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들의 대한민국 - 한국 사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 빠지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품절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는걸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 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김구, 『백범일지』)-4쪽

죽어가는 것들의 아픔을 느끼되, 명랑함으로 다양성을 만드는 것.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은 지구 위에 깃든 거대한 공동체라는 것을 느끼고 이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것. 그것을 나는 생태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7쪽

한국에서 ‘상식적인 수준의 좌파’라고 하면 정말 한 줌밖에 안되는데, 정말로 좌파 인사 중에는 장관은커녕 행정부처의 국장 자리 정도에 가본 사람도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좌파는 학계와 노동계, 그리고 시민단체 일부에 움츠려 살아가고, 기타 사회활동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힘들게 지키면서 생활인으로 살아간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니 대체로 표현하면 한국은 극우파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스스로를 ‘합리적 보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국제 기준으로 보자면 극우파에 가깝고, 일부 신문이 좌파라고 부르는 정치인들은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들여다보면 중도우파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정치 지형을 정확하게 보고 싶다면 오른쪽으로 한 칸씩 옮기면 된다. 그러면 제대로 된 이름과 지평에 대한 판단이 나올 것이다. -17쪽

경제이성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해도 또 다른 도덕이나 가치에 대한 문제들이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한국 사회는 일종의 ‘경제종교’가 움직이는 단계에서의 악몽이다. (중략) 많은 사람이 자기 동네 집값이나 땅값이 오르면 자기가 잘살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좋게 이야기하면 마음씨가 너무 좋은 것이고, 정확히 말하면 비경제적 행위에 의한 반계급적 현상이다.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배반하는 현상, 이 과정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일상에서 그렇게까지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좋았을 사람들이 더 고통받는 일이 벌어진다. (중략)
비정규직이 비정규직을 강화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비정규직이라는 제도에 대한 경제이성보다 특정 정당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중략) 이 종교가 외치는 것은 최선을 다하라는 것과 당분간 다들 죽었다고 각오 단단히 하라는 것, 두 가지 교리다. 부차적으로 한나라당 후보에게 투표하면 "경제가 살아난다"라는 부활의 예언이 하나있다. -69-71쪽

전문가들은 이런 식의 사업(청계천)을 수도만 틀면 나온다고 해서 ‘수도꼭지’라 부르기도 하고, 임시로 만들어놓은 물길에 물고기를 풀어놓는다고 해서 ‘어항’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프로젝트에 ‘생태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이런 식의 도시 조경을 ‘생태복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서울 시민들과 이를 칭송했던 전문가들, 그리고 예술가들 외에는 없다. 비만 오면 도시의 오염 물질이 한꺼번에 청계천을 흐르고, 당연히 생명체가 살 수 없는 BOD의 피크치가 발생한다. 그러면 죽은 물고기를 걷어내고 또다시 물고기를 방류하는데, 이런 숨바꼭질은 청계천이 제대로 복원되는 날까지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것이 ‘자연’이라고 가르칠 것인가? 지금의 그 어린이들이 언젠가 어른이 되어 물질순환과정과 물의 흐름을 알게 되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지금 이 순간에 배운 것이 아주 이상한 것이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80-81쪽

근본을 따져보자면 한국인들은 모두 전형적인 메갈로마니아들이다. 큰 것을 사랑하며 새로 생긴 것을 사랑하고, 인공적인 것을 사랑한다. 이러한 가치관이 동반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패권주의’성향이다. 힘없는 것은 죽어도 그만이고, 나보다 약한 것은 짓밟아도 그만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죽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것. 이것이 미학적 가치의 위치에 있다. -143쪽

다원성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누구도 돈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니면 권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지 않은 것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죽여도 된다는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을 문화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에서 구현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힘이 없어도, 땅이 없어도,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생태 미학의 다원성이다.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핍박받고, 멋지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건설 미학은 못생긴 것들, 그리고 말 못하는 것들, 혹은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는 도시의 자투리땅을 "놀고 있다"라는 이유로 밀어버리려고 한다. 여기에 반하는 것이 다원성의 원치이 아니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다원성이란 이런 것이다. -177-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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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절판


