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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17 - 오바마의 미국, 완결 ㅣ 미국사 산책 17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12월
평점 :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 마지막 권. 15권이 부시를, 16권이 9.11테러 이후의 변화한 미국상을 그렸다면, 마지막 권은 오바마의 미국을 그리고 있다. 미국인의 일반적인 이름과는 전혀 다른 '버럭 오바마'의 등장은 미국 정계에서 놀라운 사건이었다. 클린턴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왔고, 부시가 뒷배경으로 대통령이 되었다면, 오바마는 미국인들에게 그야말로 듣보잡이었다. 어떤 포털은 오바마의 사진과 함께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사고를 치기도 했고, 그의 가운데 이름인 후세인 때문에 기독교인인 그를 모슬렘으로 오해하는, 때에 따라서는 상대 진영에서 그를 일부러 모슬렘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민주당 진영에서 대선 후보로 떠오른 인물은 본래 힐러리 클린턴. 무엇보다 남편인 클린턴의 이미지가 괜찮고-섹스 사건 빼고는-, 힐러리 또한 권력욕이 강하고, 추진력이 있기에 후보로 괜찮았다. 하지만, 오바마가 등장하면서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전 대통령 클린턴은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오바마를 "몇 년 전만 해도 이 친구는 우리한테 커피나 갖다줬을 사람"이라고 말하며 불평하기도 했단다. 클린턴 부부가 이렇게 오바마를 경계하는 것은 이미 그의 지지율이 힐러리의 지지율을 넘어섰기 때문. 힐러리보다 오바마가 더 이슈가 되고, 뉴스 가치가 있다는 것.
오바마는 말을 잘 했고, 힐러리는 이런 그를 콘텐츠 없이 말만 잘할 뿐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인이 이슈를 선점하고, 말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일. 히틀러 또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어딘가 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연설을 통해 한낮 군인 상병에서 총통으로 신분을 바꾸지 않았던가. 그가 오로지 잘한 것은 연설 뿐이었다. 연설로 독일의 총통이 되었고, 주변 여러 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지금이야 그를 미치광이, 전쟁광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독일 민중의 지지율은 엄청났다. 그걸 보면 부시가 연설을 잘 못하고, 카메라 앞에 서면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던 건 어쩌면 다행이다.
오바마는 희망과 흑백 통합을 이야기하며 대통령이 되었고, 당선된지 얼마 안 되어 노벨평화상까지 받는 기염을 토했다. 그의 대통령 당선 못지 않게 이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또한 그의 연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가 세계인들에게 심어준 기대감에 비해 현실에서는 딱히 실현한 바가 없었다. 전쟁은 여전히 계속 되고 있고, 관타나모 수용소는 그대로 있으며, 고문과 학살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변화와 희망을 이야기했지만, 사실상 그가 이룬 바는 별로 없다. 그런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자, 그의 지지자들 또한 '아니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 것. 오바마의 미국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그의 정치 행위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엔 이르다. 임기가 끝날 때 어떤 변화를 이루었는가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 마지막 권엔, 이전의 열여섯 권에 없던 부분이 하나 있다. 그는 맺음말에 60여 장을 할애하며, '왜 미국은 제2의 한국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미국에 가장 비판적인 미국인이자 미국 자본주의의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진보 지식인 노엄 촘스키는 미국을 이렇게 평한다. "전 세계를 그토록 압도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지배한 것은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떤 이들은 미국을 '초강대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족하고 '초초강대국'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으로 봐서는 중국와 인도가 급부상한다고 해도 미국의 세계 지배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 끝날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걸까. 다가올 초강대국 중국에 대비하여 중국어까지.
