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님이 올려주신 경향신문 기사를 읽다가 페이퍼질. 지금 고등학교에서는 어떻게들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 난 이과/문과 구분이 있는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 -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1학년 때 자신의 성적표를 보고서 대략 수학을 잘한다 싶으면 이과를 가고, 그렇지 않으면 문과를 가는 식이었다. 요 기준 말고 한 가지 기준이 더 있는데, 적성검사다. 적성검사를 1학년 때 한번 했는데 당시 나는 토목, 기계 계통에서 유난히 기다란 막대 그래프를 그렸고, 나머지 분야는 다 거기서거기 고만고만 도찐개찐이었다. 수학을 잘했고, 적성에도 이공계열로 나왔고 당연히 이과로 가야된다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렇게 갔다.

  딱히 뭐 진로선택에 있어 상담이라고 할 만한 것도 받아본 적이 없고, 적성검사와 자신의 성적표가 말해주는대로 선택을 하는게 자연스러웠는데,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진로선택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싶다. 글쎄 누가 이런 분위기를 조성했는지 모르지만 그건 개별 학교의 선생님들의 의도적인 계획은 아닌게 분명하다. 왜냐면 우리학교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고등학교 1학년생들도 모두 그런 식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분위기였으니까. 보통은 남자들이 수학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고, 여자들은 문학, 어학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여, 남녀공학이 아닌 남학교, 여학교가 따로따로 분류되어 있는 곳에서는 남학교엔 이과반이, 여학교엔 문과반이 월등히 많았다.

  내가 있던 학교도 총 열 세반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그 중 문과반은 다섯 반 정도였다. 그러니 나머지  여덟 반이 이과반이었고, 5:8은 타 학교에 비하면 그다지 심한 것도 아니었다. 반면 내 동생이 다니던 여학교는 이과반이 두세 반 정도였던걸로 기억한다. 그렇담 나머지는 모두 문과반이겠지.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학에 와서도 이공계열엔 신입생 중 여학생이 가뭄에 콩나듯하고 그 중 어쩌다 이쁜 아이가 있으면 선배와 동기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즐거운 대학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라고 말하면 외부에서 바라본 주관적 해석이고, 나름 그네들 딴에는 여학생이 몇 없다보니 같이 어울릴 친구들이 없어서 적응하지 못해 자퇴를 하거나 전과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반면 인문계열 학과엔 여학생들이 넘쳐나서 특히나 영문학과의 경우엔 4/5 정도가 여학생이었다. 내가 다니던 철학쪽에는 그냥 반반 이었던듯. 묘한건 남자이면서 수학을 잘하고 적성검사에 이공계열이 나오면 당연히 이과를 선택해야 하고, 여자이면서 영어, 국어를 잘하고 적성검사에 문학, 어학계열이 나오면 당연히 문과를 선택해야 한다는 현실. 뭐 마땅히 다른 기준이 있는건 아니지만 한갓 1년간 성적표의 과목별 점수와 등수, 단 한번의 적성검사에 의해 자신의 진로를 단번에 결정해버리는 건 아니다 싶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이과반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고 졸업 전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두고 문과로 과감히 전과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고 - 보통 이때 계열을 바꿔버리면 행정상의 문제로 샘들한테 무쟈게 욕 얻어먹는다 - 그렇게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경상계열에서 인문계열로 또한번의 만행(?)을 저질렀다.

  처음에 이과를 선택한건 나의 의지보다는 주어진 도표와 점수, 그리고 선생님과 부모님이 조성한 분위기 때문이었지만, 이후 문과로, 또 인문계열로 바꿔타기를 한건 그냥 나의 '감(感)'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주어진 도표와 성적표, 주변의 조언보다는 나의 감대로 움직인게 나를 더  편하게 만들었고, 나는 나의 두 번의 선택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복수전공을 하나 할걸 하는 후회는 있다. 국문학이나 사회학 같은 걸로. 전공을 공부하면서도 나는 한 분야를 깊이 파기보다는 관련된 주변의 다른 것들을 찝쩍거리는데에 더 관심이 많았고, 자꾸만 외도를 했다. 그 외도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아마도 과거에 나의 감 - '흥미'라고 대체해도 무방 - 을 쫓아봤는데 후회하지 않았고, 그래서 계속해서 감대로 살아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하고픈 말은 저 위에 있었는데 손가는대로 쓰다보니 삼천포로 빠졌다. 내가 하고픈 야기는 학생들이 자신의 과목별 성적 분포와 적성검사, 혹은 부모님과 선생님의 미묘한(?) 분위기에 따라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수학을 대따 못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무진장 열심히 했다. 그 아이는 내가 이과를 선택한 이후에 만났는데, 수학을 못하면서 어떻게 이과를 올 생각을 했지, 라고 생각했다가 스스로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철회한 적이 있었다. 수학 못해도 이과와도 된다. 다만 좋아하는 만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얻으면 된다. 그리고 수학 못해도 이공계열 진학해서 훌륭한 사람 될 수 있다, 고 말하고픈데 한 가지 걸리는게 있다. 대학 입시에서의 특정 영역에 대한 가산점. 이공계열 가고 싶어 이과 선택했고 열심히 했는데 가산점 받는 영역에서 생각만큼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지. 이런 불행한 일이. 결국은 1학년 때 점수 따라 그냥 계열 선택해야 한다는 건가. 쩜쩜쩜. 결론!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그걸 감수하고라도 좋아하는걸 하겠다면 해야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08-02-09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학년 2학기때 과감히 계열을 바꾸신 용기,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왜 그런 용기가 없었을까요.