권력이 일단 국민의 손에 들어왔을 때 다수의 지배가 허용이 되고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는 실제적인 이유는 그들이 옳을 가능성이 가장 크거나 그것이 소수자들에게 가장 공정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가장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사건건 다수가 지배하고 있는 정부는 정의(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의 정의일지라도)에 입각한 정부라고 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다수가 아니라 양심인 그런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 그 안에서 다수는 오직 편의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 문제들만을 결정하는 그런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 시민이 한 순간만이라도, 혹은 아주 적은 정도라도 자신의 양심을 입법자에게 맡겨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 (계속)-12-13쪽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단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인 단체는 양심을 가진 단체이다.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계속)-13쪽

법에 대한 지나친 존경심이 빚는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결과를 당신은 일단의 병사들에게서 볼 수 있다. 놀라울 만큼 질서정연한 대오를 이루며 언덕과 골짜기를 넘어 싸움터로 행군해 가는 대령, 대위, 하사, 사병, 탄약운반 소년병 등의 행렬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뜻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식과 양심에도 어긋난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행군은 무척 힘들고 가슴은 마구 뛰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저주받을 일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원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무엇인가? 정말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권력을 잡은 어떤 파렴치한의 명령을 따르는, 걸어다니는 작은 요새나 탄약고인가? -13-14쪽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기계로서, 자신의 육신을 바쳐 국가를 섬기고 있다. 상비군, 예비군, 간수, 경찰관, 민병대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판단력이나 도덕 감각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나무나 흙이나 돌과 같은 위치에 놓아버린다. 그래서 나무로 사람을 깎아 만들더라도 그들이 하는 일을 해내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계속)-14-15쪽

그런 사람들은 짚으로 만든 사람이나 흙덩이 이상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들의 값어치는 말이나 개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이런 사람들이 보통은 선량한 시민으로 대접받고 있다. 그 외에 대다수의 입법자, 정치가, 변호사, 목사 그리고 관리 등이 주로 자신의 머리를 가지고 국가에 봉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도덕적인 변별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뿐만 아니라 악마도 함께 섬기게 된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참다운 의미의 영웅, 애국자, 순교자, 개혁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들의 양심을 가지고 이바지한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국가에 저항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따라서 국가로부터 흔히 적으로 취급을 받는다. 현명한 사람은 오직 사람으로서만 쓰이기를 바랄 뿐이고, 진흙이 되어 바람 구멍을 막는 데 쓰이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죽어 흙이 된 다음에는 그런 역할을 맡으려 할지도 모르겠지만. -15쪽

같은 인간을 위해 자시 자신을 모두 내주는 사람은 쓸모없는 이기주의자로 보이지만 자기 자신의 일부만을 주는 사람은 자선가나 박애주의자라고 불린다. -16쪽

우리는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대중은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전이 느린 진짜 이유는 그 소수마저도 다수의 대중보다 실질적으로 더 현명하거나 더 훌륭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처럼 선하게 되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단 몇 사람이라도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이 어디엔가 있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전체를 발효시킬 효모이기 때문이다. -20쪽

투표는 모두 일종의 도박이다. 장기나 주사위놀이와 같다. 단지 약간의 도덕적 색채를 띠었을 뿐이다. 도덕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옳으냐 그르냐 노름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내기가 뒤따른다. 그러나 투표자의 인격을 거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표를 던지겠지만 옳은 쪽이 승리를 해야 한다며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다. 나는 그 문제를 다수에게 맡기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임은 편의의 책임 정도를 결코 넘지 못한다.
정의 편에 투표하는 것도 정의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당신의 의사를 사람들에게 가볍게 표시하는 것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정의를 운수에 맡기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정의가 다수의 힘을 통해 실현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계속)-21-22쪽

