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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계 ㅣ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평점 :
강유원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다. 요새는 읽지 않고 있는, 하지만 몇년전에 빠져들었던 <한겨레21>의 뒷편에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란 꼭지에서 강유원을 처음 접한 듯 하다. 이 사람의 사유가 참 맘에 든다, 라는 느낌으로 그 이름을 기억했고, 여러 곳에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철학자와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같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한 회사에서 웹에디터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들었다. 당시 <씨네21>에도 '철학자'가 아닌 '회사원'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그가 지금 회사를 그만뒀는지 어쩐지는 잘 모른다. 현재 출신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맡은 것으로 알고 있고, 회사를 겸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그가 어디에 적을 두고 있건, 그는 분명코 일반 강단 철학자들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철학을 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직업이 되었을 때와 취미로 남았을 때의 그것은 분명히 다르다. 좋아하는 일을 취미로 할 땐 부담 없이 즐기면 되지만, 생계의 수단으로서 할 땐 심한 압박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스트레스와 압박에 못이겨 좋아하는 것이 '싫어하는 것' 되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나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학에 적용시켜도 좋을지는 모르겠다. '철학자'라는 직업(?)은 사실상 직업이라기엔 너무나 추상적이고 막연하며 별다른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기껏 '교수'라는 직함 정도가 '철학자'와 연계지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강유원은 누가 돈을 주지 않아도 꾸준히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철학을 해왔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그가 철학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결국 혼자만의 그 작업들은, 강단철학과 별개로 그가 철학하는 또다른 통로이고 방법이었으며, 오랜 사유를 통해 뽑아낸 흔적들은 책이란 매체를 통해 결과물로 탄생했다. <주제> <몸으로 하는 공부> <장미의 이름 읽기> <서양문명의 기반> <책> 등의 저서들은 그의 철학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따로'에서 '같이'로 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혼자만의 철학적 작업은 처음에 '따로'였을지 모르지만 하나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는 점에서 이제 책을 접하는 이들 모두가 '같이'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그는 <책과 세계>를 쓴 목적에 대해서 밝히기를, "하나는 고전에 대한 자극을 주면서 그것들로 직접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고, 다른 하나는 그 책들을 읽기 전에 미리 그 책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책은 고전읽기 대한 책이다.
책 좀 읽는다 싶은 사람들의 독서취향은, 보통 지금 당장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 서적들을 중심으로 읽는 것이 하나요, 아주 오래된 쾌쾌묵은 먼지를 쓸어내며 끄집어낸 듯 익숙치 않은 문장들과 싸워가며 어렵게 읽어내는 것이 또 하나다. 강유원은 후자의 책 읽기에 대해 말한다. 이 얇은 책 한권으로 그는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몇몇 두꺼운 고전을 간략하게 소개해주고 있고, 먼저 책을 읽은 그가 풀어내는 고전의 내용과 한발 더 나아간 사색의 장은 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고전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 생각한다. 플라톤의 <국가론>이며, <갈가메시 서사시>며, <갈리아 전기>, <논어> 그 어느 하나 쉽게 손댈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니다. 본 책의 책장을 바로 넘기기는 두렵고, 하지만 한번 읽어보고는 싶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은 요약본으로서, 혹은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서 가볍게 접할 수 있겠다.
우리는 책을 왜 읽는가?
우리는 고전을 왜 읽는가?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런 말을 한다. 20세기는 누군가의 말처럼 '극단의 시기'였고, 그것은 "<파우스트>의 한 구절처럼 '모든 이론은 잿빛'이어서 이론은 현실에 맞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이론적 파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론적 파악의 출발점인 읽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극단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고전이 보여주는 자아들을 자기 몸에 넣어보고, 다시 빠져나와보고, 다시 또 다른 것을 넣어보고, 또다시 빠져나와본 다음에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자아가 과연 진정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텍스트를 손에 잡지 말아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어려운 고전을 읽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자아를 얻기 위해 책을 읽지만, 그것이 불확실한 것이라면 우리는 책을 읽을 이유를 상실한다. 하나의 행동이 하나의 결과를 반드시 도출하지 않는다면, 굳이 힘든 이 길을 택할 자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은 치열하게 책을 읽고, 고전을 읽는다. 그들은 왜 책을 읽는가. 무엇을 위해 책을 읽는가. 책을 읽음으로서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지 않으면 '확실히'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없는 반면(아 이것도 단언하기 어렵지만), 책을 읽으면 '어쩌면'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가능성, 그것을 위해 우리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강유원의 말처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고전을 읽는다. 적어도 나를 찾기 위한 길을 탐색해 볼 순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