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논문 관련 서적들을 읽다보니, 읽고픈데 번역서가 없는 책이 많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이런 책도 있었던가 싶어서 인터넷 검색해보면 제목도 안나오고, 당연히 역서가 있을거라 생각했던 책들까지도 외면받고 있었다. 예전엔 찾아 읽는 식이 아니라 찾아 읽긴 읽는데 '국내서적'이란 테두리 안에서 찾아 읽다보니 그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던게다. 시야가 좁은게야. 간혹 헌책들을 뒤지면 최신 번역본은 아니라 할지라도 중요단어는 한자로만 채워진 옛말투의 번역본을 가끔 찾을 수 있기도 하다. 예전에 삼성문고에서 나왔던 헤겔의 <역사철학강의>같은 책은 심지어 세로로 작성되어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어간다. 학부 때 이 책 보느라 눈에 쥐 나는줄 알았다. -_-
대표적으로 존 로크의 <통치론> 이나 <시민정부론> 은 있는데, 그의 다른 저서 <종교 관용에 대한 편지>(1689년)는 오래된 번역조차도 없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란 책으로 유명한, 최근에는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라는 책도 나왔고, <추측과 논박>이란 두 권 짜리 책도 나온 칼 포퍼의, 그의 다른 저서 <관용과 지적 책임>(1987년)은 번역이 안되어있고, 또 코헨이며, 마르쿠제며, 이히하이저며, 프레스톤 킹 등의 책도 역서가 없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읽고 싶었는데, 폴커 게르하르트라는 베를린의 교수가 지은 책이 2007년 7월에 나왔다. 근데 이게 저자가 칸트라 아니라 폴커 게르하르트라는건 칸트의 저서를 내놓은게 아니라 새로 저자가 '다시읽기'를 해서 그의 저작으로 내놓은거 같은데.
역서가 없으면 원서로 보면 되겠지만, 값도 비싸고 읽기도 어려우니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그냥 버려두고 다른 책을 선택하게 되는건,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프레스톤 킹이라는 사람의 책은 이곳 저곳, 이 논문 저 논문에 계속 인용되고 있는데, 굉장히 오래된 책인데 나중에라도 꼭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른 사람들의 책도 마찬가지지만. 그 외에도 유명한 철학자들의 다른 책들도 변억서가 안나온게 많고 그나마 나온 것도 절판된 경우가 흔하다. 많이들 안사니 값은 값대로 비싸고, 나온지 얼마 안돼 또 금방 사라져버리고.
한편에서는 같은 번역서가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한다. 유명한 <어린왕자>나 <데미안> 같은 책들이 대표적. 여러 곳에서 내도 꾸준히 많이 팔리는 책이기 때문에 충분히 장사가 된다는거지. 하지만 안 읽어주는 책들은 번역서가 나와도 어느 순간 쑥 들어가버린다. 같은 책은 반복해서 이곳저곳에서 또 내고, 외면 받는 책들은 번역조차도 안되는 현실. 요즘 읽기 어려운 고전을 씹기 좋게 만들어 내놓는 '잘 만들어진' 책도 있는데, 좋은 흐름이다. 하지만 역시나 이도 논술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안타깝다. (그래도 논술 핑계삼아라도 이런 책 읽는게 어디냐) 출판사도 이윤이 남아야 장사를 해먹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을 출판사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도 않다.
궁극적으로는 번역가에 대한 대접 문제가 아닐까. 교수들, 시간강사들, 박사님들 번역한다고 해서 점수 올라가는 것도 아닌지라 - 반영 되어도 얼마 안된다고 들었다 - 번역을 기피하게 되고, 애써 번역해도 오역이라느니 잘못 번역되었다느니 하면서 평단의 돌팔매질이나 당하고 - 물론 번역이 잘 되었느냐 잘못 되었느냐에 대해서 토론하는건 바람직한 현상, 하지만 지금 이 글에선 번역자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봤다 - 6,7년 애써 번역한 제대로 된 책이라 할지라도 그만한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남는건 잘 번역했다, 라는 명예 정도이니 누가 어려운, 봐주지도 않을 철학책들을 번역할까.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힘들어도 열심히 번역할텐데 그렇지 않으니깐. 그렇다고 그런 어려운 책들을 다 봐야하느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나 같이 게으르고 영어 안되는 이들을 위해 많은 번역서가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떤 이는 그 나라 말만 된다면 독일어든 프랑스어든 그리스어든 영어든 원어로 읽는게 가장 정확하고 쉽다고 하지만, 그게 어디 말만큼이나 쉬운가. 한국어만 제대로 하기도 힘든 판에 다른 언어까지 머리에 끼워넣고 싶지는 않다. 혹여 조금 오역이 있다 하더라도 한국어로 꾹꾹 눌러 보고픈 - 뭔가 이상하면 원서를 대비해놓고 보면 될테니 - 마음이다. 천병희 씨나, 임석진 교수 같은 분들이 명예로만이 아니라 다른 물적 조건으로도 편안한 환경에서 번역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두 분의 경제적 여건이 괜찮은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일단 생활이 안되는 역량있는 사람이 애써 번역해도 아무 것도 떨어지지 않을걸 알면서 번역작업을 하기란 어렵다는 점에서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