대중의 행동에는 덕이란 게 별로 없다. 결국에 가서 다수가 노예제도의 폐지에 표를 던지게 될 때는 그들이 노예제도에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이거나 또는 투표에 의해 폐지될 만한 노예제도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만이 그때 가서 남아 있는 유일한 노예들일 것이다. 자신의 표를 가지고 스스로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만이 그 표를 통하여 노예제도의 폐지를 앞당길 수 있다. -22쪽

한 인간의 의무가 어떤 악을(비록 그것이 엄청난 악일지라도) 근절하는 데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이라고는 물론 할 수 없다. 그는 그밖에도 다른 할 일들이 있는 것이며 그것들을 추구할 온당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그 악과 관계를 끊을 의무가 있으며, 비록 더 이상 그 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그 악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없도록 할 의무가 있다. 내가 다른 사업이나 계획에 전념하고 있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앉아 그를 괴롭히면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먼저 그 사람의 어깨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말이다. -24쪽

원칙에 따른 행동, 즉 정의를 알고 실천하는 것은 사물을 변화시키고 관계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며, 과거에 있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국가와 교회를 갈라놓으며 가족을 갈라놓는다. 심지어 그것은 한 개인 조차도 갈라놓는다. 즉 한 개인 속에 있는 ‘악마적인 요소’와 ‘신적인 요소’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계속)-26-27쪽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지금과 같은 정부 밑에서는 다수를 설득시켜 법을 개정시킬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만약 저항한다면 치료가 병보다 더 나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치료가 병보다 더 나쁜 것은 정부의 잘못이다. 정부가 치료를 더 나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왜 정부는 좀더 앞을 내다보고 개혁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가? 왜 정부는 현명한 소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가? 왜 정부는 상처도 입기도 전에 야단법석을 떨며 막으려 드는가? 왜 정부는 시민들로 하여금 방심하지 않고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며, 정부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시민들이 잘하도록 격려하지 않는가? 왜 정부는 항상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며, 코페르니쿠스와 루터를 파문하고, 조지 워싱턴과 프랭클린을 ‘반역자’라 부르는가? -27쪽

만약 불의가 정부라는 기계의 필수불가결한 마찰의 일부분이라면 그냥 내버려두라, 그냥 내버려두라. 모르긴 하지만 그 기계는 매끄럽게 닳아서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닳아 없어질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이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라. 당신의 생명으로 하여금 그 기계를 멈추는 역마찰이 되도록 하라. -28쪽

나는 이것만은 알고 있다. 즉, 이 매사추세츠 주 안에서 천 사람이, 아니 백 사람이, 아니 내가 이름을 댈 수 있는 열 사람(열 사람의 정직한 사람)이, 아니 단 한 명의 정직한 사람이라도 노예 소유하기를 그만두고 실지로 노예제도의 방조자의 입장에서 물러나며 그 때문에 형무소에 갇힌다면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시작이 아무리 작은 듯이 보여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번 행해진 옳은 일은 영원히 행해지기 때문이다. -31쪽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역시 감옥이다. -32쪽

노예의 나라에서 자유인이 명예롭게 기거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이 감옥인 것이다. 감옥 안에서 그들의 영향력이 상실되고 그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정부를 괴롭히지 못하며 그들이 그곳의 담장 안에서는 더 이상 정부를 괴롭히지 못하며 그들이 그곳의 담장 안에서는 더 이상 정부의 적이 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진리가 오류보다 얼마나 더 강한가를 모르는 것이요, 감옥 안에서 불의를 직접 겪어본 사람이 얼마나 더 큰 설득력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가를 모르는 것이다.
당신의 온 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지라.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그때는 이미 소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33쪽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가난하고 천하다면 부끄러운 일이요,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하고 귀하면 부끄러운 일이다."(공자)-37쪽

