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 -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이인규 지음 / 조갑제닷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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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나는 이런 류의 작품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저자가 주장하는 사건의 현장이나 조사에 임하지 않았기에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 전체가 확실히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저자의 주장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포함

되어야 할 상대의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밖에 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말을 하면 저자로부터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할 우려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저자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나는 개인적으로 감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신혼 초 요리에 자신이 없던 집사람이 시도때도

없이 매끼니마다 감자채 볶음을 많이 해 줘서 그런지 감자라면 신물이 난다.

그럼 감자와 저자가 무슨 상관 관계가 있냐고 묻는데, 저자가 현직에 있을 당시 매스콤에 저자가

비춰지면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저자를 삶은 감자로 불렀다.

왜냐하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인데 어떤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저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통통한 얼굴이 감자를 닮았다는 나의 의견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크게

 동감할 것이라 확신한다)


서설은 폐하고, 진짜 추천하지 않은 이유로는 이런 부류의 작품들은 저자들이 재직 시

지득한 정보를 활용해 자신을 미화, 영웅화한다는 점이 마음에 안 들어서이고 어떤 작품이든

결과론적으로 나는 잘했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나는 그런 측면에서 위인전도 좋아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영웅 이야기가 대다수라 -

위와 같은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뜻 해당 작품을 고른 이유는

이런 저런 우리 정치사에 숨겨져 있을 이야기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크게 두 가지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이 이뤄지고 있는데 하나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대기업들의 돈지랄과 고인이 되신 대통령에 대한 수사 과정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저자의 주장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 저자가 수사를 담당했기에

전체적으로 저자의 주장이 맞는다는 전제하에 - 사안별 진위 여부는 읽는 사람과 이와 연관된 

사람만이 정확히 알 뿐, 저자의 내용을 읽고 옳으니, 그르니 비분강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특히 현재의 야당에서 그런 것 같은데...저자의 주장이 틀리면 이를 반박하는 저자의 유사한 

작품을 만들어 내면 그만인 것이다.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지 않는가, 반면에 이를 접하는 독자들은 작품에서 읽고 느낀

사항을 기반으로 자신의 뜻을 투표로 답을 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작품을 읽는 내내 짜증이 증가되었는데 그 이유는

현실에서는 어떤 연유가 있어 그러하겠지만 검찰 수사가 재벌들에게 너무 관대하게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선거 자금과 관련된 대기업 수사와 관련된 내용을 읽다보면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런 거 저런 거 다 조사하겠다

는 엄포를 놓았다는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문제가 있으면 전부 조사를 해서 명명백백

가려야지 검찰 조사에 협조 했다는 이유만으로 조사를 느슨하게 혹은 혐의점을 빼고 하겠다는 

표현이 자주 나타나고 있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자도 이야기했지만 검찰은 법에 입각해 정확히 수사를 하면 되는 것이고 판단은 판사가 하는 것이지 검사가 판사의 역할까지 하면서 돈 있고, 힘 있는 대기업이라고 해서 작은 허물이라고 

판단하여 덮고 가려는 듯한 인상을 주는 대목은 그리 좋은 내용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후반부에 자신의 고향에서 책방을 내신다는 문 모씨에 대한 이야기가 한가득 나오는데....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었던 것으로 보이는데....꿈 깨시고 기대할 것을 기대했으면 한다.

 

작품을 총정리하는 의미로 여겨지는 문구(479)가 눈에 들어와 여기에 옮긴다.


지금의 시기는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위기에 처했다. 극단적 지지 세력에 휘둘린 정치인들과 본분을

 잊고 법과 절차, 상식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평범한 소시민이라 할지라도  

진실과 탈진실이 투쟁하고 지성과 반 지성이 충돌하고 있다. 밝고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거짓에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는 자세로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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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끝자락에 서서
양장 지음, 윤지영 옮김 / 슈몽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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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읽는 초기에는 앞 쪽에 읽었던 원청이라는 작품과도 같은 실망감 속에 

외국 소설이 다 그렇지’ 

하면서 일종의 작품에 대한 폄하 아닌 폄하를 하였는데, 작품을 넘기면 넘길수록 다가 오는 

느낌은 이제껏 여러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삶의 속살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내가 

믿고 따르는 종교적 관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을 갖게 하는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개신교 신자인 본인의 눈에 들어온 한 가지 표현법 중 아쉬운 점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시종 일관 하느님으로 표기한 부분이었는데 열혈신도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그 차이를 찾아 보았다. 


[야후 국어사전]


+ 하느님

1. 종교적인 숭배 대상, 또는 신앙의 대상.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지니어 인류에게 화나

  복을 내린다고 믿음. 상제(上帝). 상천(上天). 천공(天公). 천제(天帝). 하늘

2. 가톨릭에서 신봉하는 유일신. 성부(聖父).


+ 하나님

개신교에서, ‘하느님을 이르는 말.


이라고 한다. 받아들이기 나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이런 작품을 읽고 어떤 느낌이나 작품으로부터 받은 소회를 기록하라고 하면 작품 

분량만큼의 내용 - 아니 어쩌면 더 많을수도 있다 - 이 나올 수 있기에 작품에서 언급된 내용 중

그럭저럭 내 가슴에 와 닿은 문구 몇 개를 올려 보았다.

 

-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데 죽음이 무엇인지 알겠느냐?(공자)

- 호인으로 태어나서 악인이 될 재주가 없다면 그냥 손해 보면서 살자, 하면서 사는 거다.

- 사람이 괴롭고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늘을 향해 

  기도하거나 하소연하며 묻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던가?

