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철학에는 정답이 없다. 하지만 어떤 철학을 정답을 찾아 끊임없이 헤맨다. 가령 형이상학이 그러하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형이상학은 끊임없이 정답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정답이 찾아지지는 않는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형이상학은 시작되어 왔지만 아직까지도 여기에 정답이란 없다. 반면 어떤 철학은 애초 정답을 찾아 헤매지는 않는다. 형이상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철학의 분과가 그러한 듯 하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하다.

 철학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철학을 하지 않는 이 시대에서 철학이 살아남기 위해 뻗어나간 분야는 '해석'이다. 그리고 이것은 본래 철학의 성격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만 그 부분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 뿐이다.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의학, 과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여타 학문들이 철학으로부터 가치를 쳐 따로 독립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내용을 잃어버렸다. 이런 시대에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철학의 불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은 방법론적인 면에서 다른 학문들이 수행하는 바를 검토하고 질문하고 고민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개인, 가족, 사회, 국가, 세계 등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철학은 의미를 부여하고 질문을 던진다.

 철학이 방법론적으로 쓰이는 경우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형식과 외관을 가지고 들어가는 분과로 논리학, 기호논리학, 분석철학과 해석학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논리학과 기호논리학, 분석철학은 언어철학과도 연계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대상으로 말의 논리성이나 말 속의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분석하는 역할을 해준다. 해석학은 그야말로 해석이다.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부분의 의미에 대해 해석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해석은 정답이 없고 각자가 해석하기에 따라 모두 다르고 그것이 모두 정답이다.

 우리는 어떤 이가 쓴 책을 읽고 그 책에 담긴 내용들을 음미해보면서 나름대로 내용에 대해 해석을 하고 있다. 책을 읽는 과정은 모두 해석의 과정에 다름아니다. 모두가 같은 책을 읽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은 뒤에 드는 생각이나 느낌이 모두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독서라는 과정 속에서 책 속의 주인공이나 설정된 인물들을 통해 각자가 살아왔던 삶을 반추해보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이라는 것은 모두 다를 수 밖에 없기에 같은 내용을 읽고 있다하더라도 해석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만약 그 책이 소설이 아닌 어려운 독일식 관념론 철학책-예를 들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같은-이라면, 해석은 더욱 어렵다. 이런 경우에 발생하는 해석의 차는 앞의 소설의 예와는 다르다. 어려운 책에서는 문장 한줄한줄 읽어나가는 것조차 고역이다. 읽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읽을 뿐이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칸트나 헤겔의 의도를 '오해'할 소지가 생긴다. 저자의 실제 의도와 다르게 읽은 이에 의해서 '잘못된 해석' 즉 오역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해석학을 학문의 경지에 올려놓은 슐라이허마허는 '우리는 오해를 통해 이해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칸트나 헤겔을 오해했지만, 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혹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결국 칸트나 헤겔을 '이해'하게 된다. '오해'는 '이해'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물론 '오해'가 '오해'로서 그친다면 그것은 문제있지만, '이해'로 도달할 수 있다면 제대로 된 해석이 된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해석하는 과정은 그런면에서 정해진 길이 있는 편이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번역서 중에서 오역이 생기는 이유는, 번역자가 직역을 하지 않고 의역을 하기 때문이다. 직역을 하면 출판사에서 번역문을 읽고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수정할 수 있지만, 애초 번역자가 의역을 해버리면 출판사에서 읽어도 문장이 매끄럽기 때문에 수정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비록 매끄럽게 연결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문장은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역'된 것이다. 그래서 번역을 맡길 때 출판사에서는 '최대한 직역해주세요'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를 나의 경험과 연관지어봤다. 단 번역의 대상이 책이 아닌 곡이라는 점이 다르다. 나는 책을 번역해본적은 없다. 물론 중고등학교 시절 수능문제를 풀면서 독해를 해본적은 있지만 말이다. 책은 글로 쓰여져있고, 곡은 콩나물대가리로 그려져있다. 책은 눈으로 읽지만 곡은 귀로 듣는다. 나는 합주를 할 때 드럼악보를 따로 그리는 편이다. 왜냐하면 내가 곡을 외우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머리가 나쁘기 때문은 아니라고 본다- 연주중 지금 어느부분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악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곡을 귀로 듣고 오선지 위에 손으로 그려넣는다. 이 과정을 '곡을 딴다'라고 말한다. 곡을 따서 악보로 그린 후 실제 합주실에서 연주를 할 때 나는 최대한 직역을 한다. 곧 무슨 말인고 하니, 내 임의대로 연주하기 보다는 그 곡이 실제 연주된 그대로를 가급적 연주하려 한다는 것이다. 곡을 직역해 연주한 뒤에 나는 이제 의역을 한다. 내 스타일에 맞게 약간씩 변형을 가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나 뿐 아니라 다른 드러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문제다. 그들 또한 곡을 여러번 듣고 악보를 그리거나 아니면 머리 속에 외우고 있거나 하면서 실제 연주를 하고 그들의 연주 또한 직역과 의역을 섞고 있다.