정부는 한 인간의 지성이나 양심을 상대하려는 의도는 결코 보이지 않고 오직 그의 육체, 그의 감각만을 상대하려고 한다. 정부는 뛰어난 지능이나 정직성으로 무장하지 않고 강력한 물리적 힘으로 무장하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보도록 하자. -40-41쪽

정부는 피통치자의 허락과 동의를 받아야 한다. 정부는 내가 허용해 준 부분 이외에는 나의 신체나 재산에 대해서 순수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입헌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 진보해 온 것은 개인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향해 온 진보이다. 중국의 철인조차도 개인을 제국의 근본으로 볼 만큼 현명했다. -57쪽

국가가 개인을 보다 커다란 독립된 힘으로 보고 국가의 권력과 권위는 이러한 개인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이에 알맞은 대접을 개인에게 해줄 때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개화된 국가는 나올 수 없다.
나는 마침내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고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할 수 있는 국가를 상상하는 즐거움을 가져본다. 그런 국가는,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초연하며 국가에 대해 참견하지도 않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더라도 이웃과 동포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한 그들이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열매를 맺고 또 이 열매가 익는 대로 떨어지게 허락해 주는 국가는, 그보다 더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국가, 내가 상상만 했지 결코 보지는 못한 그런 국가가 탄생하도록 길을 열어줄 것이다. -57-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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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첫 십년의 한국 - 우리시대 희망을 찾는 7인의 발언록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2
리영희 외 지음, 박상환 엮음 / 철수와영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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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국민이라는 말을 쓰면 안됩니다. 민주주의적 시민이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국민이라는 것은 국가라는 상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봉사하는 존재로서의 인간들을 말할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후 오늘날까지도 정치인들뿐만 아니고 심지어 결혼식장에서 주례사를 하면서도 ‘국민 여러분’ 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존재의 구성원인 스스로를 시민이라고 지칭하는 대신 국민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벌써 소외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돈, 권력, 힘을 상징하는 국가라는 상위의 가치와 존재를 인정하고 그 밑에 존재하는 개개인들을 국민이라는 정치용어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를 국민이라고 부를 때 이를 소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속)(리영희)-15-16쪽

우리는 시민이어야 합니다. 시민이란 어떤 권위나 권력도 어느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평등 사회인 시민 사회 속에 존재하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방 후 50년 동안 권위주의적인 지배자로서의 국가권력은 극우반공이라는 광적인 사상 통제수단을 가지고, 우리의 시민으로서의 삶을 부정하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해왔습니다. 이런 지배에 항거하고 투쟁하며 죽어간 선배들은 시민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위해 싸웠기에, 소외를 극복하며 삶에 귀중한 보람을 느낀 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독자성을 가지고 자기 결정적이며 자유로워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으로서 시민의 삶은 자유로운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고 억압하고 탄압하는 정의롭지 않은 것에 대해 항거하며 싸울 때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 저항 없이 ‘편안한’ 사회가 이루어진다면 우리에게 소망스런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 의미랄까 뭐 이런 것이 박탈되거나 퇴색되는 사회라고 볼 수 있지요. (리영희)-16쪽

유엔인권조약에는 A협약과 B협약이 있습니다. A협약은 사회권의 문제라 부르는 즉, 사회 실업으로부터의 자유, 최소한의 생존권, 사회적 또는 경제적 민주주의와 관련된 협약입니다. B협약은 영장 없이 구속당하지 않을 자유, 사상, 표현, 결사, 집회 등의 자유입니다. 이 중 B협약의 자유들이 보장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입니다. (손호철)-56쪽

