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쿠야. 영화리뷰를 다 써놓고 날려 버렸다. 엄청나게 길게 썼구만. 이 우울함이여. 누굴 탓하랴. 훌쩍. 다시 똑같이 쓸 수는 없고 짜증나더라도 써보기는 하겠지만 아까와 같은 글은 나오지 않을 듯 싶구나. 생각의 흐름을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

  감독 김지운. 나는 그를 주목한다. 어떤 감독에게는 그의 냄새가 풍긴다. 풍기는 정도가 아니라 심하게 진동한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과 복수 삼부작으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이 그러하고, 싸이코로 간주되는 김기덕 감독이 그러하고, 지금 말하는 김지운 감독이 그러하다.

 또 어떤 감독은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 관심영역에서 한층 벗어난 이들도 있다. 그들을 내가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위의 사람들에 비해 강렬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강제규 감독이나 강우석 감독이 그렇다. 사실 강우석 감독의 경우는 좀 애매하다. 자기만의 개인적인 스타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위의 감독들같이 심하게 냄새를 풍기지는 않는다.

 허진호, 박찬욱, 김기덕, 김지운 같은 감독들은 강아지가 길거리에서 오줌싸며 자신의 활동영역을 표시하듯 자기 영역임을 콧구멍을 자극하는 진한 냄새를 풍긴다.

 <조용한 가족> <장화, 홍련>으로 알려진 김지운 감독은 이렇다 할 대단한 상업적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고만고만한 관심을 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더라도 그의 영화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향수가 난다.

 혹자는 그의 영화를 향해 '느와르'라고 말하지만, 난 그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고, 오히려 엽기, 잔혹, 분노, 파멸, 비장미, 욕구, 고통과 같은 단어로 설명하고 싶어진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도 이와 같은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그것과 김지운의 그것은 색깔이 다르다. 박찬욱은 진하고 거친 핏빛이라면 김지운의 그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핏빛이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도 않은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이 기막힌 멘트. 이미 넌 나를 사로잡았다. 이미 잔뜩 기대를 품게 만들었으니 책임져라. 김지운.

 모던한 건축양식의 건물과 장식물. 깔끔하게 차려입은 호텔 종업원들. 와인 한잔. 소곤소곤 대화. 이 숨막힐 듯한 정적인 호수에 물 한방울 던져진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시 말이 없는 호수. 기막힌 부조화. 역설.

 어느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멍한 나의 시선 속에서 내 머리는 장자의 '나비의 꿈'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만 그런가? 다른 이들에게 묻지 않았으니 그들이 나비의 꿈을 떠올렸는지 어땠는지는 모른다. 이는 마치 <매트릭스>를 보고서 멍한 시선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떠올렸던 때와 같다. 그리고 매트릭스에 대한 철학자들의 수많은 해석이 있었고, 혹자는 나와 같이 이데아론을 들먹이기도 혹자는 불교를 들먹이기도 혹자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들먹이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선우의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선우의 꿈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선우의 꿈이고 어디까지가 선우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시작과 끝은 없다. 아니 무수히 많다.

 보는 이에 따라 선우의 꿈은 여기가 될 수도 있고, 저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선우가 희수의 연주를 보며 눈을 감는 순간 선우의 꿈이 시작되는 걸로 봤지만, 어떤 이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이는 감독의 실수일까 아니면 감독의 의도일까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닐까.

 그건 중요치 않다. 사물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듯 영화에 대한 해석도 다양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옳다 어떤 것이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다. 모두가 옳고 모두가 그르다. 이는 양비론고 양시론도 아니다. 다만 경계가 없을 뿐이다.

 장자는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는데 그때는 자기가 장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꿈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깨어나  생각하니 지금이야말로 나비가 꿈을 꾸어 그 속에서 장자가 되어 살아가면서 자기가 나비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나비가 되는 꿈. 나비가 꾸는 꿈.

 꿈이 꿈인것을 알려면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꿈에서 깨어난 것으로 다시 꿈꾸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깸에서 한번 깨어났다는 것이다. 이를 대각(큰 깨달음)이라 한다.

 세계는 모든 사물이 이것과 저것으로 나뉘어져 독립해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서로 얽히고 설키어 있으며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될 수 있다. 세계는 개별 사물이 제각기 각각의 독특성과 함께 하나라는 전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가 될 수 있는 不二性의 세계다.

 나는 지금 꿈 속에서 사는 것인가, 아니면 현실 속에서 사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면서 아 이런 이곳이 가상세계인가 실제세계인가 궁금해진다. 만약 내가 꿈 속에 있다면 나는 과연 이렇게 아둥바둥 살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생각의 파장이 한도 끝도 없다.

어느날 한밤중 제자가 잠에서 깨어 울고 있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니요.."
"그러면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니요... 너무도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리 슬피 우느냐?"
"그 꿈은 이루어질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끝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기막힌 멘트를 날리며 멋드러짐을 뽐낸다. 끝내 총알세례를 받으면서도 죽음을 인정하기 싫은지 끝까지 숨붙어있는 선우. 생뚱맞게 등장한 에릭의 한 방으로 생을 마감한다.
 
 멋들어지게 죽음을 맞이하는 선우가 꿈 속의 그일까, 아니면 깨끗하게 차려입은 호텔 짱의 모습이 꿈 속의 그일까. 어느 것이 선우의 달콤한 꿈일까, 어느 것이 선우의 달콤한 인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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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 2005-04-23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달콤한 꿈을 꾸었으면 좋겠어요. 요즘 맨날 이상한 꿈만 꾼다는..^^ 제가 본 영화를 님도 보셨다니 반가워서 인사드려요

마늘빵 2005-04-23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네 오늘 밤 달콤한 꿈 꾸세요. 부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