 것은 대개는 10대 사춘기에 발생한다. 부모의 지나친 보호와 관심과 기대, 그리고 간섭, 강요 등은 아이로 하여금 심한 압박감, 즉 정신적  스트레스를 일으키게 하고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이 아이들은 때로는 이로인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대개는 가출이나 다툼, 신경질 등으로 이어지지만, 어쨌든 자살이 아니어도 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임은 틀림없다.

 개인으로서의 인격체에 대한 권리침해라는 것은, 자의식이 성숙한 상태인 10대후반에서부터 20대후반까지에 해당한다. 이 나이대의 자식들은 이미 성인에 가깝거나, 성인이 된 상태이고, 이들은 이제 누군가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주체적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하는 상태에 놓여있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한없이 소유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영역 아래에 두고 싶어한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자식이 자신의 기대에 응해주기를 바라고, 자신의 지시대로 행동하기를 바란다. 이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주체적인 상태에 놓여있음에도 말이다.

 나는 부모의 역할은 자식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돼, 자식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선택을 하건 스스로에게 맡겨야한다고 생각한다. 권유, 조언을 할 수 있지만 강요, 지시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미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해 자기주체성이 확립된 이들에게 외부로부터의 강요나 간섭, 지시는 당연히 자기주체성을 박탈하는 행위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자기주체성이 박탈당한 인간은 이미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개인이라 볼 수 없으며, 그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강요, 간섭, 지시는 자식을 하나의 성숙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외국의 부모들은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성인이 된 후의 자식들을 해방시켜주는 반면,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자식을 소유하고 놔주지 않는 경우가 대개이다. 20살을 넘어 성인이 된 후에도, 사회적으로 독립한 후에도, 결혼을 한 후에도, 우리나라의 부모들에겐 자식은 자신의 소유물이다. 따라서 자신이 투자한 만큼의 결과를 얻기를 바라고, 끊임없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기를 바란다.
 
 자동차를 구입한 뒤 수리하고 정비하고 세차하고 가꾸는 데에는 돈이 많이 든다. 그리고 투자자는 돈이 든 만큼 자동차가 제 값을 해주기를 바란다. 이는 당연하다. 소유물이니까. 하지만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기에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투자하더라도 투자한만큼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질책해서는 안된다. 투자하고 기회를 주는 것은 부모의 자유지만, 기회를 활용해서 어떤 결과물을 산출하는 것은 자식의 몫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방치하는 것은 좋지 않다. 방치하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이며,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정서적으로 엇나갈 가능성이 크고, 사회적으로 문제있는 사람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자식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식을 올가매서는 안된다. 방치된 자녀는 생명은 보존할 수 있지만, 강요와 심한 압박감 속에서 자란 자녀는 최악의 경우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살이 아니더라도 이 또한 정서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자랄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있어서는 믿음이 필요하며, 1차적 관계인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믿음과 사랑을 잃어버린 자녀는 타인을 사랑하기 힘들다.

 이 땅의 부모들이 제발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았으면 한다. 더불어 수능이 끝난 이후 부모의 기대치에 못미쳤다는 스스로의 비관으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는 이가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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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간지를 보니 교육인적자원부가 '교원 양성체제 개편 종합방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교사의 자질과 능력을 높이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내놓은 거이라 하는데,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지금의 교원자격 취득을 위한 교육과정 및 자격검정 기준이 너무 느슨하고 교원양성기관 또한 별도 운영기준 없이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어 이를 고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생실습기간을 중등교육 4주에서 8주로, 초등교육은 8-11주에서 15주 이상으로 늘린다고 한다. 또, 시도교육청에 '교육실습지원센터'를 설치해 초중고와 연계해 지원하고, 실습지도 교사에게는 승진 가산점을 부여하기로 했단다. 사대는 최근 4년간 임용률이 10%미만일 경우 비사범계 학과 전환을 유도하고 교사자격 기준에 미달하는 학생은 졸업 시키되 자격증을 주지 않기로 했단다. 또 교사 선발 기준은 면점과 실기위주로 변경된다. 2008년도 임용시험부터 지필고사를 35%로 낮추고, 심층면접과 실기능력 위주로 뽑는단다.

가장 민감한 사안인 교사자격증 수여조건을 보자면, 현재 일반대에서도 교직과정을 이수한 뒤 평균 80점이상이 되고, 일정 필수 과목을 이수했다면 교사 자격증을 주고 있으며, 사범대 또한 성적에 관계없이 졸업학점만 따면 교사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대를 졸업하고 교육대학원에 진학하면 교사자격증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사범대라 할지라도 평균학점 C미만이거나 실습성적이 B미만이면 자격을 주지 않으며, 일반대의 경우에는 교직과목이수 20학점에서 33학점으로 늘린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문제 없어 보인다. 교총과 전교조의 반응과도 같이 방향은 맞아보이는데 내용이 부실하다. 그런데 교사의 실질적인 질을 높이기 위한 이러한 시도들이 뭔가 하나를 빼놓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교사의 교육관과 교육학에 대한 기초지식, 그리고 실습이 중요하긴 하지만, 여기에 한가지 빠진 것이 있다면 전공에 대한 심도있는 지식이다. 자신이 가르칠 과목에 대해서 깊이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고려하는 항목은 빠져있다. 오히려 임용시험에서 전공의 비중이 줄어듦으로써 전공을 소홀히 할 가능성마저 엿보인다.

대학원 입학 시험을 치루는데 한 초등학교 교사가 함께 응시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교대'나왔더니 배운 건 없고 머리에 똥만차서 머리 좀 채워보려고 왔다" 라고 했다. 초등교사가 되기 위한 교대의 교과과정들이 현장에서 가르칠 만한 뭔가를 배우기에는 부족함이 없어보이지만 교사를 빈 깡통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자기발전에 소홀히 해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다. 물론 개개인에 따라서 스스로 알아서 학습을 할 수는 있겠지만, 학문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사범대는 교대와는 좀 다르지만, 이 역시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에 한하여 일반대의 전공학과보다 수박겉핥기식의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고 본다.

내가 말하고픈 것은 그것이다. 물론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가르치면서 대단한 학문적인 내용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가르칠 내용만을 알고 있는 것은 가르치는 교사로서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윤리학을 가르친다 그러면 교과서에는 공자는 뭐라 했다, 플라톤은 뭐라 했다 정도의 기술만 되어있고, 물론 그것만 가르쳐도 무방하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내용들에 대한 심도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가르침에 깊이가 생길 것이라고 본다. 교사는 단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연구하고 끊임없는 공부를 해야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교대와 사범대의 과정이나 개편안의 내용에서 볼 때 이 점이 무시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서 일반대에서 깊이있는 배움을 한 이들에게 교사자격증 부여하기를 꺼려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20학점에서 33학점 이수해야 준다는 것은 사실상 일반대의 교직이수자들의 발을 묶어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대학에서 대처해서 33학점 이수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면 그저 말없이 따르겠다. 더 배우는 것은 문제삼을 바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조처들이 일반대생의 교직진출을 막는 행위라면 이를 묵과 할 수는 없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전공에 대해 깊이있게 배운 이들이기 때문이다. 단지 이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가르침에 대한 지식인데, 이는 교육대학원을 통해 공부할 수 있다. 좀더 나은 방향으로 개편안을 잡자면 일반대의 교직이수자들을 대상으로 '교육학'에 대한 좀더 다양한 과정을 보충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전공을 깊이있게 공부한 이들이 교육학도 더불어 익힌다면 실습이전에는 가장 바람직한 교사준비생이 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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