   내 물음에 답해 주던가? 하나님이 내 기도와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가?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감람산에서 이 고난을 면해 달라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예수의 기도를 들어주었던가?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가 

  자신의 신앙을 버렸던가?

   (나는 작품은 '하느님'으로 표기하였지만 개신교인이기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으로 변경해 적었다)

- ‘도깨비 담장에 부딪혔다고 당황해서 이리저리 길을 찾아서 헤매면 안 됩니다.

   그놈은 자기를 무서워하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앞에서는 어쩔수 없으니 물러난다

- 신념은 마음 속에 존재하는 맹목적이다

  신념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저 깨닫는 것일 수밖에 없다.

- 대자연의 법칙이라고 하는 신념은 지식의 축적에서 시작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닫는 것.

-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진 대자연의 법칙이 결코 우연히 만들어질 수 없음을 믿는다.

  그렇다면 법칙을 만들고 지배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 물질의 돌발적인 움직임에서 일정한 법칙이 생겨났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을 수긍하기에는 과학의 법칙들이 얼마나 세밀하고 확실하며, 얼마나 조금의 

  빈틈도 없고, 얼마나 보편적으로 일치하는가!

   만약 물질이 스스로 이렇게도 세밀하고 정교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면 물질이 아니라 영성을

  가지고 있는 정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각각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일 수는 없다.

  대자연에는 일치하는 하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수는 없다. 대자연에는 틀림없이 신명을

 가진 주재자가 있으며 물질은 그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자연의 신명에 대한 믿음이 축적된 지식으로부터 생겨난 신념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 신념이 합리적인 반증을 거쳐, 번복할 수 없이 옳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믿음이 된다.

  나는 대자연이 신명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혹은 신명이 대자연을 만들었다는 믿음이 충분히 

  이성적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을 미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

  대자연이 가지고 있는 신명, 혹은 신명이 만들어낸 대자연에 대한 호칭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바로 하늘이다.

  보통 하느님혹은 하나님이라고도 부르고 좀 더 고상하게 조물주’, ‘천제‘, ’상제라고도

  부른다. 부르는 방식은 달라도 그것들이 가리키는 실체는 같다.

- 하늘이 내린 본성을 성()이라 하고,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

- 세상이 귀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없다라는 것은 증명하고자

  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 옛말이나 속담은 인류 수천 년 지혜의 결정체이다(세르반테스)

  자고로 허투루 만들어진 속담은 없다.(한비자)

- 인간은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양능(良能)이라고 한다. 또한 인간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것을 양지(良知)라고 한다.

- 인간의 본성 중에서도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양심이다.

  공자는 양심에 대해 꼭 붙들면 보존할 수 있으나 놓으면 없어지는 것이라 했다.

- ‘영혼은 육체에 붙어 하나를 이루며 육체와 함께 느끼고, 욕망하고, 즐기고제멋대로 행동한다.

-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롭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자신도 모르게 너그러워진다.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은 근심하라(공자)

- ‘운명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많은 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일이 정말 내 운명에 이미 정해져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내 성격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볼만하다.

-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인간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의심하게 된다.

-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은 스스로 완전해지고 지극한 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

- 인간의 고귀함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

- 쇠가 불에 의해 달궈지고 단단해지듯, 인간도 걱정과 근심을 하면서 지혜로워지고 고통을

  겪은 후 미덕이 생겨난다.

  끊임없이 시달려야 좋은 사람이 된다

  ‘사람은 세상 속에서 갈고 딱으며, 칼은 숫돌 위에서 갈고 닦는다

  ‘백 번 다듬어야 모양을 갖추고, 천 번 다듬어야 쓸모가 있다

  ‘가장 힘든 고통을 겪지 않으면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기 힘들다

  모든 같은 의미를 가진 문구들이다.

- 나를 이해하려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인식해야 하는데 이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

- 인간의 몸은 쇠망치로 두들기거나 불로 달굴 수 없다 하지만 영성의 양심은 단련하면 할수록 

  더욱 강해진다.

- ‘수신(修身)’,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근본이다.

  세상의 만물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위해서 생겨났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인간은

  선과 악이 뒤섞여 있으므로 단련을 통해 순수해져야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 ‘’

  이 괴로운 세상은 쇳덩이를 담금질하는 공장, 운동선수를 단련하는 운동장,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실처럼 인간을 단련시키는 장소이다이것이 바로 인생이 고달픈 이유이다.

- 쌓은 공덕만큼 인생은 가치가 있다.

  그리고 공덕은 육체에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쌓는 것이니 영혼이 불멸하는 것을

  믿어야만 영혼에 쌓은 공덕이 가치를 가진다영혼의 불멸을 믿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신앙이다그래서 신앙이 있어야 인생이 비로소 가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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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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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1


사기를 당해도 단단히 당했다.

아무리 소설이라고는 하지만.....읽는 내내 고구마 100개는 먹은 것 같다.

짜증나는 독서의 시간이었다. 출판사를 상대로 고소를 할 수도 없고 그냥 안목 낮은 

스스로를 질책할 뿐이다.

작품을 갖고 이러쿵 저러쿵 긴 이야기를 해 봐야 시간만 낭비다

이런 작품은 킬링 타임용으로도 아깝다.