마늘빵 2008-02-09 16:40   좋아요 0 | URL
아 그건 용기라기보다는 그냥 '감'이에요. ^^ 그때 이후로는 그냥 마음 가는대로 산다는. 그래서 한 곳에 집중 못하고. -_-

멜기세덱 2008-02-09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적성검사에서 이학계열이 월등히 높게 나왔고, 수학을 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재밌어 했던 터라, 덜컥 이과엘 갔는데, 물리, 화학, 생물 기타 등등 때문에 완전 포기...ㅋㅋ
누군가 왜 이과에서 문과로 바꿨냐 물으면, 수능 원서 쓸 때 원서에 계열 체크를 잘못해서 그렇다고....ㅋㅋㅋ

마늘빵 2008-02-10 09:03   좋아요 0 | URL
크크. 물리, 화학이 이과가서 어려워지죠. -_- 저도 물리가 대략 난감;; 근데 원서 쓸 때 계열체크를 잘못하면 불이익보고 들어갔을텐데... 저도 그때 에이 다 귀찮아 아무데나 가, 이러면서 스스로를 막 망치하다 마감 시간도 제대로 몰라 다 끝나고 가서 받아달라고 사정했던 기억이. ( '')

깐따삐야 2008-02-0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워낙에 흥미나 적성이 문과 쪽으로 뚜렷했기 때문에 계열 선택 문제로 고민을 하진 않았어요. 다만 순수문학을 하고 싶었는데 여러 가지 여건 상 사범대에 오게 됐죠. 여전히 미련이 있지만 이제는 취미로만 만족하는 정도.
가끔 아이들 진로 지도를 하다보면 자신이 뭐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어서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그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마늘빵 2008-02-10 09:05   좋아요 0 | URL
그러면 차라리 나은거 같아요. 아예 뚜렷하면 게다가 흥미와 적성까지 일치해버리면 일찌감치 정하면 되는데. 음, 저도 순수, 기초계열에 더 관심이 있어서 사회학이나 인류학, 심리학 요런거보다는 철학에 더 관심이 많이 쏠렸어요. 좋아하는 것만 알아도 사실 끝나는데, 좋아하는건 계속 변해가더라구요.

건조기후 2008-02-10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같은 경우엔 어렸을 때부터 문과 기질이 뚜렷해서 진로 고민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하지만 의아스러웠던 건 적성검사를 할 때마다 자연계로 나왔다는 건데, 전 아직도 그런 검사들이 별로 믿을 게 못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근데 수학은 정말 흥미도 없고 싫어했는데 과학은 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 모두 굉장히 재미있게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구과학같은 건 너무 좋아해서 야간자율학습 3교시 내내 붙들고 있었던 적도..ㅎ 과학 쌤들이 수학 못하면 과학도 좀 힘들다 하실 때마다 속으로 좀 웃어줬죠.; 왜 처음부터 저런 부정적인 발언을 내뱉는지 이해가 안되기도 했고.

암튼 지금까지 저도 관심사가 여러 번 바뀌었는데,, 그래봐야 문과 테두리 안이더라고요. 역시 선택은 스스로 해야.. 가장 행복하고 또한 가장 덜 불행한 것 같습니다.

마늘빵 2008-02-11 09:22   좋아요 0 | URL
진로적성검사 그거 정말 믿을 거 못되는거 같습니다. -_- 사실상 무슨무슨 검사 하면 일방적으로 100% 신뢰해버리는게 테스트 받는 이들의 입장인데, 이거 참 위험하게 만들어요. 그냥 참고 자료로만 삼아야 하지만, '테스트'라고 하면 무조건적 신뢰를 보내는 과학적 검증 장치쯤으로 여기게 되거든요. 저도 그렇구. 그때그때 그 아이가 원하는 것에 따라서, 혹은 잘하는 과목에 따라서, 흥미에 따라서 변하는거 같기도 하고.

수학선생님들이 그런 발언을 자주 하십니다. 선천적으로 남자는 수학을 잘하고, 여자는 수학을 못한다,는 식. 실제로 정말 그런지 어떤지 알 수는 없지만, 일부러 이런 발언을 해가면서 주눅들게 팔 필요는 없는데 말여요. 애초부터 흥미를 꺾어버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