 해석학은 우리의 일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단지 인기없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한 분과가 아닌 우리의 일상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고, 또한 우리가 시간시간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고 있는 작업이 해석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삶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우리모두는 해석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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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빌리지>를 봤다. 이 영화에 대해 알고 있던 사전지식은 영화 <식스센스>의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것 하나! 그 영화에서의 의미심장함, 반전 등을 기대하고 관람에 임했다. 그리고 결과는 그럭저럭 만족한다. 이 영화를 이미 본 다른 관객들의 평을 보면 '최악 중의 최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 영화에 어떤 극적인 반전이나 긴장감 등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이 영화는 영화 <도그빌>을 보는 듯 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빌리지>를 통해 <도그빌>을 떠올리다는 것은 좀 무리일 수도 있다. 도그빌에서는 영화촬영의 배경이나 장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공간에 하얀색으로 선을 그어 영역을 표시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과 만나며 이루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빌리지>의 공간적 영화배경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영화자체가 고립된 숲속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이상 공간확장을 한다면 이 영화는 전제를 무시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에 상당한 만족감을 느낀다.

 사방이 모두 숲으로 덮힌 코빙톤 우즈라는 마을에는 소수의 가족들이 각자 자녀를 낳고 자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만 그 어느것 하나 부족함을 느끼거나 심리적으로 불행하거나 하지는 않다. 그야말로 지상낙원인 것이다. 이 지상낙원은 1897년 산업화가 진행된 19세기 후반 사람들의 이기심과 정신의 황폐화, 사회부패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상처를 받은 가족들이 모여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하지만 이 숲을 벗어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단 한번도 숲의 경계를 넘어선 적이 없다. 이 괴물은 '빨갱이'는 아니지만 붉은 색을 좋아해서 마을에서는 절대 붉은 꽃을 기를 수 없고, 어떤 붉은 색도 용납되지 않는다. 마을의 대소사는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 결정한다.
 
  그러던 어느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노아를 치료하기 위해 루시우스는 인근 마을로 가서 치료약을 가져오겠다고 자청한다. 숲을 가로질러서 말이다. 하지만 원로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루시우스는 단독으로 경계선을 넘었다가 두려움에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후 마을에 괴물이 나타나 집집마다 문에 빨간색으로 선을 그어 경고를 하고, 가죽을 벗겨 죽인 산짐승들을 각집의 문에 걸어놓기까지한다. 사람들은 괴물이 마을을 해칠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한편 아이비와 루시우스가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자, 아이비를 짝사랑했던 노아는 루시우스를 칼로 찌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비는 인근마을로 가 루시우스를 살릴 약을 구해오겠다고 자청한다. 원로들중 한명인 아이비의 아버지는 괴물에 대한 소문은 모두 거짓이며 지금까지 원로들이 아무도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거짓말을 했음을 밝힌다. 하지만 아이비가 가는 숲길에서 괴물은 나타나고 아이비에 의해 구덩이에 떨어져 죽는다. 그러나 그 괴물은 노아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비는 그것이 노아라는 사실을 모른채 약을 구해 돌아오고, 결국 실제 거짓이었던 괴물의 존재는 사실이 되어버린다.
 