굳이 이번 독서를 통해 얻은 소득을 굳이 들라고 한다면

우리 국내 작가들의 우수성이다

다시 한 번 국내의 모든 작가들님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더욱 국내 작가를 사랑하기로 마음 먹은 귀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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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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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밀레니엄 시대를 평가하면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칭기스 칸과 그의 

후손들이 이룬 업적과 그들이 끼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는 작품을 통해 특정 민족 혹은 뛰어난 특정인 한 사람의 발자취에 대해 또 그 인물이

남겨놓은 역사적 자취에 대한 평가(?)를 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민족)가 남긴 업적의 

이면에 실린 이야기를 파악하면서 내 삶의 귀감으로 삼을만한 그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

하며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작품을 읽고, 나름 정리를 한다고는 하였지만 수준 낮게 정리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전체적인 역사적 관점이 저급하거나 부족하여 여러 적절치 못한 표현과 분석과 

오판으로 인해 나의 이런 글을 접하는 여타의 일반인들이 수준 낮은 분석이라는 질타와

함께 이 모든 것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의 평가라고 폄훼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런

대로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정리한 내용이 의미 있는 행위라 생각하여 정리해 

보았다.


작품을 읽으며 내게 들었던 최우선의 생각은 시대를 달리한 인물이지만 칭기스 칸

‘붉세출의 간웅'으로 불리워지는 조조라는 인물이 닮아도 너무도 닮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지난 2014판세를 읽는 승부사....조조’(위즈덤 하우스)를 읽고 독후감에 

언급한 내용을 다시 한 번 제시함으로써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려

주고 싶다.

해당 작품을 읽고 나는 조조라는 리더에 대해 이렇게 정리를 해 보았던 적이 있다.


첫째, 위기 때마다 조조를 도운 적절한 조력자인맥과 인재가 있었다.

조조는 선친이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환관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도와주려는 

인맥들이 많았다.

오피니언 리더인 교현(橋玄)’, ‘허소와 위기 시마다 그를 도와 준 사마방’(사마의의 

부친)과 심복 전위’ 동탁과 대립각을 세울 때 그를 도운 어린시절 친구 장막포신

장수 우금및 원소의 모사 순욱’, 암살 위기에서 그를 도운 허저’, 변수전투에서 대패

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를 도움 진홍과 조홍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의 도움이 있었고,

조조가 중앙정부를 취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4인방(동소, 종요, 동승, 양봉)은 전부

외부인이었는데 특히, ‘동소종요는 일면식도 없던 상태였다고 하는데 가장 압권은

부인 변 씨를 만난 것이었다.


 둘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포용력이 있었다

불구대천지의 원수인 장수가 투항하자 대범한 아량으로 이를 받아 들였고, 양평관에서

조조에게 강력 대항하던 장로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그의 포용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셋째, 독단적인 판단이 아닌 주변인과의 끊임없는 소통으로 집단을 이끌었다.

좋은 말은 다리에서 나타나고, 능력 있는 사람은 에서 나타나듯이 소통은 역량이고,

혀 끝은 전략 무기로 위기시마다 측근들과 의견을 나누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했넌 

반면조조보다 더 많은 힘과 능력을 지녔던 원소는 자신의 잘못을 감싸고 실패를 회피

했고 정확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싫어했다고 한다.

, 그는 주변 사람의 의견과 건의를 잘 듣는 경청으로 의사결정의 맹점을 제거했다.


넷째 동물적인 기회 포착이 남달랐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서는 타인을 적극 활용하였으며 특히 사태 파악의 귀재

였으며 지속적인 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힘들 때 서민의 애로사항을 정확히 파악해 

서민의 애로사항을 적극 경감시켰으며, 자신이 불리할 경우 세력 구도를 정확히 파악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다섯째, 자기 및 측근 관리에 철저했었다.

자녀나 후궁에게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요구하였으며 딸을 시집보낼 때 모두 검소한

생활을 솔선 수범하도록 하였다는 점은 높이 살만한 행동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그를 보좌하고 있던 많은 자들이 그에 대해 절검하고 청렴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조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할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의 친인척 관리에 대한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해 보면 

변 황후의 동생이 집을 지어 이를 축하하기 위해 식사를 했는데, 상에는 나물과 조밥뿐

 어육은 놓이지 않았다

고 한 것으로 보아 어떤 행동을 한 인물인지 엿볼 수 있다 할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만 읽으면 칭기스 칸이 어떤 인물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품을 읽으며 칭기스 칸의 생몰 년대와 가족 관계, 권력 다툼에 대한 주제가 

아닌 그런 이면에 숨겨진 내용과 배경 그리고 역사적 영향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본격적인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그가 남긴 영토에 대해 우선 이야기해 

본다면 통치 및 정복 면적을 기준으로 본다면 칭기스 칸은 1,260, 알렉산더 대왕

564, 히틀러 335나폴레옹 186수준으로 현존하는 국가로 봤을 때 러시아

1,710, 미국 980, 중국 960호주 770, 인도 328이며 대한민국은

22(10, 12)수준이다.(‘다음출처기준)

참고로 내가 이전에 작성한 독후감에서는 칭기스칸의 정복 면적을 770라고 언급

하면서 나폴레옹(115 ), 히틀러(219), 알렉산더(515)라고 표기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점령 지역을 산출하는 기준 혹은 학자들마다 정복지를 평가하는 기준이 

상이하여 나타난 현상으로 생각하는데,

어찌되었던 인터넷 포탈 및 역사학자들마다 해석하는 방식이나 분석하는 관점이 달라

나타난 현상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면적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이유는 추후 조사해

볼 만한 사항이라 생각한다.

 

아래의 소제목은 내가 작품을 읽으며 느낀 점을 분류한 것이다.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분류이다.

