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에서 일요일에 벌어진 무자비한 국가 공권력에 의한 폭력사태 이후, 월, 화, 수, 목 4일을 쉬었다. 월요일은 철학자 김상봉 선생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기 위해, 화요일은 회사 야근, 수요일은 정말 쉬고, 목요일은 약속이 있어서, 결국 이래저래 제대로 쉰 건 수요일 뿐이었는데, 그렇게 4일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 6월 6일 현충일, 여덟번째 촛불집회에 나갔다. 어제부터 계속된 주말연휴 72시간 연속 릴레이 촛불집회인지라 사람들이 많이 왔고, 또 밤을 샜나보다. 전에 같이 잠시 밴드하던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 어디세요. 저는 어제 밤새고 잠깐 쉬러 피씨방 왔어요.", "응 조금 이따 갈거야."

  푹 쉬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밥 먹고 뭉기적대다가 잠깐 또 누워 잤다. 그리고 활동하기 편하게 평소 가지고 다니던 회사원 가방을 놔두고 조그만 크로스백에 꼭 필요한 물품 - 휴지, 수건, 피켓, 카메라, 수첩, 볼펜, 눈물약, 핸드폰 배터리 - 만을 넣은 채 가벼운 몸으로 시청으로 향했다. 저녁에 추울 것으로 예상되어 긴팔남방을 입고 나갔는데 어이쿠, 오늘은 많이 춥더라. 외투를 가지고 나왔어야 하는건데. 사람들은 어찌 알고들 돗자리며, 먹을거리며, 외투며 바리바리 싸들고 나왔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아예 밤을 샐 생각을 하고 가지고 나온게다.

  4일을 쉬었더니 그 동안 시위 양상이 달라졌다. 경찰의 폭력진압과 집단구타, 물대포 강경 대응은 더이상 찾아 볼 수 없고, 그러다보니 닭장차로 바리케이트 친 경찰들과 시민들의 물리적 접촉 또한 아예 없다. 왜냐. 시민들은 언제나 평화적으로 행동했는데 먼저 시민을 연행하고 폭행하고 구타하고 곤봉으로 내리치고 군화로 짓밟은 건 그네들이었으므로. 그네들이 그러지 않으면 시민들이 그네들을 건드릴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거 이대로 가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게, 청와대로 가는 모든 길목이 다 이렇게 막혀있다면 다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시위를 계속해 나가야 하는데, 별 다른 묘안이 없다는 것이 문제. 이렇게 죽치고 앉아서는 돌파구를 마련할 수가 없다.

  어제 오늘 시청 광장은 북파공작원 어쩌고 하며 사칭하는 이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시민들은 그 옆에 빙 둘러싸고 촛불 집회를 계속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가운데 뻥 뚫린 원 하나를 주변에 촛불 행렬이 가득 에워싼 격이 될텐데, 뭐 시청 광장에서하든 밖에서하든 상관이 없는게,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알아서들 촛불 하나씩 들고 자리를 잡고 앉는다. 오늘 무대엔 동영상의 주인공 한 분이 올랐다. '너클 폭행'의 피해자인 남자분이 올라와 인터넷에서 자기에 대한 말들이 많아서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나왔다고. :) 근데 걱정스러운건 스타렉스가 데려갔다는 실신한 그 분이다. 이야기는 많지만 명쾌하게 확인된 바는 없다. 

  오늘은 집에서 시청까지 두 번 왕복했다.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갔다가 앉아있는데 갑자기 신발 밑창이 뚝 떨어지는 것이다. 헉! 이게 뭐냐. 왜 갑자기 구두 밑창이 떨어진다냐. 2년전쯤 걷다가 갑자기 그리된 적이 한 번 있긴 했지만, 참 그냥 품질보장할 수 없는 값싼 길거리표  산 것도 아닌데 너무하잖아. 한 발을 질질 끌며 주변에 구두수선점을 찾는데 오늘이 휴일인지라 다 닫았다. 결국 할 수 없이 집으로 질질 끌고 가서 다른 구두로 바꿔 신고 다시 시청으로 돌아와 행렬에 들어갔다. 나 혼자였다면 그냥 에이씨 오늘은 날이 아니네 하고 집에 가버리고 말았을텐데,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지라 그럴 수 없었다. 다시 돌아왔을 땐 이미 행진이 진행 중이었다.

