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구판절판


그때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택의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어느 날 나는 경제적 핍박자들이 몰려 사는 재개발 지역 동네에 가 철거반 - 집이 헐리면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내가 그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담을 쳐부수며 들어왔다 - 과 싸우고 돌아오다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다. ‘난장이 연작’은 그 노트에 씌어지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中)-9쪽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제삼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라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 (작가의 말 中)-11쪽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의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이제 나의 노력이 어떠했나 자신을 테스트해볼 기회가 온 것 같다. -29쪽

공무원 월급표를 보면 뒷집 남자의 월급은 남편의 월급보다 사뭇 적다. 단출한 식구에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자기네는 조용한데, 많은 식구에 적은 월급을 받는 뒷집은 흥청댄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귀가 아프게 들어온 잘살 수 있는 세상이 뒷집에만 온 것 같다. 뒷집에 가난은 없다. 그래서 신애는 생각한다. 저 집은 도대체 어느 편인가? 우리는 또 어느 편인가? 그리고 어느 편이 좋은 편이고, 어느 편이 나쁜 편인가? 도대체 이 세상에 좋은 편이 있기는 한가?-38쪽

지섭이 하는 말을 나는 들었었다. 그는 이 땅에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이제 없다고 말했다.
"왜?"
아버지가 물었다.
지섭은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하긴!"
"아저씨는 평생 동안 아무 일도 안 하셨습니까?"
"일을 안 하다니? 일을 했지, 열심히 일했어. 우리 식구 모두가 열심히 일했네."
"그럼 무슨 나쁜 짓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법을 어긴 적 없으세요?"
"없어."
"그렇다면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어요."
"기도도 올렸지."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불공평하지 않으세요? 이제 이 죽은 땅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달나라로!"-102-103쪽

사장은 종종 불황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와 그의 참모들은 우리에게 쓰는 여러 형태의 억압을 감추기 위해 불황이라는 말을 이용하고는 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힘껏 일한 다음 노-사가 공평이 나누어 갖게 될 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희망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를 주지 못했다. 우리는 그 희망 대신 간이 알맞은 무말랭이가 우리의 공장 식탁에 오르기를 더 원했다. 변화는 없었다. 나빠질 뿐이었다. 한 해에 두 번 있던 승급이 한 번으로 줄었다. 야간 작업 수당도 많이 줄었다. 노동자들도 줄였다. 일 양은 많아지고, 작업 시간은 늘었다. 돈을 받는 날 우리 노동자들은 더욱 말조심을 했다. 옆에 있는 동료도 믿기 어려웠다. 부당한 처사에 대해 말한 자는 아무도 모르게 쫓겨났다. 공장 규모는 반대로 커갔다. 활판 윤전기를 들여오고, 자동 접지 기계를 들여오고, 옵셋 윤전기를 들여왔다. 사장은 회사가 당면한 위기를 말했다. 적대회사들과의 경쟁에서 지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말이었다. 사장과 그의 참모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107쪽

그는 내가 죽은 조합을 살려냈다고 말했다. 그의 말들을 나는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어요."
내가 말했다.
"알아."
지섭이 받았다. 나는 그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너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 일을 따라 했을 뿐야."
(중략)
"방송통신고교도 중간에서 그만뒀고, 대학은 생각도 못 했어요. 그래서 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고, 모르는 것은 아무나 붙잡고 물었어요. 여기 와서도 모르는 게 많아 노동자 교회에 가 두 어른에게 배웠어요. 대학 부설 기관 교육도 그래서 받은 거예요."
"그래서, 뭘 얻었니?"
"눈을 떴어요."
"너는 처음부터 장님이 아니었어!"
지섭이 큰 소리로 말했다.
"현장 안에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깥에 나가서 뭘 배워? 네가 오히려 이야기해줘야 알 사람들 앞에 가서 눈을 떴다구? 장님이 돼버린 거지, 장님이, 그리고, 행동을 못 하게 스스로를 묶어버렸어. 너의 무지가 너를 묶어버린 거야. 너를 신뢰하는 아이들을 팽개쳐버리구."-255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09-01-31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쏘공을 읽으셨군요. 29쪽의 저 말은 외우고 다니던 말. 아. 이 책은 제일 좋아하는 책을 물어보면 고민 끝에 대답하게 되는 책이에요...

마늘빵 2009-01-31 21:55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끝까지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전에 단편으로만 읽었는데. 각각의 단편들이 완성도를 갖추면서, 또 이 단편들이 모여서 새로운 틀을 만들더라고요. 조세희씨가 이 책을 집필하고, 그 후로 책을 쓸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럴 만하구나 생각했어요.

Mephistopheles 2009-01-31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정말이지 시대의 아픔이에요. 과학과 문명이 발전하고 시대가 흐르면 뭐하나요. 그들의 달력은 저 책이 쓰여진 그 시기에서 한장도 안넘어갔는데요.

마늘빵 2009-01-31 21:5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 책이 처음 쓰여진게 1978년인데, 지금은 이 책에 들어있는 것보다 더 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