황도유학의 기본은 원시유학의 특정 요소를 끄집어내어, 천황은 소위 자기 수하의 백성들을 한결 같이 사랑한다는 황도정신에 대한 구호로 변모시켰다는 것입니다. 일부 개량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일본은 1등 국민이고 우리는 2등 국민이라 생각하고 만주나 몽골은 3등 국민이라 생각하는 그런 민족의 등급을 매기는 것에서도 황도유학이 이용됩니다.
가령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지원제에서 징병제로 전환될 때, 일부 개량주의자와 황도유학자들이 이제야 독립이 되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천황을 위해서 군대에 가서 희생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고, 국민된 의무를 다해야 한다."라고 생각한 것이 그들의 논리였습니다. 이런 부정적 맥락에서 실천적 요소에 대하여 황도유학의 논리가 이용된 것입니다. (이이화)-129쪽

성찰이성에 눈뜬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 좋은 점을 공유하려고 노력합니다. 반면에 성찰이성에 눈뜨지 못한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누가 더 우월한지를 견줍니다. 서로 비교하여 내가 우월하다는 점만 확인하려고 합니다. 똘레랑스가 성찰이성을 요구하는 까닭이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다름을 용인하라는 정언명령으로서의 똘레랑스는 다름을 용인하지 않고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고 배제하는 앵똘레랑스에 ‘단호히’ 반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모든 다름을 용인하는 똘레랑스이지만 용인할 수 없고 용인해선 안되는 것은 앵똘레랑스입니다. 인류 역사상 똘레랑스 사상이 먼저 생긴 게 아닙니다. 똘레랑스사상은 인간의 앵똘레랑스 행위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앵똘레랑스의 인간 행위가 먼저 있었고 그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 태어난 게 똘레랑스사상인 것입니다. (홍세화)-162쪽

사회구성원들에게 합리적 이성이 결핍되고 긍정적 가치가 공유되지 못할 때, ‘다름’의 관계는 서로 부정하는 관계로만 설정됩니다. 공익과 진실이라는 목표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이 합리적 논거를 통해 경쟁하는 대신에 서로가 서로를 극복해야 하는 부정의 관계로만 설정되는 것입니다. 서로 용인하는 경쟁 대상은 설 자리가 없고 내 편이 아닌 모든 사람이 극복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소수자는 강자, 다수 집단에게 아주 쉬운 극복대상이 되고 인권 침해의 희생자로 전락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홍세화)-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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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오프 더 레코드 - 여자들끼리만 공유하는 연애의 모든 것
박진진 지음 / 애플북스 / 2008년 6월
절판


사랑이 식는 건 한순간이다. 실제로는 서서히 조금씩 식어가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사자에게는 한순간이다. 더이상 떨림이 없는 손, 다시 하이힐을 신기 시작한 나, 어느 날은 식어가는 사랑이 너무 서글프게 느껴져 그의 팔을 가만히 베고 누워 소리 없이 울기도 했었다. 전에는 보였지만 굳이 인정하지 않았던 단점, 그리고 새로 보이기 시작한 단점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었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의 단점이 아니라 그걸 보는 내 눈이란 것을 알았지만 사랑이 식어버린 눈으로는 더 이상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줄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23쪽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포기한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어느 날 아깝게 느껴지는 건 순식간이다. 사랑 때문에 못한 것들, 심지어는 내 사랑에서 충족되지 못한 부분들까지 못마땅해진다.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도, 모든 걸 다 걸고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어디선가 그런 사랑이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사랑은 변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단점이 있다. 우린 그저 잠깐 그걸 눈감아줄 뿐이다. 이렇게나 얄팍하고 미덥지 못하고 신념도 잘 뒤바뀌는 인간들이 대체 사랑이란 걸 왜 할까? 그건 사랑이 식는 과정의 슬픔보다 콩깍지가 쓰인 사랑의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일 것이다. -24쪽