 

 1. ‘몽골칭기스 칸그리고 지역적 상황에 대해

1) 몽골족은 투르크타타르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녔고 3세기에 첫 제국을

   건설했던 훈족(’흉노족이라고도 부른다)’의 직계 후손으로, ‘은 몽골어로 인간

   지칭한다4, 5세기경 훈족은 인도에서 로마까지 정복하지만 그 힘이 유지되지 

   못하고 그들이 정복한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다.

2)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현대 지도기준)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지만

   이를 정복하거나 통치하는 군대 숫자는 100만 정도였다고 한다.

3) 침공으로 함락한 지역 주민보다 숫자가 적었던 몽골군은 점령지의 많은 사람들을 

   전략적 용도로 활용하는데 일례로 몽골군은 당시 군대의 전형적인 방식과는 달리 

   피난민 무리를 뒤에 두지 않고 앞세우고 다녔다고 한다.

4) 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도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이었다.

   이는 물자가 풍부한 남쪽과 싸워 이기려면 그들에 비해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머리를

   써야 했으며 더 열심히 싸워야 했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전쟁은 일종의 생산이며

   전사에게 전쟁이란 성공과 부를 의미하였다.

5) ‘타타르주르첸(금나라)’ 왕국과 가까운 곳에 살면서 중국의 세련된 제품들을 자주

    접했기 때문에 초원의 다른 어떤 부족들보다 풍족하였는데 주르첸타타르를 

    정복한 뒤 통치영역을 확장하려 칭기스 칸에게 복종을 요구하자 교역 물자 때문에

    ‘주르첸과의 전쟁을 고려하고 있던 몽골에게 공격의 구실을 준 것이었다.

6) ‘무슬림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려는 통치자를 찾지 못하자 칭기스 칸에 의지해 

    억압적인 왕을 타도하려 하였다.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으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은 투르크족 술탄 무함마드 2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제국을 호라즘이라 불렀다.

     ---> 호라즘의 술탄은 투르크인으로 같은 무슬림이기는 하지만 아랍인과 페르시아

           인으로부터 야만적 정복자라는 인식으로 인해 어떤 동맹자도 얻을 수 없었다.

7) 몽골의 정복은 파키스탄 중심부에 있는 물탄이란 도시에서 멈추는데 이는 건조하고

   추운 산악지대를 벗어나자마자 몽골의 전사와 말들이 시름시름 앓았기 때문이며 

   생애의 마지막 원정 대상이었던 탕구트지역 최종 승리를 며칠 남겨 놓고 죽는다.

8)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 옛 러시아 무역도시들은 몽골군이 누구고 그곳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몰랐기 때문에 이 낮선 사람들에게 패한 일을 신이 내린 벌로 생각

   했고 자신들의 패배를 잊고 자신들끼리 싸우기 시작한다.

9) 몽골은 어떤 영토를 원정할 때면 먼저 공식 사절을 보내, 항복하여 몽골 가족에 

   합류하고 대칸의 봉신이 될 것을 요구한다. 상대가 동의하면 사절은 새로운 봉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할 뿐 아니라 권력과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허용

   했다.

10) 몽골군의 침공을 물리치지 못하자 유럽의 기독교 사제들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몽골군을 제압하기 위해 성자의 유골과 유물을 진열해 몽골군을 저지하려 했는데,

     이는 몽골군이 기독교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으로 그러나 몽골군은 이에 격분

     했고, 유럽을 폐허로 만들게 된다.

     1241년 부활절 기간에 거둔 승리는 유럽 봉건제중세의 완전한 붕괴의 전조

     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유럽인들은 공격자의 정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공황은 

     더 심각해졌다.

     --->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극도의 사악함때문에 죄 없는 자신들이 몽골인의 

            진노의 피해를 입었다면서 자신들이 당한 방법으로 유대인을 벌주려 했다.

11) 몽골인들은 모든 종류의 시합을 즐겼는데, 특히 씨름시합을 열듯이 종교인들이 

     참여하는 토론시합을 개최하여 논리만으로 자신들의 종교 사상에 대한 

    설득력 시험을 하고는 했다.

 

2. 신개념의 통치 질서 수립

1) ‘칭기스 칸은 훈족으로부터 내려오는 초원의 제국에 어울리는 자기 나름의 통치 

    방식을 찾고자 했다.

2) 테무진과 함께 지도층을 형성한 19명은 9부족 출신으로 무슬림’ 3명 외에 기독교

   ‘불교도도 있었다.

3) ‘칭기스 칸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한 뒤 각각의 혈통, 씨족, 부족에 내려오는

   세습적인 귀족 칭호를 없애고 테무진 자신은 구르 칸이나 타양 칸같은 예전의 

   부족 칭호를 거부하는 대신 칭기스칸이라는 호칭을 썼다. 몽골어에서 (Chin)’

   강하고, 흔들림 없고, 두려움이 없다는 의미다.

4) 또한 다른 입법자들과는 달리 신의 계시를 자신의 법의 기초로 삼지 않았고, ‘정주 

   문명의 오래된 법전으로부터 자신의 법을 끌어오지 않으면서 수 백 년 동안 유지

   되어 온 유목민 부족들의 관습과 전통을 강화한 칭기스 칸의 대법령을 제정 운영.

    ---> 통치자를 법에 복속시킨 것은 그때까지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다.

5) 몽골은 필요한 경우 캐러반에게 자본을 대주기도 했으며 칭기스 칸의 후계자

   ‘우구데이는 교역을 개선하려고 여러 나라와 동시에 사용하는 무게측량 단위

   표준화했고, 금은괴나 동전대신 지폐를 만들어 교역이 간편하고 안전해졌다.