 왜 워커는 아이비가 다른 마을에서 약을 구해오는 것을 허락했는가? 이 마을에 정착한 1세대는 각자 산업사회와 문명의 폐해를 피해 이곳으로 왔지만, 결국 이곳에서도 노아에 의해 살인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저 평화롭기만 할줄 알았던 고립된 이 숲에서 살인이 일어나자 자신들이 세운 지상낙원이 더이상 '지상낙원'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루시우스를 치료할 약을 구해오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계속해서 이 마을이 지상낙원으로서 독립된 공간으로 유지되려면 말이다.

 <빌리지>는 단지 문명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닌듯 하다. 오히려 그에 반해 세워진 독립된 지상낙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고난끝에 이 마을은 계속해서 지상낙원으로서 존재하게 되지만, 지상낙원에서 조차도 문명사회의 폐해를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는 매우 단조롭고 지루하기까지하며 특별한 긴장감을 주지는 않지만 많은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의문에 관객 스스로가 대답하면서 깊은 사유로 나아가는 것이다. 좋은 영화는 화려하고 웃기고 감동적인 영화일수도 있지만, 학문에서의 '철학'과도 같이 새로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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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표현.이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4
빌헬름 딜타이 지음, 이한우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체험, 표현, 이해>는 해석학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의 해석학 일부를 떼어다 번역한 책이다. 단 일부이지만 딜타이의 해석학이 제대로 번역된 것이 이 책이 처음이다. 그동안 딜타이는 그가 사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다뤄지지 않은 잊혀진 철학자였다. <체험, 표현, 이해>의 번역이 딜타이의 철학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딜타이는 정신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철학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데에 온갖 정력을 쏟아부었다. 그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본따 자신의 철학을 '역사이성비판'이라 하였고, 칸트는 물론 헤겔까지도 포괄, 종합하는 철학을 만들어냈다. 칸트가 이성의 한계를 찾는 실험을 감행했고, 헤겔이 처음으로 '역사'개념을 도입해 절대정신의 구현을 꿈꿨다면, 딜타이는 헤겔의 역사를 통해 칸트와 같이 역사이성의 한계를 찾는 실험을 했다.

 해석학은 본래 성서를 해석하는데서부터 출발했고 이후 슐라이어마허를 거치면서 딜타이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해석학의 마지막 철학자 폴 리꾀르는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해석학을 일컬어 '인식론적 해석학'이라고 명명하기에 이른다. 물론 딜타이에서 리꾀르에 이르기까지는 베티와 하이데거, 가다머가 끼어있다.

 딜타이의 해석학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책세상문고의 문고판 시리즈라고는 하지만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다. 그는 앞서 언급했듯 스스로 칸트와 헤겔을 종합했다고 하기때문에 칸트와 헤겔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들이 그대로 딜타이에게 전해진다. 독일 관념철학은 오로지 머리로만 하는 철학이기때문에 언어와 표현이 매우 어렵고, 문단 가운데서 핵심을 찾기도 힘들다. 이 책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에서 혼자 고민하면서 정독해서 읽어야할 이론서다. 그리고 해석학에 대한 아무런 배경없이 읽는다면 절대 이해못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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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년이나 된 영화이지만 정말 감동적인 영화다. 영화내용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알고 있을 것이다. 텔레비젼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등에서 각색해서 수없이 우려먹었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리처드 기어가 줄리아로버츠가 사는 허름한 할리우드가에 리무진을 몰고와 프로포즈하는 장면-은 유명하기 때문이다.

