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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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월한 선택이었다. 2005년의 12월, 인터넷 서점의 할인행사 물품 중 고를만한게 없을까 뒤지던 중에 <공중그네> <인터폴> 셋트를 발견. 아니 두 권을 한권 값에 준다네. 이런 할인행사 때는 왕창 많이 지를 염려도 있지만, 한 두개쯤은 질러주는 센스도 있어야.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시작으로, 보통 씨의 책을 다 찾아 읽다가, 연애소설로 나의 관심이 이동, 연애소설에서 이제 일본소설로 관심이 이동 중이다. 그리하여 최근 일본의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하나씩 골라 맛보고 있는 중. <공중그네> 역시 그 와중에 나에게 발탁(?)된 놈이다.  

  오쿠다 히데오라는 작가.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 기획자, 잡지편집자, 카피라이터, 구성작가 등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비슷한 관련 분야의 다양한 직업 변천사 때문인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소설가로 데뷔한 작가들에게 묻어나오는 정통 소설의 구도를 과감히 깨버린다. 아카데미를 통해 영화를 제대로 배운 감독과 생판 아무 것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기로 영화를 배운 감독과의 차이라고 할까. 지나치게 도식화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에서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유쾌한 한편의 코믹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 하지만 코믹영화라고 해서 그냥 웃고 떠들고 즐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있는 하나의 교훈.  

  <공중그네> 는 총 5개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있다.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과 사건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성방식은 같다. 각각의 단편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라부 의사와 마유미 간호사, 두 사람의 환자 처방법이 특이하다.  

  내가 선택한 길이 과연 맞을까 의심이 들 때, 가장 친한 친구와 다퉈놓고 찜찜할 때, 여자친구로부터 시련당했을 때, 나를 보살펴준 부모님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등등의 사소한 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이런 고민들, 누군가의 나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고 조언을 해줬으면 하는 바램, 딴지걸지말고 그냥 그래 그래 네가 맞아 네가 옳다 라고 이야기해줬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된다. 내가 이 분야에서 만큼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나보다 대단한 고수를 만났다. 이 때 느끼는 좌절감. 나를 포함한 누구나 다 느껴봤을 법한 일이다.

  대학교 1학년 때 짧게나마 정식으로 드럼을 배웠고, 이후 독학하며 이런저런 밴드들을 거치고, 프로젝트를 꾸려 공연을 하기도 하면서, 학교 내에서는 나름대로 최고의 드러머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학교 내 여러 밴드들이 공연할 때 보면 아무래도 나보다 더 나은 이를 찾기가 힘들었다. 아 이런 못말릴 거만함. 내가 거만하다는 걸 안다. 사람들도. 그러면서도 그들은 날 인정해줬다. 하지만 언젠가 나보다 나이 많은 다른 밴드의 드러머가 공연하는 것을 보고 헉! 이런, 이란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온 적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는 방송국의  세션드러머까지 했다고 하니. 아 이런. 그야물로 우울안의 개구리, 정저지와는 이럴 때 하는 말.  

  홍대 앞 라이브 클럽 재머스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공연을 할 때, 정식 인디밴드가 되었다는 자부심. 이제 언더그라운드의 한 축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웅큼의 흙 정도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자부심. 하지만 또 클럽에서 마주치게 되는 대단한 실력파의 밴드들. 이 이럴 때 같은 클럽 밴드지만 정말 우울. 이렇게 노력했는데 이거 밖에 안되나. 세상이 고수는 너무나 많다. 내가 학교에서 후배에게 드럼을 가르치며 하던 말이다. 여기서 아무리 잘해봤자 나가면 고수는 엄청나다.   이럴 때 이라부 의사에게 간다면 딱 좋겠는데.