6) 모든 사람에게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적인 자유를 부여하고 종교를 장려하기 

   위하여 종교 지도자와 그 재산에 대한 세금 면제 및 공적인 의무도 면제해 주었다.

7) 칭기스 칸은 정복지의 지식을 제국에 이용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학자들을 끌어

   오거나 잡아오는데 관심이 많았고 그가 가는 곳마다 그 지역 학자들을 불러 그들이

   무슨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그의 제국에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파악

   하려고 노력했다

    ---> 제국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 을 제정하였으나 이를 수행해야 할 신민들이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문자 체계를 도입하려 했고, 무슬림의 식자층을 활용

           하려는 생각을 하였고 고려에도 종이 10만장을 요구하기도 한다.

8) 몽골은 유럽 침공의 물질적 성과에 실망해 원정에 약간이라도 이익이 있음을 보여

   주려 크림 반도에 자리 잡은 이탈리아 상인들과 거래하는데, 몽골군이 물자를 가져

   가는 대신 유럽에서 잡은 포로를 넘겨주었다. 이렇게 팔린 노예들로 구성된 노예

   부대20년 뒤 조우하게 된다.

9) 칭기스 칸은 광활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각 지역의 통치자들의 자식들을 볼모로

    잡아두지만 이는 외견상의 모습이었고, 그 자식들을 행정관으로 훈련시켜 능력이나

    충성심이 떨어지는 관리가 나타날 경우에 그를 대체할 인력집단으로 활용하였다.

 

3. 후손들에 대하여

1) 칭기스 칸은 평생 친척을 불신하고 젊은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동료나 친구들에게만

    의지했기 때문에 자식들이 사이좋게 지내도록 돕지 못했으며 그들을 자신의 후계자

    로 훈련시키지도 못했다.

2)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 어머니 소치겔후엘룬의 직계 가족현황은 아래와 

   같다.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 투레게네          톨루이 --- 소르칵타니

   ↓                ↓                              ↓               ↓     ↓       ↓          ↓

  바투              ↓                             구육           뭉케 훌레구 쿠빌라이 아릭부케

   ↓                ↓                                                        ↓       ↓

킴착칸국      무굴제국                                                 일칸국  원왕조

(러시아)         (인도 )                                     (페르시아, 이라크) (중국)


칭기스 칸 사후 불과 14년 만에 그의 자식들 전부가 죽음을 맞는다

3) ‘뭉케는 진지했는데 우구데이처럼 경박하지도 구육처럼 무모하지도 않았으나

   ‘차카타이우구데이’ 후손과 가족을 완전히 뿌리 뽑으려는 듯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77명 죽였다.

4) 칭기스 칸의 여인들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몽골에 절실하게 필요하던 외부의 재능을

    통치세력 내부로 끌어들였으며 수도원과 학교, 책의 인쇄, 사상과 지식의 교류를 

    지원하여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5) 몽골 제국은 뭉케 칸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그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6) 후대에는 뭉케’(테무진의 막내 동생 톨루이의 장남)‘가 제국의 자산 규모를 파악

   하는 통계조사와 종이어음 발행화폐 표준화등을 추진하였고, ‘쿠빌라이 칸'

   (톨루이의 3)지폐를 도입했고문맹을 없앨 목적으로 모든 아동에게 보편적인

   기본교육을 시킬 수 있는 초등학교를 세우려 했다.

7) ‘쿠빌라이는 쿠테타를 일으켜 자신이 대칸의 자리에 오르지만 몽골의 왕가 일부와

    그 추종자들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명령에 의해 카라코룸은 불과

    30년 동안 몽골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한 뒤 몽골인들의 손에 의해 약탈을 당하고 

    파괴되어 버린다.

     ---> 쿠빌라이는 할아버지가 야만적인 힘으로 이루지 못했던 과업, 즉 중국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하는 과업을 대중 정치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는 적어도 

            송나라 사람보다 더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중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8)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마지막 인물은 부하라’(현재의 우즈베키스탄)아미르의

    알림 칸이었다그는 당시 우즈베키스탄의 권좌에 있다가 1920년 소비에트 혁명의

    물결에 밀려난다.

     ---> 1220년부터 1920년까지 700년 동안 역사상 가장 긴 가족 왕조로 꼽힌다.

 

 

4. 가족 이야기

1) 칭기스 칸의 후계자인 우구데이(3)’는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말을 타고 정복을

    할 수는 있지만 말을 타고 다스릴 수는 없다고 확신해 자신의 제국을 향유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위대한 군주들처럼 영원한 수도갖기를 희망한다.

     ---> 권력 중심과 제국의 행정부를 고정시키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2) 칭기스 칸은 사위인 토쿠차르와 손주인 무투겐이 전투에서 전사했을 당시 가장 

    괴로웠을 것이다사위가 죽자 미망인인 딸에게 정복한 도시에 대해 마음대로 

    앙갚음을 하라고 허락하자 자신의 남편이 사망한 도시(나사푸르)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 대해 사형 선고를 내린다.

3) ‘케레이트나이만을 정복한 뒤 기독교를 믿는 부인을 얻었던 것으로 보아 몽골

    조정을 지배했던 세력은 기독교도였던 것 같으며 그가 가장 아끼는 손자

    ‘시레문’(솔로몬의 몽골식 이음)이 기독교도였다. 특히, ‘예수라는 말은 몽골의

    신성한 숫자인 ‘9’를 가리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4) 몽골과 유럽인들은 영적인 믿음의 많은 부분을 공유했음에도 처음에 관계를 맺을 때

    방향이 부정적으로 잘못 잡히는 바람에 공통의 종교라는 기반 자체도 무너지고 

    말았다. 몽골은 기독교 유럽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방법을 모색해보지만 기독교 

    자체를 완전히 버리고 불교와 이슬람으로 방향을 튼다.