  함께 하던 사람들과 만나 무리(?)를 지어 시청에서 남대문, 회현역, 그리고 어딘가로 계속 갔는데 나는 도통 이 거리를 10년 넘도록 다녀도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지형도가 지하철 역을 기준으로 머리에 박혀있는지라 안가던 길을 가면 어딘지 모른다. 어쨌든 광화문 근처 어딘가로 갔는데, 아니 그 많은 20만의 시민들이 다 어디로 사라지고, 중간 대열에 있던 우리는 대략 2-3천 정도의 시민들과 함께 중간에 버려졌다. 앞엔 또 닭장차들이 바리케이트를 잔뜩 쌓고 있었고, 아예 길거리에 주저앉아 가지고 온 과자며 야쿠르트를 먹고 수다를 떨다가 주변의 재밌는 광경들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분명 일요일까지는 이런 광경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기타와 엠프를 들고 와 연주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려대 무슨 동아리인지 과인지에서는 대여섯명이 호랑이 옷을 입고 와 "쥐.를.잡.자." 외치며 계속 주변을 맴돈다. 사람들이 각자 집에서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온 것도 인상적이었다. 가장 강렬했던 것은 "글로벌 호구"라는 문구였는데, 큭큭, 그 말이 정말 맞다. 글로벌 호구. 어떤 여고생은 가방 뒤에 팻말을 달았는데, 적혀 있는 문구가 대략 이런거. "학명 : 이메가마우스" 아래로는 중얼중얼중얼. 대략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팻말처럼 문구를 작성해 가방 뒤에 매달았는데 참 머리들 잘 돌아간다. 큭큭. 사람들 구경하는 것만해도 재밌다.

  깃발도 흥미로웠는데, 대걸레 자루에 천조가리를 매달아 오신 분도 있었고, 대개는 낚시대를 이용해 깃발을 만들어 왔다. 정말 급했는지 낚시대에 청테이프로 덕지덕지 천을 붙여서 오신 분도 있었는데 바람이 부니 금방 휘어버리더라. 인쇄소에 맡겨 새긴 천도 아니었고, 그냥 손으로 썼는데 잘 보이지도 않고. 시위 초기에는 당기가 많았는데, 지금은 대학깃발과 인천 계양구, 대전 머머구 등의 각 지역별 깃발이 눈에 많이 띄었다. 다음의 아고라 인원도 엄청났는데, 앞에서 깃발 한번 세우니 뒤에 따르는 이들이 대략 천명은 넘는 듯 했다. 이번 촛불시위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건, 아고라와 마이클럽이다. 아고라는 온라인에서는 각종 담론을 만들고, 오프라인에서는 함께 발로 뛴다. 마이클럽은 아줌마들의 조직력과 자금을 바탕으로 신문광고도 내고 우비나 초, 종이컵 등을 지원하는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해줬다.

  한바퀴 돌고 광화문에 도착해 시민들은 각기 모여 공연도 하고, 수다도 떨고, 웅변(?)도 하고, 나름의 놀이문화를 즐겼는데, 글쎄 경찰과 대치하며 함께 구호를 외칠 게 아니라면 굳이 밤을 새야 할 이유는 없어서 오늘은 이만 철수했다. 이제 시위는 하나의 축제가 되어가고 있다. 경찰과의 대치보다는 드넓은 광장에 모여 각자의 놀이를 즐기는 쪽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시위 참여시 준비해야 할 것은 더이상 우비나 우산, 마스크, 대일밴드가 아닌, 음료를 포함한 먹을 것, 돗자리, 외투, 함께 놀 거리 등이다. 각자 가지고 있는 재주를 드넓은 광장에서 뽐낼 도구들, 개성있는 문구와 피켓도 축제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이다. 축제가 되지 않으면 시위는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이제 직접 나와 자신들의 메세지를 명확히 표현하는 것을 넘어, 시위를 즐기고 있다.

p.s. 오늘 함께한, 네꼬님, 그리고 네꼬님 친구분(이름도 모르네요), 두세차례 함께한 마노아님, 멜기세덱님, 지난 토요일 물대포 맞고, 오늘은 원고 마감하고 합류하신, 지금 홀로 남아 밤을 지새우시는 시비돌이님, 그리고 시비돌이님과 함께 오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분(이름을 모르네요), 도착하고 처음 만난 웬디양님, 우리와 별도로 대낮부터 명동 근처에서 거리행진을 했던, 오늘은 결국 만나지 못한, JADE님, 제게 연락은 없었고 만나지도 못했지만 그 시간 어느 곳에서 함께하셨던 섬사이님, 그 외 그곳에 계셨던 다른 분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내일은 부산에서 글샘님이 오십니다. 환영시위(?)를 해야겠네요.

p.s.2 지금(02:30) 오마이뉴스 티비를 켜니 상황이 급반전됐다. 새문안교회와 세종문화회관 뒷길 부근에서 경찰과 시민이 격렬하게 대치중이다. 내가 있던 광화문만 축제의 장이었구나. -_- 시위대가 너무 많아 여럿으로 쪼개지는 바람에, 다른 곳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알았다면 그곳으로 갔을텐데. 분말소화기 쏘고 또 난리도 아닌거 같은데 지난 토요일과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 일단 티비로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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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6-07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랬군요.... 역시 정보가 중요해 ㅜㅜ

마늘빵 2008-06-07 02:46   좋아요 0 | URL
아 지금 오마이뉴스 보고 있는데, 우리 있는데만 그러고 놀았던거였어요.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갔나 했는데, 다들 분산되어 있었군요. -_- 다 집에 갔나보다하고 집에 왔더니.

웽스북스 2008-06-07 02:51   좋아요 0 | URL
보고있어요, 역시 좀더 둘러봤어야 했는데

마늘빵 2008-06-07 02:55   좋아요 0 | URL
아 그러게요. 근데 우리쪽에선 너무 멀었어요. 세종문화회관 뒷길은 어딜 말하는건지 모르겠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