   소설 속 이라부 의사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오랜 공부기간에서 나오는 해박한 의학지식과 권위주의적인 거만하고 뻔뻔한 태도의 의사들이 절대 아니다. 아니 뭐 이런 의사가 다 있어. 오자마다 반말 찍 하더니 처방은 안해주고 자꾸 딴소리만 해. 내가 야구선수라니깐 같이 캣치볼을 하자고 하질 않나. 서커스단이라니깐 자기도 공중그네 해보고 싶다고 정말 서커스장에 와서 매일같이 연습하지를 않나. 도대체가 이해가 안가. 당신 의사 맞아? 돌팔이 아냐? 당연 의심이 갈 수 밖에. 요즘 또 흰 가운입은 돌팔이들이 한 둘이야? 게다가 의사는 그렇다 쳐. 가슴 곡선 다 보이게 노출하고, 핫팬츠 입고 다니는, 껌 짝짝 씹으며 쇼파에 누워 패션잡지나 읽고 있는 저 여자는 뭐야. 간호사 맞아? 아니 무슨 일본 포르노 찍나. 하지만 이라부 의사를 찾아온 환자들은 다음 날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마련. 무슨 최면술에 걸린 것도 아니고 말야.  

  이라부의 환자 처방법은 특이하다. 그냥 대놓고 비타민 주사를 시도때도 없이 놓지를 않나. 아니 무슨 처방법이 그래. 비타민 제만 주사하면 다 낫는데? 하지만 다 낫는다. 정말 의학적으로 처방한 것은 비타민 주사가 전부인데도. 이라부를 찾아온 환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의사소통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 그들은 각 분야의 최고의 인물들이지만, 불안과 강박증세, 자신감 부족, 결단력 상실의 문제를 안고 있다. 분명히 이분야에서 만큼은 날 따라올 자가 없는데 하찮은 기본기에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고, 타인에게 알려지기를 숨긴다. 누군가에게 나의 문제점을 솔직하게 상담해보고 싶지만 말 할 사람이 없고, 말할 사람이 있다 해도 내가 그런 문제로 고민한다는 자체가 이미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러니 혼자서 끙끙 앓고 있을 밖에. 이라부는 바로 이 점을 고쳐준다. 일부러 고쳐주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가 환자와 함께 놀면서 환자는 저절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깨닫고 인정하고 마음을 열게 된다. 만병의 근원은 마음에 있나니. 마음을 열면 모든 병은 치유된다.

   분명 비정상적이고 황당한 병원이다. 의사나 간호사나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다 한번 이곳을 찾은 환자들은 다시 방문하게 마련. 그것은 어쩌면 병원에 대해, 의사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고정관념들이 깨지면서, 그 자체만으로 마음을 열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환자들은 모두 의사소통의 문제를 겪고 있었으므로. 때로는 안놀아주면 울어버리는, 또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고 떼쓰는 어린아이 같지만, 그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이 환자를 완치로 이끈다. 우리가 못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나도 같이 못된 놈이 되듯이, 착하고 순수한 어린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어 마냥 투명한 유리거울 같은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라부의 마음이 환자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치유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의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살면서 아직까지 이런 비슷한 의사도 결코 보지 못했다. 물론 예전에 비해 권위주의적인 의사가 많이 줄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지니스 차원에서 다른 병원과 경쟁해 이기려는 자들의 컨셉이 아닐까 생각. 

  이 소설 후딱 읽으며 정말 속으로 혼자서 큭큭 거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한편의 코믹영화를 보고 난 느낌. 이라부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벌써 마음이 후련해지고 기분이 상쾌해진다. 옮긴이의 말로 마무리를 대신할까 한다.  

 "인간의 삶에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서로 경계를 알 수 없게 버무려져 있다. 그리고 사람마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정도는 다르다. 한마디로 상대적이다. 인간의 삶은 또한 겉과 속이 다르게 되어 있다. 완벽주의자는 있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듯이,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속까지 그런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아 역시 상대적이다.

더러는 가벼워 보이던 것, 하찮던 것, 사소한 성격적 결함이 정신적 결함으로 이어지는 수가 있다. 그렇게 되는 계기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지 않닫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알 수 없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만들어 쓰고 있는 가면이 어떤 방패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 이제 당신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 이라부를 찾아가는 길만 남아있도다. 어서 가자 이라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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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1-3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에 붙은 말들이 더 재미있어서 추천! ^^

마늘빵 2006-01-31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핫.

토트 2006-01-3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추천하구 가요.

마태우스 2006-02-01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아프락사스님 저도 이거 읽고 리뷰 쓰려고 합니다^^ 글구 저를 이라부에 비유해 주셔서 감사!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늘빵 2006-02-01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 ^^

하이드 2006-04-13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왜 지금 봤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