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하위징아는 (자신이 책으로도 쓴 적이 있는 『에라스무스』만큼이나) 우울증에 시달렸다지만, 놀이하듯이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독서야말로 가장 신성한 놀이의 하나 아니겠습니까. 단, 저자 스스로가 서문에서 인정하고 있듯이, 자신의 학문을 집대성한 마지막 저작, 『호모 루덴스』에 이르기까지도 놀이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충분히 심화, 체계화시키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구사된 용어들에 대하여 자세한 참고문헌을 기대하지 말기 바란다. 문화의 일반적 문제들을 다루다 보니 그 방면의 전문가조차도 아직 충분히 탐구하지 못한 여러 분야를 약탈자처럼 침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약탈로 인한 지식의 부족분을 모두 채워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로서는 지금 당장 글을 써 나가느냐, 아니면 그만 두느냐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놀이는 곧 승복입니다. 놀이 정신을 잃고 승부에만 집착할 때 사회는 야만으로 타락하고 원시 사회의 폭력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게 됩니다. ˝중요한 건 승부가 아니라 게임(인용자 주 : 게임의 과정 자체)˝입니다(네덜란드 속담). 놀이에는 목적이 없는 것이고, 놀이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연성과 유머의 결핍이야말로 지독히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놀이는 지혜와 어리석음, 진실과 허위, 선과 악의 대립관계를 초월하는 `무사무욕(無私無慾)`한 것입니다. 그것은 `일상적` 생활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필요와 욕구의 충족이라는 생활인 논리의 바깥에 있습니다. 놀이는 일상 속의 `인터메조(Intermezzo, 간주곡)`로서 놀이가 주는 긴장 이완은 개인과 사회의 필수품입니다.

놀이는 질서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질서가 됩니다. 놀이는 질서로서 리듬과 하모니를 갖습니다. 게임의 규칙을 무시하거나 위반하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놀이의 본질은 규칙을 지키는 것, 즉 페어플레이이기도 합니다. 페어플레이는 놀이의 관점에서 표현된 `신의성실의 원칙`으로서, 진정한 문명은 놀이 요소가 없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명은 자아의 제약과 통제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은 자신의 이기적 경향을 더 높은 궁극적 목표와 혼동해서는 안 되고, 자신이, 스스로 자유롭게 받아들인 일정한 한계에 의해 둘러싸여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보면 문명은 일정한 규칙에 의거해 `놀이되는` 것이고, 속이거나 놀이정신을 망치는 행위는 문명 자체를 동요시킵니다. 한계를 인식하고 절제하는 자발적인 놀이정신이 우리를 진정한 자유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하위징아는 법률, 과학, 시, 신화, 철학, 예술 등의 성취가 어떻게 놀이본능으로부터 자양분을 얻었는가를 폭넓게 예증하고 있는데, 저자는 전쟁 역시 `게임`, 즉 놀이의 관점으로 봅니다. (놀이정신에 충실해) 상대방의 명예를 존중하며 일정한 제약 사항들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전쟁은 문명의 영역 안에 머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전쟁관으로부터 기사도 정신이 나오고, 나아가 국제법의 아이디어가 탄생합니다. 국제법은 놀이와 마찬가지로 상호 인정의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놀이와 법률의 상관성에 대해서도 하위징아는 길게 서술하고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소송은 경기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지요.

한 가지 덧붙여, 어원적 기원을 탐구해 들어가 문화사적 의의를 끄집어 내는 저자의 역량이 인상 깊었습니다. 하위징아는 어릴 때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아랍어 등 여러 언어에 두각을 드러내다가 산스크리트어 전문가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특히 기억에 남았던 것이 있는데, `school(학교)`이라는 단어는 원래 `여가`라는 의미의 `σχολή(skole)`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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