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은 들뢰즈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홀로 읽고 있는 누구나 철학 총서, 오른쪽은 강의하시는 박정태 선생님이 번역하고 엮은 강의 주교재다.
르네21(http://www.renai21.net)의 <들뢰즈의 철학과 바디우의 철학 강의>. 두 번 들었다. 세 번째 강의였지만 두 번째 강의를 빼먹은 탓이다. 첫 강의에서 들뢰즈 철학의 세계관과 다섯 가지 특징을 배웠다면, 이번 강의에서는 들뢰즈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사건 발생 논리, 그리고 수학의 미분과 적분을 끌어들여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살폈다. 아직까지는 들뢰즈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 공부라고 봐야 한다. 칸트 철학을 공부할 때 선천과 선험의 개념을 구별하는 것처럼.
<사건의 발생 논리>
우선 들뢰즈의 '사건의 발생 논리'를 이해할 때 차등화와 차이화의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 프랑스어에서 (발음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들었다) '디페랑씨아씨옹'이라고 똑같이 소리나는 두 단어에서 '씨'라는 소리가 나는 부분의 스펠링이 't'와 'c'로 각기 다른데, t가 들어간 디페랑씨아씨옹을 박정태 선생님은 '차등화'라고 번역을 하고, 'c'가 들어간 디페랑씨아씨옹을 '차이화'라고 번역을 하신다. 프랑스어로 표현했을 때의 언어상의 미묘한 차이를 한글로 번역했을 때도 살리고 싶었던 것. 디페랑씨(t)아씨옹은 차등화, 미분화로, 디페랑씨(c)아씨옹은 차이화, 분화, 육화, 적분화로 번역한다.
위의 개념 구별로부터 다음과 같이 나아간 내용을 정리해볼 수 있다. 배운 내용을 쉽게 정리해보고 싶지만 배운 내용보다 더 쉽게 전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첫째, 잠재의 차원에서 다수가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는 무엇, 이것은 잠재의 차원에서 다수가 차등화되어 있는 무엇이다. 둘째, 현실의 차원에서 다수가 '온전하게' 결정되어 있는 무엇, 이것은 현실의 차원에서 다수가 차이화되어 있는 무엇이다.
<개별 미분화/개별 적분화>
다음으로, 들뢰즈에게 있어서 개별 미분화와 개별 적분화 개념을 이야기해 보자. 고등학교 때 누구나(?) 배운 수학의 미분과 적분 개념을 그대로 가져다가 해석한다.
일단 기억을 더듬어서 미분 f(x)란 곡선을 곡선의 구간으로 나누고, 곡선과 관련된 각 구간을 이루는 점을 수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미분은 곡선을 쪼개 점으로 만들고, 각 점의 수학적 성격을 순간변화율로 파악하는 역할을 한다. 적분 s(x)는 원래 함수의 면적을 나타내는 함수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수학적 미분과 적분에서, 미분을 잠재적 영역으로, 적분을 현실적 영역으로 해석한다. 'y는 x제곱'의 현실적 영역 속의 곡선을 미분화하여 '무한하게' 잘게 쪼개고 또 쪼개고 하면-이때 무한하게 쪼갠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감각적으로 쪼개는 것에서 나아가 사유의 영역에서도 무한하게 세세하게 쪼개는 것을 의미한다- 잠재적 차원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잠재적 영역 속 점들의 수학적 성격은 순간 변화율의 함수이다. 시간에 적용하여 살피면, '현실적 영역 속의 곡선'은 시간의 분열에서 '과거의 보존'을 의미하며, '잠재적 영역 속 점들의 수학적 성격'은 시간의 분열에서 '현재의 흐름'을 의미한다.
잠재적인 것은 애매한 것이고, 이성적 개념의 틀을 벗어나는, 개념 바깥의 구체적인 것, 그리고 특이한 것이다. '개념 바깥의 구체적인 것'이란 말은, 예를 들어 짜장면(국립국어원님께서 표준어로 격상(?)시켜주셨다)을 먹고 '맛있다'라고 표현하는 것, 이것을 제외한 짜장면을 먹고 느끼는 나머지 감정들, 느낌들, 감각들이 바로 '구체적인 것'이다. 특이한 것은 흔히 느끼듯 뭔가 벗어나 있는 것.
다시, 이러한 일련의 개념 정립 과정과 시간에 적용하는 논리를 통해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억은 단지 지나간 회상의 의미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현재의 지각과 부딪히면서 지각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해주고 있다."
<정리 발언>
기존의 개념을 활용하여 자기 이론을 세우는 철학자들과 달리 칸트나 들뢰즈처럼 기존의 언어로 풀어낼 수 없는, 기존의 언어를 활용하지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아니면 단어를 새로 창조해내는 이들의 철학을 공부할 땐 이렇게 개념을 먼저 알고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쓴 글을 한 줄도 읽어낼 수가 없다. 박정태 선생님은 열정적으로 무척 쉽게 전달하려고 애쓰셨고, 들뢰즈가 언급한 어떤 영화의 장면을 보여주시기 위해 쭈그리고 앉아 노트북을 두 손으로 들고 계시기까지 했다. 수강생은 여전히 열 명안팎으로 적지만 그 수와 관계 없이 의욕이 넘치신다. 대학에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많은 교수들의 마인드와는 무척 다르다.
르네21은 기획 단계에서 저서든 번역서든 좋은 책이 있으면, 그 책을 기준으로 강사를 섭외한다고 한다. 이번에 개설된 단 한 개의 서양 철학 강좌도 역시 마찬가지. 동양 철학 강좌의 김교빈 선생님, 수요 교양 강좌, 금요 강좌 또한 마찬가지다. 열악한 환경에서 기획하고 강의를 운영하는 분들과 열정적인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빼먹지말고 계속 들어야 하는데. 한 번 빼먹는 바람에 세 번째 강의를 못따라갈까봐 지레 겁먹기도 했다. 다음 강좌는 아마도 알랭 바디우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