5) ‘뭉케는 프랑스의 루이 9세에게 서한을 보내 모든 사람들이 몽골인의 관대한 통치

    밑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였다고 하였지만 그의 일차적 관심은 종교가 아니라 

    외교와 상업이었는데 그의 최대 관심사는 송나라와 중동 아랍 국가들의 정복이었다.

6) ‘뭉케는 가장 군사적 자질이 뛰어난 형제 훌레구에게 우익을 맡겨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카이로 등의 아랍국가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쿠빌라이에게 좌익을 맡겨

    송나라를 정복하게 한다.

7) 쿠빌라이는 중국의 교육받은 사람에게 그들의 민족주의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매혹적인 기회를 제공했고 1260년 몽골의 연호를 중국식으로 번역해 완전한 시작을

    뜻하는 지원(至元)으로 바꾸었으며, 1271년에는 위대한 기원의 의미를 지닌 대원

    (大元)’으로 정한다. 1277년에는 새로운 몽골 왕조를 선포한 뒤에는 조상들에게 

    중국식 이름을 추서한다.

    또한 낡은 체제를 지속시키는 대신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다양한 외국인, 특히 

    무슬림의 행정 지원을 받았으며 하나의 민족이나 인종 집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하여 서로 이간질을 시키는 경향이 있었으며, 늘 중국인과 외국인을 

    다양하게 섞어놓았다.

 

 

5. 기술의 장려를 통한 무기의 과학화

1) 사람과 과학기술을 다루는 칭기스 칸의 능력은 40년 이상에 걸친 쉼 없는 전쟁 

   경험을 통해 얻은 것으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실용적 학습, 실험적 적용, 꾸준한 

   수정을 통해 얻은 것이다.

2) 몽골은 초원 전사의 전통적인 공격력과 기동력에 과학기술이 결합되어 승리를 

   거두었다.

3)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인 장의사, 의사, 법률가, 교사

   학자들에게도 면세를 해 주었다.

4) 막내 동생 훌레구가 바그다드 공격 시 화약을 활용한 포격 공격을 실시하였는데 

   연막탄, 원시 수류탄원시형태의 박격포 및 소이탄 등을 활용하였다고 한다.

   몽골군은 불과 2년 만에 서쪽의 유럽 십자군과 동쪽의 셀주크 투루크가 200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어도 하지 못한 아랍 세계의 심장부를 점령한다.

5) 훌레구는 또 카라코룸에서 형제들과 헤어진 뒤 7년 만에 약 6천 킬로미터 거리를 

   주파하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땅을 정복하거나 재정복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아랍인,

   투르크인, 쿠르드인, 페르시아인 등 수 백 만 명을 식민화했다.

 

 

6. 뛰어난 통치력

1) 테무진의 핵심적 업적은 친족 관계를 무시하고 개인의 능력과 충성도 및 능력에 

    따라 과제를 부여하고 책임을 나누어 주었으며 충성스런 동맹자들을 최측근으로 

    기용하고 정복된 국가의 신민들을 노예가 아닌 정상적인 부족 구성원으로 받아

    들였다.

     ---> 타타르의 정복 후 예수겐과 그녀의 언니 예수이를 아내로 맞이한다.

2) 테무진이 활동한 60년 동안 장군들 중에서 그를 배반하였거나 그가 불이익을 준 

   적이 없었다

3)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전사자의 부인과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동일한 몫을 배분한

   결과테무진의 부하들 사이에서는 그가 나를 불로 보내건 물로 보내건 나는 간다

   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4) 신의를 중시한 테무진은 라이벌인 상대 수장인 자무카를 생포해 온 자무카의 부하

   장수들에게 상을 주는 대신, 그들이 잡아온 지도자 앞에서 모두 처형해 버린다.

5) 몽골군의 특징은 첫째 모두 기병이고, 둘째 병참부나 거추장스런 보급 대열이 

   없었다는 점으로 그들은 지역을 정복한 후 농지를 다시 목초지로 돌리기 위해 말을

   이용해 농토를 짓밟았다고 한다.

6) 몽골군의 여러 문화를 정복하면서 이 모든 기술을 모아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전해 주었다특히, 칭기스 칸이 세운 영원한 구조물은 다리로 역사상 어느 통치자

   보다 많은 다리를 놓았다.

7) 쿠빌라이는 강력한 법전을 중심으로 민간 행정을 짜나갔다. 법전을 만들면서 

    칭기스 칸의 법과 양립할 수 있도록 중국 법을 개혁했으며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송나라의 가혹한 형법을 완화했다.

    ---> 몽골인에게 법은 유죄를 결정하거나 처벌을 하는 수단이라기보다 문제를 해결

           하고, 단결을 이루고 평화를 보존하는 방법이었다.

8) 쿠빌라이는 전통적인 중국의 학문과 문화 가운데 몇 가지 유형을 장려하기 위해 

   학교(2166)를 세우고,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들로 이루어진 한림원을 

   재건했다또한 세계의 모든 언어를 적을 수 있는 단일한 알파벳을 만들려고 했으며

   티베트 라마승 팍파에게 이 과제를 맡겨 팍파 문자'를 만들기도 했으며 또한 

   태사원(太史院)을 세우고 인쇄소를 만들어 달력과 연감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7. 관련 기록이 없어 일방적인 평가로 몽골이 폄하되었다.

