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의 철학 - 혼합의 시대를 즐기는 인간의 조건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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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석. 내가 정말 좋아하는 우리나라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요 몇년 사이에 관심을 갖게 된 대표적인 철학자로 김용석과 탁석산을 들 수 있는데, 탁석산 선생님의 경우에는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주체성>이라는 미니 문고판 책으로 단번에 스타 철학자로 우뚝 선 반면, 김용석씨(선생님이란 칭호는 나에게 오프라인을 통해 가르침을 준 분이기에 사용했고, '씨'는 오로지 책을 통해서만 안 분이기에 구별해 사용했다)의 경우에는 스폰지에 물이 스며들듯 서서히 다가왔다. 그리고 실제로 대중들에게 알려져있기로도 대중에게 다가서는 탁석산 선생님의 접근 방식과 김용석 씨의 접근 방식은 엄연히 다르다. 두 분 모두 강단철학이 아닌 대중적인 철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탁석산 선생님의 경우에는 무게있는 주제를 가볍게 다루는 반면, 김용석 씨의 경우에는 가벼운 주제를 깊이있게 다루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철학자 김용석을 내가 처음 접한 것은, 지금은 절판된 <서양과 동양이 만나 127일간 이메일을 주고 받다>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에서 그는 서양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승환 교수는 중국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이 대화가 대담집의 형식을 빌어 나온 것이었다. 일방적인 강의보다 대담 형식의 책은 같은 주제를 통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의 시각을 엿볼 수 있어 더 폭넓은 사고를 장려한다. 이 책을 통해 김용석씨의 사유가 마음에 와 닿았고, 이후 그의 저서를 곁눈질 하고 있었으나 <일상의 발견> 이외에는 아직 접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번째 그와 만난 것이 바로 이 책, <두 글자의 철학>이다. 책이 소개되면 그 책의 내용과 불문하고 바로 구입해버리는 작가가 나에게는 몇 있다. 김용석씨가 그렇고, 앞서 언급한 탁석산 선생님이 그렇고, 스위스의 젊은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그렇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의 저서가 최근 번역되자마자 바로 '질러버렸다'.

  <두 글자의 철학>은 두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들을 주제로 삼아 저자의 생각을 풀어내는 철학에세이이다. 저자는 크게 1부 인간의 조건, 2부 감정의 발견, 3부 관계의 현실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각의 범주안에 두 글자로 된 작은 제목들을 품고 있다. 생명, 자유, 유혹, 고통, 희망, 행운, 안전, 낭만, 향수, 시기, 질투, 모욕, 복수, 후회, 행복, 순수, 관계, 이해, 비판, 존경, 책임, 용기, 겸허, 체념 등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주제를 다룬다고 하여 결코 글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주제 하나를 다루더라도 그가 오랜 세월에 걸쳐 평상시에 가지고 있던 깊이있는 사유를 바탕으로 쓰여졌고, 우리가 뻔히 다 아는 주제이고 여기서 더 무엇이 나올까 싶은 주제들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 자신이 생각한 것 등을 바탕으로 폭넓고 깊이있는 시각을 전달해준다. 그래서 그의 글이 좋다.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소재를 다루지만 거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을 물어 들어가 사색의 향연을 펼쳐준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흠뻑 젖은채 즐긴다.

  책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명언이 나오지만, 그는 명언에 의존하지 않는다. 명언은 단지 그의 글을 보조해줄 뿐이고, 정말 알짜배기는 그만의 순수한 사유이다. '용기'와 '소신' 에서 보여준 그의 이런 사유들은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인간이 자기 생각을 만들어갈 때 중요한 것은 결론 이상으로 과정이다. 더구나 어떠한 입장에 대해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지속적인 반성과 성찰을 전제로 하지 않을 경우 오히려 위험하다. 진짜 소신을 중요시하는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해오던 것과 믿어오던 것을 수정할 줄 안다. 소신을 내세우고 지키며 굽히지 않는 것 이상으로 소신을 관리할 줄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성실한 관찰, 치밀한 사고, 다른 사람과의 지속적인 대화, 포용적인 세계관 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실수와 오류를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소신은 강자앞에서 지키는 것이지 약자 앞에서 내세우며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소신이 그야말로 옳다고 확신하더라도 약자의 소신에 문을 열줄 알아야 한다. 진정으로 소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소신에 귀 기울이고 그것이 부각되도록 하며, 그것이 지켜지도록 배려한다. 이것이 소신있는 사람의 겸허함이다."

"모든 일에 총명하게 대처하고 매사에 정의롭게 행동하며, 용기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의 에너지 한계를 넘어서는 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편안한' 상태의 자기를 유지하기 힘들다. 이때 필요한 것이 겸허의 자세이다. 즉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쓰던 에너지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로 돌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에너지 사용을 적절히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겸허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겸허는 자신의 능력을 가장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무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능력대로 삶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허는 일반적 정의에 따르면 다른 사람 앞에서 뻐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인 관계의 덕목이지만, 각 개인의 차원에서는 결국 자기 조절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자아 찾기의 덕목인 것이다."

  이로써 나는 책을 통해 그와 세번째 만남을 경험했고, 그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책을 조만간 탐독하겠노라 다시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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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0-31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관심도 그렇지만...지은이에 대한 관심까지 만드는 리뷰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마늘빵 2005-10-31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책에 대한 이야기보다 지은이 이야기를 더 많이 한거 같아요. 쓰고보니. ^^ 좋은 책입니다. 읽기도 쉽고.

Common 2006-02-12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아프락사스님 리뷰 보고 이 책 샀었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