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 언어가 춤을 춘다 세상을 다 말하라!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3
윤세진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절판


책은 책의 속도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책은 다른 매체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 다른 매체와 접속하는 능력을 증대시킨다. -15쪽

우리말의 ‘오염’을 개탄하는 지식인들 중에는 그 ‘오염’의 원인을 모두 외국어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있다. 한자가 가져온 오염, 일본말이 가져온 오염, 영어가 가져온 오염…. ‘우리말 오염’을 개탄하는 ‘애국자’들의 비장한 글들을 보며 나의 지저분한 언어 사용을 반성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세계화 시대’가 될수록 우리말의 ‘순수’를 지킨다는 일이 너무나 힘겨워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오염되기 이전의 순수한 우리말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태초부터 ‘순수한 단일체’였다는 발상만큼이나 근거가 없다. -118쪽

중요한 것은 지배적인 언어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 즉 지배적인 언어 안에 낯설고 이질적인 언어들을 뒤섞고 그럼으로써 지배적 언어를 변형시키는 것이며, 한 언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언어를 넘나들면서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한글과 한자 중에 뭘 선택하는가’라는 사실 자체는 그리 중요치 않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쓰는 표현이 ‘영어식 표현이냐 일본식 표현이냐’ 하는 것도 중요치 않다. 그 표현들이 언어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생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언어를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빵빵’하게 해줄 것이다. -125쪽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릴는 결국, 영어가 보편의 언어이므로 그것을 써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경쟁의 논리다. 전세계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수적으로 절대 소수지만, 세계 질서 속에서 권력을 쥔 제국들이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그것은 ‘지배적인 다수어’가 된다. 영어의 보편성이란, 그런 의미에서 권력과 자본의 보편성인 것이다.-130쪽

브루노의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의 언어 단일화는 절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진행되었다고 한다. 즉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사용하던 언어가 고상하고 학식 있는 언어로 공식화되고, 상대적으로 민중들이 사용하던 여러 지역 방언들은 부정적이고 경멸적인 의미의 ‘사투리’로 격하된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는 의미였던 ‘사투리’라는 단어가 1690년에 발행된 퓌르티에르 사전에서는 ‘보통 사람들의 비속하고 천한 말’이라는 의미로 정의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의 언어가 공식 언어, 즉 표준어로 승격함으로써 부르주아들의 정치적 독점을 보장해주었다는 사실이다. -134쪽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배에 낭랑하여 그 이치와 취지를 잘 맛보게 되어서 배고픔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둘째, 차츰 날씨가 추워질 때 읽게 되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 유전하여 체내가 편안하여 추위를 잊을 수가 있게 되며,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땐, 눈을 글자에 마음은 이치에 집중시켜 읽으면 천만 가지 생각이 일시에 사라지게 되고, 넷째, 감기를 앓을 때에 책을 읽으면 기운이 통하여 부딪힘이 없게 되어, 기침 소리가 갑자기 그쳐버리게 된다. (이덕무, <이목구심서>)-176-177쪽

무릇 글을 읽을 때에는 높은 소리로 읽는 것이 좋지 않다. 소리가 높으면 기운이 떨어진다. 눈을 딴 데로 돌려도 안 되니, 눈이 딴 데에 있으면 마음이 딴 데로 달아난다. 몸을 흔들어도 안 된다. 몸이 흔들리면 정신이 흩어진다. 무릇 글을 욀 때에는 착란하지 말아야 하고 중복하지 말아야 하며 너무 급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급하게 하면 조급하고 사나워서 맛이 짧다. (홍대용, <매현에게 주는 글>)-177쪽

소설가 베게트는 여행에 대해 멋진 정의를 내린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여행을 하는 이유는 꿈이나 영혼 등으로부터 나온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눈이 파란 사람이 세상에 정말 존재하는지, 꿈에서 본 그 황홀한 하늘빛이 어딘가에 정말로 펼쳐져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길을 떠난다는 것, 그게 여행이라는 거다. -179쪽

텍스트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아직 건설 중인 건물 같은 것이다. 건축가는 자신의 설계도에 따라 건물을 짓지만, 사실 그 건물을 ‘건물’로서 완성시키는 사람은 건축가가 아니다. 건물을 완성하는 건 그 건물 안에서 생활하게 될 거주자의 몫이다. 거주자야말로 건물을 ‘사용’함으로써 건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에 숨어 있는 ‘결정된 의미’ 같은 건 없다. 텍스트의 모든 가능한 의미들은 그 텍스트와 접속하는 독자에게 맡겨져 있다. 텍스트라는 건물이 만들어진 시대의 건축 양식에 주목할 것인지, 그 건물이 사용되어온 역사에 주목할 것인지, 아니면 내 나름의 기준으로 건물을 리모델링할 것인지, 그건 독자의 몫이다.-201-202쪽

텍스트를 읽는 것은 텍스트를 내 신체의 일부로 느끼는 것이며, 거기에 하나의 해석을 가하는 것이다. -225쪽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낙타가 사자로 변신해야 하는 것과 같다."(니체)-231쪽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공리니 정의니 하는 미명으로, 성인군자란 간판으로, 점잖고 성실한 체하는 가면으로, 유언비어와 여론이란 무기로,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의 글로 사리사욕을 채우면서 칼도 없고 붓도 없는 약자들을 숨도 못 쉬게 하는지를. 나에게 이 붓이 없었다면 수모를 받고도 어디가서 하소연할 길조차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깨어났다. 그러기에 늘 이 붓을 들어 기린의 피부 속에 감춰진 마각(馬脚)을 드러내고 있다.(루쉰, <화개집 속편>)-247쪽

페이지(page)라는 말의 어원인 라틴어 ‘파구스’(pagus)는 농부가 일구는 밭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쓰여진 글들이 경작된 밭고랑을 닮은 것도 같다. 좋은 농부의 덕목이 토양과 기후, 경작물에 대한 앎과 성실함, 그리고 뿌린 것 이상을 탐내지 않는 정직함이듯이, 좋은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세상에 대한 앎과 자신에 대한 정직함이다. 물론 이때의 ‘앎’이란 추상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터득한 직관적이고 구체적인 지혜를 의미한다. 글을 이루는 것은 어떤 법칙이나 현란한 수사, 잡다한 지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걸음걸이와 세상에 대한 시각, 그가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 등이다. -247쪽

글은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떠날 수 있을 때 시작된다. -251쪽

글을 쓴다는 건, ‘언어’라는 ‘도구’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글쓰기는 자신을 뛰어넘는 실험이자,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모험이며, 다른 이들과 공감하기 위한 공명통이다. 자신의 신체가 공명할 수 있는 만큼 글은 풍요로워지고 자유로워지고 다채로워질 것이다. -293쪽

보통 책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아끼는 것이라도 남에게 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예전에 동춘 송준길 선생은 남에게 책을 빌려 주었는데 그 사람이 되돌려줄 때 종이에 보푸라기가 생기지 않았으면, 반드시 책을 읽지 않았음을 나무라고 다시 빌려주었다. (이덕무, <이목구심서>)-309-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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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요 2009-09-14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맘에 드는데요. 아프님 소개라는 것만으로도...
저도 보관함에 담아두기 했어요.^^

마늘빵 2009-09-14 09:21   좋아요 0 | URL
내용 전개가 약간 어수선한 감이 있는데, 도입부를 좀 지나면서 점점 빠져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