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구판절판


"예술에서 혁신은 내용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고, 기술에서 나온다."(발터 베냐민)-7쪽

영화는 정신적 지각의 대상을 제작하는 행위에서 점차 신체적 체험을 연출하는 행위로 변해가고 있다.

"기술을 통해 인류에게 하나의 자연이 조직되고 있다."(발터 베냐민)-9쪽

렌즈는 소수를 전지한 간수로 만들면서 다수를 무력한 수인으로 만든다. -10쪽

디지털 시대는 새로운 상형문자의 시대다. 윈도 창문의 아이콘처럼 오늘날 이미지와 텍스트는 하나가 되고 있다. 문맹 대중에게 의미를 그림으로 보여주어야 했던 시대에는 해석의 다의석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원주의 시대에 지성적 몽타주의 해석적 모호함은 외려 미적 매력이 될 수 있다. 디지털은 영화로 하여금 제 언어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29쪽

글쓰기는 청각을 시각으로 바꾸어놓는다. 하지만 글자를 피부에 쓸 때, 글쓰기는 촉각이 된다. 그리고 그 종이의 냄새를 맡을 때 글쓰기는 후각이 된다. "종이 냄새는 모두 좋았다. 모두 살갗 냄새 같았다."(<필로우북>) 청각과 시각이 후각과 촉각이 될 때, 글쓰기는 섹슈얼리티로 연결된다. -35쪽

19세기까지의 주요한 이미지는 회화나 그래픽처럼 손으로 직접 그리는 ‘원작 이미지’였다. 20세기의 이미지는 장치로 찍은 그림, 즉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복제 이미지’였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것은 ‘생성 이미지’. 여기서 앞의 두 이미지는 하나가 된다. 원작 이미지는 없는 것도 그릴 수 있으나 묘사한 생생함이 떨어진다. 복제 이미지는 사실성은 뛰어나나 피사체를 요구한다. 그런데 생성 이미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진적 사실성을 가지고 생생하게 나타난다.
‘컴퓨터그래픽’이란 결국 만화와 사진의 결합이다. 만화는 맥루언식으로 표현하면 정세도(해상도)가 떨어지는 전형적인 ‘쿨미디어’다. 하지만 그래픽이 컴퓨터를 만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컴퓨터는 그래픽을 뜨겁게 달군다. 디지털 기술은 그래픽의 환상적 이미지에 사진보다 더 실감나는 고해상의 하이퍼리얼리티를 부여한다. 이때 환상은 관객의 눈앞에 사실보다 더 실감나는 현실로 나타난다. 환상이 고해상의 실재가 되어 나타나는 것. 이것이 오늘날 대중이 겪는 새로운 이미지 체험이다. -41쪽

(unheinlich(uncanny, 不氣味)에서 오는 섬뜩함에 관하여)
시체의 표정과 좀비의 동작을 닮은 휴머노이드가 불쑥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사망 가설)이라고 한다. 다른 가설에 따르면 뭔가 결함이 있어 보이는 존재가 종족의 유전자 풀에 섞여 들어오는 것에 생명체가 본능적 거부반응을 보이기 때문(진화 미학적 가설)이라고 한다.아무튼 인간-기계의 관계는 원래 1인칭-3인칭의 관계이나, 그것을 1인칭-2인칭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는 분명히 어떤 섬뜩함이 있는 게 사실이다. -53-54쪽

50년대 미디어 철학자 권터 안더스는 <인간의 골동성>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기술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나, 인간의 자연적 신체와 정신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그 격차로 인해 날로 새로워지는 테크놀로지 앞에서 인간이 ‘골동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얘기. 미디어가 새로워지고 신체는 고루해진다. -97쪽

‘사이보그’라는 낱말은 그 사이에 ‘심보그(symborg)’라는 신조어로 진화했다. 'symbios'와 ‘organization'의 합성어인 심보그는 한마디로 인간과 동물, 신체와 기계, 가상과 현실의 공생관계 위에서 살아가는 유기체를 가리킨다.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 진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명 자체가 실은 다른 생명체와의 공생을 통해서만 탄생하고 존속할 수 있다는 얘기. 이 자연현상을 인공적으로 수행하는 존재가 바로 ’심보그‘다.
사이보그가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이식된 타자에 대한 자아의 지배를 의미한다면, 심보그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평등한 공존을 함축한다. 어느 퍼포먼스에서 스텔락은 여러 개의 낚싯바늘로 제 몸을 공중에 띄웠다. 인포머틱과 로보틱스를 결합한 이 퍼포먼스에서 그는 네티즌들로 하여금 인터넷을 통해 원격으로 크레인을 조종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그의 신체는 더 이상 그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와 공존하는 어떤 것이 된다. (계속)-100쪽

(이어서) 그 타자가 굳이 기계나 기관처럼 물질성을 띨 필요는 없다. 오늘날 누구나 사이버공간에서 자기의 ID를 갖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바타’라는 이름으로 제 자신의 화신을 갖고 있다. 숙주가 돈을 들여 아바타를 먹여주고 입혀주면, 아바타는 그 대가로 숙주에게 삶의 보람과 기쁨을 선사한다. 심보그는 자아가 사이버공간의 이 도플갱어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게 된 어떤 상황을 가리킨다.
-100쪽

"국가와 전쟁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아는 문제는, 지각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본성을 갖는다."(메를로 퐁티)-162쪽

문화적 기억은 한 사회의 대부분의 성원에게 공유된다. 하지만 기억을 수정하고픈 사람들도 있게 마련. 가령 <조선일보>가 건국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우리 헌법에 기입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사제(私製) 대한민국의 법통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승만 독재는 4.19 민주이념에, 박정희의 친일은 3.1운동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조선일보>의 옆차기는 가망없는 위헌적 망동에 불과하다.
최근 박근혜 대표는 5.16을 "구국혁명"이라 불렀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쿠데타의 정의 자체가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의 견해는 집단의 문화적 기억이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의 사제 기억에 머물 뿐이다. -272-273쪽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당시에 <조선일보>의 김대중 전 주필은 광주 시민을 '폭도'라 불렀고, 실제로 광주 시민은 오랫동안 공식적 기억 속에서 '폭도'로 지내야 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강요한 그 기억은 그저 단기기억에 불과했다. 오랜 싸움 끝에, 광주의 시민군은 오늘날 장기기억 속에 민주화 유공자로 기입됐다. 심지어 한나라당의 정치인들도 이제는 광주를 참배하는 것으로 정치일정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인터넷에 모인 '전사모' 회원이 1만 4천 명이라 한다. 하지만 어느 사회나 제 분량의 또라이를 갖고 있게 마련이다. 독일사회에도 그 정도 분량의 네오 나치는 서식하고 있다. 문제는 이 소수의 얼빠진 이들이 아니다. 광주의 빛을 바래게 하는 것은 그 기억을 현실 정치에서 정략의 수단으로 써먹는 이들이다. -275-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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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9-01-11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기술미학으로 영화를 읽어나가니 확실히 여타의 영화 평문들과는 다르더군요. 읽고 있는 책 반가워서 댓글 남기고 갑니다.

마늘빵 2009-01-11 23:03   좋아요 0 | URL
^^ 재밌는데 조금 어렵더라고요. 잘 모르는 영화 기술적 개념들이 많이 나와서요. 근데 계속 읽다보면 또 중복되는 부분이 있더군요.

2009-01-11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1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1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1 2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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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2 01: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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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2 09: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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