1) ‘호라즘과 경쟁관계에 있던 칼리파는 몽골에게 호라즘을 공격해 줄 것을 부탁하며

   자신들이 포로로 잡은 십자군 군인들을 선물하지만 기병 위주로 운영되던 몽골에게

   보병이 필요 없었기에 칭기스 칸은 이들을 풀어주나 풀려난 이들이 자신들의 고향

   유럽으로 돌아가 몽골 정복자들에 대한 헛소문을 유포한 것과 정복과정에서 

   심리전을 활용한 수월한 정복 전쟁을 벌이기 위해 전개하였던 터무니없는 정보

   (칭기스 칸과 몽골인)의 확산, 재생산으로 인해 몽골인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이 확산.

2) 뿐만 아이라 몽골군의 행동이 잔인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공포를 자아낸 것은

   특별히 잔혹해서가 아니라 정복이 빠르고 능률적이었으며 부자나 권력자의 목숨을

   경멸했기 때문으로 그는 주민 살육자라기 보다는 도시 파괴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할 것이다.

3) 칭기스 칸과 몽골인의 경우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는 관계로 업적은 묻혀

   지고 이른바 범죄나 야만성만 일부 구전된 미확인 소문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학자들이 분석한 내용을 보면,

   헤라트에서 죽은 사람의 총수가 240만 명이라고 하기도 하고 5년간 1500만 명이라

   하는데 이런 살육을 하기 위해서는 몽골군 병사 한 명이 100명 이상을 죽여야 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몽골 병사 한 명이 350명 이상을 살육해야 하는 숫자라고 함.

    ---> 몽골군이 정복한 도시의 유적을 조사해 보면 실제 주민의 수가 희생자로 계산

           된 주민 수의 10분의 1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 살육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해당 지역은 건조한 사막 토양으로 유해가 수 백 년 또는 수 천 년씩

          보존되기 때문에 그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해당 증거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4) 몽골인은 자신과 서민의 오락을 위해 대중문화를 후원하면서도 유혈을 혐오하는 

   문화는 고수했다씨름과 궁술을 즐긴 반면 로마인들이 즐겨했던 검투사 시합이나 

   공개 학살과 비슷한 오락은 만들지 않았다. 참수나 교수형이 흔했던 유럽 도시와는

   달리 몽골 제국에서는 범죄자 처형을 공중의 오락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 중국 대중의 입장에서 취향이나 감수성 면에서는 중국 조정의 관리들보다 

          오히려 몽골인에게서 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5) 몽골 병사들이 전쟁을 하면서 투석기에 페스트 주검을 넣어서 적진으로 날려 

   보냈다는 이야기는 제노바에서 변호사로 일했던 특정인이 몇몇 선원에게서 들은 

   자신들도 들은 이야기를 퍼트린 것이라 함

6) 칭기스 칸의 고향과 무덤의 위치가 불분명한 이유는 칭기스 칸이 죽자 그의 고향을

   누구도 출입할 수 없도록 출입을 영구히 금지했기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8. 팍스 몽골리카

1) 14세기를 팍스 몽골리카또는 팍스 타타리카라고 명명하는데, 몽골의 칸들은 

   평화로운 교역과 외교를 통해 과거 무기의 힘으로 얻지 못했던 상업적, 외교적 연결

   통로를 얻으려 했다---> 상업적 영향은 몽골 제국을 몽골 회사로 바꾸었다.

2) 몽골 제국의 행정구역은 중국, 모굴리스탄, 페르시아, 러시아 등 크게 넷으로 나누

   었지만 다른 지역의 물자에 대한 요구는 줄지 않았다. 한 칸이 다른 칸에게 물자를 

   보내지 않으면 자신도 물자를 보내지 않았다. 물자의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몽골이

   전쟁할 때 쓰는 길은 점차 상업적 간선으로 바뀌어갔다.

3)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

   으로 공격하여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시켰다.

4) 역사상 대부분의 제국은 정복한 땅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했지만 몽골은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던 반면 농민이 자기 땅의 기후, 토양, 배수 방식에 가장 적합한

   작물을 심도록 장려는 했다.

5) 몽골인은 어떤 지역을 정복하자마자 행성과 별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측정할 관측소

   부터 세웠고 몽골 정부 직원들은 주판을 이용했다고 한고 중국에 ‘0’, 음수, 대수학을

   소개했다.

6) 몽골은 문화적 취향이 없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인 해법보다는 실용적인 해법을

    찾았다.

7)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보았는데, 몽골 제국의 사상은 유럽의 정신에 새로운 가능성을 

   일깨웠다.

   특히, 몽골 제국 전체의 공통된 원칙 - 지폐, 교회에 대한 국가의 우위, 종교의 자유,

   치외법권, 국제법 은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8) 프레스코화가들은 기독교 회화 속에 독특한 옷, 모자, 활 차림의 몽골인을 집어

   넣었다쿠빌라이 칸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사절을 보내는 데 그는 종교의

   자유가 강조되는 몽골과는 달리 단 하나의 종교만 용인된다는 사실에 놀란다.

 

9. 저무는 제국

1) 1332년 몽골제국을 휩쓴 것은 역병인 페스트’(흑사병)이었는데 이 병은 최초 중국

   남부에서 발생해 몽골 병사들이 북쪽으로 옮겨졌다고 하며 중국은 몽골이 세계

   체제에서 제조업의 중심 역할을 했는데 중국에서 물자가 쏟아져 나가며 페스트도 

   전파되었다고 한다

2) 페스트의 창궐로 외교사절은 물론 몽골 운송체계의 가동이 중단되자 가톨릭 교회와

   중국 선교단의 연락이 끊겼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외국인이 병을 가져온다고 비난

   하면서 국제교역은 위축된다.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다시 유대인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는 유대인이 교역이나 

   동방과 관련이 깊다는 이유에서다.