 현대판 신데렐라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영화는 대단한 부자이자 엘리트이지만 인간적인 면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 냉정한 사업가 에드워드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창녀 비비안 두 사람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에드워드는 비비안을 돈으로 사서 일주일간 함께 생활하지만 그 일주일이 에드워드를 바꾸어 놓았다. 비비안과 함께 하며 인간적인 면을 배우고 파산직전의 회사를 사서 조각내 되파는 자신의 일이 비생산적임을 깨닫고 마지막 계약순간에 그는 오히려 회사를 지원하는 후원자가 되기로 한다. 그는 돈으로 비비안을 샀지만 비비안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줄리아로버츠의 창녀차림의 모습과 에드워드를 만난 이후의 우아한 고급스러운 모습이 대비되면서 어쩜 두 가지 모습을 저렇게 잘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다. 줄리아로버츠의 연기는 대단해서 그녀가 오페라를 처음 구경하며 감동해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에서는 그녀가 보고있는 오페라를 보지 못하는 나도 그녀를 따라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

 이 세상에 신데렐라는 있을까? 난 아직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가능할 법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환경속에서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좋은 영화에 이런 발언을 함으로써 감동을 반감시키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영화를 본 여자들 누구나가 다 신데렐라의 꿈을 품게 할 수는 없는 법.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하류인생을 사는 남자를 구해주는 사람좋고 이쁘고 돈많은 여자의 이야기는 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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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32
장 자크 루소 지음, 박호성 옮김 / 책세상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볼테르에 대한 관심이 다른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루소와 로크, 홉스에 대한 관심으로 <사회계약론>을 접하게 되었고, 그중 로크와 홉스의 다음 세대를 살아가며 계몽주의의 전성기를 보낸 루소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장 자크 루소, 그는 사실 18세기 계몽주의자 중에서 사상계의 이단아로 불리운다. 시계공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다. 그래서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고독과 방랑, 소외 속에서 그는 바랑 부인을 만났고 그녀에게서 자신의 지적인 성장의 단초를 제공받았다. 그의 지적 토대가 모두 그녀에게서 나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후에 루소는 <학예론>을 써 명성을 얻었꼬,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계약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고백록> 등의 저서를 냈다. 그의 사상이라는 것이 당시의 계몽주의자들과는 서로 대치되는 면이 많아서 온갖 비난과 핍박을 받아 외로운 지식인 생활을 했다.

 이번에 읽은 <에밀>은 사실 루소의 <에밀>의 완전번역본이 아니다. 완역본은 김중현씨가 번역하고 한실사에서 낸 <에밀>이 따로 있다. 기왕에 읽을 바에야 완역본을 읽는 것이 좋겠지만, 워밍업으로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일부 번역본을 봐도 괜찮다 싶었다.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박호성씨가 해제한 이 책은 루소의 <에밀>의 1부만을 번역한 것이다. 그 역시 책에서 이 책을 읽고 완역본을 읽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자신의 번역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난 이 축약본을 읽고 사실 다 읽고픈 생각이 간절히 든 것은 아니나 읽어야한다는 의무감이 더 든 것은 사실이니 그의 시도가 내게있어선 그다지 실패로 단정하지는 않아도 될 듯 하다.

  <에밀>은 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나, 혹은 교직에 몸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나, 정치학을 하는 자들에게나, 철학을 하는자들에게나 모두 읽어야할 필독서다. 루소의 <에밀>은 교육소설이라고 알려져있지만 또한 정치소설이기도 하다. 그의 사회계약설에 대한 기초적인 부문, 인간과 정치, 문명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이곳에 숨어들어있기 때문이다.

 책세상문고판은 <에밀>의 1부만을 담고 있고, 두껍지 않고 책크기도 작아서 그냥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면서 읽어도 그다지 오래걸리지 않을 듯 싶다. 두꺼운 <에밀>을 읽기가 겁이 난다면 우선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다면 완역본을 손에 쥐기가 쉬워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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