사람들은 대부분 첫사랑을 좋게 기억한다. 뭔가 잘 모르고 순수했던 시절이라서 서툴렀지만 그래도 그때는 ‘진심’이라는게 존재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진심은 서로가 다시 만나면 언제든 부활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첫사랑은 원래 이뤄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만난다고해서 그 이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참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되지도 않는다. 지난날의 좋았던 기억만 가지고 다시 만나보지만, 그건 좋았던 일만 있어서가 아니라 편리하게도 우리의 뇌가 그것만을 취사선택해서 기억했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은 그냥 지나가게 둬야 한다. 세월의 흔적을 다 버릴 수 있는 건 노래 가사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 흔적들을 다 떠안은 채 다시 예전처럼 사랑할 수는 없다. 세월만 흐른 게 아니라 우리의 일부분도 그 세월 안에 흘러가버렸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되도록 만나지 않는 게 좋다. 그냥 좋았던 기억, 그걸로 충분하다. -50-51쪽

세상에서 가장 ‘등신쪼다’같은 일을 꼽으라면 헤어진 남자에게 친구로라도 만나고 싶다며 매달리는 것이다. 그렇게 못잊겠걸랑 차라리 눈물 콧물 다 짜가면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애걸복걸해보고, 그래도 안 된다면 깨끗하게 잊는 게 맞다. 괜히 자존심 한 조각은 남겨두고 싶어서 친구 어쩌고 하는 어설픈 가면을 써봐야 상대는 이미 어떤 마음으로 친구 운운하는지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못 이기는 척 친구로 받아주는 놈은 십중팔구 진짜 나쁜 남자다. 적어도 자기가 아니라면 상대방의 미련 정도는 싹을 잘라줘야 하는데 이건 그 싹에 물을 주고 앉았으니 나쁜 남자란 말도 아깝다. -104-105쪽

섹스는 분위기다. 왜 여자들이 촛불도 켜놓고 침대에 꽃잎도 뿌리길 바라겠는가. 또 제아무리 평소에는 깡소주를 즐기나 하더라도 그날만큼은 맛도 모르는 와인을 고집하겠는가. 그것은 섹스할 때 뭔가 그럴듯하고도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이다. 신음이라고 해서 어디서 산모가 애 낳나 싶을 정도의 신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귓전에 살짝살짝 흘리듯 내는 신음은 아마 섹스 테크닉 못지않게 서로에게 만족감을 선사할 것이다. -110쪽

우리는 바람을 피우기 전에 딱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건 현재 사랑하는 사람이 이 일을 알게 될 경우 받게 될 마음의 상처이다. 아마도 바람난 애인 때문에 마음고생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다. 세상에 배신만큼 사람을 아프게 하는 건 없다. 믿었던 사람에게 찍히는 발등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간혹 자기를 배신한 사람이 작정하고 자신을 이용했다는 사실보다 그들의 바람 상대가 믿었던 친구나 애인이라는 점에 더 오래 마음 아파한다. -196쪽

연애가 좋은 건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을 때 얼마든지 선택의 기회가 있어서이다. 지금의 사랑보다 훨씬 더좋은 사랑이 찾아왔다면 미련 없이 떠나도 좋다. 그러나 상대방이 마음 아파할까 봐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양다리를 걸친다면 그건 정말로 이기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기만 하면 모든 게 다 괜찮은가?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결속된 남녀의 경우 새로운 사랑을 선택하려면 너무나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하지만 연애의 경우는 다르다. 물론 상대방은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받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을 사랑하는 당신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을 위한답시고 이 사람도 사랑하고 저 사람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둘 중 어느 하나도 진지하게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196쪽

시간이 흐르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당연히 단점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이 단점을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아 아니다. 견디고 있다면 이미 그건 사랑이 아니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단점이라면 내가 조금씩 노력해서 그가 고쳐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고, 만약 조금씩 양보하면 되는 단점이라면 그 단점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 이 단점 때문에 그 단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방법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다. 바람의 상대 또한 단점을 갖고 있다. 단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완벽하게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197-198쪽