3) 페스트는 유럽뿐만이 아니라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사는 몽골인을 중국이나 몽골과

   차단시키는 부작용도 낳는데 몽골인이 자기들보다 더 많은 신민들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약해진 뒤에도 교역물자가 지속적으로 흘러다니게 해주었기

   때문인데, 군사적 힘과 상업적 이득이 사라지자 러시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중동의 몽골인은 자신의 신민과 결혼을 하고 의식적으로 그들의 언어종교, 문화에

   동화됨으로써 권력과 정통성의 새로운 양식을 찾아나갔다.

    ---> 이곳에서 몽골인들은 여타의 종교를 몰아내고 이슬람 신앙을 강화했다.

4) 중국의 몽골인들은 가능한 한 중국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노력의 일환으로

    다양한 종교를 공정하게 대접한다는 전통적 정책을 버리고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를 우대하는 특혜를 주었다하지만 티베트 불교는 중국의 유교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5)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와 탐험가들은 칭기스 칸과 몽골인에게 공개적인 찬사를 보낸

   반면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아시아에 대한 적대감을 조성하였는데 하지만

   그 중심엔 몽골인이 있었다. 특히 아시아인이 열등하다는 가장 유해한 이론적 설명은

   유럽의 철학자나 예술가 쪽에서 나왔다기 보다 계몽주의 영향으로 태어난 새로운 

   지식인 종족인 과학자들에게서 나왔다.

   ---> 독일 과학자에 의해 인간의 동물학적 분류에 의해 인간을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세 가지 기본 인종으로 구분하고 여기에 하위 범주로 아메리카와 

         말레이가 따라붙는다.

         특히, 아시아인이 몽골에서 유래했다는 이론에 따라 모든 아시아인을 몽골인 

         항목에 넣는다.

   ---> 몽골 인종이 아시아이의 원숭이인 오랑우탄과 가까운 관계라고 주장

   ---> 로버트 체임버스는 일부 발달이 늦은 아이의 얼굴이 아시아인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지진아와 몽골 인종을 연결시키는 만행도 저지른다.

   ---> 몽골 인종 분류체계가 서구 과학에 자리를 잡고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자 새로운

         분야로 확대됨.

6) 칭기스 칸과 몽골의 잔혹성은 문명화된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의 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통치할 수 밖에 없는 구실이 되었다.

 

 

[작품으로 얻은 잡지식]

- 몽골족은 술데라는 영기(靈旗)를 들고 다녔는데 이는 자연으로부터의 힘을 받고자

   하는 샤머니즘적 증표로, 평화로울 때는 백마 말총으로 전시에는 흑마 말총을 

   만들었다.

- 부족의 중심이자 왕궁 역할을 하는 우두머리 게르 단지오르도또는 호르테라고

   불렀다.

- 숫자 7은 몽골족에게는 불운의 숫자, 반면에 9는 행운의 숫자라고 함.

- 몽골 군대의 편제는 전사를 10명으로 끊어서 아르바(십호)’, ‘자군(백호)’, ‘밍간(천호)’,

   ‘투멘(만호)’로 구분하여 분할 지배하였다.

- 칭기스 칸은 장남 주치와 그의 투멘들에게 시비르지역을 제압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시베리아라는 말이 탄생하였다.

- 몽골의 사냥 대회 : 아바

- 몽골의 귀향과 승리 축하행사 : 나담

- 오늬 : 화살의 머리를 활시위에 끼도록 에어낸 부분

- 연산을 뜻하는 알고리듬(algorithm)이라는 말은 알 호라듬(al Khwarizm)에서 나왔다.

- 콜롬부스는 몽골을 찾기 위한 항해를 했으며 그래서 만난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인도인)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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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편향의 종말 - 우리 안의 거대한 편향 사고를 바꿀 대담한 시도
제시카 노델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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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 일반인 2, 해당 분야 전문가 3


인간이 살아가면서 편향적인 생각을 갖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도 살아오면서 편향의 오류로 인해 여러번 실수를 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리 봐도 그럴 인간이 아닌다'

'그인간이 그랬단 말이지'

'확실한 데 그놈은 우리 편이다'

'그놈은 분명 변할 것이다'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개인적 편향의 절대성을 기준으로 상대를 우호적 혹은 엄혹하게 평가하는

오류로 인해 오해아닌 오해는 물론이거니와 긍정적인 편향이 부정적인 결과로서 나타날 때의 

인간적인 실망감이란 상상 이상의 것으로서 개인적으로 무척 이를 감내하기가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으며 작품을 읽는 내내 그런 상처를 치유하거나 편향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궁금해 하며 작품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했는데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다고 실망의 연속이었다.


이 역시 편향의 오류, 작품 제목과 선전 문구가 던져주는 뭔가를 건질 수 있겠다는 편향의 오류로 

인해 상처를 쉽게 받는 나로서는 정말 참을 수 없는시간이었다.

다시 이야기해 개인적 편향의 오류를 근본적으로 치유해 보고자 작품을 골랐는데 솔직히 실망의 

끝판왕 작품이다.

거듭 이야기합니다. 

일반인들이 접하면 속상할 우려가 있으니 심리학이나 이와 유사한 학문을 연구하시는 분들이라면 모를까 일반인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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