'왜 미국은 제2의 한국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강준만은 미국과 한국의 닮은 점으로 압축 성장, 평등주의, 물질주의, 각개약진, 승자독식 다섯 가지를 뽑는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와 이로 인한 부작용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복거일과 한홍구, 김진경 등이 모두 비슷하게 언급하고 있듯, 보수와 진보의 시각이 다르지 않다. 미국 또한 한국보다는 더딘 속도였지만 유럽에서 보인 봉건제 등을 거치지 않고 민주 사회에 도달했다. 또한 산업 발전 역시 마찬가지. 게다가 귀족이 없는 미국과 한국은 모두 평등주의 면에서 닮았다고 말한다.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을 중류 계층이라 생각하고, 한국인 역시 마찬가지다. 실제 삶에서는 자본주의로 인한 눈에 빤히 보이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압축적 근대화는 또 물질주의와 깊이 관련된다. 현재도 노동 시간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일만 하고 사는 한국인들은, 여유보다는 돈을 선택한다. 삶의 가치관이 돈에 맞추어져 있고, 그 돈으로 사고픈 물건을 사고, 크고 비싼 집, 남들이 부러워하는 차를 사고 싶어 한다. 노동 시간 면에서 한국인을 따라갈 국가는 없지만, 강준만은 노동 강도 면에서는 미국도 못지 않다고 한다. 철학자 니체는 미국을 이렇게 평가했다고. "오늘날에도 그들은 휴식을 부끄러워하며, 한참 동안 생각에 몰두할 경우엔 양심에 문제가 있다는 핀잔을 들을 정도다. 그들은 한쪽 손목에 시계를 찬 상태에서 생각에 잠긴다."
각개약진은 적진을 향해 병사 각 개인이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개별적으로 돌진한다는 뜻으로, 공적 영역에 대한 불신이 강한 한국은 모두 사회적 문제도 가족 단위로 돌파하려는 특성을 지닌다. 미국 역시 공적 영역에 대한 불신이 강하고, 가족 돌파가 아닌 개인 돌파라는 점에서는 조금 모습이 다를 듯하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시키기 위해 각개약진하는 미국인과 달리 코리아 드림엔 학벌과 학력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는 점도 꼬집는다. 연예인을 해도, 가수를 해도, 청소부를 해도 서울대 출신은 화제가 된다. 수 년 전에 '서울대 출신 버스 기사'가 뉴스인지 화제 현장인지 그런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나온 적이 있다. 이게 뉴스가 된다는 것 자체가 학벌 사회라는 것을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승자 독식. 오늘의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다. 이 역시 학벌주의와 떼어 설명할 수 없는데, 강준만은 구체적인 수치를 대가며 서울대 출신이 각 영역을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런 기 현상을 두고 형평성이나 연구와 교육의 질 문제를 언급하는 사람에게는 찌질이, 사회 부적응자 등의 수식어가 붙고, '꼬우면 니가 서울대 나오던가'라는 식의 말이 되돌아 온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이제 현실이다. 잘못된 사회 구조와 제도를 비판하기보다는 내가 또는 내 자식이 잘못된 사회 구조의 상층부에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사회가 한국이고, 이를 설명하는 단어가 승자 독식이다.
미국와 한국의 공통점 다섯 가지는 우연히 맞아 떨어진 요소도 있지만, 다수는 한국이 미국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닮아간 게 아닌가 싶은 부분이 많다. 짝사랑도 사랑인지라 좋아하면 닮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반미(反美)하자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기를. 또 돌아가신 분의 말마따나 반미 좀 하면 어떤가. 한국은 세계 패권 국가 미국이 운전하는 차에 함께 타고 있고, 뒷자리보다는 앞자리에 앉아 좀 더 가까이에서 친밀감을 쌓고자 노력하고 있다. 수십 년 전에는 미국이 운전하는 차를 뒤에서 따라가는 허름한 차에 몸을 실었다가, 지금은 같은 차에 동승하고 있는 셈. 한국은 미국을 닮다 못해 동승한 차의 속력을 높이라고 재촉하고 있다. 그 길의 끝에 낭떨어지가 있어 결국 모두 다 죽게 될 거란 걸 모르고서. 이미 한국은 그 끝과 멀리 있지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