여자들은 사랑을 하면 자신의 전부를 거는 경향이 있다. 생활 자체에 사랑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남자들은 처음에는 여자와 같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가 여자보다는 훨씬 빠르다. (중략)
어쩌면 남자들이 우리처럼 사랑에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는 건 바로 이런 차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자들과 달리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사랑만을 강요하는 건 다 포기하란 소리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남자에게 너무 많은 집중도를 요구하는 것은 내가 1순위일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연애 초창기에나 그렇다. 시간이 지나고 여자친구가 일상으로 자리 잡으면 그는 늘 해왔던 생활로 다시 복귀하려고 한다. 여자친구가 있어도 늦게까지 회사 일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며 컴퓨터 게임을 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이런 일들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도대체 당신에게 어떤 존재이냐며 따진다. 그러면 남자들은 여자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지나치게 보챈다고 생각한다. (중략)-216-218쪽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자친구가 싫어져서 혹은 당신의 존재가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를 제쳐두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왔던 일을 하는 것이며, 단지 달라진 것은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뿐이다. -219쪽

사랑을 계산하는 시기는 이 사람과 사귈지 말지를 고민하는, 연애를 시작하기 바로 전이어야 한다. 이미 연애를 시작했다면 그런 계산은 접어야 한다. 사랑하는 도중에 계산하기 시작하면 누구나 자기가 아깝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상대방을 충분하게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은 천년만년 지속되는 게 아니다. 언젠가 끝난다.
그렇게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그 시간에 후회 없을 만큼 충분히 사랑해야 한다. 오래전에 끝났던 사랑이 아쉬워 다시 만난다고 해서 예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 같은 건 없다. 그때의 그와 나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다.
아무리 변하지 않았더라도 서로 분명 달라져있다. 다시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사랑을 하는 것이지, 과거의 사랑을 이어가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 헤어짐을 고민하고 있다면 제일 먼저 충분히 사랑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 그와 하고 싶은 일이 더 많다면, 그와 함께할 행복한 일들이 남아있다면 다 해보고 헤어져도 늦지 않다. -223쪽

첫사랑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건 단지 그게 처음이어서가 아니다. 뭘 잘 몰라서 충분히 사랑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자꾸만 생각나고 아쉬운 것이다. 생각보다 첫사랑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어떤 사랑을 해도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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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읽는 CEO - 명화에서 배우는 창조의 조건 읽는 CEO 2
이명옥 지음 / 21세기북스 / 2008년 3월
품절


나는 이전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한다. (르네 마그리트)-13쪽

경이는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다. 아니, 경이로운 것은 어떤 것도 아름답다. 사실은 경이로운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다. (앙드레 부르통)-21쪽

우리의 눈은 환상과 마찬가지로 바로 눈앞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것보다 막연하고 아련하게 보이는 것에 더 매혹되게 마련이다. (카스카 다비드 프리드리히)-81쪽

눈은 천문학의 주인이며, 인간이 창조하는 예술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상의 감각 기관이다. 눈은 자연이라는 완전무결한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게 만드는 필수적인 도구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97쪽

화가들이여, 그대는 자연이 창조한 모든 종류의 형태를 모방할 수 있는 만능인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연의 다양한 형태들을 관찰하고 머릿속에 각인시켜두지 않으면 만능인이 될 수 없다. 화가는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자연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해답을 예술의 언어로 표현하는 통역사가 되어야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11쪽

나는 고집스럽게 작업을 계속한다네. 나는 길을 개척하면서 죽을 결심을 했네.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약속의 땅을 본다네. (폴 세잔)-125쪽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왜 그것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전혀 흥미롭지 않다. 그럴 바엔 다른 것을 하는 것이 훨씬 낫다.(파블로 피카소)-141쪽

정확성이 진실은 아니다.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진정한 화가에게 장미 한 송이를 그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 장미를 제대로 그리려면 지금껏 그렸던 모든 장미를 잊어야 하기 때문이다. (앙리 마티스)-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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